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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

발제 1.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에서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있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땅에 당당히 발을 디디고 저렇게 활짝 웃으며 사진까지 찍었으니 국가보안법 제 6조, 제 8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제 6조(잠입, 탈출)


(1)국가의 존위,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 단체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으로부터 잠입하거나 그 지역으로 탈출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제 8조(회합, 통신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정을 알면서 반국가단체의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와 회합, 통신 기타의 방법으로 연락을 한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아니 반국가단체에 잠입한 녀석이 우두머리 괴수의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마치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듯이 기뻐하고 있다니... 그런데 이 당시 KBS, MBC를 비롯한 방송사들은 물론 주요 일간지에서도 1면에 이 장면을 보도하였다. 그리고 네이버, 엠파스를 검색해도 이 사진은 수십 개씩 나온다. 이들도 모조리 국가보안법 제 7조에 의거하여 징역이다. 그러고 보니 김대중 대통령은 또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손을 맞잡고 높이 치켜 올리는 것이야 말로 상대방에 대한 렬렬한 호의 아니겠는가! 



제 7조 (찬양, 고무 등)


(1)국가의 존립, 안전이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알면서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그 지령을 받은 자의 활동을 찬양, 고무, 선전, 또는 이에 동조하거나 국가변란을 선전, 선동한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자, 이 사진 한 장을 통해서 우리는 국가보안법이 얼마나 바보 같은 법인지 알 수 있었다. 토론회에 참여하신 여러분, 그런데 여러분들 또한 국가보안법을 위반하였다.




제 10조 (불고지)


제 3조, 제 4조, 제 5조 제 1항, 제 3항(제 1항의 미수범에 하한다.)제 4항의 되를 범한자라는 정을 알면서 수사기관 또는 정보기관에 고지하지 아니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본범과 친족관계가 있을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한다.






  ‘자유민주주의’마저도 보장해주지 않는 국가보안법.




 「저의 입국 이후로부터 시작된 <국가보안법>을 둘러싼 뜨거운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 법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자기 최면제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저는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이 법에 의해서 지켜질 수 있다는 <자유민주주의>가 바로 이 법에 의하여 무자비하게 훼손당하고 있다는  모순조차 바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자기 최면제입니다.」


-<송두율 교수 항소심 최후 진술서>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키는 마지막 안전장치인 국보법을 폐지하는 것은 저의 모든 것을 걸고 막아내겠습니다”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국가보안법의 역사를 돌아보면 이 법이 계속해서 전제로 붙여대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마저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상․양심의 자유, 학문․예술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집회 결사의 자유 등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본적인 권리마저도 전혀 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통해서 이 법이 얼마나 어이가 없는 지 알아보았지만, 실상 국가보안법이 가져온  희생은 상당히 심각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메이데이에 참여하면서 만든 자료집을 소지하였다는 죄, 교보문고에서도 판매중인 ‘신좌파의 상상력’이라는 책을 소지하였다는 죄. 일가친척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의 혐의를 신고하지 않았다는 죄. 심지어는 ‘○○나이트 앞에서 김정일을 찾아주세요.’라는 명함을 돌린 죄. 국가보안법에 자유와 민주는 없다. 그렇다면 국가보안법은 누구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가?


  국가보안법의 모법은 일제의 치안유지법이다. 일제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저항을 무마하려는 법이었다는 것은 안 봐도 뻔하다. 국가보안법은 이런 모법을 따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승만 정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면서 132개 정당과 사회단체를 해산시키고, 군인 8-9천명을 처벌하였다. 해방공간에서 국민의 절대다수가 좌익계열을 지지하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은 자신의 정권을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해서 좌익세력을 청소했다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반공법’과 ‘데모규제법’을 제정하려다가 거센 저항에 부딪혀 이루지 못한 채, 5.16 군사쿠데타를 맞았다. 그 이후에도 국가보안법이 쓰인 곳은 동일하다. 박정희 정권은 더 나아가서 반공법을 제정하고 국가보안법에 대한 처벌을 사형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계속되는 군사정권이건 문민정부건 간에 노동조합 하나 건설하는 것도 국가보안법을 적용시켜 처벌하였다. 국가를 보안하기 위해서.  


  개정과 개정을 거듭하고, 폐지를 하네 마네 말은 많았지만, 그리고 지금도 많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이 법이 노동자민중의 저항으로부터 자본주의를 지켜내기기 위한 법이라는 사실이다. 노동조합을 건설하면 국가를 전복시키려고 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계급의 사상이나 문학을 담은 책, 예술작품을 판매하거나 전시하였을 때에는 불온사상을 전파한다고 잡아넣고,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투쟁하려고 할 때에도 잡아넣었다. 그것은 70년대에 다시 남한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되살아났을 때에도, 80년에 광주민중항쟁이 불같이 타올랐을 때에도, 87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노동해방’을 외치던 때에도, 그리고 지금 현재에도 그러하다. 이는 국가보안법 철폐를 외쳤던 김대중, 노무현과 같은 ‘자유주의자’들도 대통령이 되자 국가보안법을 오히려 정권유지를 위해 이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박근혜 같은 파쇼세력이나 노무현 같은 자유주의세력이 아무리 박 터지게 싸워도 자본주의를 유지하려는 그 본색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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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소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관점

참고자료: 소부르주아 운동에 대한 맑스와 레닌의 관점


  1. 맑스


 [1] 맑스는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에 대립하고 있는 계급들 중에서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계급들은 대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쇠퇴하고 몰락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대공업의 가장 고유한 산물이다. 중간 신분들, 즉 소공업가, 소상인, 수공업자 및 농민, 이들 모두는 중간 신분으로서의 자기의 존립을 몰락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하여 부르주아지와 투쟁한다. 따라서 그들은 혁명적이지 않고 보수적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반동적이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려고 한다. 그들이 혁명적인라면 그들이 그들에게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행을 목도하는 한에서인데, [이때] 그들은 그들의 현재의 이익이 아니라 그들의 미래의 이익을 옹호하며, 그리하여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서기 위하여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한다.” (칼 맑스, 「공산주의당 선언」, 『저작 선집』1권, 410쪽)


  [2] 당장의 현실에서는 노동자건 농민이건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에 철저하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배 계급의 사상들은 어떠한 시대에도 지배적인 사상들”인 것이다. 그런데도, 왜 하필 노동자 계급만이 혁명적인 계급으로 될 수 있는가? 이것은 맑스주의가 확고하게 유물론의 토대에 서 있기 때문이다. 모든 계급은 자신들의 계급적 처지를 자각함으로써 정치적 실천에 나서게 된다. “의식은 결코 의식된 존재 이외의 어떤 것일 수 없으며, 인간들의 존재는 그들의 현실적 생활 과정”이다.3) 자본주의의 혁명적 철폐를 자신의 계급적 이해로 가지는 계급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밖에는 없다. 또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노동자 계급에게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전복시킬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을 쥐어준다.


  “대공업은 서로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을 한 장소에 집결시킨다. 경쟁이 이해 관계에 따라 그들을 갈라 놓는다. 그러나 임금의 유지라는, 고용주에 대항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공동의 이해가 그들을 저항, 곧 단결이라는 하나의 동일한 사상으로 결집시킨다. …

  경제적 조건들은 먼저 그 나라의 대중을 노동자들로 바꾸어 놓았다. 자본의 지배는 이 대중에게 하나의 공동의 지위, 공동의 이해를 만들어 주었다. 이리하여 이 대중은 자본에 대해서는 이미 하나의 계급이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직 그렇지 않다. 우리가 단지 그 몇몇 국면들만을 지적했던 투쟁 속에서 이 대중은 결합하고 자신을 대자적 계급으로 구성한다. 대중이 옹호하는 이해는 계급의 이해가 된다. 그런데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은 정치 투쟁이다.” (칼 맑스, 「철학의 빈곤」, 『저작 선집』1권, 294쪽)


  [3] 반면 소부르주아의 경우에는 끊임없이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 동요할 수밖에 없다. 그들 계급의 본질 자체가 소‘자본가’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지만, 한편으로는 소유욕을 포기할 수 없는 그들, 즉 “소부르주아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프루동 씨가 더더욱 이해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들의 물질적 생산성에 조응하여 사회적 관계들을 생산하는 바로 그 인간들이 또한 이념들, 범주들, 즉 바로 그러한 사회적 관계들의 추상적, 이념적 표현을 생산해 낸다는 것입니다. … 프루동 씨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부르주아지의 철학자, 경제학자입니다. 소부르주아는 발전된 사회에서는 자기 자신의 지위로 말미암아 부득이하게 한편으로는 사회주의자가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학자가 됩니다. 즉 소부르주아는 대부르주아지의 화려함에 현혹되고 인민의 고통에 공감합니다. 소부르주아는 부르주아인 동시에 인민입니다. 그는 중용과는 구별된다고 자부하는 진정한 평형을 발견했다고, 편파적이지 않다고 내심 우쭐댑니다. 이와 같은 소부르주아는 모순을 신격화합니다. 왜냐하면 모순이 그의 존재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 자신은 실행에 옮겨진 사회적 모순에 지나지 않습니다.” (「맑스가 빠리의 파벨 바실리예비치 안넨코프에게」, 『저작 선집』1권, 588쪽)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사회 전체를 변혁할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으며, 사회 상태가 변화되어 현존 사회가 가능한 한 자기들이 견딜 만하고 살기 편하게 되는 것을 갈망한다. … 노동자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들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임금 노동자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다만 이들 노동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고 한층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기를 이 민주주의적 소부르주아들은 희망한다. … 요컨대, 그들은 많건 적건 은폐된 자선으로 노동자들을 매수하려 하고, 노동자들의 처지를 일시적으로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그들의 혁명적 힘을 파괴하려 한다.” (맑스/엥겔스, 「1850년 3월의 호소」, 『저작 선집』2권, 118쪽)


  [4] 그렇다면 맑스는 소부르주아 계급의 운동에 대해서 무조건 배척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는 “(노동자 계급에) 대하여 다른 모든 계급들은 하나의 반동적 대중일 뿐이다”라고 주장한 라쌀레를 격렬히 비판하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몰락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는 소부르주아 계급을 노동자 계급이 획득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여전히 봉건제와의 투쟁이 완료되지 않았던 맑스의 시대에서, 노동자 계급은 민주주의 투쟁에서 소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함으로써 그것을 현실화 할 수 있었다. 물론 맑스는 이 과정에서 노동자 계급의 독자성을 견결히 지킬 것을 요구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비해 혁명적인 것은 대공업의 기반 위에서 성장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부르주아지가 영구화 하려고 시도하는 자본주의적 성격을 생산에서 벗겨 내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언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덧붙어 있다: “중간 신분들은 … 자신들에게 임박한 프롤레타리아트로의 이행을 목도하여 … 혁명적으로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간 신분들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더구나 봉건 영주들과 함께, 노동자 계급에 대하여 “하나의 반동적 대중을 이룰 뿐”이라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맑스, 「고타 강령 초안 비판」, 『저작 선집』4권, 379쪽)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당파에 대한 혁명적 노동자 당의 관계는 다음과 같다 : 혁명적 노동자 당은 자신이 전복하고자 하는 분파에 대항할 때에는 이들 민주주의 당파와 공동 보조를 취한다 ; 이들 민주주의 당파가 자기 자신을 위하여 발걸음을 멈추고자 할 경우에는 언제나 이들 민주주의 당파에 반대한다.” (맑스/엥겔스, 「1850년 3월의 호소」, 『저작 선집』2권, 118쪽)


  “공산주의자들은 어디서나, 현존의 사회 정치 상태를 반대하는 모든 혁명 운동을 지지한다. 이 모든 운동들 속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그것이 더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덜 발전한 형태를 띠고 있든 소유 문제를 운동의 기본 문제로 내세운다.”  (칼 맑스, 「공산주의당 선언」, 『저작 선집』1권, 443쪽)



  2. 레닌


  노동자 계급을 변혁의 주체로 정립해 낸 맑스주의의 핵심적 사상은 레닌에 의해 계승되며 또한 현실화 된다. 짜르 전제 하의 후진 농업국이었던 러시아의 상황은 노동자 계급이 농민들을 획득해야 함을 절박한 실천적 과제로 제기하고 있었다.


