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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노동자 있긴 있는 거야?

귀족 노동자 있긴 있는 거야?


고난 

  귀족! 노동자!  귀족노동자? 


· 귀족 : 혈통·문벌·재산·공적 등에 의하여 일반 민중과는 다른 특별한 정치적·법제적 특권을 부여받은 사람, 또는 그 집단.

· 노동자 :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못하고 노동력을 팔아 자본가에게 임금을 받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 또는 그 집단

 귀족노동자. 중세 봉건시대의 최상위층과 자본주의로 이행하며 발생한 계급을 나타내는 두 단어가 나란히 쓰이는 아이러니한 용어. 이는 ‘노동자 중에 귀족’이라는 의미로 철밥통을 ‘약속받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자본과 정권은 이러한 귀족노동자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고 있다.


 투쟁과 “밥통”  


 자본가들의 이윤 창출에 장애가 되기 때문에 자본의 나팔수인 부르주아 언론에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이나 임금인상 투쟁을 당연히 나쁘게 그린다. 특히, 고액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진 LG 칼텍스정유나 항공사 노동자들의 경우는 나라경제는 생각도 안하는 극단적 이기주의에 빠진 존재로 묘사했다. 항공업계가 파업에 돌입해 휴가철 해외 여행객 뿐만 아니라 반도체나 휴대 전화 등의 효자 수출품의 발목이 잡힐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호’를 침몰시키려 한다는 등의 기사를 내보냈다.1) 내수침체와 유가 상승, 물가상승이 지속되고 청년 실업이 50만에 육박, 실업률이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상황에서 “나라가 잘 돼야 내가 잘되고, 내가 잘 돼야 나라가 잘 된다.” 라는 것만큼 쉽게 수긍되는 구호로 여론을 공략하고 있다. 다음의 기사를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성남시 분당에 사는 정유미(여ㆍ24) 씨는 "일반 직장인의 경우 적은 임금과 수준 낮은 사원복지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회사와 함께 참고 견디는 것"이라며 "업무의 특수성을 이용해 시민과 국가를 볼모로 자신의 밥그릇 싸움에 치중하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성토했다. 네이버 자유게시판에 글을 올린 `독수리`라는 필명의 네티즌은 "대형 비행기를 모는 기장의 경우 최고 1억7000만원이나 받는 것을 안 뒤 허탈했다"며 "해마다 성수기를 이용해 파업에 돌입하는 심보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전했다. <헤럴드경제 2004.07.29 “남부러운 고액연봉받으며 툭하면 파업·파업” >

 이처럼 대국민에 대한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비판적인 여론공격으로 노조가 심각하게 고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현대자동차노조는 닷새 만에 파업을 정리했다. 또,  LG 칼텍스 노조는 고임금공세로 인해 여론이 악화된 상태에서 ‘김선일씨 참수 재현’으로 구설수에 오르더니 흐지부지 파업을 종결짓고 말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올해만 같은 협상’이 내년에도 이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


 하지만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는 단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본은 더 많은 초과 착취를 하기 위해 비정규직을 만들어 놓고 그들과 정규직 사이를 이간질함으로써 이득을 챙기고 있다. 이 때에도 귀족노동자 이데올로기는 효과적으로 작용한다.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의 약 60~70% 정도만 받고, 노동3권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자본의 논리에 휘말리기 쉽다. 정규직 노동자가 자신들의 몫까지 가져간다는 것이나, 강성노조 덕분에 힘들게 일하지 않아도 돈 많이 벌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몇몇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을 자신의 밥통을 지켜주는 안전장치로 사고하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에게 상대적 박탈감과 적대감을 느끼고 있으며, 정규직은 비정규직 노조 설립이나, 임금 협상 투쟁에 그들과 함께 하지 않고 방관하는 경우가 많다. 그 예로, 현대자동차 하청 노조에서는 원청 노조와 맞춰서 임금 협상 투쟁을 진행하려고 했으나, 원청노조가 투쟁을 먼저 끝내버리고 만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의 문제를 노동자 계급의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 자본은 노동계급의 분열과 전반적인 노동유연화를 얻어간다. 자본은 정규직에게 경기 침체를 구실로 삼아 이들에 대한 노동 조건의 하락과 양보를 강요하기 위한 술책을 짜내고 있기 때문이다.

