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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04/25
    이러고도 비정규직 '보호'입법?
    레드타임즈
  2. 2005/04/25
    115th may day!
    레드타임즈
  3. 2005/03/31
    한승조 교수 파문, 어떻게 생각하세요?(1)
    레드타임즈
  4. 2005/03/31
    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레드타임즈
  5. 2005/03/08
    3월1호>유물론이란 무엇일까?
    레드타임즈
  6. 2005/02/28
    3월1호>교육투쟁, 망설이지 마세요.
    레드타임즈
  7. 2005/02/28
    3월1호>비정규직보호입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레드타임즈
  8. 2005/01/19
    호외>이주노동자, 다시생각해보기.
    레드타임즈

이러고도 비정규직 '보호'입법?

 

김성렬 tjdfuf@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4월 1일은 만우절이 아니라

노동자의 날이었다!


  4월 1일 전국의 노동자들은 일을 멈췄다. 그리고 하나 둘씩 모였다. 서울 국회 앞 3천여 명, 울산역 광장 2만여 명을 비롯하여 광주와 부산에서는 각각 6500여 명과 2600여 명이 모였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머리띠를 묶고 목이 터져라 외치기 시작했다. “비정규법개악 막아내고 비정규직 철폐하자!”라고. 노동자들이 이렇게 외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낯설게 들리는 ‘비정규법개악’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날 거리로 나온 노동자들은 모두 10만 여명에 달했다. 규모로 보나 뭐로 보나 단순한 해프닝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그들의 요구가 너무 절박하다.


정부의 법안은 왜 ‘개악’안 인가?


  지난 1998년 IMF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정부는 고통분담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부가 말하는 고통분담은 노동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경제위기를 틈타 사업주가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방식이 아닌 용역업체를 통해 노동자를 공급받는, 즉 파견근로를 할 수 있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예전에도 비정규직이 있었지만, 이 법안이 통과된 결과 비정규직은 급격히 늘어나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고 말았다. 이렇듯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부는 2004년 하반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며 새로운 법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법안을 살펴보니 정부의 말은 순전히 거짓이었다.

  무엇보다 파견업종이 대폭 확대되었다. 이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정규직 임금의 절반 이하를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더욱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임시직 2년 후 정규직으로 채용’이라는 조건이 3년으로 1년 더 연장되었다. 사업주가 바보가 아닌 이상 2년 동안 실컷 부려먹고 그 후 정규직으로 고용하기는커녕 바로 해고할 텐데, 1년 더 임시직으로 마음껏 쓸 수 있게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특수고용직 노동자란 형식상 개인 사업주이지만 실제로는 사용주에 종속되어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화물차 기사나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학습지교사들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우리가 봐도 보통 노동자들과 다를 게 없는데, 새로운 법안에서는 노동자임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이처럼 새로운 법안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호하겠다는 ‘보호입법’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기존의 법안 보다 훨씬 더 ‘나쁘게’ 만들어졌다. 그래서 비정규법개악이라고 하는 것이다.


4시간 경고파업을 넘어

실질적인 총파업이 중요하다!


  지난 1일 파업은 4시간 경고파업이었다. 정부가 4월 임시국회 때 비정규법개악을 통과시킨다면 무기한 총파업을 진행하겠다는 그야말로 ‘경고’였다. 하지만 이런 경고에 기죽을 정부가 아니다. 따라서 파업에 대해 선언이나 경고가 아닌 실질적인 행동이 중요하다. 그래야 이 법안을 막아낼 수 있다. 1500만 노동자들 중에서 이미 절반 이상이 비정규직이다. 이제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물러날 데가 없다. 이제 싸울 때다. 지난 1일 목이 터져라 외쳤던 그 함성을 4월에 실제로 행동할 일만 남았다. 우리도 여기에 힘찬 박수를 보내자!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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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th may day!

 

김진태 kissme@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기네스북으로 본 메이데이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에 의해서 가장 많이 불린 노래로 기네스북에 올라있는 노래가 무엇일까? 바로 ‘인터내셔널’이라는 노래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외침과 함께 시작되는 이 노래의 가사는 모든 노동자민중이 ‘참 자유 평등의 길로 힘차게 나갈 것’을 주장한다. 아니 사랑얘기도 아닌데 어떻게 기네스북에 오르기 까지 했을까?