  [1] 먼저 레닌의 당 강령 논의 자료를 통해, 그가 맑스주의의 정수를 누구보다도 뛰어나게 이해하고 있음을 확인해 보자.


   “모든 소생산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특수한 계급을 이루며, 비록 그들이 수천가지 끈과 매개적 단계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연결되어 있을지라도 역시 특수한 계급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우리 자신과 다른 모든 사람들 사이에 경계선을 긋고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을 배타적으로 추출하고, 오직 그런 다음에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두를 해방시킬 것이고 모두에게 호소하며 모두를 초청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국제 사회 민주주의는 피착취 근로대중들의 해방운동의 선두에 선다…’ 결코 아니다. 국제 사회민주주의는 오직 노동계급만의 오직 노동계급 운동만의 선두에 서며, 만일 이 계급에 다른 분자들이 참여한다면, 이들은 다만 분자들이지 계급은 아니다. 또한 그들은 오직 ‘그들 자신의 입장을 포기할’ 때에만 완전하게 절대적으로 이쪽 편이 된다.”

  “프롤레타리아트 이외의 ‘피착취 근로대중들(주로 소생산자)’의 다른 부분은 부르주아지에 대한 투쟁에서 오직 부분적으로 혁명적이다.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에 가담하기 위하여’ 그들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입장에 설’(『공산당 선언』)때 그들은 혁명적이다.”

  “‘독재’의 개념이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외부의 지지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과 서로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만일 우리가 정말 적극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그들의 혁명,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성취할 때에 소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지할 것이라고 인정한다면, ‘독재’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다면 압도적인 다수가 완전히 우리를 지지하게 되어 독재가 없어도 잘되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진실로 혁명적인 계급이라는 『공산당 선언』의 테제와 가장 긴밀하고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다.” (레닌, 「RSDLP 강령의 준비자료」, 『레닌 저작집』2-1, 전진출판사)


  [2] 이러한 관점 아래 레닌은 러시아의 공업 도시에서 형성되고 있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을 주목한다. 대공업의 급속한 발전과 더불어 형성된 그들이야말로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철폐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이다.


  “강령은 먼저 대공장들의 급속한 발전을 다룬다. 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낡은 생활조건, 특히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을 완전히 변화시키는 현대 러시아의 요체이기 때문이다. …

  … 지금 강령이 기술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낡은 생활방식의 변화이다. 강령은 대공장들이 소수공업자와 농민들을 파산시켜 그들을 임노동자로 전환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소규모생산은 모든 곳에서 대규모생산으로 대체되고 있으며, 이러한 대규모생산에서 노동자대중들은 단지 자본가의 고용인일 뿐이다. …

  … 변화는 소규모생산이 대규모생산으로 대체됨에 따라 생산이 많이 개량된다는 사실에 있다. … 공동노동은 개인노동보다 훨씬 더 효과적(생산적)이며, 훨씬 더 쉽고 빨리 상품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개량은 오직 자본가들에게만 향유된다. …

  대자본에 직면한 지금, 조직은 노동자들에 필연적이다. … 1) 일년 내내 규칙적인 작업을 요구하는 기계제 생산을 도입한 대공장은 노동자와 토지 및 그 자신의 농장 사이의 연결을 완전히 단절하여, 그를 절대적인 프롤레타리아트로 만든다. … 2) 게다가, 수십만 노동자들의 공동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필요사항을 공동으로 토론하고, 공동행동을 취하는데 익숙하게 한다. … 3)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이 공장에서 저 공장으로 옮겨 다니면서 다른 공장의 조건과 관행을 비교하는데 익숙하게 되어, 모든 공장에서 착취의 동일한 성격을 확인하고 자본가와 충돌했던 다른 노동자들의 경험을 획득하고,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고양할 수 있게 된다.  …

  … 노동자들은 이제 각각의 고립된 공장의 개별적 소유자와 부딪히는 대신에, 전체 자본가계급과 그들을 지지하는 정부와 부딪히게 된다. 전체 자본가계급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항하는 투쟁을 수행한다. … 따라서 전체 노동계급의 공동행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된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고립적인 반란에서 전체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성장한다. 고용주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계급투쟁으로 전화한다. … 또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역시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 공동행동을 필요로 하며, 그 목적을 위해 국가기구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 지금 대공장이 최고로 발전시킨 것은 현대사회의 근저에 있는 임노동의 착취이다. 모든 산업의 모든 자본가들이 사용하여, 러시아 노동계급 인구의 전체대중이 고통받게 하는 모든 착취방법들은 공장에서 집중·강화되며, 정규적 지배를 정당화하며 노동자들의 노동과 생활의 모든 측면에서 확산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자본가가 노동자의 피땀을 짜내는 전체적인 과정과 체계를 만들어낸다. …

  이 모든 예들을 통해서 공장은 노동자의 착취를 강화하고, 이런 착취를 보편화하며, 그것을 전체적 “체계”로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노동자는 억압자가 어느 하나의 자본가가 아니라 전체 자본가계급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착취체계는 모든 공장에서 똑같기 때문이다. …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자본의 노동착취를 지향하는 사회체제 전체를 다루어야 한다. … 따라서 고용주에 대항한 공장노동자들의 투쟁은 불가피하게 전체 자본가계급에 대한 투쟁, 자본의 노동착취에 기초한 전체 사회질서에 대한 투쟁으로 전화한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적 중요성을 획득하고, 타인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모든 계급에 대항하는 모든 근로인민의 투쟁으로 전화되는 이유이다.” (레닌, 「사회민주주의당의 강령 초안과 해설」,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3] 러시아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드시 다수 농민 대중을 획득해야지만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이라는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 속에 당면 활동의 집중점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활동의 역량을 대공장에서의 투쟁에 우선적으로 투여해야 한다. 그로써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강고해진다면 기회주의적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는 소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의 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또 주요하게 공장, 도시 노동자들을 지향한다.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는 자신의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적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잘 발달되어 있고, 또 나라의 정치적 중심지에서 그 숫자나 집중도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산업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활동을 집중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공장과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강고한 혁명조직을 창출하는 것이 사회민주주의가 직면해 있는 첫 번째의 가장 긴급한 임무이며, 오늘날 우리 자신이 이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힘을 공장 노동자들에게로 집중할 필요성을 인정하며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는 것을 반대하고 있지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와 노동계급의 다른 계층을 무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자신의 힘을 수공업자나 농촌 노동자들에게 쏟는 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을 무시할 의도는 전혀 없다. … 따라서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편협해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근로 주민 대중을 방치하려 한다고 비난하는 자들은 지극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진 부분 가운데에서의 선동은(운동을 확장하는 것과 같이)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일깨우는 가장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도시의 노동자들 가운데로 사회주의와 계급투쟁의 사상을 불어 넣는다면, 이는 이 사상을 더 작고 더 여러 갈래로 흩어진 수로를 따라 쉬지않고 흐르게 할 것이다.”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투사로서 정치적 저항에서의 다른 모든 사회계급과 그룹들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 명시된 사회민주주의의 근본원칙에 의해 아주 명확하게 규정되어 있다. … 사회민주주의자는 공동의 적을 보다 빨리 파멸시키기 위해 이같은 지지를 보내지만, 이 일시적 동맹자들로부터는 그들 자신을 위한 그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그들에게 아무 것도 양보하지 않는다. … 사회민주주의자는 노동자들과 여러 저항세력과의 이런 혹은 저런 공동행동을 지적하면서도, 언제나 노동자들을 다른 세력과 구별하고 이 연대가 일시적이고 조건적임을 항상 강조하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그들의 오늘의 동맹자가 내일 그들 자신의 적일지도 모른다는 계급적 독자성을 항상 강조할 것이다. … 절대주의를 향한 모든 다른 계급들, 세력들 그리고 주민층의 적대감은 무조건적이지 않다. …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제도를 위한 전위투사일 수 있다.” (레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권력 장악을 주요한 목적으로 하는 독립적인 노동자 정당을 결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다른 계급들과 정당들을 “하나의 반동적 대중”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와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사회·정치적 생활에 참여해야 하며, 반동적인 계급들과 정당들에 반대하는 진보적인 계급들과 정당들을 지지해야 하고, 현존 체제에 대항하는 모든 혁명적 운동을 지지해야 하며, 모든 억압받는 민족과 인종, 모든 박해받는 종교, 권리를 박탈당한 성(性) 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레닌,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의 항의」, 『레닌 저작집』1, 전진출판사)



  ▶ 시간의 문제로 인하여 주로 맑스와 레닌의 글을 발췌 인용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상세한 논평을 진행하지 못한 점, 그리고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점은 우리 역시 대단히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글이 일정한 의미를 갖는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 운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위의 글을 스스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것 ; 그리고 맑스 레닌의 관점이 과연 오늘날에도 여전히 타당한가를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고민할 수 있으리라는 것 ; 운동이 주관적 의지로써가 아니라 오로지 엄밀하게 고찰된 과학적 인식을 통해서만 실천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국 혁명주의적 이론과 기회주의적 이론을 분별 정립하는 것으로밖에 귀결되지 않는다는 것 ; 그러한 판단을 가져가는 과정에서 위의 글이 분명한 자극이 될 수 있으리라는 것.