 잠시 2002년 겨울을 생각해본다. 노무현은 비정규직의 이러한 열악한 상황을 ‘가엾게’ 여겼는지, 표를 구걸하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2002년 대선 후보 정책토론회에서 이들의 처우 개선을 약속했다. 하지만, 집권 후 열사 정국에서 그는 이제 더 이상 죽음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때는 지났고, 정규직 노동자는 자기 배만 불리지 말고 갖고 있는 ‘밥통’을 비정규직에게 나눠주자고 말했다. 뭐 뀐 놈이 성낸다더니, 애초에 비정규직을 만든 것은 누구이며, 갈라놓고 분열 책동을 한 것은 누구이며, 노동자들을 일상적으로 착취해온 것은 누구인데 이렇게 기만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인가.

  정규직 노동자는 왜 그리도 많은 임금을 받는다고 생각하는가? 아님 실제로 그들이 ‘귀족’ 이라는 이름을 붙여질 만큼 쉽게 돈벌고 있다고 여겨지는가? 한때 인기 신랑감 후보에도 올랐던 현대자동차 생산직 노동자의 연봉은 6000만원이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이 정도의 돈을 받으려면 20년 근속자가 12시간 맞교대근무로 365일 중에 380여 일을 일해야 한다!!


“당신의 굳센 팔이 원한다면 모든 수레바퀴는 멈출 것이다.”


 왜곡된 실상을 깨닫고 자본의 이데올로기 공세의 본질을 알아차렸다면 이제 우리는 다음의  문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이러한 파업이 일어나는 것일까? 고임금은 아니더라도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비해 먹고 살만하잖아? 라는 질문에 단순히 돈을 더 받기 위해서라고 답하기는 뭔가 부족하다. 레닌이 말하고 있듯이 이는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자본가들에 대항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야기하기 때문이며, 생산이 대규모일 때 투쟁은 필연적으로 파업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이 가진 생산수단에 노동력을 적용하여 가치를 생산한다. 그러나 자본가는 그들이 가족과 함께 겨우 생존할 만큼의 임금만을 지불한다. 반면 노동자들이 이것을 초과하여 생산하는 모든 것은 이윤으로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간다. 따라서 자본가와 노동자가 임금 문제를 가지고 싸우는 것은 당연한 문제가 된다. 그런데 개별 노동자는 자본가 앞에서 절대적으로 무력하게 되므로 노동자들이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 노동자들이 개별적으로 자본가들과 거래해야 한다면, 자본가들의 이윤을 얻도록 쉬지 않고 노예처럼 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소자본가가가 대자본가들에 의해 더욱 더 몰락할수록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저항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모든 파업은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지위가 절망적이지 않으며 그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며, 자본가 계급 전체 그리고 노동자 계급 전체를 생각하도록 가르친다.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단결했을 때에만 자본가들에 대항해 투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즉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귀족’ 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뿐이며, 개별적으로 활동했으면 그들의 노예가 될 뻔했으나 공동행동을 통해서만이 겨우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귀족 노동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노동자란 자본가들에 의해 착취당하는 계급이기 때문이다.


 “나는 재빨리 그 녀석의 목을 조였지.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그 망할 녀석에겐 목이 없더란 말이야.” 3)

 

 




1) 세계일보 2004.07.30 “귀족노조들 해도 너무해”



 

2) 레닌 「파업에 관하여」1899. 전진출판사 레닌저작집 1권



 

3) 로자룩셈부르크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96p 우스펜스키의 소설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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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2-1. 학생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보론 2-1. 학생회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발제 : 김성렬


 0.들어가며


  학생회라고 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를까? 학우들의 복지를 위한 공간? 아니면 새터, 대동제 주점, 고연전 참가 등 매 달 있는 달력사업을 학우들과 함께 하는 공간? 이런 생각들이 하나로 모이는 지점이 바로 현재 학생회에 대한 학우들의 인식틀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대중자치조합’이다. 대중자치조합이라면 말 자체가 무슨 의미인지 확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자. 학우들의 생각은 개개인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학생회라는 틀은 기본적으로 단일한 ‘정치’를 바탕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우들로 구성된다. 따라서 학생회에 대해 ‘대중자치조합’이라는 것은 다양한 생각을 가진 학우들 즉 대중들이 모여 학생회 행사를 함께 만들고 진행하는 조합적 틀을 의미한다. 이런 학생회에 대해 많은 사람들 혹은 단체들은 시각을 달리하기도 한다. 이제부터 학생회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다양한 담론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1. 학생회가 노동조합인가?


