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8/12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레드타임즈
  2. 2005/08/12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레드타임즈
  3. 2005/08/12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레드타임즈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반전운동의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전쟁은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가지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치는 전쟁반대는 단순하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외침과 같지 않다. 반전운동이 전쟁의 원인인 자본주의에 대한 철폐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반전운동과 자본주의 철폐 투쟁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와 힘을 인정하는 세력이 반전운동을 주도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에 이렇다할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현재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시민운동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철폐는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저항을 진행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계속되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힘겨운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들은 노동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더욱 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무조건 반전운동에 결합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몽상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파병철회를 위해 거리로 나서자는 말은 현장에서의 생존권적 요구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반전운동과 현장투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선택은 현장투쟁이다. 아니 현장투쟁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의 선택은 교섭을 통한 실리 획득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파병철회를 주장하자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반전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에게 전쟁과 자본주의가 가지는 연관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녀들이 반전운동에 나서는지를 알리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결합이 없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계급적인 시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에 직접 결합하면서 반전운동을 선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반전운동은 거리에서의 촛불시위로 한정되고 있을 뿐, 현장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의 적극적인 선동을 통해 현장투쟁과 반전운동이 결합될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평화주의와 민족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반전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철폐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파병철회를 외치려는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당면한 임무는 학생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당연하게 대학에서 반전을 외치는 일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자본주의를 끝내는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전쟁은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것,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가 끝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학교 안에서, 그리고 집회 장소에서 꾸준하게 알려나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노동자계급이 어떤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지를 알리고, 이 투쟁들을 반전운동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은 반전운동과 다른 맥락이 아니며,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반전시위에 단순한 시민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을 알리고 이 투쟁들에 관심을 갖고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그러한 연대가 반전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택시, 보건, 궤도연대 등 굵직한 투쟁들이 마무리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산별노조이거나 산별의 형식을 취한 세 사업장 모두 조합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투쟁을 정리하였다. 노동조합이라는 신분마저 보장을 받지 못한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건설노조는 간부들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을 진행 중이다. 작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속 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아직까지도 회사로부터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정부는 고용허가제 실시를 강행하려 하며,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이 투쟁들에 결합하는 속에서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폭로하고, 반전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선동하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혼돈의 그 이름. 파병 반대를 외치다.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있는 파병 반대 집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층위들이 결합하고 있는데, 각종 시민 단체 뿐 아니라,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꾸준히 그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각각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만큼이나, 그 개입방식도 확연히 구분되고, 내밀고 있는 유인물 등에서 그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는 그들이 정치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다음에서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살펴보면서, 각각 어떠한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반대” “미국 반대”


 얼핏 신자유주의와 반미라는 것은 별로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둘은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 초국적 자본으로 인한 금융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의 침탈이 자유로워지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은 파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그것을 주도 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금융 세계화와 맞물려, 군사 세계화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시 대표세력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구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기 전에 계속 있어왔던 국내 자본의 착취에 대해서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세에 발 맞춰 나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금융세계화로는 현재의 상황을 오히려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작은 중소 기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은 왜 계속 초과 근무를 하며 수탈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소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온갖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지, 왜 자본가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고용하려고 하는지 등등 신자유주의로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좀 더 명확히 말해야 한다. 자본의 노동 탄압과 착취는 오로지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 뿐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등. 그 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온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해 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노동자다. 하지만 그들이 산출한 잉여 가치는 자본가들이 가진다. 자본가는 그것을 더욱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하고 탄압한다. 결국,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분쇄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분쇄할 수 있고, 따라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둘째,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다”


 흔히, 민족 운동 진영에서 말하는 파병 반대의 논리는 얕게는 민족주의적 감상을 토대로, 깊게는 첫 번째에서 논했던, ‘미국’ 자본이 주도로 한 전쟁에 반대하자는 것인데, 후자는 앞에서 논의했으므로, 전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다음은 한반도다”나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라는 구호는 우선 대중에게 우리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게 하면서 즉각적인 분노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거쳤다고 보기 힘들고, 미국에 질질 끌려가는 한국 정부의 종속적 태도에 대한 비판에 머물게 된다. 이는 전쟁이 왜 일어났고, 파병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 한국은 왜 자주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 한미 동맹 파기 주장으로 나아간다. 당장 한미 동맹 파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차치해 두더라도, 미국이 아닌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을 벌였을 때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궁금해진다. 



 셋째, 반전! 반 세계화!


 앞서의 발제에서 논의되었듯이 파병반대에 대해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미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 좌파 단위에서 행하고 있는 꾸준한 신문 발행을 통해 대중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평가 지점이 다양하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앞 발제에서도 충분히 얘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 단위에서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연적이라는 것.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지,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상류에서 쓰레기와 함께 물이 내려오는데, 그 쓰레기를 하류에서 치우면서, 이렇게만 하면 물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류로 흘러가는 물 속에서 쓰레기를 완벽히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히 물을 정화할 수 없다. 즉, 상류에서 물을 더럽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거꾸로 된 논리로 대중들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를 외치는 것은 자칫하면 단순히 선전주의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강경 대응해야 한다며, 파병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반대 논리를 펴나가고 대중들에게 그것을 알려나가는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을 대시민 피케팅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노동 계급 중심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전쟁과 파병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토대로, 실제로 이러한 자본주의 전쟁에 막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 하다.



