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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장면 하나.


 뜨거운 여름. 논에 들어간 학생과 아저씨가 함께 웃으면서 피를 뽑고 있다. 피 대신 모를 잘 못 뽑아도, 농부 아저씨는 사람 좋게 웃으시며 친절하게 피와 모가 어떻게 다른지, 어떻게 잘 뽑는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신다. 그렇게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아주머니가 머리에 막걸리와 식사거리를 이고서는 천천히 걸어오신다. 그리고 일한 뒤에 먹는 꿀맛 같은 새참 맛에 일하는 보람은 점점 더 커져가고, 농민 분들과 끈끈한 연대의 정을 느낀다.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전형적인 환상에서 깨면, 여름 태양보다 더 뜨겁고 열받는 농민과 농촌의 현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새벽부터 저녁때까지 힘들여서 일해야 함은 물론이요, 일하면서 계속 불거져 나오는 문제는 나를 계속 당혹스럽게 했다.


 첫 번째, 권위와 통제.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학생들은 농민들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일찍 준비를 해 새벽부터, 저녁 6시 정도까지 계속 일 ‘해야 한다’. ‘농활’ 이기에 물론 농민과 학생 사이에 연대감을 키우는데 같이 일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는 하겠지만, 이는 농민들이 학생들을 단순히 일 도와주러 온 것으로만 생각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은 학생을 일꾼. 더 심하게는 머슴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어 재떨이 좀 찾아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도였다. 그들의 권위주의적 태도는 학생들의 생활을 통해 확실히 알 수 있는데, 학생들은 농대장의 명에 따라 숙소에서도 쉽게 드러눕지 못하고, 벽에 등을 대지도 못한다. 이유는 단 하나. 숙소에 무심코 들린 농민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드리면 안 되기 때문이다.  학생들의 오버액션인 것 같지만, 실제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으로 군림해온 남성 농민은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이 예의 없이 버릇없이 아무데서나 함부로 누워있기를 원하지 않았고, 학생들은 거기에 맞춰야 했다. 물론 공동체 생활과 연대 단위에서의 행동의 통일은 필요한 것이지만, 농활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다.

 그들이 권위주의적 태도는 밤에 술 마실 때 많이 마시는 걸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그걸 남에게 강요하는 것으로 그 절정으로 치 닿는다. 권위주의적 태도는 농촌 사회의 가부장성과 떼어놓고 말할 수 없는데, 농사일을 잘 도울 수 있는 아들을 선호하는 남아선호 사상은 아직도 농촌 사회에서는 뚜렷이 남아, 그들의 가부장성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주방 일은 여학생에게만 시키려고 한다든지, “여자 애들을 가르쳐서 뭐해?” 와 같은 여성의 능력을 한정짓는 말은 실제로, 농민들과의 연대활동을 하는데 있어서 방해와 장애물이 되고 만다. 물론 이는 비단 농민의 문제만은 아니다. 얼마 전에 택시 노동자 집회에서도 있었던 일과 함께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두 번째, 누구와 연대하는 것인가.

 또한, 학생들이 농사일을 하는 데 있어서 그 일의 배분은 마을 청년 회장이 하는데, 주로 마을 청년회의 핵심 멤버들을 위주로 나눈다. 따라서, 학생들이 항상 일을 하게 되는 집은 몇몇 집으로 한정되어 있다. 또한 학생들에게 도와달라고 말하는 이들은 학생들의 도움을 받을 만큼 사정이 열악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작업량이 만다는 것. 즉 그만큼 부농이라는 사실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빈농들의 경우는 학생들이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이 일거리가 적은 것이 사실이며, 학생들이 할 만한 일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을 청년회와 잘 연관이 되지 않는다. 농민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분된다. 하지만, 소자영농과 같은 경우에 높은 토지 가격이 문제시 되고, 비료, 농기구를 확보하기 어려워진다. 농업 생산력이 증대될수록 소자영농의 경우, 경쟁력이 뒤떨어져, 몰락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들은 사회주의 선전에 귀 기울이게 되는데, 이들의 몸에 배여 있는 소유욕 때문에 토지 소유를 사회 전체로 돌려야 한다는 사회주의자들을 적으로 보게 된다. 소자영농이 이러할 진대, 학생들이 많은 경우 연대하게 되는 부농의 경우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누구와 어떻게 연대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농민의 계급 의식을 상승시키고, 소작농의 경우, 자신들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시켜야 한다. 맑스가 말했듯이, 단순히 이는 농민들이 미래의 프롤레타리아로 계급 운동에 가담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보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농민인 채로 사회주의자에 편이 될 수 있는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변혁은 더욱더 빨라지고 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지난 1월 두차례 전농대회에 결합하면서 농민 계급이 가진 한계와 그들을 어떻게 혁명의 전선 앞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1. 전농대회와 농민의 문제점


1) 농민들은 모두 애국자?