  학생회에 대해 노동조합이라고 바라보는 시각이 있다. 그렇다면 ’학생이 노동자와 똑같다고 말하는 건가?’하는 의문이 금방 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학생을 노동자와 동일하게 바라보는 단체에서는 학생을 ‘사회적 노동자’라고 부르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가 열심히 일하더라도 일한 만큼 임금을 받지 못하는 모순에 처하듯이 학생 역시 이 체제에서 학생으로 살아가기에 고통 받고 있기 때문에 큰 틀에서 사회적으로 보면 노동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라면 자본주의 체제인 남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다 ‘노동자’가 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를 변혁의 길로 이끌 수 있는 계급은 어느 계급인가에 대한 명확한 분석은 어느 새 희석된 채 모두가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또한 학생이 사회적 노동자라고 주장하면서 수업에 대해 ‘수업노동’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학생 대중의 이해가 다름을 사고하지 못한 것이다. 학생들 중에서 수업에 대해 미래의 사회진출에 있어 자신의 노동력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높은 학점을 받으려고 결코 강제적이지 않은 ‘능동적’으로 열심히 듣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생을 단일한 이해를 가진 대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체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다양한 조류에 맞물려 있는 것이 바로 학원사회이며, 따라서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학생을 사회적 노동자로 바라보는 경향에서는 학생회와 노동조합은 별반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에서 임금인상 등 경제적 요구를 주장하는 경제투쟁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에 기반한 여러 사안에 대해 싸우는 정치투쟁으로의 상승이라는 논리가 학생회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즉 등록금인상 및 학내 민주화를 위해 싸우는 교육투쟁(경제투쟁)을 바탕으로 하여 반전투쟁이라든지 노동자투쟁에 연대(정치투쟁)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앞서 언급했듯 아직 직접적인 생산관계에 위치하지 않은 학생을 무리하게 ‘사회적 노동자’라고 설정하는 그 자체에 이미 오류가 있으며, 따라서 학생대중의 이해는 단일하다는 전제 아래 노동조합처럼 학생회를 중심으로 운동을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 역시 오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2.‘조직’의 형식은 문제가 안 된다! 오직 운동만이!


  학생회에 대해 대중자치조합으로 바라보고 여러 자치단위와 더불어 하나의 의미있는 정치적 공간이라고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시각은 크게 문제될 것이 없으며 오히려 바르게 분석하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 하지만 문제는 학생회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이 왜 위기에 빠졌는지, 학생회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지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우선 이렇게 주장하는 단체에서는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하거나 붕괴해가고 있는 것은 위기의 결과이지 원인은 아니다. 다시 말해 학생운동의 위기로 인해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지 학생회가 학우들로부터 보편성을 상실했기 때문에 학생운동의 위기가 온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현재 학생운동의 위기는 어디까지나 융합의 위기일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은 바로 학생운동의 위기의 원인이 무엇인가이다. 과연 변화된 학생대중과의 융합의 위기인가? 그렇다면 다시 학생대중이 왜 변화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80년대의 서슬 퍼런 군사파시즘의 광풍이 불던 시기에는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사실상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학원을 중심으로 사회 곳곳에서 벌어졌었다. 따라서 학생대중들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단일한 행동을 할 수 있었고, 그 때 학생회란 학생대중들을 하나로 묶는 효율적인 틀이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와서 어느 정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안착화되고 강화되자, 더 이상 학원사회에서 단일한 정치적 행동을 벌일 수 있는 기제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히려 전체 사회의 정치적 조류에 따라 학생대중의 정치적 이해는 더욱더 선명하게 분화되어 갔다. 따라서 기존 학생운동의 방식이 학생회 중심이었다면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는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단체에서는 학생운동의 위기를 학생대중과의 융합의 위기로 보는데, 이는 학원사회를 전체 사회에 맞물려 존재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학생대중의 이해를 바탕을 둔 운동이 학생운동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학생대중의 이해는 단일하게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은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학생회에 대한 개입에 있어서 ‘조직’의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운동’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운동이란 것이 정치적 방향성에 따른 일련의 실천 활동임을 고려해 볼 때, 대중자치조합으로서의 학생회에 대한 개입은 더욱더 조직적인 판단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럴 때에만 학생회 활동을 통해 조직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이 단체에서 바라보는 학생회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은 크게 문제될 것은 없으나, 그러한 입장이 도출되는 과정은 상이한 입장 차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


