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적 입장들

 

민주주의에 대한 원칙적 입장들


  일말의 정치 활동과 권리도 보장되어 있지 않았던 한국의 6,7,80년대. 그것에 맞서 국민 대다수가 벌였던 민주화 투쟁과 그 성과들. 그들은 스스로 대통령과 국회의원 등을 선출하는 권리를 쟁취하고, 대통령을 탄핵시키려는 야당의 ‘음모’에 맞서왔다. 그들이 생각하기엔 현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는 조금만 보완하면 거의 완벽하다. ‘진보적’인 사람의 경우라도 국가보안법 정도가 맘에 들지 않지만 곧 폐지될 것도 같으니 봐줄만 하다. 각종 기구 등을 통해 정치적 행위를 하는 것이 보장되어 있고 어떤 노동자들은 ‘귀족’ 소리 들을 만큼 배불리 먹고 산다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한다. 모든 시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를 직접 해결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민주주의.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지만 소수의 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절충하면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드는 절대적인 제도가 아니던가!! 어찌 이것을 신봉하고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첫 번째, “당신들의 천국”


  하지만 피어나올 변혁의 불꽃을 가슴에 품고 있는 청년 학생들이여. 그대들은 현재 다수의 평등과 소수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행해졌던 모든 것들이 단순히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번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현재 사회는 여러 계급들로 분열된 자본주의 사회이며 이를 유지시키는 것은 사유재산제와 임금 노예제이다. 자본가들은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이윤을 창출한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해 잉여가치를 만들어 냄으로써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렇듯 체제를 굴리는 자들은 노동자 계급이지만 그것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자들은 자본가 계급이라는 점이 자본주의의 모순이다. 상식과 역사를 우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면, 우리는 “순수” 민주주의에 관해 말할 수 없는 것이다.1) 착취자와 피착취자 사이에 평등이라는 개념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순수” 민주주의를 “순진”하게도 부르짖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스승은 카우츠키다. 그는 자신을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내세워 1918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팜플렛을 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만만세!!”라는 구호를 세련되게 포장한 것에 불과했다. 지금 사회의 새로운 ‘카우츠키’ 들에게 다음의 사례들을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본질을 더 자세히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예 하나. 공권력의 문제. 지난 탄핵 정국. ‘탄핵반대. 민주수호’ 외치며 다양한 단체와 시민들이 광화문으로 촛불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현 남한 사회에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저녁 5시가 넘으면 거리에서 집회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들은 ‘금지된 시간’에 경찰들의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평화적으로 반대시위를 진행하였다. 하지만 비정규직 철폐하자고 외치는 집회에서는 무장한 경찰들이 마구 폭력을 휘두르며 집회를 진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 집회의 성격이 체제에 反하고, 혹은 위협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모두가 광장에 나와서 자신의 요구를 담은 집회를 할 수 있는 “순수” 민주주의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예 둘. 부르주아 의회. 국민의 뜻을 하늘 같이 받들겠다며 악수를 청하던 사람들은 모든 노동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 반대하는 파견법 확대 개악안을 국회에 상정, 통과시킬 작정이다. 반면 사상의 자유를 침해하고 반인권적인 법률이라는 국가 보안법은 아직도 어영부영 하며 폐지 혹은 개정 여부도 확실히 알 수 없는 상태다. 이 법안을 논하는 와중에도 국회 앞에서 국보법 폐지 기습 시위를 한 청년 학생들은 연행까지 되었다. 이는 단순히 부르주아 의원 몇몇을 잘못 뽑아서의 문제가 아니다.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정치인이 있는 나라의 인민이더라도 자본가의 “민주주의”가 선언한 형식적 평등과 프롤레타리아트를 임금 노예로 전락시키는 수천의 실제적 제약 및 사기가 빚어내는 절박한 모순과 어디서나 마주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3)

  예 셋. 외교 정책. 어떠한 부르주아 국가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민주적이라고 하는 국가에서도 외교정책은 결코 공개적으로 수행되지 않는다. 외교 문제의 주된 사안은 식량, 파병, 관세 문제 등 인민의 삶에 즉각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이다. 현 남한 사회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안인 쌀 수입에 관련해 정부가 농민들의 의사를 하나도 반영하지 않았다는 기사4)를 통해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회에서 소외되는 인민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언론이나 교육의 문제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모든 인민이 자신의 생각을 담은 언론출판물을 내는 것은 인쇄하는 기구나 인쇄 용지의 소유문제와 각종 법적 제제때문에 쉽지 않다. 오로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굴종할 것을 가르치는 제도권 교육을 떨쳐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위의 예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정말로 순수하지 않다는 것. 부르주아들만을 위한 민주주의며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계급 독재라는 점을 말이다. 이것을 더 많은 대중들에게 알려나가는 것이 ‘가슴에 불꽃을 품은 자’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우리들의 천국”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소수의 착취 계급이 다수의 피착취 계급을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소수만이 잘 살게 되어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 어긋나게 된다. 당연히 우리는 근로피착취인민의 민주주의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확장해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전위 대공장 노동자들의 민주주의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5) 그런데 흔히 많은 자유주의자들과 기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만의 독재’가 되어 형식적인 민주주의조차 지키지 않으면 어쩌냐는 기우를 하곤 한다. 걱정마시라. 노동자계급민주주의 혹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백만 배 민주적이다.6) 노동자 계급 민주주의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고 할 수 있는 1871년 파리 코뮌7)의 역사적 경험을 살펴보면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맑스가 강조했던 파리 코뮌의 대책8)들이 충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모든 국가기관 봉직자의 월급 수준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낮추는 등의 대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의 전환을, 또한 특정계급이 억압수단인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에서 노동자·농민과 같은 대다수 인민대중의 일반적 권력에 의한, 억압자에 대한 억압으로의 전환을 보다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의회 선거란 몇 년에 한번씩 자신들을 억압하고 탄압할 자들을 뽑는 것이었던 반면 파리코뮌은 단순한 의회가 아니라, 활동하는 행정기관이면서 동시에 입법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파리코뮌은 부르주아 사회의 부패한 의회제도를, 의사발표의 자유와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전락되지 않는 기구로 대체했다. 그것은 곧 의회 구성원 자신들이 일해야 하고, 그들 자신의 법에 따라 업무를 집행해야 하며, 실제로 얻어진 결과에 따라 스스로 평가하고 그에 따라서 자신을 뽑아준 사람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기구는 잔존한다. 그러나 여기서 잔존하는 대의 기구는 결코 입법과 행정의 노동을 분리시키거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와 같은 특수한 체계로서의 의회는 아니다.9)