  아울러 노동해방학생연대의 입장을 밝히자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맑스와 레닌의 정치 이론이 변증법적 유물론의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 있다고 확신하며, 그것의 정당성은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수차례의 역사적 경험에서 되풀이되어 입증되었다고 판단한다. 때문에 우리는 오늘날 맑스와 레닌의 이론을 속류화 하며 왜곡하는 갖가지 기회주의적 사상 ― 민족주의, 관념론, 엘리트적 무정부주의 등등 ― 에 가차 없이 투쟁해 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덧붙이도록 하겠다. 언제부터인가 운동 진영에서는 건강한 논쟁의 기풍이 사라지고 흑색선전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비방이 난무하게 되었다. 그 중에 하나는, 우리가 맑스와 레닌의 제자임을 분명하게 공인한다는 것으로 인해 ‘교조주의자’로 불리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단,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이 맑스주의를 ‘교조주의’적으로 이해할 만큼의 이론적 역량도 갖추고 있지 못함을 확인해 둔다. 그렇다면 맹목적인 써클주의적 활동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운동의 대의를 위해 자신의 정치를 엄밀히 정립해 나가는 과정이 우선이라는 점을 동지적으로 충고하고 싶다. 다음으로,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우리는 맑스 레닌의 정치 이론을 옹호하고 있으며 이것에 대하여 논리적 근거를 갖춘 비판이 제기된다면 언제라도 성심성의껏 비판에 답변할 용의가 있음을 밝혀 둔다. 그리고 논쟁의 과정은, 정치적 타당성은 물론이며 논쟁에 임하는 태도까지도 대중이 판단할 수 있도록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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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요즘 들어 이러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ABC를 멋대로 왜곡하면서, 자신들의 관념론으로의 이탈을 합리화하고자 하는 치들이 있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이러한 관점은 ‘경제 결정론’이며 이것은 ‘맑스를 왜곡하여 이해한’ 엥겔스에게서부터 시작된 경향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왜곡인가를 엥겔스 스스로로 하여금 반박하게끔 하자.

   “유물론적 역사 파악에 따르면, 역사에서 종국적인 결정적 계기는 현실적 생활의 생산과 재생산입니다. 맑스도 나도 결코 이 이상의 것을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명제를 경제적 계기가 유일한 결정적 계기라고 왜곡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명제를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추상적이고 허무 맹랑한 공문구로 바꾸어 버리는 것입니다. 경제적 처지는 토대입니다. 그러나 상부 구조의 다양한 계기들 - 계급 투쟁의 정치적 형태와 계급 투쟁의 결과들 - 전투가 끝난 후 승리한 계급이 확립한 헌법 등등 - 법 형태, 그리고 또 이 모든 현실적 투쟁이 거기에 참가한 사람들의 머리에 반영된 것으로서의 정치적, 법률적, 철학적 이론, 종교적 견해와 이 견해의 교의 체계로의 가일층의 발전 등도 역사적 투쟁의 진행 과정에 영향을 주며 많은 경우에 주로 이 투쟁의 형태를 결정합니다. 이 모든 계기들은 상호 작용을 하며, 이 상호 작용 속에서 결국 경제적 운동은 무한히 많은 우연들(즉, 그 내적 상호 연관이 너무 멀거나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상호 연관이 없다고 간주하고 지나쳐 버릴 가능성이 있는 사물들과 사건들)을 통해서 필연적인 것으로서 자신을 관철해 갑니다.” (「엥겔스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요제프 블로흐에게」, 『저작 선집』6권, 5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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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농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실천적 방향은 무엇인가

발제 3.  농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실천적 방향은 무엇인가


- 양갱



1. ‘민족농업사수하자!!’에 대해서


 ‘민족농업 사수하자!!’라는 슬로건으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솔직히 이러한 슬로건이 대다수다. 전농이라는 단체의 성격과 현재 남한 운동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세력의 성격, 그리고 농업이라는 토지와 연결된 문제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이 안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슬로건은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는 이 슬로건이 그다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민족모순을 앞세워서 자본주의 근간을 이루는 계급모순을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농업개방의 문제도 자본주의의 항상적 세계화의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를 반대하는 근본적 투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족이라는 개념은 모순의 근거를 자본주의가 아닌 민족간의 지배, 피지배관계로 돌려버린다. 결국 근원을 회피하는 투쟁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민족이라는 관점에서 자국의 자본가를 옹호하는 이론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철저히 계급모순을 지워버린다.


 민족이라는 관점은 자본주의를 설명하지 못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식민지가 존재하던 시기에는 민족해방이라는 운동이 제국주의 모순 타파와 맞물리면서 계급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의 시기에서 민족해방운동은 자칫 우경화의 가능성이 높고, 그러한 부분으로 흘러들어간 부분이 많기 때문에 경계해야한다. 지금에 있어서 민족주의란, 자민족중심의 관점 말고는 도출해내는 것이 없다. 이는 체제변혁에서 필수인 노동자국제주의 관점을 흐리게 하고, 민중들의 우경화를 도울 뿐이다. 미국은 무조건 못된 놈이고, 한국은 피해자라는 망상은 떨쳐야 한다. 착취하는 자는 자본가이고, 억압받는 자는 노동자민중들이다.


 그리고 민족주의의 다른 오류는 ‘일국에서의 농업을 보호하자’라는 요구를 함으로써 체제변혁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에 있다. 자본주의란 것은 지난 봉건적 잔재를 쓸어버리고 생산력을 증대시켰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평가된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 민중의 삶이 피폐하게 되었지만 지난 체제보다 상대적인 긍정성이 포함된다는 얘기이다. 민족주의적 슬로건은 그것을 무시하고 있다. 그저 농민의 이해를 바탕으로 무조건적으로 그들에게 맞추어가고 있을 뿐이다. 솔직히 값싼 농산물이 들어왔을 경우 농민을 제외한 사람들은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마트와 같은 대형할인점이 동네에 들어섰을 경우 구멍가게 주인들이 결사반대를 하더라도 우리와는 상관없다는 것과 똑같은 논리이다. 생산력의 발달에 의한 진보를 막을 이유는 없다. 그러나 진보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산업재편의 무정부성은 이러한 과정을 폭력적으로 진행하게 한다. 우리는 이러한 지점에서 농민의 이해를 바탕으로 운동을 펼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위기에 몰아넣을 수  밖에 없는 현 체제-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반대로 말해야 한다. 그것이 자본의 무정부적 세계화에 따른 피해를 없애는 방법이다.



2. ‘쌀 개방을 막고 식량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민중에게로’에 대해서


 이 슬로건이 민족주의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 슬로건을 외치는 사람들은, 지금의 농민의 상황이 신자유주의적 모순에 있다고 보고, 억압받는 민중들에게 이를 거부하고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식량주권’2)의 개념은 신자유주의가 초국적자본의 이익만을 향상시켰다고 말하면서, 빈국과 민중의 권리를 지켜내자는 것이다. 이 슬로건에서 말하는 민중의 식량주권에서 우리는 농민의 소유욕을 인정하고, 그것을 초국적 자본으로부터 지켜내자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것이 WTO를 격파하고 민중에 대한 억압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 구호의 모호성은 농민, 민중, 국가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극명히 보여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윤을 극대화해야 하는 부르주아의 집행기구인 국가를 저항의 주체로 올려놓았다는 점은 그들이 자본주의 모순 철폐에 관심이 있는지 의문이 가는 대목이다. 그리고 농민과 민중의 소유욕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이해를 지켜 내려는 모습은 마치 WTO의 위기가 자본주의 모순인 항상적 세계화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책의 모순으로 생겨난다는 것처럼 보여주고 있다. WTO를 책동하는 자본주의 구조 반대의 투쟁이 아니라, WTO정책 반대로 내걸어버리는 정치의 후퇴인 것이다.


 그들의 정치는 민중에 기반을 둔다고 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구조 속에서 모든 민중들은 예와 달리 억압받고 있고, 여기에 기반한 운동을 펼쳐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은 자본주의 시대의 특징이다. 자본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 농민들은 끊임없이 임노동자로 전락하거나, 자신의 땅을 빼앗기게 되었다. 여성들은 가사노동, 저임금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고, 장애인들은 자본의 이윤추구 과정에서 언제나 배제되어 있는 집단이었다. 신자유주의만의 특징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은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에서 타파될 수 있는 것이다.


 민중은 단일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계층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억압받는 민중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계급은 상황에 따라서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농민, 여성, 장애인 등등등 무수한 민중들이 자본주의 시대에서 억압받는 것은 옳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들의 이해가 단일하게 자본주의 철폐라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노동자가 아니고서는 그들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거부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들의 운동은 자신 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자본주의 체제안의 운동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중들이 저항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민중들은 단일한 이해를 가지지 못한다고 하여도, 항상적으로 억압의 과정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들은 저항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의 올곧음을 지켜야 한다. 농민들은 농민의 소유에 기반한 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철폐해야한다는, 즉 자본주의를 철폐한다는 운동을 승인하고 그 운동에 복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때 비로소 농민은 저항의 일주체로서 체제 변혁 운동을 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여성, 장애인, 빈민 등등 모든 민중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3. 실천적 방안은 무엇인가?


 지금의 상황에서 농민들의 정치에 꽁무니 쫓아가기 식으로 부합하는 것은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태의 방향성을 실추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농민의 정치에서 목적의식적으로 결합하여 농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의 정치로서 세상을 함께 바꾸어 나가자고 말해야 한다. 앞에서도 계속해서 말했듯이 우리의 정치는 프롤레타리아의 정치가 되어 그것을 알려나가고, 현 체제를 무너뜨리는 운동을 해야 한다. 이번 주 토요일 두 곳에서 집회가 열린다. 농민대회와 학습지교사들의 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농민대회의 상황은 이경해씨 자결 1년 되는 날로서 운동하는 단위들이 모여서 WTO개방반대를 외치는 것으로 될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실천적으로 결합하여 프롤레타리아의 정치를 펼치는 것도 분명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활동의 집중의 면에서 우리는 후자의 집회에 참여할 것을 제안한다. 학습지 노동자들은 현재 떨어질 곳조차 없는 비정규직 특수고용노동자들이며, 이러한 노동탄압에 맞서 투쟁을 결의하고 있다. 현재와 같이 비정규직의 투쟁이 노동탄압에 의해 공격당하고, 이주노동자 투쟁 또한 절벽의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개방반대의 활동가들이 모여서 압력을 주는 집회보다는, 노동자대중이 직접 나서서 참여하는 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대중운동이 더욱 유의미하고 효율적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지금은 엄혹한 현실이다.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은 무수한 노동탄압과 개량주의의 유혹 속에서 풍전등화의 운명이다. 우리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수호를 위해 더욱 강고한 연대와 활동을 펼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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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식량주권이란 곧 초국적 자본과 농산물 수출국들의 식량독점과 침탈에 맞서 농민과 민중, 각 나라가 자신들의 농업과 식량정책을 규정할 수 있는 권리, 그리고 생산, 토지, 종자, 물 등을 생산주체인 농민들이 조절 통제할 수 있는 권리, 나아가 안전한 식량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와 자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 생산과 공급을 통제할 수 있는 각 나라의 권리를 포함하는 '민중의 식량주권'을 의미한다.” -파병철회! 노무현 퇴진! 전학투위 선봉대 자료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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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본 농민 문제

발제 2.  노동계급적 관점에서 본 농민 문제


-녹테잎


  반세계화 투쟁이 불붙듯이 일어나고 있다. 특히나 쌀 개방과 관련한 농민들의 투쟁은 교육개방, 스크린 쿼터와 함께 주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작년 이경해 열사 분신 일주년을 맞는 농민대회가 9월 10일로 예정되어 있고, 이 투쟁에 많은 농민들이나 농민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우들이 참여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투쟁에 매스컴과 정부 역시 주목할 것이라 생각이 든다.