  위에서 언급한 두 단체에서는 기본적으로 학생회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최근 학생회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 하며 ‘모두가 행복한 학생평의회’를 일각에서 주장하기도 했다. 학생평의회라는 말 자체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학생평의회란 말 그대로 ‘총학생회-단대학생회-꽈학생회’로 이어지는 기존 학원사회 구조가 아닌 모두가 참여할 수 있고, 모두가 자신의 이해를 반영할 수 있는 ‘자율과 공존’이 어우러지는 공간을 말한다. 이러한 모습을 가진 학생평의회는 대다수의 학생들이 학생회에 대해 불필요하다는 불만을 가진 지금의 상황에 바람직한 것으로 비춰질 수도 이다.

  그러나 학생평의회를 주장하는 단체에서는 학원사회를 전체 사회와 유리된 하나의 이상적인 ‘꼬뮌’으로 바라본다는 것에 우선 문제가 있다. 학원사회가 하나의 꼬뮌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의 시야를 전체 사회로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학원사회 그 자체로 확 좁게 만들며, 이 공간 자체가 절대시 되는 경향을 갖기 때문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두 단체에 비해 이 단체에서는 학생대중의 이해가 단일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대중운동이란 학생대중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중요하다며 학생대중들의 이해에 따라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으로 결국 학원사회를 꼬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전제가 크게 작용함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학생회를 해체하고 학생평의회를 만들자는 주장은 그 동안 학생회라는 틀에 대해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긴 했지만 전체 사회와 맞물린 학원사회를 간과함으로써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라고 할 수 있다.


 4.나가며


  학생회에 대한 입장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입장 하나 하나가 다 다르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세 입장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즉 학생대중이 단일한 이해를 가졌다고 바라보건 그렇지 않건 간에 학원사회에 안에서 학생대중의 이해를 바탕으로 운동을 만들어 가려는 것이다. 과연 학생운동이 학생대중의 보편적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에 대해 학생들의 정치적 의식/이해 자체가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은 옳지 않다는 앞에서 수차례 언급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떠한 방향의 학생운동이 진정 전체운동과 맞물리는 운동이 될 것인가? 이런 입장 아래 학생회에 대해서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라는 고민을 우리는 새롭게 가질 수 있다. 이제 고민의 해결방안에 대한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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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학생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발제 2. 학생회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요?


발제 : 녹테잎


 1. 들어가며


  여기 계신 학우 여러분 중에는 지금 학생회를 고민하고 있는 분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학생운동’이라는 것도 고민하고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글을 쓴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스럽습니다. 혹 여러분이 학생회를 건설하고 기획하는데 있어 제 글이 참고자료로 쓰일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학생회를 준비하기 위한 저의 고민이 미숙하고 별로 깊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여기 계신 학우여러분들과 저의 고민을 나누고 함께 논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학생회에 대한 단상이나 그것의 역사적 변화에 대해서는 다들 이전 발제를 통해 확인하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시기에 있어 학생회가 80-90년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전국적으로 봤을 때 학생회라는 것이 이정도로 남아있는 것도 고대 외에는 드문 것이 사실이고, 그 중에서도 90년대와 같은 모습으로 학생회가 구성되고 진행되는 곳도 많지 않습니다. (사실 학생회의 전통이 많이 남아있는 과반의 학우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대에 일반적인 과반 -학생회란 틀이 아직 남아있긴 하지만 매년 집행부 할 사람 남기는 것도 겨우겨우 하는- 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려 합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대로 지금의 대부분의(고대의) 학생회는 집행부 몇몇을 남기기도 힘들게 그럭저럭 돌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그래서 과반에서 정치적인 사업을 만들기조차 힘들다고 느끼실 겁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 대해 너무 안타깝다고만 생각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생사회라는 것은 전반적으로 그 전체사회가 어떻게 흘러가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고, 지금에 학생회도 그러한 사회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집회가 매일같이 있었고, 노동자들의 파업과 강고한 투쟁이 자본의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많이 일어나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투쟁에서 패배하였고, 그 후로는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은 많이 줄었고, 실제 집회도 많이 줄었으니까요. 좋습니다. 80년대를 생각해 봅시다. 사실 학생회라는 공간은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대중투쟁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로는 어느 정도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정착되면서 그러한 전선이 해체되었습니다. 이것이 학생운동이 쇠퇴하는 중요한 계기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이후에 대학 내 구조조정에 일환으로 들어온 학부제가 과공동체라는 최소한의 문화까지도 위태위태하게 만들었습니다. 즉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회=학생운동’라는 공식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고, 학생회 공동체마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했던 것입니다.