   바로 메이데이라는 국제적인 날에 불린 노래이기 때문이다. 메이데이는 매년 5월 1일에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날이다. 1890년부터 기념하기 시작하여 올해로 115주년을 맞이한다. 그렇다면 누가 왜 메이데이를 제정했을까?


노동자와 자본가, 극단의 시대


  19세기 후반 미국 노동자들의 생활은 정말 비참했다. 놀기만 하는 자본가들이 다이아몬드로 이빨을 만들어 넣고, 100달러 지폐로 담배를 말아 피우며, 애완견에게 1만 5천 달러짜리 목걸이를 해주도 있는 동안 노동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루 12~14시간 일한 노동자들은 30달러의 월급을 받으며 다락방 월세 15달러조차 내기 힘든 삶을 살고 있었다. 아동, 여성 할 것 없이 아무런 보호 시설 없는 환경에서 목숨을 걸고 노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데이의 유래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살아가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하루 8시간 노동을 주장했다. 투쟁의 성과로 8시간 노동법이 제정되었으나 실제로 지켜지는 곳은 한군데도 없었다. 이에 미국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을 기해 모두 파업을 할 것을 약속하고 집회를 연달아 개최한다. 이 흐름은 광범위하게 확대되어, 5월 1일에는 34만 명이 집회에 참여하고 19만 명이 파업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파업 농성 중이던 한 공장에서 경찰이 노동자들을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노동자들의 분노는 더 커져 5월 4일에 헤이마켓광장에서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집회를 연다. 이 집회를 진행하던 중에 갑자기 폭탄이 터졌다. 경찰과 법원은 집회 주동자들의 행위라고 주장하며 주동자들에게 모두 검거, 사형 혹은 징역형을 내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폭발사건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하기 위한 자본가들의 음모사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했다.

  이러한 미국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리며 국제적으로 8시간 노동을 실질적으로 쟁취하기 위한 흐름은 이어졌다.  1890년에 전 세계 노동자당의 협회인 ‘제 2인터내셔널’에서 5월 1일을 메이데이라는 이름으로 기념하도록 제정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전 세계적으로 1일 8시간 노동확립을 위한 국제적 시위를 만들어나가기로 약속한다.

  한반도의 노동자들이라고 처지가 달랐을 리가 없다.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시작한 20년대에는 18세 미만 미성년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노동자들이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혹사당하고 있었다. 이에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노동자들의 국제적인 연대가 시작되면서, 일제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과 함께 메이데이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이 연대에는 일본노동자들이 함께 하기도 했다.


근로자의 날이 아니라 메이데이!


  많은 사람들이 ‘메이데이’를 ‘근로자의 날’로 알고 있다. 네이버 사전에서도 ‘근로자의 노고를 생각해서 하루 쉬는 날’로 설명하고 있다. ‘전 세계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권리를 쟁취하는 날’이라는 원래 의의와는 거리가 멀다. 메이데이의 정신이 이렇게 변질된 것은 남한  노동운동이 억압에 의해 사라지고 이승만 정권이 성립되면서부터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현실이 바뀌지 않는 한 투쟁은 끝날 수 없다. 대한노총과 한국노총이 기득권에 빌붙어 오히려 노동자 투쟁을 억압했지만,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1989년 메이데이 100주년을 맞는 날에는 70년대의 전태일 열사에서부터 시작된 의식적인 노동자들의 힘으로 메이데이를 기념하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어 115주년을 맞는 것이다. 이렇게 115년 동안 지속된 국제적인 노동자연대의 날에 함께 해보는 것이 좋은 경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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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교수 파문,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성렬 tjdfuf@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친일/반일’ 구도 속에서

가려지는 진실


  한승조 고대 명예교수의 기고 글로 인한 파장은 실로 막대했다. 그렇다면 국민여론이 들끓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일일까? 한마디로 말해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찬물을 끼얹듯 일본 보수우익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것이다. 일제 36년 식민지배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는 생생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친일/반일’의 구도는 여전하다. 즉 ‘당시에 러시아보다 일본에 먹힌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한교수 입장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그렇다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하는 것 아니냐?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냐?’ 등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논리의 귀결점이나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에 머물고 만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아직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체제의 성원들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있을까? 쉽게 말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듯 자본주의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고, 봉건제에 이어 ‘계급사회’다. 즉 누구는 빼앗고 누구는 빼앗기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에서는 비록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해도 ‘공통된 이해’는 갖기 힘들다. 아니, 가질 수 없다. 누구는 떵떵거리며 사는 반면, 누구는 열심히 일해 봤자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사이좋게 ‘공통된 이해’를 갖는다고 한다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주의 논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고자 한다. 그 결과, 현재 진행 중인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청주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 이 땅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투쟁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반외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남한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자본가와 정권에 대해서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위험 역시 있기도 하다.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대로 비판하자!