  학생들은 올 여름 농활을 갔다 오면서 많은 농민들을 만났을 것이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에 대해 많이 경험하고 왔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이 현 상황에 대해서는 농활을 다녀온 분들이 더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와 함께 많은 고민을 하고 오셨으리라 생각된다. 농민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어떠한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것일까? 전국농민회 총연맹에서 이야기 하는 “우리쌀 지키기 식량주권 수호”를 외쳐야 하는가? 과연 농민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방법은 무엇이 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이에 대해 노동계급의 입장을 중심으로 농업문제, 농민문제가 현 생산양식에서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고, 농민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우들이 어떻게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원칙적인 입장을 이야기 해보려 한다.

  노동 계급이라니까 싫어하는 학우들도 있을 듯싶다. “또 노동자야? 지겹지도 않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농민이 일을 하니까 노동자라는 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사회를 계급적으로 바라본 맑스의 입장이다. 맑스를 이야기 하려는 이유는 맑스가 했던 현 체제에 대한 분석이 아직까지도 변하지 않았고, 그가 제시한 길이 아직도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데 있어서 맑스의 중요한 핵심은 현 시기가 계급 사회라는 지점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유명한 문구를 다들 알고 있을 것이다. 이것의 의미하는 것은 단순히 현 자본주의 시기에서 노동자들이 수가 많고, 그들이 자본가랑 사이가 않좋다는 것들이 아닐 것이다. 자본주의가 봉건시대와는 다르게 ‘임노동과 자본’, 즉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채 자신의 노동을 팔아 생활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생산된 물건을 소유하는 자본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관계의 모순이 전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면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등이 자본주의가 계급투쟁의 시대임을 증명한다. 자본주의의 구성이나 현 시기에 있어서 계급모순이 유효한가 등의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하지 않겠다.

  맑스는 변혁의 주체를 노동자 계급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그들이 변혁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 그들의 조건이 자본주의를 변혁할 수 있는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민은 계급이라 규정할 수 있는가? 농민은 어떤 존재인가? 우선 농민이라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농민들 중에는 다른 농민들을 고용해서 농사를 짓는 대토지 소유자인 농민도 있을 것이고, 조그만 땅을 지니고(혹은 그것을 임차해서 사용하거나) 그것으로 먹고사는 농민(소농)도 있다. 아마 마지막에 언급한 ‘소농’이 농민의 대부분을 차지 할 것이다. 대부분 농민의 특징은 자신이 ‘생산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주의가 구성되는 주요한 부분이 임노동과 자본 즉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의 등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반적인 농민은 계급으로 분리될 수 있는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그들을 맑스가 말한 계급의 범주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농민이 자본주의의 모순과 동떨어져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모든 민중이 그렇듯 농민도 자본주의 사회가 진행되면서 고통을 받는다. 물론 모든 농민이 그런 것은 아니다. 농민 내에 잘 잘 사는 농민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농민이 있다는 것은 농활을 갔다 와 본 학우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즉 땅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남의 땅을 빌려 근근이 먹고 사는 소농들도 있고, 소농들에 비해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는 중농/대농도 있다. 그리고 땅을 많이 소유해서 기업적 농업을 하는 대토지 농민도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이들의 실질적인 이해관계는 다르게 된다. 우선 대토지를 가지고 있는 농민들은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더욱 집적경영을 하게 되고, 그들의 이해관계는 자본가의 이해와 다르지 않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서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는 소농은 자신의 삶의 근거지를 잃게 된다. 아예 토지를 잃은 사람들은 농업노동자가 되거나 빈농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농민들은 산업예비군으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아 살아가는 노동자가 된다. 중농/대농 역시 대토지 소유 농민들과의 경쟁에서 소농으로 전락할 것이다. 여기서 제출하고자 하는 점은 원칙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특히 소농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정리 했다.

“우리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농이란,····이 소농은 소수공업자와 마찬가지로 노동자이지만, 자신의 노동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 프롤레타리아트와 구별된다 ; 요컨대 소농은 과거의 생산방식의 잔재이다.


“요컨대 우리의 소농은 과거의 생산 방식의 모든 유물과 마찬가지로 걷잡을 수 없이 몰락해가고 있다. 그들은 미래의 프롤레타리아이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다른 농민들 중에서 노동계급의 이해를 지지 할 수 있는 조건에 있는 농민은 누구일까? 바로 소농이나 빈농일 것이다. 대토지를 소유한 농민들의 이해는 자본가들의 이해와 거의 일치한다. 그렇기 때문에 엄밀하게 이야기 하면 부농, 대토지를 소유한 농민은 농업 자본가이고 이들의 이해는 노동자 계급과 일치 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에서 볼 때 소농은 노동자 계급과 함께 변혁을 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동맹군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생산수단을 보유하고 있는 소농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생산수단을 버리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농을 변혁의 동맹군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의 현시기적 이해를 수호하는 구호를 함께 외치면서 그들과 함께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단 시간 내에 그들을 획득하기 위해 사탕발림의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의 현 시기 요구사안에 그쳐 활동하는 것에 동의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 우리는 농민을 해방시키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형 집행을 유예해주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그들의 지금 외치는 요구 중 핵심은 “쌀 개방 반대” 일 것이다. 이 요구 자체만 살펴보자. 우리가 그들의 이해를 보호해 주는 것이 실질적인 대안이 될 수 있겠는가? 만약 농민들의 투쟁이 승리해 수입개방이 완전히 철회된다면 농민들은 번영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몇몇 대토지 농민들은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전하는 남한 내에서 농민들은 빈농과 부농(농민 노동자와 농민 자본가)로 나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결국 지금의 소농들은 농업자본가가 발달 할수록 그들과의 경쟁에서 밀려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국 그러한 미봉책으로는 어떠한 모순도 이겨내지 못한다. 진정으로 이 세상을 변혁하고 모순을 극복하려 한다면 그들의 지금 이해에 맞추는 요구사항이 아니라 그들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이야기 해야 할 것이다.

  소농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안은 과학적으로 농사를 짓는 집단적 대규모생산을 조직하고, 계획적인 생산을 하는 것일 뿐이다. 상식적으로 볼 때에도 대규모, 계획적인 생산이 더 효율적이고 더 많은 상품을 재배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엥겔스는 협동조합적 생산을 제시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농장을 협동 조합적 경영으로 통합할 것을 권고하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멸망에 대하여 어떠한 것도 행할 수 없는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에서는 임금 노동에 대한 착취가 점차로 제거될 것이며, 이 협동 조합적 경영은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의무를 갖는 전국적인 대규모 협동조합의 여러 부문들로 점차 전화되어 갈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안이 비현실적일 수 있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분석과 냉철한 현실인식에서 출발한다면 이것만이 농민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대안이다.

  여태까지 맑스주의에서 농민을 어떻게 분석하고 있는가. 그들이 변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농민 역시 자본주의에서 소수의 부농과 대다수의 빈농으로 나뉘어 질 수밖에 없고, 빈농과 소농은 산업예비군으로 농업노동자가 되던지, 공업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부농 즉 농업자본가들의 이해는 빈농과 소농의 이해와는 상이 할 수밖에 없고, 오히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적된 생산을 통해 이윤을 더 얻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연대하고 선동해야할 대상은 소농, 빈농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대안은 그들이 가진 토지에 대한 소유욕을 버리고 협동조합적 생산을 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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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 최바울 (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현 시기 남한 농업의 현황에 대하여 사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생각이다. 이것은 주로 윤수종의 〈한국 농업의 미래와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글에 의거할 것이다. 한편 글에는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하반기 농업 개방과 관련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신문 기사를 이용했음을 밝혀 둔다.

  다음으로 글의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남한 농업이 처해져 있는 현실을 맑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내려 한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맑스의 『자본』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가운데 전개될 것이다.


  Ⅰ. 남한 농업의 현황


  최근 농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농촌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상은 여전히 목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렇지 않다면,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수많은 창업 실패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워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이러한 정서는 남한 사회에서 일반적인데, 그 까닭은 남한 사회가 농업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격렬한 역사적 변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시기의 극심한 노동 착취 속에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비록 빈궁할 지라도 ‘인간’일 수 있었던 농촌 사회를 그리워하곤 했다. (실제로도 여전히 대다수의 귀향지는 농촌이다.) 언론 보도를 보라. 민주노총이 화염병을 던지면 잡아먹으려고 난리를 치지만,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에는 언제나 동정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사회적 풍토 아래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남한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적 정서는, 우리가 농업 문제를 과학적 시각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윤수종의 글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지점은, 농민들 간의 계급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1)


   “농촌 사회 관계는 특히 농민들 간의 계층분화를 들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보면, 전형적인 양극 분해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앞선 시기에 주로 중농으로 표준화되던 양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어쨌든 양극으로의 분화는 기계화에 따라 차지형 상층농이 등장하는 등 기계를 통한 대규모화가 가능해지면서 정치규모가 큰 상층이 등장하였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지 규모에 매이지 않는 시설농가, 축산농가 등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지원제도의 강화와 더불어 지원을 받은 농민들이 기계화와 시설화를 통해서 경제력을 집중하여 새로운 상농층으로 도약하고 그 반대쪽에는 다수의 침전층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농업 생산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로 현상하고 있다.


  “농업 생산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농업 생산 주체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농업 생산 조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위탁 영농회사와 영농조합법인, 다양한 생산실험(예를 들어 생명농업) 공동체들이 그것이다. … 일관 기계화가 가능한 기계 체계를 갖추고 회사형태를 갖춘 위탁 영농회사는 벼농사의 수위탁 작업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벼농사의 핵심적 작업집단으로서 부각되었다. … 다수의 영농조합이 소수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수의 구성원을 지닌 영농조합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것은 영농조합 내의 분화 현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출자규모로 볼 때에도 대다수의 영농조합은 소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부 대규모 투자를 하는 영농조합도 나타나고 있다.”


