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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발제1 .  남한 농업의 현황과 이에 대한 맑스주의적 분석


- 최바울 (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이 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현 시기 남한 농업의 현황에 대하여 사실 관계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생각이다. 이것은 주로 윤수종의 〈한국 농업의 미래와 농민운동의 새로운 방향〉이라는 글에 의거할 것이다. 한편 글에는 직접 인용하지 않았지만, 하반기 농업 개방과 관련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몇 가지 신문 기사를 이용했음을 밝혀 둔다.

  다음으로 글의 후반부에서는 오늘날 남한 농업이 처해져 있는 현실을 맑스주의 경제학의 관점에서 분석해 내려 한다. 이것은 인류의 가장 위대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 맑스의 『자본』을 직접적으로 인용하는 가운데 전개될 것이다.


  Ⅰ. 남한 농업의 현황


  최근 농민들의 격렬한 투쟁이 아니었다면, 우리들이 농촌에 대해 제일 먼저 떠올리는 인상은 여전히 목가적인 풍경이었을 것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렇지 않다면, 배추를 갈아엎는 농민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느끼는 안타까움. (수많은 창업 실패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렇게 안타까워 해 본 적이 있었을까?)

  이러한 정서는 남한 사회에서 일반적인데, 그 까닭은 남한 사회가 농업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격렬한 역사적 변혁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시초 축적 시기의 극심한 노동 착취 속에서, 대다수의 민중들은 비록 빈궁할 지라도 ‘인간’일 수 있었던 농촌 사회를 그리워하곤 했다. (실제로도 여전히 대다수의 귀향지는 농촌이다.) 언론 보도를 보라. 민주노총이 화염병을 던지면 잡아먹으려고 난리를 치지만, 농민들의 격렬한 시위에는 언제나 동정의 눈빛을 보내곤 한다. 우리 역시 이러한 사회적 풍토 아래서 성장하였다. 그리고 남한 사회에 만연한 이 사회적 정서는, 우리가 농업 문제를 과학적 시각으로 엄정하게 고찰해 내는 데 방해가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각설하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하자. 윤수종의 글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지점은, 농민들 간의 계급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는 점이다.1)


   “농촌 사회 관계는 특히 농민들 간의 계층분화를 들 수 있다. 지난 10년간의 변화를 보면, 전형적인 양극 분해의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앞선 시기에 주로 중농으로 표준화되던 양상이 크게 바뀐 것이다. 어쨌든 양극으로의 분화는 기계화에 따라 차지형 상층농이 등장하는 등 기계를 통한 대규모화가 가능해지면서 정치규모가 큰 상층이 등장하였다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경지 규모에 매이지 않는 시설농가, 축산농가 등이 증가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90년대 들어 지원제도의 강화와 더불어 지원을 받은 농민들이 기계화와 시설화를 통해서 경제력을 집중하여 새로운 상농층으로 도약하고 그 반대쪽에는 다수의 침전층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농업 생산 방식에 있어서의 변화로 현상하고 있다.


  “농업 생산 조건의 변화와 더불어 농업 생산 주체도 변화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농업 생산 조직들이 등장하고 있다. 위탁 영농회사와 영농조합법인, 다양한 생산실험(예를 들어 생명농업) 공동체들이 그것이다. … 일관 기계화가 가능한 기계 체계를 갖추고 회사형태를 갖춘 위탁 영농회사는 벼농사의 수위탁 작업이 활성화되는 가운데 벼농사의 핵심적 작업집단으로서 부각되었다. … 다수의 영농조합이 소수인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일부에서는 다수의 구성원을 지닌 영농조합이 생겨나고 있는데, 이것은 영농조합 내의 분화 현상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출자규모로 볼 때에도 대다수의 영농조합은 소규모 투자를 하고 있는 데 반해 일부 대규모 투자를 하는 영농조합도 나타나고 있다.”


  농민층의 계급 분화, 그리고 그것과 변증법적 원인·결과로 맞물려 있는 생산 방식의 변화에 조응하여, 정부 역시 농정 정책의 초점을 상층농에 대한 지원으로 맞춰 나가고 있다. 1950년, 공산주의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시행했던 소농 육성 정책은, 오늘날 농업 생산력의 증대로 인한 계급 분화에 직면하면서 ‘농업 자본가’ 지원 정책으로 변모된 것이다. 농민 전체가 아닌 ‘경쟁력 있는 농민’에 대한 중점적 지원, 그로써 ‘경쟁력 없는 농민’에 대한 자연 도태가 정부의 농정 정책인 것이다. 솔직하다는 점에서만큼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노무현이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이다.