  그렇다면 친일/반일의 구도의 민족주의 논리가 아니라면 결국 한교수의 주장에 대해 찬성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주적 근대화’,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스스로 이행한다고 한다면 그 과정은 과연 순탄하기만 했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치를 떨며 말해준다. 바로 ‘영국의 인클로저운동’을 비롯하여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인민의 피로 얼룩진 참혹한 과정’임을 말이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봉건제 국가가 스스로 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해도 그 과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당시에 조선 스스로 ‘자주적 근대화’로 나가든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든지, 러시아가 식민지배를 하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역사적 판단의 과제는 단순히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가 함께 한 ‘원산총파업’처럼 자본주의의 이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에 대해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시각이 아닌 한 사회를 관통하는 ‘체제’ 속에서 발생하는 대립을 중심으로 이번 한교수 파문을 다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미래 역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교수 파문의 본질을 다시 봐야 한다.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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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무엇이 문제인가?

 

김진태 kissme@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지난 호에서는 고려대학교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재정사용과 교육문제에 대한 태도에 대해 비판하였다. 이번에는 전반적인 교육문제에 대해 더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학이 변했다?


  우리는 ‘자유, 정의, 진리’를 배우고 있다. 우리가 배우고 있는 자유, 정의, 진리는 무엇인가? ‘대학은 지식의 상아탑이다.’ 정말 자주 들어본 말이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영어, 중국어 점령에 경영학 부전공을 목표로 하고 있는 수많은 신입생들을 보면서, 그리고 인문학부생도 인문학을 공부하지 않는 요즘을 두고서 ‘대학이 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대학은 이렇게 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 변했을까? 왜 예전에는 고려대면 인문학부 출신도 어렵지 않게 취직을 했는데 요즘에는 경영학 2중전공 안하면 이력서도 못 낸다고 할까?

  요즘 대학의 구조조정을 담당하는 곳에는 항상 대기업 인사가 참여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커리큘럼이 기업이 원하는 방향으로 구성된다. 대학인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어에 능통해야 하고 경영학이 어느 정도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철학과나 사학과는 전국에 몇 개만 남고 다 사라져 달라고 요구한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땅의 교육자들도 아니오, 학생들도 아니다. 바로 자본주의 사회가 지금 그러한 인력을 대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은 대학을 통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력을 공급받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재 자본주의 사회는 인문학도를 예전만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곳곳에서 사라져가고 있고, 인기도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의 이윤만이 최고라고 말하는 교육, 변했지만 변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교육’의 의미를 돌아봤을 때, 자본가들의 요구에 따라 교육과 대학의 모습이 변하는 모습은 그다지 생소하지 않다. 공교육을 통한 기초교육의 발달과 대학교와 같은 고급교육의 발달은 모두 자본주의 국가의 탄생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농사지어 먹고 사는 조선시대 백성들은 자기 이름이나 쓸 줄 알면 됐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국민(그 중의 대다수 노동자민중)은 기본적으로 글과 간단한 계산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에 공교육은 발달해야만 했다. 고을 원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던 조선시대에는 원님 생각이 법이었지만, 자본주의국가에서는 전국을 관장하는 행정과 법, 교육이 필요했기 때문에 행정, 법, 인문학도를 양성하는 대학 또한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의 이 모든 보통교육과 고급교육을 아우르는 특징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현 체제에 감히 도전하지 못하도록 교육하는 것이다. 교과서에서는 피지배계급의 항쟁의 역사를 숨기고, 권리를 위한 투쟁은 부도덕하다고 말하고 있다. 대학교육은 영어와 경영학에 통달한 엘리트 관리자가 되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효율적으로 짜내라고 말하고 있다.(물론, 극소수의 대학 강좌가 노동자민중의 편에 서기도 한다. 아주 극소수만이.) 