  농민층의 계급 분화, 그리고 그것과 변증법적 원인·결과로 맞물려 있는 생산 방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정부 역시 농정 정책의 초점을 상층농에 대한 지원으로 맞춰 나가고 있다. 1950년,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시행했던 소농 육성 정책은, 오늘날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계급 분화에 직면하면서 ‘농업 자본가’ 지원 정책으로 변모된 것이다. 농민 전체가 아닌 ‘경쟁력 있는 농민’에 대한 중점적 지원, 그로써 ‘경쟁력 없는 농민’에 대한 자연 도태가 정부의 농정 정책인 것이다. 솔직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노무현이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이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농업만 살아남는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가자. 여러 지원정책 중에서 경쟁력 없는 농업에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농촌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YS·DJ 정부가) 지키겠다고 잘못 공약한 것이다. 앞으로 시장기제에 의해 농업인구가 줄어든다는 점, 탈농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신뢰가 따르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하자.”

-  미제의 앞잡이 제프리 존스 회장과의 대담에서


  한 마디로 ‘살 놈은 살리고, 죽을 놈은 죽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이러한 말을 WTO 체제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인용한 통계자료는 85년부터 95년까지의 자료이다. 농민 간의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농촌 사회에서 계급 모순이 증대한 것은, 이른바 ‘세계화’가 매스컴을 온통 떠들썩하게 채웠던 것보다도 이전이다.

  따라서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농업개방 문제는 결코 새로운 모순이 ‘도입’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기존의 모순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확대·재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네 글자와만 관련이 있다. 물론 WTO 체제는 농촌 사회의 계급 모순을 가속화시킬 것임은 틀림없다. 노무현이 더 이상 YS·DJ와 같이 농촌을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은, 농촌 사회에서도 점차 소자본이 대자본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은 이전 시기에도 있어 왔으며, 다만 오늘날의 전면적인 농업 개방에 의하여 그것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전면적인 쌀 개방은 결코 농촌을 황폐화 시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독점 자본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식량 무기’로 인한 ‘국가 안보의 위협’이 실질적인 것으로 된다면, 남한의 부르주아들 역시 자신의 애국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의 애국심의 본질은 남한 사회에서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국심은 애국심이다). 그들은 ‘식량 주권의 수호’를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와 동떨어진 것으로 사고하고 있지 않다.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를 위해 400만 농민이 200만으로 줄어야 한다고,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발전된 농업 생산력을 200만 명의 목숨과 바꾸겠노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지만 말이다.


  Ⅱ.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을 맑스주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위에서 밝힌 대로, 이에 대하여 맑스의 불후의 명저 『자본』(김수행 역, 비봉출판사)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한 부분은 『1권 : 자본의 생산과정』 중 「7편 : 자본의 축적과정」과 「8편 : 이른바 시초축적」, 그리고 『2권 : 자본의 유통과정』 중 「1편 : 자본의 변태들과 그 순환」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의 부족으로 발제문이 완결되지 못했다. 굵은 글씨를 중심으로 짧게 구두로 발제하겠다.


  [1] 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 법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발전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서만 자본가는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열광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 ― 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 ― 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각 개별 자본가에게 강요한다. 경쟁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 …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대하는 것이다. …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이다!” (1권, 807쪽)


  [2] 자본의 축적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축적을 위해 필요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개별 상품 생산자들로 사회가 분업화 되는 것은 자본 축적의 전제이다. 즉, 남한의 소농 육성책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본축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따라서 또한 일정한 크기의 잉여가치]가 체화되어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한다.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면[또는 떨어지는 경우조차도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는 것보다 완만하게 떨어지는 한], 잉여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1권, 824쪽)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아래서만 노동의 분할 및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수단은 대규모 집적에 의해 절약될 수 있으며, 이미 물질적 성질로 보아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예컨대 기계체계 등]이 나올 수 있고,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되며, 생산과정이 과학의 기술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지배적인 제도가 상품생산이라면, 즉 생산수단이 개인의 소유이어서 수공업자가 고립해서 자립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든가, 또는 그에게 자립적 생산을 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한다고 하면, [위에서 말한 전제인] 대규모의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에 의해서만, 또는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전제가 된다.” (1권, 852쪽)


 [3] 자본의 축적에서 필요로 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의 끊임없는 발전이다. 또한 이것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축적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개별 자본은 크든 작든 생산수단의 집적이며, 그에 대응해 크거나 작은 노동자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으로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그리하여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 집적은 축적으로부터 직접 나오거나 또는 오히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것…. 축적은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에 대한 지휘의 집적의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사회적 총자본의 분열 또는 그 단편들의 상호배척은 그들 사이의 흡수에 의해 상쇄된다.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수단과 노동지휘의 단순한 집적[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된 자본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이며,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이며, 다수의 소자본을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흡수과정이 집적과정과 다른 점은, 흡수과정은 이미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는 자본들의 분배의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작용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 또는 축적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축적 및 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1권, 853쪽)


  [4] 위의 내용과 같이, 집중이란 대자본이 소자본을 격파하고 흡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밝힌 대로 대자본이 노동 생산성을 훨씬 빠르게 증대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농사짓는 캘리포니아 쌀을 기껏해야 경운기로 경작하는 남한의 쌀이 당해낼 수 없듯이 말이다.


  “이 자본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경쟁전은 상품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값이 싸지는 것은, 기타 조건이 같다면, 노동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생산성은 생산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에 따라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자본의 최소금액이 증대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그러한 생산분야로 몰려든다. 여기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는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1권, 854쪽)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되며, 또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광범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즉,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1권, 856쪽. 엥겔스의 주석.)


  [5]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임금노동에 의한 생산이 일반적으로 되자마자 상품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상품생산은 사회적 분업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데, 특정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상품은 끊임없이 전문화하고, 보완적인 생산과정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분할된다. … 상품생산의 물적 조건들은 점점 더 큰 범위로 여타의 상품생산자의 생산물로서[상품으로서] 개별 자본가와 직면하고 있다. 거기에 발맞추어 자본가는 점점 더 화폐자본가로 등장하게 되며, 그의 자본이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임금노동자 계급의 존재]을 만들어내는 동일한 사정이 모든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촉진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발달은 모든 이전의 생산형태[주로 생산자의 직접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처음에는 외관상으로는 생산방식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은 채 생산물의 판매를 주관심사로 삼는다. …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정착되자마자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의거하고 있거나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 의거하고 있는 상품생산의 모든 형태를 파괴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상품생산을 일반화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상품생산을 점차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킨다.” (2권, 43쪽)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향은 모든 생산을 가능한 한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는 주된 무기는 모든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유통과정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발달한 상품생산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인 것이다. 산업자본의 침입은 어디에서나 이 전환을 촉진하며 그와 함께 모든 직접적 생산자의 임금 노동자로의 전환도 촉진한다.” (2권, 128쪽)


 [6]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 법칙은, 결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 발생한 특수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생 시기에서부터 관철된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소생산자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은, 공상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동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계급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인류 역사의 ‘부정의 부정’을 완료해야 한다.


   “자본의 시초축적, 즉 자본의 역사적 발생은 결국 무엇으로 귀착되는가? 그것이 노예 및 농노를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것[즉 단순한 형태변화]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오직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즉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사적 소유의 해체]을 의미할 따름이다.

  …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토대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

  이 생산방식은 토지의 분할과 기타 생산수단의 분산을 전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수단의 집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각 생산과정 안의 협업과 분업, 자연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 사회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도 배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 및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운동할 때에만 적합하다. 이 생산방식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페쾨르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만인(萬人)의 범인화(凡人化)를 명령’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방식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가슴속에서는 이 생산방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생산방식은 철폐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철폐된다. 그것의 철폐, 즉 개인적이며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광범한 국민대중으로부터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러한 처참하고 가혹한 국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건과의 융합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타인노동[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 축출된다.

  이 변환이 낡은 사회를 깊이와 넓이에서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또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그리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노동이 더욱더 사회화 되는 것,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즉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더욱더 전환되는 것, 따라서 또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 -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즉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러한 집중[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 병행해 기타의 발전도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예컨대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따라서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등이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빈곤·억압·예속·타락·착취의 정도는 더욱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수가 계속 증가하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속박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1권, 1047쪽)


  첫 번째 발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바이다. 남한의 농업 생산이 점차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자본의 몰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본 발제의 결론이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이, ‘소자본의 몰락’ 과정은 너무나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다음의 발제에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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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앞서 윤수종은, 호당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의 75%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경우 ‘평균소득’이라는 개념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1조 7천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건희와 통장 잔고 0원을 자랑하는 나의 ‘평균 소득’은 8천 5백억원이지 않은가.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농업 인구가 대개 고령화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도시와의 평균 소득 비교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에 비해 문화적·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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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발제 3. 파병철회 운동을 위한 실천적 제안



반전운동의 상황과 노동자계급의 상태


  전쟁은 몇몇 정신 나간 사람들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관계가 가지는 모순에 의해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외치는 전쟁반대는 단순하게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외침과 같지 않다. 반전운동이 전쟁의 원인인 자본주의에 대한 철폐 투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다. 반전운동과 자본주의 철폐 투쟁이 하나로 이어지는 것은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거나,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지는 위치와 힘을 인정하는 세력이 반전운동을 주도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에 이렇다할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 않다. 현재 반전운동을 주도하는 세력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확대를 요구하는 시민운동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다. 그들에게 자본주의 철폐는 불가능하거나 먼 미래의 일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반전운동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한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인 저항을 진행하는 것에 머물고 있다.

  계속되는 정권과 자본의 공세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힘겨운 투쟁을 진행하고 있다. 그/녀들은 노동법에 보장된 기본적인 권리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계급이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의식적 각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탓도 있겠지만, 현장에서 부딪히는 사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더욱 큰 원인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자계급이 무조건 반전운동에 결합하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몽상일 뿐이다. 노동자계급에게 파병철회를 위해 거리로 나서자는 말은 현장에서의 생존권적 요구를 포기하라는 말과 다름없다. 반전운동과 현장투쟁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현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선택은 현장투쟁이다. 아니 현장투쟁마저 제대로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그/녀들의 선택은 교섭을 통한 실리 획득이다.



노동자계급의 입장에서 파병철회를 주장하자


  노동자계급의 이해에 기반한 반전운동을 펼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에게 전쟁과 자본주의가 가지는 연관에 대해 설명하고 왜 그/녀들이 반전운동에 나서는지를 알리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결합이 없는 상황에서 반전운동을 계급적인 시각으로 조직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에 직접 결합하면서 반전운동을 선동해야 한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반전운동은 거리에서의 촛불시위로 한정되고 있을 뿐, 현장으로 뛰어들지는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의 적극적인 선동을 통해 현장투쟁과 반전운동이 결합될 때 비로소 노동자계급은 반전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다. 그리고 평화주의와 민족주의로 경도되고 있는 반전운동이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 철폐투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대학에서 파병철회를 외치려는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선동을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당면한 임무는 학생들에게 전쟁의 의미를 설명하고 이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당연하게 대학에서 반전을 외치는 일은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바탕으로 진행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조에 있음을 이야기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과 함께 자본주의를 끝내는 투쟁을 진행해야 한다고 외쳐야 한다. 전쟁은 자본주의가 끝나지 않는 이상 계속 반복될 것이라는 것, 노동자계급만이 자본주의가 끝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학교 안에서, 그리고 집회 장소에서 꾸준하게 알려나가야 한다.