   “(앞으로) 경쟁력 있는 농업만 살아남는다는 점을 확실히 하고 가자. 여러 지원정책 중에서 경쟁력 없는 농업에 지원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 한다. 농촌 인구를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YS·DJ 정부가) 지키겠다고 잘못 공약한 것이다. 앞으로 시장기제에 의해 농업인구가 줄어든다는 점, 탈농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각오하고 가야 한다. 신뢰가 따르지 않으면 정책은 실패한다.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얘기하자.”

-  미제의 앞잡이 제프리 존스 회장과의 대담에서


  한 마디로 ‘살 놈은 살리고, 죽을 놈은 죽인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무현의 이러한 말을 WTO 체제에 의해서 강제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에서 인용한 통계자료는 85년부터 95년까지의 자료이다. 농민 간의 계급 분화가 이루어지고 농촌 사회에서 계급 모순이 증대한 것은, 이른바 ‘세계화’가 매스컴을 온통 떠들썩하게 채웠던 것보다도 이전이다.

  따라서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농업개방 문제는 결코 새로운 모순이 ‘도입’되는 것이 아니며, 오로지 기존의 모순을 전세계적인 차원에서 확대·재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오로지 ‘자본주의’라는 네 글자와만 관련이 있다. 물론 WTO 체제는 농촌 사회의 계급 모순을 가속화시킬 것임은 틀림없다. 노무현이 더 이상 YS·DJ와 같이 농촌을 살리겠다고 거짓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핵심적인 본질은, 농촌 사회에서도 점차 소자본이 대자본에 의해 구축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은 이전 시기에도 있어 왔으며, 다만 오늘날의 전면적인 농업 개방에 의하여 그것이 전세계적 규모로 확대되어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장담하건대, 전면적인 쌀 개방은 결코 농촌을 황폐화 시키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독점 자본이 농업 생산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것으로 귀착될 것이다. ‘식량 무기’로 인한 ‘국가 안보의 위협’이 실질적인 것으로 된다면, 남한의 부르주아들 역시 자신의 애국자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물론 그들의 애국심의 본질은 남한 사회에서 노동력의 안정적인 공급이긴 하지만…, 그래도 애국심은 애국심이다). 그들은 ‘식량 주권의 수호’를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와 동떨어진 것으로 사고하고 있지 않다. ‘농업 자본의 이윤율 제고’를 위해 400만 농민이 200만으로 줄어야 한다고,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위해 발전된 농업 생산력을 200만 명의 목숨과 바꾸겠노라고 공공연히 선언하고 있지만 말이다.


  Ⅱ. 소자본과 대자본의 투쟁을 맑스주의는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위에서 밝힌 대로, 이에 대하여 맑스의 불후의 명저 『자본』(김수행 역, 비봉출판사)을 살펴보도록 하자. 참고한 부분은 『1권 : 자본의 생산과정』 중 「7편 : 자본의 축적과정」과 「8편 : 이른바 시초축적」, 그리고 『2권 : 자본의 유통과정』 중 「1편 : 자본의 변태들과 그 순환」이다. 불행하게도(!) 시간의 부족으로 발제문이 완결되지 못했다. 굵은 글씨를 중심으로 짧게 구두로 발제하겠다.


  [1] 소자본과 대자본 사이의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본주의의 생산 법칙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맑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가가 인격화한 자본인 한, 그의 활동동기는 사용가치의 획득과 향락이 아니라 교환가치의 획득과 증식이다. 그는 가치증식을 열광적으로 추구하며 그리하여 무자비하게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제한다. 이리하여 자본가는 사회의 생산력의 발전과, 또 [각 개인의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발전을 그 기본원칙으로 삼는] 더 높은 사회형태의 유일한 현실적 토대로 될 수 있는 물질적 생산조건의 창조에 박차를 가한다. 자본의 인격화로서만 자본가는 존경을 받는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절대적 치부욕을 수전노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수전노의 경우에는 개인의 열광으로 나타나는 것이 자본가의 경우에는 사회적 메커니즘 ― 여기서 자본가는 하나의 나사에 지나지 않는다 ― 의 작용으로 나타난다. 더욱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한 사업에 투하되는 자본액을 끊임없이 증대시키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며, 그리고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내재적 법칙을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각 개별 자본가에게 강요한다. 경쟁은 그로 하여금 자기의 자본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을 끊임없이 확대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데, 그는 누진적 축적에 의해서만 자기의 자본을 확대할 수 있다. … 축적은 사회적 부의 세계를 정복하는 것이고, 착취당하는 인간의 수를 확대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가의 직접적·간접적 지배를 확대하는 것이다. … 축적하라 축적하라! 이것이 모세며 예언자이다!” (1권, 807쪽)