바꾸고 싶다면 이렇게!


  이처럼 이 땅의 교육이 자본주의 국가가 낳은 것이기에 항상 체제가 필요로 하는 교육만을 하고 있다. 대학이 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이 체제 자체에 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교육문제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적어도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면, 당당하게 이 자본주의 국가의 교육에, 이 체제에 돌을 던지자!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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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유물론이란 무엇일까?

 

김진태(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유물론(唯物論)’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공산당? 마르크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악의 무리들? 우리는 유물론materialism을 ‘오직 유(唯)’자에 ‘물질 물(物)’자를 써서 번역합니다. 오직 물질! 유물론은 ‘정신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물질적인 가치만을 추구하는 사상’이라는 잘못된 이해가 보편적입니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가치만을 중요시하고 정신적 가치를 무시하기 때문에 인륜도 도덕도 땅에 떨어진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들은 마치 ‘공산당은 뿔 달린 악마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우스꽝스러운 오해입니다.


  그렇다면 유물론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이에 반대되는 관념론(觀念論)은 무엇일까요? 이는 물질(자연 뿐만 아니라 사회까지 포함)과 의식(정신, 사고 등)의 관계에서 무엇이 본원적인가에 대해 대립되는 두 견해입니다. 물론 유물론은 물질이 본원적이라는 주장이고, 관념론은 의식이 본원적이라는 주장이죠.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 즉, ‘신을 비롯한 어떤 정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인간의 의식에 앞서서 옛날부터 존재했는가?’라는 질문이 바로 유물론이 맞느냐, 관념론이 맞느냐를 묻는 질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눈이 한 줄의 여백을 지나는 동안 어떤 생각하셨을지 정말 궁금하네요. 어려운 문제인 만큼 이는 철학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쟁점을 형성합니다. 고등학교 윤리 교과서에서는 ‘유물론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나타난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과 사회구조의 모순을 비판하기 위하여 대두된 사상’이라고 설명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발생하기 수천 년 전 철학적 사고가 막 발생하기 시작한 그 때부터 유물론과 관념론은 대립해왔답니다. 우리는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영혼과 육체의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했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좀 지나서는 플라톤과 데모크리토스의 대립이 있었죠. 한국에서는 이황과 이이, 서경덕의 대립이 그 예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무엇이 옳은 견해일까요? 판단을 내리는 데에 도움이 되는 얘기를 몇 가지 더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에요. 인간이 한순간에 갑자기 몽땅 죽었다고 생각해봅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가 갑자기 몽땅 사라질까요? 아니면,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해도 날아다니던 새, 뛰어다니던 토끼들이 갑자기 멈출까요? 아니겠죠? 그렇습니다. 인간 또한 이 세계를 이루고 있는 하나의 운동하는 물질일 뿐입니다. 토끼가 뛰고 새가 나는 것을 우리가 아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새와 토끼를 감각을 통해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존재해야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존재해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죠.


  공룡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예로 들 수 있을 듯합니다. 우리는 화석, 공룡발자국 등을 연구하면서 공룡의 진짜 모습을 상상하여 복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연구를 하기 전에, 다시 말해 예전에 공룡이 살았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전에는 실제로 이 지구에는 공룡이 살지 않았던 것이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공룡은 실제로 살았던 것이고,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연구를 통해서 현재 공룡이라는 대상에 대한 관념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처럼 물질이 정신에 우선함을 알 수 있습니다.


  언뜻 생각해보면 ‘TV는 누가 먼저 생각을 한 후에 물질로 만든 것이 아니냐! 그러면 관념이 우선한 것 아니냐!’라고 따질 수도 있겠습니다. 네 맞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사실이라는 것과 유물론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서 자연에서 금속, 플라스틱 등의 물질을 뽑아내는 방법, 전기를 만들어내는 방법 그리고 전파라는 것을 영상으로 변화시키는 방법을 알아냈을 것입니다. 이렇게 자연과의 결합을 통해서 알아낸 것들을 종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TV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존재하는 물질들을 통해 형성된 관념들을 바탕으로 머리를 써서 생각한대로 물질 대상을 오히려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하지만 TV라는 관념이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 TV를 실제로 구성하는 것들은 어디서부터 왔는지를 따져보면 오히려 유물론이 옳은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몇몇 관념론자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념들은 그저 관념일 뿐,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 물질이 존재하는 것은 알 수 없다.’라고 말합니다. 관념론의 한 견해라고 볼 수 있죠. 이런 사람들한테 실제로 대상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인간의 의식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요? 아주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향해 총을 쏴보면 됩니다. 그 사람 말로는 총알이라는 관념은 존재해도 실제로 총알이 존재하는지는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총에 맞는 것이 그리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저 총알이라는 ‘관념’이니까요.