  이와 더불어 현재 노동자계급이 어떤 투쟁을 진행하고 있는 지를 알리고, 이 투쟁들을 반전운동과 접목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진행하는 투쟁은 반전운동과 다른 맥락이 아니며, 둘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반전시위에 단순한 시민으로 참여한 이들에게 노동자들이 벌이고 있는 투쟁을 알리고 이 투쟁들에 관심을 갖고 연대할 것을 호소하고, 그러한 연대가 반전운동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택시, 보건, 궤도연대 등 굵직한 투쟁들이 마무리되었지만,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산별노조이거나 산별의 형식을 취한 세 사업장 모두 조합원들의 요구를 묵살한 채 투쟁을 정리하였다. 노동조합이라는 신분마저 보장을 받지 못한 채, 공안탄압을 받고 있는 건설노조는 간부들의 구속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투쟁을 진행 중이다. 작년 3월 이후 전국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금속 대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조합은 아직까지도 회사로부터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에도 정부는 고용허가제 실시를 강행하려 하며, 대대적인 단속으로 이주노동자들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다. 이 투쟁들에 결합하는 속에서 전쟁의 계급적 성격을 명확하게 폭로하고, 반전운동이 어떠한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하는지 선동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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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발제 2. 전쟁에 대한 각 세력의 입장



혼돈의 그 이름. 파병 반대를 외치다.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에서 있는 파병 반대 집회에서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층위들이 결합하고 있는데, 각종 시민 단체 뿐 아니라, 학생운동 진영에서도 꾸준히 그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각각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만큼이나, 그 개입방식도 확연히 구분되고, 내밀고 있는 유인물 등에서 그들이 외치고 있는 구호는 그들이 정치를 명확히 말해주고 있다. 다음에서 그들이 외치는 구호를 살펴보면서, 각각 어떠한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지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신자유주의 반대” “미국 반대”


 얼핏 신자유주의와 반미라는 것은 별로 연관되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외로 이 둘은 쉽게 연결지을 수 있다. 초국적 자본으로 인한 금융세계화가 이루어지고, 자본의 침탈이 자유로워지면서, 억압받고 있는 민중들의 삶은 파탄내고 있는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 그리고 그것을 주도 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에 대해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이 만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 미국은 이라크와 전쟁을 벌이면서, 그 본성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에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러한 금융 세계화와 맞물려, 군사 세계화도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시 대표세력인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구호에 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문제의식을 제기하고 싶다. 하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일기 전에 계속 있어왔던 국내 자본의 착취에 대해서다. 물론 현재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를 얘기하는 것은 정세에 발 맞춰 나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로, 금융세계화로는 현재의 상황을 오히려 완벽히 설명하지 못한다. 작은 중소 기업장 내에서, 노동자들은 왜 계속 초과 근무를 하며 수탈을 당해야 하는 것인지, 소규모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은 온갖 사람대접도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도 일을 해야만 하는지, 왜 자본가들은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바꿔서 고용하려고 하는지 등등 신자유주의로만 현재 자본주의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말할 수는 없다. 우리는 좀 더 명확히 말해야 한다. 자본의 노동 탄압과 착취는 오로지 자본주의에 반대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을 말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주의에 대해 반대하고, 체제를 전복시킬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노동자 계급 뿐이라는 것을 말해야 한다. 물론 신자유주의 체제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등등. 그 중에서도 노동자 계급을 말하는 것은 오로지 이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온전히 분쇄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여 가치를 생산해 내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노동자다. 하지만 그들이 산출한 잉여 가치는 자본가들이 가진다. 자본가는 그것을 더욱 많이 얻기 위해 노동자를 더욱 착취하고 탄압한다. 결국, 노동자 계급만이 자본주의를 분쇄함으로써, 신자유주의를 분쇄할 수 있고, 따라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둘째, “이라크 다음은 한반도다”


 흔히, 민족 운동 진영에서 말하는 파병 반대의 논리는 얕게는 민족주의적 감상을 토대로, 깊게는 첫 번째에서 논했던, ‘미국’ 자본이 주도로 한 전쟁에 반대하자는 것인데, 후자는 앞에서 논의했으므로, 전자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다음은 한반도다”나 “조국은 아직도 식민지”라는 구호는 우선 대중에게 우리 민족의 안위를 걱정하게 하면서 즉각적인 분노를 이끌어내는데 효과적이다. 하지만,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거쳤다고 보기 힘들고, 미국에 질질 끌려가는 한국 정부의 종속적 태도에 대한 비판에 머물게 된다. 이는 전쟁이 왜 일어났고, 파병을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벗어나 한국은 왜 자주국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 한미 동맹 파기 주장으로 나아간다. 당장 한미 동맹 파기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차치해 두더라도, 미국이 아닌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을 벌였을 때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궁금해진다. 



 셋째, 반전! 반 세계화!


 앞서의 발제에서 논의되었듯이 파병반대에 대해서,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미약하다. 그런 면에서 한 좌파 단위에서 행하고 있는 꾸준한 신문 발행을 통해 대중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에 대한 평가 지점이 다양하다.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음은 앞 발제에서도 충분히 얘기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부 좌파 단위에서는 이것을 기본 전제로 하여, 전쟁에 반대하는 것이 곧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 투쟁이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필연적이라는 것.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없애는 것이 순서에 맞는 것이지, 전쟁을 반대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것은 선후관계를 반대로 생각한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상류에서 쓰레기와 함께 물이 내려오는데, 그 쓰레기를 하류에서 치우면서, 이렇게만 하면 물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류로 흘러가는 물 속에서 쓰레기를 완벽히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하고, 완전히 물을 정화할 수 없다. 즉, 상류에서 물을 더럽히는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거꾸로 된 논리로 대중들에게 반전과 파병 반대를 외치는 것은 자칫하면 단순히 선전주의 경향으로 흐를 수 있다. 물론, 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강경 대응해야 한다며, 파병에 찬성하는 여론이 높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지속적으로 반대 논리를 펴나가고 대중들에게 그것을 알려나가는 것은 좋게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선전을 대시민 피케팅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실천적으로는 노동 계급 중심성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앞에서도 논의되었지만, 실제로 전쟁과 파병을 막기 위해서는 노동 계급이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토대로, 실제로 이러한 자본주의 전쟁에 막기 위해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듯 하다.



 넷째,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


 김선일 씨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도, ‘눈에는 눈’ 이라며, 강력 대응을 주장하는 여론에 힘입어, 파병을 강행하려는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는 구호가 집회에서 자주 등장한다. 실천적으로, 노무현 정권 퇴진을 주장하는 것은 파병을 함으로써, 역시 이윤 증대를 꾀하는 국내 자본과 정권에 대해 전선을 확실히 긋는다는 점에서 분명 의미 있는 구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구호가 다음과 같은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넘어가자. 이 구호에 대해 오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병 강행을 어떤 면에서, 노무현과 반대했다가 찬성으로 돌아선, 열우당 등 부르주아 정치인의 변덕의 소산으로 판단하고,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가 노무현을 이렇게 변신시켰다고 여길 수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들에게 반대하는 것에 머무는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하지만 민노당이 집권하더라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대통령이라는 특수한 자리’ 가 자본의 이윤 증대를 위한 전쟁과 파병에 반대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무현 정권을 물러나게 하고 나서, 누구를 대통령 자리에 세우고,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씩 개혁을 해 나가면서,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현재 사민주의 국가들이 복지 정책 등을 축소하고 있으며, 다시 오른쪽으로 선회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게 될 것이다.


 다섯째, world peace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명분없는 전쟁에 의해서, 목숨을 잃는 이라크 민중과 전장으로 나가는 ‘우리의 젊은이들’을 말하고, 무고한 희생을 감행하지 말아야 하며, 모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해야 한다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물론, 폭력과 전쟁에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들의 파병 반대 운동은 여기서 그친다. 과연 누구를 위한 전쟁이고, 파병이기에 반대해야 하고, 누구를 위한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가 빠져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은 파병하지 말 것을 정부에 강력히 호소하고, 부탁하는 시민운동 양태를 벗어나지 못한다. 매일 매일 전쟁같은 하루를 보내는 노동자들과 전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 구조 속에서 인권과 평화를 외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다시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각각의 학생 운동 단위에서 외치는 정치적 구호에 드러나 있는 각 단위의 파병 반대 운동의 한계는 드러났다. 계급적 학생 운동을 고민하는 자들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구호를 외치며, 실천적으로 개입해 나가야 한다. 우리가 외쳐야할 구호는 “ 노동자 계급 중심에서 파병을 반대한다” 이며, 평화주의, 민족주의, 반미 투쟁으로서는 절대 파병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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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어느덧 수능을 본 지 2년이 지났다. 오랜만에 일반사회 교과서를 보니 그 당시 공부했던 것이 새록새록 기억나기 시작한...................콜록콜록

  사실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나는 것은 윤리와 일반사회 시험을 볼 때 객관식에서 답이 되는 것은, “제일 그럴싸한 보기”와 “제일 긴 보기” 였다는 것 뿐이다. 여기서 교과서에서의 가장 큰 문제를 집어 볼 수 있다. 바로 굉장히 “그럴싸하다”는 것이다.

  음... 일반사회 교과서를 중심으로 기억을 되살려 그럴싸한 맥락들을 집어보자~!(나는 물론 되살릴 기억이 없다..)

  우선 일반사회 대단원 중 두 번째 민주 시민의 역할에 나와 있는 부분들을 보자..


“현대 민주 시민 사회는 시민들의 자유 의사에 의해 운영된다”(p.20)

”시민이 주체가 되는 민주 시민 사회에서는 시민 각자의 현명한 판단이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한다.“(p.21)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 민주주의 국가란, 국민의 천부 인권과 행복을 존중하고 이를 법으로 보장하는 국가이다. 기본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법적인 제도와 절차를 마련하고, 국가가 앞서서 지켜 나가는 것이 자유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질서이다.“(p.190)


  위에서 언급한 말만 보면 우리는 “무릉도원”에 살고 있는 것이 틀림 없다. 우리의 자유 의사가 사회 전체의 질을 결정하고, 법이 우리의 행복을 보장해주니 이 어찌 완벽한 사회인가?