  [2] 자본의 축적이 무한경쟁 속에서 자본이 살아남기 위한 것이라면, 축적을 위해 필요로 되는 것은 무엇인가? 특히 개별 상품 생산자들로 사회가 분업화 되는 것은 자본 축적의 전제이다. 즉, 남한의 소농 육성책은 필연적으로 계급의 양극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자본축적의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 수준이다. 노동생산성의 상승에 따라 일정한 가치[따라서 또한 일정한 크기의 잉여가치]가 체화되어 있는 생산물의 양이 증가한다. 잉여가치율이 불변이라면[또는 떨어지는 경우조차도 노동생산성이 상승하는 것보다 완만하게 떨어지는 한], 잉여생산물의 양은 증가한다.” (1권, 824쪽)


  “노동의 사회적 생산성의 발전은 대규모의 협업을 전제하며, 이 전제 아래서만 노동의 분할 및 결합이 조직될 수 있고, 생산수단은 대규모 집적에 의해 절약될 수 있으며, 이미 물질적 성질로 보아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노동수단[예컨대 기계체계 등]이 나올 수 있고, 방대한 자연력이 생산에 이용될 수 있게 되며, 생산과정이 과학의 기술공학적 응용으로 전환될 수 있다. 지배적인 제도가 상품생산이라면, 즉 생산수단이 개인의 소유이어서 수공업자가 고립해서 자립적으로 상품을 생산하든가, 또는 그에게 자립적 생산을 위한 수단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서 판매한다고 하면, [위에서 말한 전제인] 대규모의 협업은 개별 자본의 증대에 의해서만, 또는 사회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이 자본가의 사적 소유로 전환되는 정도에 따라서만 실현된다. 상품생산의 토대 위에서는 대규모 생산은 자본주의적 형태로서만 발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개별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일정한 자본이 축적되는 것이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전제가 된다.” (1권, 852쪽)


 [3] 자본의 축적에서 필요로 되는 것은 노동 생산성의 끊임없는 발전이다. 또한 이것은 ‘규모의 경제’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축적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개별 자본은 크든 작든 생산수단의 집적이며, 그에 대응해 크거나 작은 노동자집단을 지휘한다. 모든 축적은 새로운 축적의 수단으로 된다. 자본으로 기능하는 부의 양이 증대함에 따라, 축적은 개별 자본가들의 수중으로 부의 집적을 증대시키며, 그리하여 대규모 생산의 토대와 진정한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토대를 확대시킨다. … 집적은 축적으로부터 직접 나오거나 또는 오히려 축적 그 자체와 동일한 것…. 축적은 한편으로는 생산수단의 집적과 노동에 대한 지휘의 집적의 증가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는 다수의 개별 자본가들 상호간의 배척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개별 자본으로 사회적 총자본의 분열 또는 그 단편들의 상호배척은 그들 사이의 흡수에 의해 상쇄된다. 자본들의 흡수는 생산수단과 노동지휘의 단순한 집적[축적과 동일한 의미의 집적]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형성된 자본의 집적이며, 그 개별적 독립성의 파괴이며, 자본가에 의한 자본가의 수탈이며, 다수의 소자본을 소수의 대자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이 흡수과정이 집적과정과 다른 점은, 흡수과정은 이미 존재하며 기능하고 있는 자본들의 분배의 변화만을 전제하며, 따라서 그 작용범위는 사회적 부의 절대적 증대 또는 축적의 절대적 한계에 의해 제한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 곳에서 어떤 한 사람의 수중에 자본이 대량으로 증대하는 것은 다른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것은 축적 및 집적과 구별되는 진정한 집중이다.” (1권, 853쪽)


  [4] 위의 내용과 같이, 집중이란 대자본이 소자본을 격파하고 흡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위에서 밝힌 대로 대자본이 노동 생산성을 훨씬 빠르게 증대시킴으로써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와 콤바인으로 농사짓는 캘리포니아 쌀을 기껏해야 경운기로 경작하는 남한의 쌀이 당해낼 수 없듯이 말이다.