  그렇다면 예를 들어, 물이 끓으면 수증기가 된다는 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누가 보장해주는데? 위에서 말한 사람들은 실재로 물과 수증기는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물’의 관념이 ‘수증기’의 관념이 시간적으로 연속적으로 감각된 것일 뿐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여러분들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저라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맨 날 끓여먹는 게 라면인데 그걸 모를 리가 있냐!’ 그렇습니다. 우리는 물질에 ‘실천’을 가함으로써 그 대상 물질이 나의 의식과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실천’하면 뭔가 정의로운 뉘앙스가 있지만 철학에서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대상을 변화시키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물은 수천억 번이 훨씬 넘게 끓여졌고 단 한 번도 수증기로 변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물은 끓으면 수증기가 된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물질이 의식에 반영’된다고 합니다. 이 반영이 제대로 되는가를 보증해주는 것이 바로 보고 듣고 느끼는 등의 ‘실천’입니다. 실천이야 말로 제대로 인식하는 것의 보증수표입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물질이 의식에 근원한다는 것을 알아봤습니다. 화창한 봄날이 다가옵니다. 연애하기 딱 좋은 계절이죠. 혹시 그 사람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으신가요? 그러면 계속 찔러보세요. 찔러보는 ‘실천’만이 그 사람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니까요. 그리고 명심하세요. 그 찔러봄이 그 사람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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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교육투쟁, 망설이지 마세요.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2003년 8%, 2003년 6.9%, 그리고 올 해는 5%

“인구율이 줄어든다고 해서 절대 속지 마세요. 절대 인구수는 계속 증가합니다. 알았지요?” 누구나 한창 수능 공부할 때, 이런 퍼센트 문제에 속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교묘하게 그래프와 퍼센트로 우리 눈을 현혹시켰던 바로 문제. 그럼에도 어쨌든 대학에 온 우리는 다시금 퍼센트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바로 매년 반복되는 등록금 인상률 때문이다. 어김없이 올 해도 올랐다. 무려 5%나 말이다. 말이 5%이지, 그 동안 인상률을 고려해 봤을 때, 우리가 실제로 납부해야 하는 금액은 이제 인문계 등록금만 300만원이 넘는다. 이공계는 말할 필요도 없이 그 이상이다. 부푼 마음으로 입학한 05학번 새내기들은 일단 등록을 해야 입학을 하게 되어 있으니, 입학금에 등록금까지 포함한 금액은 인문계의 경우 400만원을 훌쩍 넘기고 말았다.

“누가 고대에 오라고 했는가. 아무도 고대에 오라고 한 사람은 없다.”

등록금이 오르면서 학생들은 휴학에, 아르바이트를 하지만 이러한 학교 측의 대답은 그 어이없음에 오히려 우리를 당황하게 한다. 여기에 “고대가 연대를 이기는 것은 연대보다 등록금 인상을 높이는 것이다.”라고까지 말하는 학교 측의 대답은 과연 온전히 정신을 갖고 사는지 의심이 들 정도다. 그렇다면 학교 측에서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100주년이다. 올 해 고대는 건학 100주년을 맞는다. 그래서 중앙광장 옆의 으리으리한 100주년기념관은 5월 5일 완공을 목표로 거의 다 지었으며, 각종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에 올 해 등록금 인상분 115억 중에서 53억이 쓰인다고 한다. 하지만 곰곰이 따져 보자. ‘이제 곧 완공되는 100주년기념관에는 우리가 마음 놓고 24시간 사용할 수 있는 ‘자치공간’이 있는가? 각종 행사를 한다고 하지만 실질적으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행사는 과연 몇이나 될까? 있기나 할까?‘하고 말이다. 그 어디에도 학생들을 위한 것은 없다. 다만 학교 측의 입장, 재단 측의 입장만 있을 뿐이다.