 넷째,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눈에는 눈’ 이라며, 강력 대응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입어, 파병을 강행하려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가 집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실천적으로, 노무현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파병을 함으로써, 역시 이윤 증대를 꾀하는 국내 자본과 정권에 대해 전선을 확실히 긋는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호가 다음과 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 구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병 강행을 어떤 면에서, 노무현과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열우당 등 부르주아 정치인의 변덕의 소산으로 판단하고,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가 노무현을 이렇게 변신시켰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것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민노당이 집권하더라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 가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나서, 누구를 대통령 자리에 세우고,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개혁을 해 나가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현재 사민주의 국가들이 복지 정책 등을 축소하고 있으며, 다시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다섯째, world peace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명분없는 전쟁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이라크 민중과 전장으로 나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말하고, 무고한 희생을 감행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물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의 파병 반대 운동은 여기서 그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파병이기에 반대해야 하고, 누구를 위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은 파병하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호소하고, 부탁하는 시민운동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매일 매일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는 노동자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 속에서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학생 운동 단위에서 외치는 정치적 구호에 드러나 있는 각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의 한계는 드러났다. 계급적 학생 운동을 고민하는 자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실천적으로 개입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외쳐야할 구호는 “ 노동자 계급 중심에서 파병을 반대한다” 이며, 평화주의, 민족주의, 반미 투쟁으로서는 절대 파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되는 각국 자본의 이익추구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1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고, 미국 또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남한의 경우에는,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여론이 급격히 파병찬성여론으로 돌아선 가운데 무수한 논쟁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국익은 없다. 파병을 반대해야한다’라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김선일씨 사건이 발발했기에 우리는 공수부대라도 보내서 이라크놈들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아니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파병을 강행한 정부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다.1)


 우선,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자. 국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부터 필자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에 있다. 이라크 파병을 해서 생기는 국익. 그것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인가? 아니면 남한자본가들의 이익인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복구사업 몇 개 더 따내어서 사업을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자본가들의 이익인가? 노동자들의 이익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주체가 된 것은 분명 노동자계급이다.2) 하지만 그에 대한 떡고물은 모두 자본가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매파의 호전적 정책때문, 그리고 석유패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은 이 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현 정권에만 전가시키고 있다. 과연 미국의 매파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이윤율의 저하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단지 미쳐 날뛰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패권의 논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 필자는 이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석유패권의 논리는 어디서부터 도출되는가를 생각해보자. 단지 석유를 얻으려고 석유 하나만을 노리고 벌이는 전쟁인가? 중동지역 석유의 독점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증대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출신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이라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국가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국은 찬성한 가운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등은 반대를 하였다. 이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블레어가 전쟁광이고, 시라크․푸틴등이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하였는가? 그러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들 국가들 간의 이라크 유전에 관한 세력분포를 알아야 한다. 우선 북부 루마이라 유전 개발권은 중국 러시아에 있었고, 러시아 루크오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토털피나앨프등은 이라크와 석유 탐사 및 개발계약을 한 바 있는데,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배제되었다. 이들 반전진영 자본가들은 UN에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그 이면으로 후세인과 석유지분권을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중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었고, 반전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자국 자본의 이해가 우선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윤 동기라는 ‘황금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다. 계속되는 자본의 이윤증대에 대한 욕구는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파괴적 행위를 원한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는 불황과 전쟁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서 새로운 투자지역을 찾아내고, 생산의 요소와 소비의 요소를 찾아낸다. 자본의 파괴적 본능은 오직 이윤을 바랄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공격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전쟁과 현 시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중심의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을 위한 설정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을 외치려 한다. 이 글에서 왜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심성이 나오는지 의문이 갈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집중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이 받는 착취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녀들의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근본 체제가 바로 노동자계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그들의 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의 이윤증대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해 가면서 노동자계급을 착취/억압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계층들과 다른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탄생할 때부터 자본주의를 철폐할 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하였을 때, 다른 여성, 장애인, 농민 등의 여러 소외 계층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함께 나가야 한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사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철폐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지점인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승인하고 그것에 복무할 때, 자본주의 철폐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우선적이다. 이라크에도 노동자가 있고, 미국에도 노동자가 있으며, 한국에도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는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으며,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계급이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있지만, 자본가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본가의 분할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버려서 이라크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따로 보고 있다. 그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에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한국 노동자에게 자신은 이라크 노동자와 다르고, 자신은 억압/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의 광폭은 노동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구조조정의 형태이든, 비정규직의 형태이든, 전쟁의 수행을 위한 파병의 형태이든- 노동자 계급을 끊임없이 연계시키며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노동자가 민족주의를 넘어 연대할 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모든 착취의 쇠사슬을 끊고 나설 때 자본에 의한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1) 여기서 논한 주장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지만, 사실은 이들 주장보다 훨씬 다양한 주장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2) 참전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며 대개 대학이나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하였다. 더구나 위험한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희생된 미군 병사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참전한 라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는 911이후 부시행정부가 외국인 비시민권자가 군대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즉시 발급하는 절차를 도입한 것에 기인한다. 남한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전 베트남전 때의 파병지원 심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로 가면 조금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로 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본가계급 출신의 젊은이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파병 뿐 만이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무고한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어 김선일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