  “이 자본집중의 법칙 또는 자본이 자본을 흡수하는 법칙”에 대해서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경쟁전은 상품값을 싸게 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상품값이 싸지는 것은, 기타 조건이 같다면, 노동생산성에 의존하며, 노동생산성은 생산규모에 의존한다. 그러므로 대자본은 소자본을 격파한다. 또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의 발전에 따라 정상적인 조건 하에서 사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개별자본의 최소금액이 증대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교적 작은 자본은 대공업이 산발적으로나 불완전하게 장악하고 있는 그러한 생산분야로 몰려든다. 여기의 경쟁은 적대적인 자본들의 수에 정비례하고 그 크기에 반비례해 격렬해진다. 경쟁은 언제나 다수의 소자본가의 멸망으로 끝나는데, 그들의 자본은 부분적으로는 승리자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부분적으로는 사라진다.” (1권, 854쪽)


 “어디에서나 기업체들의 규모확장은 많은 사람들의 집단노동을 더 포괄적으로 조직하기 위한 출발점으로 되며, 또 그들의 물질적 추진력을 더 광범하게 발전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즉, 관습적인 방식으로 운영되는 고립적인 생산과정을 사회적으로 결합되고 과학적으로 설계되는 생산과정으로 점차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출발점으로 된다.” (1권, 856쪽. 엥겔스의 주석.)


  [5]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을 띠게 된다.


  “임금노동에 의한 생산이 일반적으로 되자마자 상품생산은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 상품생산은 사회적 분업을 끊임없이 증진시키는데, 특정의 자본가가 생산하는 상품은 끊임없이 전문화하고, 보완적인 생산과정들은 독립적인 것으로 끊임없이 분할된다. … 상품생산의 물적 조건들은 점점 더 큰 범위로 여타의 상품생산자의 생산물로서[상품으로서] 개별 자본가와 직면하고 있다. 거기에 발맞추어 자본가는 점점 더 화폐자본가로 등장하게 되며, 그의 자본이 화폐자본으로 기능하는 규모는 점점 더 확대되고 있다.

  반면에,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본조건[임금노동자 계급의 존재]을 만들어내는 동일한 사정이 모든 상품생산을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이행시키는 것을 촉진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의 발달은 모든 이전의 생산형태[주로 생산자의 직접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전환시킨다]를 파괴하고 해체시키는 작용을 한다.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처음에는 외관상으로는 생산방식 그 자체를 공격하지 않은 채 생산물의 판매를 주관심사로 삼는다. … 그러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은 정착되자마자 생산자 자신의 노동에 의거하고 있거나 생산물의 과잉분만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것에 의거하고 있는 상품생산의 모든 형태를 파괴한다. 그것은 처음에는 상품생산을 일반화하고, 그 다음에는 모든 상품생산을 점차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킨다.” (2권, 43쪽)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경향은 모든 생산을 가능한 한 상품생산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며, 이것을 달성하는 주된 무기는 모든 생산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유통과정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발달한 상품생산 자체가 바로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인 것이다. 산업자본의 침입은 어디에서나 이 전환을 촉진하며 그와 함께 모든 직접적 생산자의 임금 노동자로의 전환도 촉진한다.” (2권, 128쪽)


 [6] 자본주의의 이러한 전개 법칙은, 결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시대에 들어서 발생한 특수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발생 시기에서부터 관철된 법칙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소생산자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하는 것은, 공상적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반동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임금 노동자 계급에 의해 전복됨으로써, 인류 역사의 ‘부정의 부정’을 완료해야 한다.


   “자본의 시초축적, 즉 자본의 역사적 발생은 결국 무엇으로 귀착되는가? 그것이 노예 및 농노를 직접적으로 임금노동자로 전환시키는 것[즉 단순한 형태변화]이 아닌 이상, 그것은 오직 직접적 생산자의 수탈[즉 자기 자신의 노동에 입각한 사적 소유의 해체]을 의미할 따름이다.