‘합리적으로 대화로 풀어내자!’ vs ‘오직 우리의 실질적인 대중행동이 필요하다’

과연 어느 것이 더 옳은 말일까? 요즘 사회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난리가 아니다. 신문 사회면에 가끔씩 ‘노동’이란 말이 들어간 기사가 나오기만 하면 어김없이 사설에는 ‘이제는 대화와 타협으로’하는 글이 실릴 정도다. 하긴 장구한 12년간의 제도권 교육에서 우리는 항상 배워오지 않았는가? ‘사회적 갈등은 구성원들의 대화를 통해 서로간의 입장을 고려하여 타협해야 한다’고 말이다. 학생들 사이에 등록금 인상 반대 목소리가 커지면 학교 측에서도 이러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한다. 여기에 ‘합리적’이라는 말이 덧붙여진다. 학교 측에서 대화와 타협을 강조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저들은 학생들이 하나로 뭉쳐있지 않고 개별화 되어 있는 한 힘에서 결코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힘이 뒷받침되지 않는 대화라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바로 학생들이 하나로 단결하여 뭉치는 것이다. 학교 측의 논리에 말로만 대항해 봤자 학교 측은 당황한 기색은 전혀 없이 속으로 애써 웃음을 참으며 ‘합리적’으로 자신의 논리를 반복할 뿐이다. 이제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할 때이다. ‘부당한 등록금 인상 반대한다’라고 말만 외칠 것이 아니라 실제로 행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피부로 와 닿는 등록금 문제를 이제 결코 좌시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퍼센트 문제를 풀듯 머리로 푸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행동으로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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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호>비정규직보호입법은 비정규직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김성렬

 

 

1500만 노동자들 중 800만이 비정규직!

2003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남성노동자가 월차휴가를 내겠다고 하자 회사 관리자가 와서 식칼로 아킬레스건을 잘라버린 사건. 2004년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한 영세한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의 하반신이 마비가 된 사건. 이렇게 굵직굵직하게 얘기된 사건 외에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사건들은 잠시 잠깐 신문의 한 귀퉁이에서 기사로 나타났다가 어느 새 잊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당사자들의 고통 역시 나 몰라라 잊혀질 뿐이었다. 바로 누구의 얘기인가? 누구의 고통인가? 하루하루 열악한 작업환경에 치를 떨며 살아가고 있는, 아무리 일해 봤자 한 달 월급이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그야말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가는 이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이 땅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지난 98년 이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급격히 많아지더니 이제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섰다. 노동자들의 실태에 관해서는 그렇게 인색해 하는 정부조차도 인정하고 있을 정도다. 말이 800만이지 그야말로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이제 그 어디에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하기 힘든 시대, 비정규직 800만 시대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이다.

‘비정규직보호입법’이면 비정규직을 보호하는 건가?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현재 정부가 내놓은 법안을 보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사업주가 2년 동안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는 기간이 오히려 3년으로 늘어난다. 비정규직으로서 2년 동안 갖은 설움과 고통으로 살아가는 것도 억울한데 3년이라니.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것’은 기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하고 고용에 대한 불안감을 줄이고 잘 살 수 있도록 ‘정규직화’ 한다는 것 아닌가? 상식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법안은 오히려 비정규직을 양산하려고 안달이 났다. 그렇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이를 보고만 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이 확산되고 더욱더 열악한 처지로 전락하고 마는 이 법안에 대해 모든 것을 걸고 싸우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박한 것이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원칙’, 그 훌륭한 원칙만이 있을 뿐이다. ‘서로 싸우지 말고 대화로 해결하자. 하지만 우리가 정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 불법적으로 행동할 경우 가만있지 않겠다!’하는 그 원칙을 말이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실질적인 힘이 있어야 대화를 통해 뭐라도 따낼 수 있지 않은가? 아무런 힘이 없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불법행동 하지 말고 대화를 통해 (그것도 정부가 자초한) 문제를 해결하자고 하는 것은 이 법안을 통과시키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 목소리로 이 법안을 반대하자!

