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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들은 왜 파업을 하는가?


녹테잎(노동해방학생연대 회원)


Intro


 올 한해 노동자들의 투쟁이 굵직하지는 않았지만 꽤나 많이 발생했다. 공무원 노동자들의 투쟁이나 LG칼텍스 노조의 투쟁, 궤도연대의 투쟁, 아직도 끝나지 않은 이주노동자들의 투쟁.. 올 한해 벌어졌던 투쟁들은 자본가들의 공세에 밀려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정부와 자본의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라던지 그 원인을 분석해보면 다양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그들이 투쟁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투쟁하면서 파업을 했다는 것이다. 파업은 “하던 일을 중단하다”는 뜻의 하다형 자동사이다(Naver 국어사전 참고.) 왜 노동자들은 하던 일을 중단하는가?- 혹은 중단할 수밖에 없는가?-


왜 파업을 하는가?


  노동자는 자신이 어떠한 가치를 생산하기 위해-즉 자신을 위해-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을 얻기 위해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을 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자신의 이득을 높이기 위해서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임금을 깎아야만 한다. 혹 노동자들의 저항에 임금을 삭감할 수 없으면 노동 강도를 높이거나 노동자들을 해고 한다. 아무런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지 않은 노동자들에게 임금과 해고의 문제, 노동 강도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탐욕스런 자본가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고, 여기에서 자본가와 노동자의 이해관계가 대립하게 되는 것이다.

  자본가는 한줌도 되지 않지만 매우 강한 존재다. 노동자들을 해고 할 수 있고, 작업속도를 늘릴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그러한 힘이 없다. 자본가를 해고할 수도 없고, 저항하기 전에는 작업속도를 늦출 수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의 이윤을 멈추기 위한 최후의 수단-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투쟁에 돌입하면서부터 파업을 하는 경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업속도를 늦춘다던지 준법투쟁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으로도 자본가들이 말을 들지 않을 때-대부분의 경우에 그/녀들은 자신의 이윤이 위협받지 않으면 말을 잘 들으려 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서 파업을 진행한다.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다. 수배 연행 구속 등의 위협에 시달려야 하고, -말도 안 되는- 무노동 무임금의 원리에 따라 경제적 고통마저 수반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파업을 결의하고 진행하는 것은 그것 이외에 방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파업이라는 것은 생산을 멈추는 행위이다. 생산을 멈추는 것은 노동자 한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혼자서 생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을 멈추는 일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파업을 진행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한 공장에서 공동으로 생산하고, 공동으로 생활한다. 이는 다른 계층과는 차별화 된 모습이다. 그들의 공동생산은 그들로 하여금 노예와 같은 처지에서 일을 할 때부터 단결을 배우게 한다. 농민집회에서와 노동자들의 집회에서의 분위기 차이는 이를 여력히 증명한다. 농민집회에서는 사회자의 멘트를 듣거나 자리에 착석한 채 집회에 집중하는 움직임을 찾기 힘들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한 대오 안에서 대오를 흩트리지 않은 채 집회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이러한 집회에서의 모습은 노동자들이 투쟁을 하면서 단결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쟁하기 전부터 이미 공동생산을 통해 단체 행동을 배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단결할 경우에만 자본가와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실제 노동을 하면서 ‘단결’에 대해서 체득하는 것이다.


파업은 “전쟁의 학교”


『···자본주의 사회의 바로 그 본성에서 일어나는 파업은 노동계급의 바로 그 사회체제에 대한 투쟁의 시작을 의미한다.”』1)