  … 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자의 사적 소유는 소경영의 토대이며, 소경영은 사회적 생산의 발전과 노동자 자신의 자유로운 개성의 발전에 필요한 조건이다. …

  이 생산방식은 토지의 분할과 기타 생산수단의 분산을 전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수단의 집중을 배제하기 때문에, 각 생산과정 안의 협업과 분업, 자연력에 대한 사회적 통제와 규제, 사회적 생산력의 자유로운 발전도 배제한다. 이 생산방식은 생산 및 사회가 자연발생적인 좁은 범위 안에서 운동할 때에만 적합하다. 이 생산방식을 영구화하려는 것은, 페쾨르가 옳게 지적하고 있듯이, ‘만인(萬人)의 범인화(凡人化)를 명령’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 일정한 발전수준에 도달하면 이 생산방식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물질적 수단을 만들어 낸다. 이 순간부터 사회의 가슴속에서는 이 생산방식을 질곡으로 느끼는 새로운 세력과 새로운 정열이 태동하기 시작한다. 이 생산방식은 철폐되지 않을 수 없으며 또 철폐된다. 그것의 철폐, 즉 개인적이며 분산적인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집중된 생산수단으로 전환되는 것, 따라서 다수인의 영세한 소유가 소수인의 거대한 소유로 전환되는 것, 그리고 광범한 국민대중으로부터 토지와 생활수단과 노동도구를 수탈하는 것. 이러한 처참하고 가혹한 국민대중의 수탈이 자본의 전사를 이룬다. … 자신의 노동으로 획득한 사적 소유, 말하자면 개개의 독립적 노동자와 그의 노동조건과의 융합에 입각한 사적 소유는, 타인노동[그러나 형식상으로는 자유로운 노동]의 착취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에 의해 축출된다.

  이 변환이 낡은 사회를 깊이와 넓이에서 충분히 분해시키자마자, 또 노동자가 프롤레타리아로 전환되고 그들의 노동조건이 자본으로 전환되자마자, 그리고 또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이 자기 발로 서게 되자마자, 노동이 더욱더 사회화 되는 것, 토지와 기타 생산수단이 사회적으로 이용되는 생산수단[즉 공동의 생산수단]으로 더욱더 전환되는 것, 따라서 또 사적 소유자를 더욱더 수탈하는 것 - 이러한 것들은 새로운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제 수탈의 대상은 자영의 노동자가 아니라 [다수의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본가이다.

  이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자체의 내재적 법칙의 작용을 통해, 즉 자본의 집중을 통해 수행된다. 항상 한 자본가가 많은 자본가를 파멸시킨다. 이러한 집중[즉 소수 자본가에 의한 다수 자본가의 수탈]과 병행해 기타의 발전도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예컨대 노동과정의 협업적 형태의 성장, 과학의 의식적 기술적 적용, 토지의 계획적 이용, 노동수단이 공동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전환되는 것, 모든 생산수단이 결합된 사회화된 노동의 생산수단으로 사용됨으로써 절약되는 것, 각국의 국민들이 세계시장의 그물에 얽히게 되는 것, 따라서 또 자본주의 체제의 국제적 성격의 증대 등등이 더욱더 대규모로 일어난다. 이 전환과정의 모든 이익을 가로채고 독점하는 대자본가의 수는 끊임없이 줄어들지만, 빈곤·억압·예속·타락·착취의 정도는 더욱더 증대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 수가 계속 증가하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과정의 메커니즘 그 자체에 의해 훈련되고 통일되며 조직되는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반항도 또한 증대한다. 자본의 독점은 [이 독점과 더불어 또 이 독점 밑에서 번창해 온] 그 생산방식의 속박으로 된다. 생산수단의 집중과 노동의 사회화는 마침내 그 자본주의적 외피와 양립할 수 없는 점에 도달한다. 자본주의적 외피는 파열된다.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의 조종이 울린다. 수탈자가 수탈당한다.”  (1권, 1047쪽)


  첫 번째 발제는 여기서 마무리하는 바이다. 남한의 농업 생산이 점차 자본주의화 되어 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이 과정에서 소자본의 몰락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본 발제의 결론이다. 물론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듯이, ‘소자본의 몰락’ 과정은 너무나 폭력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제 이 문제에 대응해 나가기 위한 방법을 다음의 발제에서 이야기 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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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에 앞서 윤수종은, 호당 농가 소득이 도시 근로자 소득의 75% 수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개의 경우 ‘평균소득’이라는 개념은 신뢰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예를 들어, 1조 7천억원의 재산을 가진 이건희와 통장 잔고 0원을 자랑하는 나의 ‘평균 소득’은 8천 5백억원이지 않은가. 특히 농촌 사회에서는 농업 인구가 대개 고령화 되어 있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도시와의 평균 소득 비교가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물론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농촌은 도시에 비해 문화적·사회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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