  그러나 당신의 실제 삶은 그러한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볼 부분이 있다. 하나는 “우리”라고 뭉뚱그려 표현할 수 있는가? 표현할 수 없다면 왜 그런가? 그리고 국가는 중립적인 존재인가?

  우리는 여기서 맑스의 유명한 선언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맑스가 한 말이 그냥 멋져서 아직까지 읽히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멋있기도 하다.) 잉여생산이 생겨나면서부터 계급과 소유를 둘러싼 투쟁들이 벌어질 수 밖에 없고, 사회의 경제적 조건들이 바뀌어 가면서 각기 다른 모습의 계급들이 투쟁해 온 것이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이 맑스의 말에 담겨있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시작되면서 두가지 계급이 대립하게 된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프롤레타리아는 무산자로서 자신의 노동을 팔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이고, 부르주아는 유산계급으로서 자신이 노동하지 않고 살아가는-매우 유복하게- 존재이다.

  위에서 굉장히 재미없는 이야기(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한 것은 다름아니다. 이러한 모습이 사회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이다. 사회는 계급간의 대립이 반영되는 공간이다. 물론 계급간에 대립하는 모습의 투영이 전부는 아니다.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전반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이제 대충 하고 싶은 말이 나왔다. 즉 사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이데올로기가 사회 전반을 장악한다. 그리고 이 주도권이란 소유라는 하나의 “힘”을 가지고 있는 유산계급이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잡고 있다.(이에 관해서는 밑에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라고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계급사회에서 모든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가능한 것은 이것이다. 부르주아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거나,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을 대변하거나.

  전 세계적으로 발생했던 부르주아와 중세 영주와의 투쟁은 혁명으로 봉건제 사회는 종식됐고, 이로 인해 부르주아의 승리 즉 자본주의의 막이 올랐다.(불행히도 조선에서는 그러한 흐름이 폭발적으로 나타나지는 못했다.) 프랑스 대혁명이라 불리는 부르주아 혁명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외쳐졌던 구호는 어떤 것이었는가? “자연에 근거한 평등”, “양도할 수 없는 인권”이었다. 이러한 권리, 부르주아 혁명 이후 국가에 대해서 엥겔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이성의 왕국이 부르주아지의 이상화된 왕국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영원한 정의는 부르주아적 사법으로 실현되었다는 것 ; 평등법률 앞에서의 부르주아적 평등으로 귀착되었다는 것; 가장 본질적인 인권의 하나로 선포된 것은-부르주아적 소유권이었다는 것...”*


  즉 현대국가에서 이야기 하는 자유는 부르주아가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는 자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고, 평등 역시 부르주아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법률 앞에서의 평등-부르주아만이 실질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에 다름 아닌 것이다.

  자세하고 파고들면 굉장히 길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절대 모르거나 귀찮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다ㅡㅡ;;.) 발제할 부분은 일반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주의에 관한 비판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 그 중에서도 계급사회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갈등을 교과서에는 어떻게 감추려하는지(민주주의의 이름을 이용해서)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다.(써 놓은 걸 보니 이미 충분히 길게 써놓았군...;;;)

  일반사회 교과서에는 민주시민의 생활 원칙으로 ‘대화와 토론’, ‘양보와 타협’, ‘다수결과 소수 의견 존중’을 이야기 한다.(교과서에 나오는 “민주시민”이라는 개념도 참 재미있다. 대학 와서 알게 된 민주 시민은 집회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전경에 맞서 ‘지나가다 분노한’ 시민‘인양’ 싸우는 사람들 이었다..;)

  ‘대화와 토론’과 ‘양보와 타협’은 하나의 맥락 속에 있는 논리이다. 사회의 갈등을 서로 대화를 통해 조금씩 양보해서 타협을 보자는 것인데, 갈등의 본질을 생각해 보면 굉장히 공허한 이야기임이 드러난다. 또 이는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을 대화와 타협으로 은폐시키려는 -요즘들어 노동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사회적 합의’라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즉 임금노동과, 자본이라는 구조적인 모순에서 시작되는 갈등은 대화와 토론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본질적인 모순이며, 그것은 절대 타협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한 모순관계를 보지 않고, 단지 대화와 타협을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을 해결하려는 것이 아닌 노동자․민중을 자신의 이데올로기 밑에 포섭하려는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주변에서도 쉽게 드러난다. 등록금투쟁을 생각해 보자. 학교와 학생들이 처음으로 교섭을 할 수 있었던 때가 언제였는가? 비상학생총회 당일 교양관으로 기습 항의 방문을 들어가서 부총장을 압박했었을 때 비로소 그들은 교섭을 하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우리가 그 전부터 요구해 왔던 교섭에 대해서는 들은 척도 안하다가 학우들이 학교를 실제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하자 그들은 교섭을 시작해 왔다. 그러면서 본관점거에 대해서 학교가 폈던 말은 “학우들이 대화하려 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는 것이 아니었는가? 우리보고 어쩌라구~! 압박을 받지 않는 한 그들은 협상하려 하지 않는다. !

  “다수결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다수결이 ‘전원 일치에 가깝기 때문에’ 제일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이야기 한다.(물론 소수의 의견을 존중하기 위해서 그들과 대화하고 타협해야 한다고 (기만적으로)말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많은 이가 찬성하는 것이 과연 가장 합리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이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열악한 자신의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투쟁을 하고, 철거민들이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농민들이 FTA에 반대하는 집회를 갖지만 이 모든 것들은 왜곡되고 이기주의에서 나온 행위들로 보도되고, 대부분의 시민들은 인식한다.(이는 가장 진보적인 담론이 많이 오가는 대학에서도 존재한다.) 그리고 파병문제에 있어서도 그것이 제국주의 전쟁으로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지만, 대부분의 시민들은 파병에 찬성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현재 계급간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르주아는 모든 것을 통제 한다. 자신이 소유한 물질적인 힘으로 의식 역시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조선일보 KBS등의 모든 매스컴 역시 돈 없이는 굴러가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많은 대중들은 접하는 매체는 부르주아들의 그 것일 수밖에 없고,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사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국가에서 인증한 교과서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하나의 중립적인 존재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을 보호하고, 그들을 위한 정책을 집행하는 공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날 때부터 보고 듣는 것, 심지어 학교에서 배우는 것 역시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이데올로기 역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의식적인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투쟁하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자신의 이해관계와 직결되어 있음을 알지 못하고 파병에 찬성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수결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수결이라는 것은 다수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합리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지막 학습 정리(시험에 꼭 나온다고 해서 외웠었던 기억이...)에 다음과 같이 정리해 놓는다.


“사회적 집단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는 문제이지만, 그러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사회를 개선하려는 움직임도 있게 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립되는 집단 간의 이해관계를 합리적으로 조정하여 사회 안정과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p.103)


  교과서 스스로가 갈등은 근본적으로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그러한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합리적으로 조정한다는 것은 자신의 조건을 바꾸지 않으면 어떠한 본질도 변하지 않는 무산계급을 자본의 ‘세련된’ 합의라는 이데올로기 아래 포섭하려는 것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이는 위에서도 강조해서 이야기 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왜 없는가? 생산력은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이제 지역간의 갈등은 지역간의 교류를 통해 없어질 수 있다.(물론 자본주의에서는 어려운 이야기이다.) 여성과 남성의 차별에 있어서도, 사적인 소유관계를 철폐하면 차별적인 분업이 아닌 자연적인 분업만이 남게 될 것이다. 즉 사적소유와 계급을 철폐하면 자연히 계급간의 대립이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계급간의 갈등은 존재하지 않게 되지 않겠는가?

  이제 결론을 내려보자.(뭐 했다고...;;;) 우리가 고등학교에서 배웠던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계급모순이 엄연히 존재하는 자본주의에서 모두의 이해를 대변하는 민주주의는 불가능 하다. 결국 어느 계급의 민주주의인지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봤던 대화와 타협 등의 이야기, 그리고 실질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대부분의 경우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입각해서 보자면, 교과서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을 변호하는 민주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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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 선언,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선집 1권,박종철 출판사)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 프리드리히 엥겔스(저작 선집 5권, 박종철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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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교과서 속의 민주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비판-


   ‘민주주의’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지. ‘모두에게 좋은 거다’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을 터인데 당장에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참으로 막연해진다. 교과서에 제시된 민주주의의 의미를 참고하여 우선 이렇게 이해해두자.

 

“결론적으로, 민주주의라는 말은 국가 의사의 결정을 국민의 합의에 두는 특정한 정치 형태라는 의미와, 자유, 평등과 같은 기본 이념을 민주적 방식으로 실현시킨다는 의미,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자세, 생활 태도, 행동 양식 등을 민주적으로 수행하는 생활양식이라는 의미를 담게 된 것이다.” (정치 교과서)

 

 그렇다면 오늘날의 남한 사회는 민주주의 국가인가? 우리는 흔히 민주주의 국가의 표본으로서 프랑스 혁명 이후 등장한 ‘시민 사회’를 떠올린다.

 

 “서구 사회에서는 신분 사회와 절대주의적 전제 군주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17, 18세기에 이르러 시민 혁명을 일으켰고, 이 과정에서 고대 민주 정치의 이상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재현되었다. 특히, 대혁명으로 알려진 프랑스 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혁명 이념을 내걸고, 국민 주권의 기치 아래 공동 사회를 새로이 구축하는 원동력으로서 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정치 교과서)

 

 그런데 프랑스 혁명을 위와 같이 설명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해 보인다. 그렇다. 글에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킨 주체가 빠져있다. 프랑스 혁명의 주체는 누구였나? 바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17, 18세기 프랑스에서는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성장하였고, 더 많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생산을 확대시킬 필요가 있었던 그들에게 당시 국가를 지배하고 있던 봉건 귀족들은 큰 걸림돌이었다. 즉,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이라고 불려오고 있는 부르주아지에 고유한 생산 방식은 봉건 질서의 지방적이고 신분적인 특권들 및 인신적 상호 속박과는 양립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이 무엇보다도 원한 것은 당시 국가 체제에 의해 제약 받지 않으면서 마음대로 경쟁하고 무역할 수 있는 ‘경제적 자유’였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의 본질은 부르주아지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바탕에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대개 프랑스 혁명을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혁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다면 그 때  프롤레타리아트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들 역시 혁명을 위해 싸웠다. 혁명의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봉건 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대립과 마찬가지로, 이 두 신분 모두와 프롤레타리아 계급 사이의 대립 또한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관계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간의 갈등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부르주아 계급이 그들의 경제적 이해를 위한 투쟁을 마치 보편적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탈바꿈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계급 또한 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는 신분적 특권을 배제하고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취급하며, 권리에 있어서도 평등하다는 이념을 내세운다. 이러한 평등의 이념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 사회적 차별은 공동 이익을 근거로 해서만 있을 수 있다.”는 프랑스 인권 선언의 규정에 잘 명시되어 있다.” (정치 교과서)


 혁명의 성과를 만인의 것으로 돌리기 위해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이 주장한 ‘(경제적) 자유’와 ‘(신분적) 평등’의 범위를 확대시켜야만 했다. 그들은 정치의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영역에 자유와 평등을 선언하였다. 단, ‘경제적 평등’만을 제외하고.

