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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을 비판한다



  운동 진영 내에서 농업 문제를 바라보는 가장 주된 관점은 아마도 민족주의적 관점일 것이다. 한복 차림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전농 출신 강기갑 의원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식량주권을 지켜내서 민족농업을 사수하는 것’이 농업 정책의 올바른 방향이라고 역설한다. 학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인데, ‘신참’ 민족주의자들은 농활 사업이 “농민-학생이 힘을 모아 전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당당하게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식량주권을 세계에 선언”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아래에서는 이와 같은 주장이 왜 공허하거나 심지어는 반동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짧게나마 분석해내고자 한다. 특별한 설명이 없는 한 이 글의 인용문은 모두 『우리농업 지키는 2004년 민족고대 봄 농촌활동』 자료집에서 인용하였음을 밝혀둔다.


  (1)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인가


  이 질문에 옳게 답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농업 현안에 대한 각 계급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따져보아야만 한다. “쌀을 지켜내는 것은 우리 민족 모두의 문제, 우리 국민 모두의 문제”라는 민족주의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농업 문제에 있어서 각 계급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에 따라 상이한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칠레 FTA 문제를 가지고 이를 살펴보자.

  먼저 농민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소농 계급은 FTA가 통과되는 즉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려 있다. 정부 스스로도 FTA가 통과되면 400만 농업 인구가 200만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시인하고 있다. 나머지 200만은 죽으라는 이야기이다. 하기야 비행기로 씨앗을 뿌리고, 거대한 콤바인으로 수확을 해대는 대규모 기업적 영농에 남한의 영세한 농업이 경쟁한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때문에 소농 계급은 지난 한 해 그토록 전투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FTA에 관한 남한 ‘민족’ 자본가 계급의 입장은 어떠한가? 그들의 입장은 농민들과는 정반대로 열렬한 환영이다. 지난 한 해 전경련이 노무현 정권에게 하루 빨리 한-칠레 FTA를 발효시켜 줄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는 것을 기억해 보라. 이것은 그들이 ‘민족의 배신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들의 계급적 이해에 충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로 FTA의 발효는 남미의 공산품 수출 시장을 남한 자본에게 활짝 열어준다는 점, 둘째로 값싼 수입 농산품의 유통은 남한 노동자 계급의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묶어 두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점은 FTA의 관철을 비롯한 농업의 세계적 재편이 결코 농업 선진국 자본의 이해만을 대변하지 않으며, 남한 자본의 이해 역시 동일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농업의 세계화’는 제국주의 자본의 남한 침략으로써가 아니라, 남한 자본 역시 그 일부로서 참여하고 있는 세계 총자본의 이윤율을 제고하기 위한 것으로써 이해되어야 한다. (‘미국의 농업 침탈에 맞선 민족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허황된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 자체가 분쇄되지 않는 한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목적이며, 이것을 한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정책의 기조로 가져간다는 것은 공상에 불과하다. 농업 문제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은 이 같은 사태의 본질을 그릇 이해하게 할 뿐이며, 더불어 민족 내부에서의 계급적 대립을 간과하게끔 만들 따름이다.


  (2)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는 어떤 측면에서 반동적인가


  모든 사물/사건은 자신의 내부에 대립되는 두 측면을 지니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대립되는 양자는 부단히 서로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새로운 질로 이행하기도 한다. 이것은 모든 문제에는 양면성이 있으며, 어느 한 측면을 절대화 시켜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의 세계화’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 앞에 현상하는 갖가지 세계화 흐름은 전 세계 근로인민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몰아넣으며 그들이 누려왔던 갖가지 제반 권리들을 파괴하고 있다. 이것이 세계화의 한 측면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는 ‘절대악’일 뿐이며, 세계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인류의 목적으로 되어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세계화라는 것은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 아닌데,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이라는 그들의 저작에서 자본의 세계화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신의 생산물의 판로를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욕구는 부르주아지를 전지구상으로 내몬다. 부르주아지는 도처에서 둥지를 틀어야 하며, 도처에서 정착하여야 하고, 도처에서 연계를 갖추어야 한다. … 낡은 지방적, 국민적 자급 자족과 고립 대신에 국민들 상호간의 전면적 교류, 전면적 의존이 들어선다.” 즉 세계화가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측면은 생산의 전 세계적 체계화를 수행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다. 더불어 세계화는 “모든 봉건적, 가부장제적, 목가적 관계들을 파괴”하는데, 이것이 자본가 계급이 “역사에서 (수행하는) 매우 혁명적인 역할” (칼 맑스 ·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박종철출판사)이다.

  따라서 세계화의 참된 모순은 세계화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이 오로지 자본가 계급의 이윤욕을 위해 무계획적으로, 무정부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을 뿐이다. 자본주의 세계화를 통해 획득된 전체 인류 사회의 거대한 생산력은 계승/발전 되어야 하며, 이것을 전체 근로 인민이 아니라 소수의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는 현재의  생산 관계를 변혁해내는 것이 앞으로 역사가 수행해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식량주권 수호, 민족농업 사수’라는 민족주의적 관점은, 역사의 앞을 보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퇴행적 시도이다. 이들은 “원래 농산물은 인간의 생활에 기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자급자족, 즉 자기나라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자국에서 소비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혀 당연하지 않다. 이미 남한의 식량 자급률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이들의 논리대로라면 식량주권을 지켜내기 위해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지은 값싼 농산물을 수입하는 대신 소 달구지에 의존하는 민족적 농업을 부활시키는 것이 우선적 과제로 된다. 글쎄, 이들에 대해서 ‘경제에서의 자립’이라는 구호를 내건 북조선의 경제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는가를 언급해 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민족농업의 논리는 그것이 전혀 생산력의 발전을 담보할 수 없으며, 심지어는 이미 획득된 생산력의 유실마저도 인정한다는 점에서 반동적이다.


  (3) 결론 : 농업 문제의 진정한 해결은 어떻게 가능한가


  농업 개방을 앞두고 수많은 농민이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렸다는 것은 우리 앞에 놓여진 절박한 현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절박성이야말로 어설픈 민족적 감정에서가 아니라 과학적인 인식을 토대로 하는 문제 해결의 방법을 절실히 요구한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자면, ‘농업의 세계화’는 남한 자본을 비롯한 국제 자본의 요구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는 것, 문제는 세계화의 흐름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본의 이해에 따라 무계획적, 무정부적으로 수행됨으로써 남한 농민을 비롯한 전 세계 근로 인민의 생존권을 박탈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상을 통해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완전한 변혁을 통해 생산의 전 사회적 계획을 수립할 때만이 농업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이 가능하다는 확고한 결론을 얻게 된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분쇄되고 계획에 의한 생산이 전면화 되지 않는 한, 영세한 남한 농민의 생존권이 보장받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민족의 전통을 지키자고 민족 자본에게 외치고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의 변혁을 위한 비타협적 투쟁을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투쟁하는 농민들의 대다수는 그들의 소소유자적 본능으로 말미암아 정부에 대한 청원 이상의 의식을 획득하고 있지 못하다. 농활을 통해 그들에게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알려내고, 자본주의 변혁의 주력군인 노동자 계급과 연대할 것을 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결론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 민족주의는 구체적 역사적 현실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남한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자본가 계급의 ‘사회 통합’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고 있거나, 기껏해야 몰락하는 소생산자 계급의 이해를 대변해내는 것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점이다. 농업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 필요한 것은 민족적 감성이 아니라 노동자 계급을 주축으로 한 전 세계 근로인민의 국제주의적 연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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