  그런데 분명 이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도 역시 완벽한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계급 간의 지배와 피지배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계급 사회에서 이것은 필연적인 것이라 대답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파리코뮌)는 이러한 계급을 계속 유지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낡아 빠진 관료기구를 일시에 때려 부수고 관료제의 점진적인 폐지를 가능케 할 일시적인 통치기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국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서 모든 인민이 완전한 평등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과도기의 역할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카우츠키주의자들은 한 술 더 뜬 주장을 제기한다. 착취자는 언제나 극소수의 인구만으로 이루어져 왔다며 프롤레타리아트가 절대적 다수를 이루고 있는데 굳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말할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다수는 다수이므로 다수가 소수의 “저항을 분쇄”할 필요도 “그것을 무력으로 억누를 필요도 없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 아직도 동화 속 세상을 꿈꾸는 몰계급적·초계급적인 주장이라는 것을 다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또한, 혁명과정에서도 관료제·국가 기구나 부르주아지를 한 번에 패퇴시키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다. 부르주아지가 자신이 소유하고 생산 수단이나 토지 등을 턱하니 내줄 리가 없을뿐더러 그것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또한 항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를 오가며 줄을 서는 쁘띠 부르주아들이나 각종 반동들에게 공포를 불어 넣기 위해서, 부르주아지에 대해 무장된 인민들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적들을 무력으로 억누르기 위해서 독재는 필요한 것이다.10)


  첫 번째와 두 번째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 그 독재는 혁명적 폭력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 그것을 통해서 진정으로 모든 인민의 해방과 평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현재 부르주아 민주주의 안에서의 민주주의적 투쟁을 방기해서는 안 된다. 자본주의 체제,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라는 것은 그들을 해방시킬 충실한 무기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내디던 걸음에 뒤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구체적 이론 학습과 실천으로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고민하자.”

 

 

1) <레닌「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28p>

2) 위의 책의 33~35p에서 레닌이 구분했던 방식을 사용.

 

3) 위의 책 34p

 

4) 쌀 관세화 여부를 결정하기 위한 협상의 종료 시한이 다가오면서 농민들이 대규모 집회를 잇따라 개최키로 하는 등 정부와 농민간의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정부는 관세화 유예기간을 10년으로 하되 의무수입 물량을 현행 기준 소비량의4%에서 8∼9%로 늘리고, 수입물량의 일부를 밥쌀용으로 판매하는 것을 허용하는 선에서 쌀 협상 대상국가들과 이견을 좁힌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중략)

    전국농민연대 대표들은 지난 1일부터 서울 광화문 시민공원에마련된 농성장에서 국민적 합의없는 쌀협상 중단과        쌀 개방 여부에 대한 국민투표 실시 등을 요구하며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다. <11월 8일자 한겨레 기사>

 

5)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운동은, 그 시작이 아무리 작고 평범할지라도, 또 그 기회가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불가피하게 당장의 목표를 뛰어넘어 구체제 전체와 양립할 수 없게 되며 그것을 파괴하는 힘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동은, 자본주의 하에서 이 계급의 처지에 있는 본질적 특수성 때문에, 필사적이고 전면적인 투쟁으로, 착취와 억압을 자행하는 모든 어둠의 세력들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는 뚜렷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 < 토니클리프『레닌1』362p 러시아어판 레닌 전집8권, 426p 재인용>

6)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36p>

7) 제정에 정반대되는 것이 코뮌이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트가 2월 혁명(1848)을 시작했을 때, ‘사회공화국’ 이라는 최임은 군주제라는 계급지배 형태 뿐만 아니라, 계급지배 그 자체까지도 폐지하려는 공화국의 막연한 염원을 표현한 구호였다. 코뮌은 그런 공화국의 실현형태였던 것이다. 낡은 통치권력의 중심지인 동시에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성채인 파리를, 티에르와 시골지주들이 제정에서 인계받은 이 낡은 통치권력을 부활하여 영구화하려고 한 데 대해 노동자들이 무기를 들고 봉기한 것이다. <맑스. 『프랑스 내전』>

8)  코뮌은 파리의 각 지역에서 보통 선거를 통해 선출된 지방자치 위원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언제나 소환의 대상이 되고, 자연적으로 코뮌 구성원의 대부분은 노동자들이거나, 노동계급의 덕망있는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대표자들이었다. 경찰은 일시에 정치적 속성이 제거되고 책임성 있고 항상 소환될 수 있는 기구로 변하였다.

   <위의 책>

 

9) <레닌 『국가와 혁명』 63p, 65p>

 

10)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43p>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