 2.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처음에 길게 이야기를 했던 이유는 학생회라는 것이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여러 과정을 통해 쇠퇴했고 사실 학생사회는 전체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제가 말할 내용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있는 현실에서 시작하자”고. 현실과 학생회의 연관을 보지 않고 학생회를 이야기 하는 시도는 공상적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거기에 개입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옳은 자세이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고려해야 할 것은 우리의 정치. 즉 자신이 운동이란 것을 하는 활동가로서 과에서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학생회라는 것 자체를 물신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재미있게 모여서 놀기 위한 공간이라면 다른 공간도 만들 수 있고, 활동가로서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도 굳이 학생회일 필요가 없겠지요. 학회나 동아리 등 여러 방법을 통해서 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단지 지금 고대의 상황에서는 아직도 과학생회가 틀이라 하더라도 존재하고, 새로운 학회를 만드는 것보다, 있는 과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면서 고민을 푸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지요. 물론 과반 문화가 완전히 없어진 곳에서는 과를 복원하는 것보다 다른 공간을 통해 활동을 만나고 많은 학우들을 만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학생회는 우리의 정치적 입장을 이야기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공간입니다.


 3. 과반활동을 준비하는 자세


  과반활동을 하는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까요?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한 가지는 과 활동에 헌신적으로 임하려는 자세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녹아나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배치하려 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사람의 활동가로서 자신이 활동하는 공간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은 당위적인 부분일수도 있겠지만 두 번째 임무를 소화하기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활동가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책임감과 믿음을 주는 모습이 필요하고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풀기에도 그렇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있기 때문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새터를 준비한다고 합시다. 여/남에 대한 성폭력문제에 대해서 문제제기 하고 그것을 만들기 위한 실천을 벌이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초기 새터 기획단에서부터 적극적으로 함께하면서 기획회의에서 이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제기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새터를 가서 “반성폭력자치내규가 필요하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겠죠. (쟤는 평소에는 암 것도 안하다 왜 저래? 운동권은 다 저래? 등등의 수 없는 비판들...)