  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처음으로 자본가와 비슷한 위치에 서게 된다. 87년도의 노동자 대투쟁을 상기해보면 확실해 질 것이다. 노동자들이 요구했던 요구사항 중에는 “두발 자유”, “아침체조를 하지 말 것”등등이 있었다. 그렇다. 투쟁하지 않았던 노동자들은 일만 하는 하나의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들이 투쟁함으로서 자본가에게 ‘우리는 너희를 위한 생산을 중단 하겠다’라고 외침으로서 자본은 그들에게 부당한 통제와 관리를 할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써 노동자들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당당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게 된다. 투쟁하기 전에는 시키는 대로 일을 하고, 작업량을 늘려도 뭐라 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에 대해 요구하고, 라인별, 위치별로 자신의 처지에 대해 토론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한 논의를 하게 된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이해를 위해 가치를 생산해내는 하나의 기계로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는 인간으로서 다시금 스스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처음의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사의 고용주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스스로에 대해 발견하게 되면 될수록 자신의 적이 고용주만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인간임을 선언한 노동자들에게 손배가압류와 수배령을 때리는 경찰· 사법권력, 자신들의 너무나도 당연한 요구에 대해 ‘이기주의’라고 호도하는 언론과 정부. 그들을 보면서 노동자들은 진정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만인을 위한 법률이 과연 어떤 만인을 위한-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법률인지를 명확히 알게 되고, 이에 맞서서 투쟁하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파업하기 전에는 자기 혼자 공장 내에서 일하는 것을 신경 쓰기만 바빴던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서 자신의 옆 공장, 주변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알게 되고, 노동자들의 처지는 비슷비슷하다는 것. 전체 노동자가 단결해서 서로의 사안에 연대하여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적은 자신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전체 자본가 계급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를 통해서 너무나 당연하지만 너무나 공허해보이기도 하는 노동자는 하나다는 구호는 그들의 투쟁 속에서 진리이자, 진실로서 확인이 된다.

  그것만 배우겠는가? 자신의 투쟁에 연대해 오는 단체. 자신의 투쟁에 대해서 입장을 내오는 단체에 대해서 노동자들은 누가 우리의 편이고, 누가 아닌지를 명확히 알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움직이고 있음을, 노동자계급의 세상의 주인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파업을 통해서 명확해진 사실이 이전에는 어두운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는 것. 드러난 이상 투쟁을 통해서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내용에서 명확해 지는 것은 다음과 같다. 자사의 문제를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의 문제로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하는 파업. 자본가를 넘어 정권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댈 수 있게 하는 파업에 대해서 자사의 고용주뿐만이 아니라 정권 역시 억압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정부는 귀족노동자니 집단이기주의니 치졸하기 그지 없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그들의 투쟁을 막으려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노동자들은 이것에 굴종하려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를 통해 한줌도 안되는 자본가와 정부가 결국 한 몸이고 비슷한 족속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이 배우게 되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주체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주체라는 것. 그리고 한줌도 안 되는 자본과 정권은 한패이고, 자신들의 적이라는 것을 명확히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파업에 대해서 옛 러시아의 성인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 이것이 파업을 전쟁의 학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파업은 전체인민, 노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정부 관리들의 멍에와 자본의 멍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그들의 적에 대해 전투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이다”2)


보충수업


  누가 누구의 편이고, 누가 적인지가 명확해지는 상황에서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부분이 더 남아있다. 노동계급이 전체 자본가와 싸워야 하고 정권과도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파업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파업을 통해서 노동자들에게 학교가 되기는 하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그들의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것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꾸는 주체인 노동자계급이 농민의 문제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것인가는 파업을 통해서 배우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겠는가? 보충수업. 노동자계급의 눈으로 전체 세상을 볼 수 있는 보충수업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전체 노동계급이 단결하고 세상을 변혁할 수 있는 의식을 획득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하나의 소중한 학교임은 틀림이 없다. 다만, 그/녀들이 다시는 노예로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그/녀들이 다시는 파업을 하지 않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파업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변혁적인-노동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입장을 가질 수 있도록 그들에게 선전· 선동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다.

  우리는 파업이 “전쟁의 학교”이지 전쟁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 파업은 단지 투쟁 수단의 하나이며, 단지 노동계급운동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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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V.I.Lenin, 파업에 관하여


 

2) 같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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