더 이상 비정규직이 양산되는 것을 이제는 눈 뜨고만 볼 수 없다. 이윤을 위해서라면 일하고 있는 노동자의 손가락이 잘려나가든, 하반신이 마비가 되든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자본가들을 위해 만든 이 법안에 대해 한 목소리로 반대해야 한다. 이 땅 모든 노동자들을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노예와 같은 삶을 강요하는 것에 반대하여 우리는 힘차게 싸우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지지와 박수를 보내야 한다. 이는 책 속의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함께 바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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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이주노동자, 다시생각해보기.

 

이주노동자,

다시 생각해보기.


“사장님, 나 한국에 데려가 치료해 주세요”

  이 말은 한 타이 여성노동자가 타이에서 고통스럽게 살아가면서 한글로 쓴 편지글의 일부입니다. 지난 11일 귀국한 이 노동자는 그토록 고통스러웠던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안정장치 하나 없이 일하면서 노말헥산 중독으로 인해 ‘다발성 신경장애’를 앓게 되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것입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는 있지만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회사 측에서는 이런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려 하고 은폐/축소시키고자 하는 상황. 이러한 현실이 바로 이 땅 이주노동자의 현실입니다. 이번에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된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합니다. 정부에서는 이주노동자들의 처우를 개선한다고 하지만 사업장 이동의 자유가 없어 사실상 노예제도에 다름 아닌 ‘고용허가제’를 지난해부터 실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불법’이란 명목으로 마치 동물을 사냥하듯 이주노동자들을 수십 명씩 잡아서 강제출국 시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주노동자들은 불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규정으로 사장이나 관리자들의 협박과 눈치를 보며 고된 노동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처해 있습니다. 3D업종이라 불리는 영세한 공장에서 그야말로 혹사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에,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그 모멸감을 받아가며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장님 나빠요‘하며 희화화시킨 TV 코미디 프로를 보며 마냥 웃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봅니다.




경기 화성시 향남면 요리 ㄷ사에서 일하다가 노말헥산에 중독돼 ‘다발성 신경장애’(일명 앉은뱅이병)를 앓고 있는 한 타이 여성 노동자가 지난해 12월 초순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에서 자원봉사자의 부축을 받아 임시숙소에 들어가고 있다. 이 여성 노동자는 지난달 13일 안산중앙병원에 입원해 현재 치료를 받고 있다. 사진 안산외국인노동자센터 제공

 

사회적 갈등은 대화와 타협으로?

우리는 그 동안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간 이른바 ‘제도권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그 제도권 교육의 사회교과에서 항상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는 각각의 이해를 요구하는 이해집단들이 있고 집단들의 요구가 상충할 때 사회적 갈등이 야기된다. 이럴 때 중요한 것은 이해의 극단적 대립이 아니라 서로의 요구를 인정하면서 절충안을 마련하기 위한 대화와 타협이다. 그리고 갈등이 바람직하게 해결되면 사회는 한층 더 발전할 수 있고, 이런 의미에서 갈등이란 사회발전에 있어 긍정적이기도 하다.’ 바로 이러한 논리가 아니었습니까? 따라서 사회의 여러 문제들을 바라볼 때 있어, 대화와 타협이란 잣대를 먼저 우선시 하게끔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러한 논리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습니다. 바로 각 집단이 서로의 이해를 요구한다면 최소한 그 집단들 사이의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전제하지 않는 가운데, 모든 사안들에 대해 대화와 타협을 요구하는 것은 힘이 더 센 집단에 손을 들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됩니다. 자국에서는 더 이상 일자리가 없어서 더 나은 삶을 위해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가진 거라곤 자신의 몸이 전부입니다. 여기에 한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을 경우 아직 한국말이 서툴러서 제대로 자신의 목소리조차 낼 수 없으며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주노동자와 회사 간의 싸움에 있어 우리가 그동안 배워 온 제도권 교육의 논리를 대입하면 이는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린 회사 측의 입장을 옹호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땅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다시 생각하며


  고된 노동 속에서 자신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기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힘들게 살아가는 이 땅 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은 이러한 고통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차별을 받으며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우리와 전혀 무관한 남의 이야기일까요?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발 디딛고 있는 대학이란 공간에서, 교육은 전체 사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하나가 모두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하며 이 사회 속에서 벌어지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 문제들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무엇인지를 앞으로 함께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이주노동자들은 오늘도 정부의 강제추방정책에 반대하고, 합법적으로 일하기 위해, 병들지 않고 사람답게 살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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