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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조 교수 파문, 어떻게 생각하세요?

 

김성렬 tjdfuf@jinbo.net

(노동해방학생연대 고대모임 회원)

‘친일/반일’ 구도 속에서

가려지는 진실


  한승조 고대 명예교수의 기고 글로 인한 파장은 실로 막대했다. 그렇다면 국민여론이 들끓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일일까? 한마디로 말해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찬물을 끼얹듯 일본 보수우익의 입장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것이다. 일제 36년 식민지배가 아직도 국민들의 뇌리에는 생생한데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도 볼 수 있듯, ‘친일/반일’의 구도는 여전하다. 즉 ‘당시에 러시아보다 일본에 먹힌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라는 한교수 입장에 대한 비판의 대부분은 ‘그렇다면 결국 일제의 식민지배를 용인하는 것 아니냐? 우리 민족이 당했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 것이냐?’ 등으로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비판의 논리의 귀결점이나 그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민족주의’에 머물고 만다.


  혹자는 ‘우리나라에서 민족주의는 아직 의미가 있다’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자본주의 체제의 성원들의 이해관계가 같을 수 있을까? 쉽게 말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교과서에 나와 있듯 자본주의체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존재하고, 봉건제에 이어 ‘계급사회’다. 즉 누구는 빼앗고 누구는 빼앗기는 그런 사회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체제에서는 비록 같은 나라에 살고 있다 해도 ‘공통된 이해’는 갖기 힘들다. 아니, 가질 수 없다. 누구는 떵떵거리며 사는 반면, 누구는 열심히 일해 봤자 하루 벌어먹고 살기도 힘든데 사이좋게 ‘공통된 이해’를 갖는다고 한다면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주의 논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이들을 하나로 묶고자 한다. 그 결과, 현재 진행 중인 [울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청주 하이닉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등 이 땅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투쟁에 대한 관심은 멀어지고 있다. 왜냐하면 ‘반외세’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남한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자본가와 정권에 대해서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될 위험 역시 있기도 하다.


이 사회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제대로 비판하자!


  그렇다면 친일/반일의 구도의 민족주의 논리가 아니라면 결국 한교수의 주장에 대해 찬성하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비판을 하려면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20세기 초, 조선이라는 나라가 ‘자주적 근대화’, 즉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스스로 이행한다고 한다면 그 과정은 과연 순탄하기만 했을까? 역사는 우리에게 치를 떨며 말해준다. 바로 ‘영국의 인클로저운동’을 비롯하여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과정은 ‘인민의 피로 얼룩진 참혹한 과정’임을 말이다. 따라서 조선이라는 봉건제 국가가 스스로 자본주의로 이행한다고 해도 그 과정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당시에 조선 스스로 ‘자주적 근대화’로 나가든지, 일본이 식민지배를 하든지, 러시아가 식민지배를 하든지 간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느껴야 했던 고통은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당시 역사적 판단의 과제는 단순히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노동자가 함께 한 ‘원산총파업’처럼 자본주의의 이행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을 최소화하고 일본제국주의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에 대해 비중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시각이 아닌 한 사회를 관통하는 ‘체제’ 속에서 발생하는 대립을 중심으로 이번 한교수 파문을 다시 봐야 할 것이다. 그래야 복잡하게 얽힌 과거사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부터 우리의 미래 역시 고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한교수 파문의 본질을 다시 봐야 한다.

 레드타임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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