 

 우리는 민주주의라고 줄여서 말하지만, 사실 오늘날 민주주의의 형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실재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국민의 참여에 의한 정치가 가능한’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을 위한, 법적으로 국민의 참정권은 주어져있지만 사실상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정치가 이루어지는’ 민주주의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이러한 민주주의의 형태 또한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 발전의 이상은 모든 국민이 강한 공동체 의식을 지니며, 개인이나 사회 집단의 자율성이 보장되는 다원주의적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지속적인 경제 발전 속에서 국민들이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복지 사회의 건설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하는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 자유 민주주의, 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윤리 교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자유 민주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윤리 교과서에서는 자유 민주주의가 표방하는 자유의 개념을 “국민 각자가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자신의 욕구에 따라 그 삶의 조건들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으로, 평등을 “기회 균등의 의미”로서 “법적, 정치적 평등이며, 이는 경제적 평등이나 결과의 평등으로 확대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교과서에서는 계급을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현대사회가 계급사회라는 것을 명시한다면 민주주의가 갖는 의미는 분명해진다. 계급사회에서 부의 집중과 집적은 일반적으로 -로또에 당첨되지 않는 한- 생산수단을 소유한 부르주아 계급, 즉 자본가 계급에게만 가능하다.** 따라서 삶의 조건들이나 선택의 기회는 우리가 지배 계급의 자식으로 태어나지 않는 한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하다. 현대사회는 또한 자본주의 사회이다.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에 의해 지배계급의 이해관계가 보장되는 한, 오늘날 자유와 평등의 이념은 태어날 때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우리가 머리 속으로 상상하는 것과는 다르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 노예제 사회나 봉건제 사회와 비교할 때, 지배관계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훨씬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와 평등은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일반적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는 머리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실현되며, 그러한 이념들은 현실의 철저한 반영물에 불과하다.


 “원시 상태를 제외하면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였다는 것, 서로 투쟁하는 이 사회 계급은 언제나 그때그때의 생산 관계들 및 교환 관계들, 한마디로 경제적 관계들의 산물이라는 것 ; 따라서 사회의 그때그때의 경제적 구조는, 역사 시기마다의 법적, 정치적 제도들과 종교적, 철학적 등등의 표상 방식들로 이루어지는 전체 상부 구조를 종국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실재적 기초를 형성한다는 것.”***


 계속 말했지만,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또한 인용문에 나타난 사회의 경제적 관계들과 무관하지 않다. 한 사회가 표방하는 이념들을 이러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교과서가 교묘하게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본질을 감추고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것이다.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5



** 왜 그런지는 굳이 쓰지 않겠음.



***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프리드리히 엥겔스, p.453



**** 맑스에 의한 유물론적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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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발제1. 이라크 전쟁에 대한 계급적 관점



이라크 전쟁에서 발견되는 각국 자본의 이익추구


 2003년 3월 20일. 미국의 침공으로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1년 하고도 반년이 더 지났지만, 아직도 이라크 민중들의 저항은 거세고, 미국 또한 이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고 발표한 상태이다. 더군다나 남한의 경우에는, 김선일씨 사건으로 인해서 반전여론이 급격히 파병찬성여론으로 돌아선 가운데 무수한 논쟁들이 있었다. 이전에는 ‘국익을 위해서 파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돌아오는 국익은 없다. 파병을 반대해야한다’라는 논리였지만, 지금은 ‘김선일씨 사건이 발발했기에 우리는 공수부대라도 보내서 이라크놈들 싹 쓸어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아니다. 김선일씨를 죽인 것은 파병을 강행한 정부이다.’라는 주장들이 있다.1)


 우선, 국익이라는 것에 대해서 논해보자. 국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라는 관점에서부터 필자는 굉장히 회의적인 시각에 있다. 이라크 파병을 해서 생기는 국익. 그것이 누구의 이익을 말하는 것인가? 과연 남한의 노동자민중들의 이익인가? 아니면 남한자본가들의 이익인가? 이라크에 군대를 보내어 복구사업 몇 개 더 따내어서 사업을 한다면 과연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자본가들의 이익인가? 노동자들의 이익인가? 전쟁을 수행하면서 그 주체가 된 것은 분명 노동자계급이다.2) 하지만 그에 대한 떡고물은 모두 자본가들이 먹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알기 위해서는 ‘과연 무엇 때문에 전쟁이 발발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 매파의 호전적 정책때문, 그리고 석유패권을 위한 싸움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것은 이 전쟁의 원인을 미국의 현 정권에만 전가시키고 있다. 과연 미국의 매파가 아니었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역사에 ‘만약’이란 것이 없기 때문에 필자로서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추론해 볼 수 있다. ‘만약’ 미국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되어 이윤율의 저하가 눈에 띄게 하락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을 때 미국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라크전쟁이 단지 미쳐 날뛰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석유패권의 논리에 대해 말을 해보자. 필자는 이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허나 석유패권의 논리는 어디서부터 도출되는가를 생각해보자. 단지 석유를 얻으려고 석유 하나만을 노리고 벌이는 전쟁인가? 중동지역 석유의 독점으로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자본의 이윤증대이다. 미국은 자국 자본의 이윤증대를 위하여 자국의 노동자계급출신의 병사들을 파견하여 이라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다른 국가들의 상황을 살펴보자. 영국은 찬성한 가운데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등은 반대를 하였다. 이 이유는 무엇인가? 영국의 블레어가 전쟁광이고, 시라크․푸틴등이 평화주의자라서 반대하였는가? 그러한 이유는 절대 아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인가? 이를 이해하려면 이들 국가들 간의 이라크 유전에 관한 세력분포를 알아야 한다. 우선 북부 루마이라 유전 개발권은 중국 러시아에 있었고, 러시아 루크오일, 이탈리아 에니, 프랑스 토털피나앨프등은 이라크와 석유 탐사 및 개발계약을 한 바 있는데,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배제되었다. 이들 반전진영 자본가들은 UN에 이라크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구하면서 그 이면으로 후세인과 석유지분권을 거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 대해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통해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세움으로써 중동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다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랑스, 독일, 러시아, 중국 등은 중동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가 침해당하는 것을 심각하게 우려하게 되었고, 반전진영을 형성하게 되었다. 모든 것은 자국 자본의 이해가 우선적이었다. 쉽게 말해, 자본가들은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전쟁을 반대하는 것도 모두 이윤 동기라는 ‘황금 기준’에 따른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은 필연적이다. 계속되는 자본의 이윤증대에 대한 욕구는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와 파괴적 행위를 원한다. 이러한 파괴적 행위는 불황과 전쟁 등을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 자본주의는 전쟁을 통해서 새로운 투자지역을 찾아내고, 생산의 요소와 소비의 요소를 찾아낸다. 자본의 파괴적 본능은 오직 이윤을 바랄 뿐이며, 그 속에 살아가는 민중들의 생활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전쟁이 자본주의의 모순으로 인해서 일어나는데 반해 우리는 자본주의를 타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본의 공격적 모습으로 드러나는 전쟁과 현 시기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만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실로 취해야 할 행동은 바로 자본주의 체제 변혁이다. 체제를 바꾸지 않고서 전쟁을 반대한다는 것은 근본적 문제해결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 계급중심의 운동


 자본주의 체제의 타격을 위한 설정에서 필자는 노동자계급 중심의 운동을 외치려 한다. 이 글에서 왜 노동자계급에 대한 중심성이 나오는지 의문이 갈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노동자 계급에 집중하는 것은 단지 노동자 계급이 받는 착취가 불쌍해서도 아니고, 그/녀들의 수가 많기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 근본 체제가 바로 노동자계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계급의 존재는 필수적이며, 그들의 노동에 의해 자본주의의 이윤증대가 가능해지는 법이다. 자본주의는 발전해 가면서 노동자계급을 착취/억압하지만,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집단적으로 노동을 하게 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바로 이점이 다른 계층들과 다른 지점이다. 노동자계급은 탄생할 때부터 자본주의를 철폐할 칼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해서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운동을 펼쳐나가자고 하였을 때, 다른 여성, 장애인, 농민 등의 여러 소외 계층들은 어떻게 되냐고 물을 수도 있다. 물론 그들도 함께 나가야 한다. 우리는 민중에 대한 어떠한 형태이든지 간에 모든 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운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치의 사고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철폐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지점인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사고하자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정치를 승인하고 그것에 복무할 때, 자본주의 철폐가 이루어 질 것이다.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선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연대가 우선적이다. 이라크에도 노동자가 있고, 미국에도 노동자가 있으며, 한국에도 노동자가 있다. 노동자는 현재 세계 어느 나라에도 있으며, 그들은 그 사회의 모든 것을 생산하는 역동적인 계급이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의 처지에 있지만, 자본가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자본가의 분할책동에 의해 노동자들은 하나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갇혀 버려서 이라크 노동자와 한국 노동자를 따로 보고 있다. 그들의 처지는 자본주의에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로서 하나의 관점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민족주의적 관점은 한국 노동자에게 자신은 이라크 노동자와 다르고, 자신은 억압/핍박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본의 광폭은 노동자들을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구조조정의 형태이든, 비정규직의 형태이든, 전쟁의 수행을 위한 파병의 형태이든- 노동자 계급을 끊임없이 연계시키며 착취하고 있다. ‘노동자는 하나다’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말인 것이다. 노동자가 민족주의를 넘어 연대할 때 전쟁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모든 착취의 쇠사슬을 끊고 나설 때 자본에 의한 전쟁은 종식될 것이다.

 




1) 여기서 논한 주장들을 이분법적으로 갈라놓았지만, 사실은 이들 주장보다 훨씬 다양한 주장이 있었음을 밝혀둔다.



 

2) 참전한 대부분의 미군 병사들은 노동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이며 대개 대학이나 직업 훈련을 받기 위한 방편으로 어쩔 수 없이 입대하였다. 더구나 위험한 작전에 주로 투입되어 희생된 미군 병사들은 시민권을 획득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참전한 라틴계 미국인들이었는데, 이는 911이후 부시행정부가 외국인 비시민권자가 군대에 지원할 경우 시민권을 즉시 발급하는 절차를 도입한 것에 기인한다. 남한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예전 베트남전 때의 파병지원 심리와 마찬가지로, 이라크로 가면 조금이라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심리로 가는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본가계급 출신의 젊은이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젊은이들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파병 뿐 만이 아니라, 테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도 자본가계급의 사람들이라기 보다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무고한 젊은이들이다. 예를 들어 김선일씨가 바로 그러한 경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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