 전농대회에서 가장 많이 외쳤던 구호는 “민족 농업 사수하자”이다. 대치상태에 있는 전경들에게 그와 함께 꼭 덧붙인 말은 “너희는 어느 나라 쌀 먹냐? 너희는 밥도 안먹냐?”이다. 농업 자체가 수천만년 전부터 한반도에서 한민족이 직접 행했고 지금도 하고 있는 일이라 그런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자부심을 갖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반대하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대응되게 서 있는 칠레 농민, 칠레 농민들 입장에선 그들의 민족 농업을 사수하는 한편 농산품을 자유롭게 수출까지 한 것이니 정말 잘 된 것 아닌가? 라고 물었을 때 한국 농민들은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위와 같이 민족의 문제로만 치부할 경우 너무나도 많이 얘기되고 있는 민족주의의 한계에 부딪쳐 근본적인 요인을 간과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로 전농대회 내내 진행되는데 있어서 좌파 학생진영 쪽에서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은 전국에서 힘들게 올라온 농민들에게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인가? 아님 그 근본적인 요인은 알고 있지만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진 것이 특별히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신자유주의에 폭풍 속에 노동자, 농민, 빈민 모두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는 민중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몰계급적인 사고로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2) 멈추시오!!!!

 전농대회가 계속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이유는 fta 국회 비준안 통과를 막기 위해서이다. 우리의 투쟁은 단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해줘서는 안되는 것이다. 농민들의 투쟁은 마치 국회의원들이 우리들의 의견을 꼭 우리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농성하는 것과 같다. 비준안 통과에 찬성한 국회의원들의 이름을 부르며 매국노라고 외치는 것은 단지 나라의 근본이 되는 농업을 팔아먹었다는 관점뿐만 아니라 왜 우리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냐고 분노하는 것과 같고, 이 역시 근본적인 문제에 다가가지 못했다. 전국 각지에서 고생해가며 서울까지 올라와 추위에 떨면서 투쟁한 결과물이 고작 농촌 출신 의원들이 비준을  막아주었다는 것에 과연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청원식 투쟁은 농민이 주체로 서지 못한 것이며, 자신의 계급이 직면한 상황에 대해 투덜거리며 징징대는 것으로 그칠 수 밖에 없다.


3) 나를 두 번 죽이는 일이라고.

  농민가와 앞에서 투쟁을 선동하시는 마이크 잡고 계시는 분의 말이 집회 내내 거슬렸다.  지난 회의 때에도 지적했던 것이지만 농민가에 나오는 “♪~~형제들 있다.♬"라는 가사가 바로 그것인데, 처음에는 문제를 인식했다가도 겨우 외워서 노래를 부를 때면 그대로 따라 부르게 되어 알게 모르게 그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앞에서 선동하시는 분이 경찰 쪽에 마이크 잡고 있는 사람(명칭이 뭔지ㅡㅡa)에게 거기 숨어서 나불대지 말고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맞짱 한번 뜨자고 말하자, 사람들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집회에 참가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환호성을 지르며 말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는 농민이 위에서도 논했듯이, 농촌 사회의 특성상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농민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며, 아무도 그 문화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문제의식을 느끼더라도 쉽게 그러한 논의들이 오가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 억압적인 구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농민들은 단순히, 브나로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할 계몽의 대상이 아니다. 많은 농민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과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도태되고, 몰락한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절실하게 체감하고 있으나, 정작 자신들은 그것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위의 전농 대회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인들이 정치를 잘 못해서, 이상한 협약을 체결해서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당장의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에 반대하는 투표를 하고, 국회 앞에서 온 힘을 다해서 투쟁을 하지만 그 한계만큼 농민들은 쉽게 지치고 만다. 그들에게 닥쳐온 문제는 사회주의자, 노동자들과 함께 반자본주의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해결이 가능함을, 명확히 인식시키고 함께 투쟁의 주체로 설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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