  그리고 첫 번째 임무에서 한 가지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학생회에서 열의를 가지고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집행부(혹은 과장)를 결의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학생회는 일종의 조합이기 때문에 친목이나 과학생회 싸이클에 따라 하기 싫어도 해야 하는 사업 역시 존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고연전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그런데 고연전을 하고 싶어 하는 학우들은 굉장히 많죠. 그렇다면 어찌 해야 할까요? 그 학우들을 일일이 만나면서 고연전에 대한 비판 등을 통해 과내에 고연전 반대 흐름을 키우고 고연전을 가지 않아야 할까요? 물론 역량이 되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좋겠죠. 하지만 그런 역량이 되지 않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죠. 이에 대해 인정하지 않고, 그래도 가기 싫다고 해서 안가면 학우들에게 무지하게 반감을 사겠죠?^^; 그렇다면 과 집부 혹은 과장으로서는 고연전을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만들 수 있는 실천들(지하철에서 응원을 하지 말라는 내용을 유인물로 돌리거나 하는 등)을 최대한으로 하면서 고연전을 학우들과 함께 가서 여러 실무를 해야 하겠지요. 하기 싫다 하여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고연전이 싫은 이유는 무진장 힘든 응원과, 지하철에서 일어나는 정신 나가 보이는 행동들- 응원이나 FM등등- 인데,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이러한 것들에 대해 문제제기 조차 하지 못하겠지요. 혹 들어가기 싫은 회의가 있다 해도, 과에서 필요한 회의라고 하면 들어가야 할 경우도 있겠구요. 정치적 입장을 가진 활동가와 조합에서 활동하는 집부원의 역할에서는 서로 상치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에 대해서 그것을 마냥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역량에 따라 할 수 있는 실천을 최대한으로 하면서 그것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활동가로서의 정치적 입장을 관철시키고 그러한 사업을 배치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지금의 사회를 자본주의사회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이 사회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꺼떡하면 사람들이 생활고에 못이겨 죽고, 매일같이 짤리는 노동자들이 있고, 국적이 다르단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까지 몰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있고...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이 잘못된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고, 또 실질적으로 바꿔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투쟁해야 하겠지요. 저는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심적인 사람들이 노동자라고 생각합니다. 또 그들이 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저는 지금 학생입니다. 그러면 제가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는 학생운동이겠지요? 그리고 제가 해야 하는 학생운동은 학우들과 고민을 나누면서 학우들이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도록 하는 것이고요. 이러한 제 입장을 알려나가고, 논의하는 일을 과내에서도 지속적으로 해야 하겠지요. 그 방법은 무지하게 다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공간이 지속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의 학생회는 몇몇 결의 높은 사람들이 붙잡고 있지 않으면, 굉장히 빠른 시간에 무너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한 해 한해 근근이 사업만 꾸리는 것도 힘들지요. 그렇기 때문에 학생회에서 자신이 지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공간과, 사업의 틀을 만들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과에서는 한 달에 한번 정기토론회를 열도록 한다. 우리 집행부에서는 매년 몇 월 달에 투쟁하는 노동자나 사회인사 들을 초청해서 간담회를 진행 한다 등등... 꽤나 중장기적인 전망을 가지고 봐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성이란 것은 참 무섭습니다. 요즘 4·18에 참여하는 사람은 몇 안 되지만 매년 진행되고 왠지 당연히 뛰어야 할 것 같잖아요? 이런 식으로 이 맘 때쯤 되면 뭐 하겠구나 하는 식의 사업의 틀을 만드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정착되면 그 공간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 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워지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2-3년 동안의 철저하고 현실적인 계획을 가지고 진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핵심적인 것은 그 틀 내에서 헌신적인 참여와 기획을 통해 자신의 정치를 이야기 하고 그것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겠지요. 학생회 전체적으로 사업을 배치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부서별로 사업을 배치시키는 것이 관성이 되기에는 좋을 것입니다.(예를 들면 학술부에서는 매달 한 번씩 주제를 가지고 토론회를 열고 내부논의를 통해 신문을 발간하는 등의 것은 (식상하지만) 매우 좋은 방법이겠지요.) 물론 구체적인 방법은 창발적이고 다양하게 나올 수 있겠지요. 한 가지 명심할 것은 너무 무리한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행부가 두 명 있는 과에서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토론회를 하고 매주 그에 관한 신문을 낼꺼야’라고 기획한다면 훌륭한 활동정신이기는 하지만 실행되기 힘들겠죠.


 4. 정리하며


  길게 썼던 제 글을 정리해야 될 것 같군요. 핵심적인 것만 정리하자면,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기획하자.’, ‘조합 활동가로서 헌신적으로 참여하자’, ‘지속적으로 갈 수 있는 사업을 만들자’ 뭐 이정도 되겠죠?

  다들 상황이 안 좋다 하여도 낙관적으로 생각하면서 현실에 입각한 학생회 활동들 열심히 펼쳐 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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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1-1. 과반학생회, 그리고 단대 학생회/총학생회

보론 1-1. 과반학생회, 그리고 단대 학생회/총학생회


발제 : 고난


 위기? 위기!


  흔히 학생회, 또는 학생운동의 위기라고 말한다. 물론 과반 학생회에도 이 말은 적용된다. 매년 과반 학생회는 건설되지만, 학생회 사업을 만들고 이끌어나갈 주체들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고, 학생회 활동을 통한 인자 재생산은 너무나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자신들을 자본주의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에 열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반 학생회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단대 학생회/총학생회와 차이점을 보인다. (이는 단순히, 과반 ‘학생회’에서만 희망을 발견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각 과반의 상황에 따라, 활동가들은 학회나 소모임을 통해서 자신의 정치를 말할 수도 있다.) 이 글에서는 과반 학생회의 틀거리가 남아있는 고대 상황에서, 과반학생회와 단대 학생회/총학생회와의 질적인 차이를 확인함으로써 그것의 유의미성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모여라! 모여라! 과반 동산으로.


  과 학생회와 단대/총학을 비교해봤을 때 가장 명확한 차이점은 바로 구성원들 간의 친밀성이다. 물론 학부제가 시행됨으로써 그 긴밀성은 많이 약해졌고, 많은 과반 학생회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과반에서는 학생회를 꾸리고 그것을 통해 대중 사업을 벌이고 있다. 대부분 학생들은 대학생활을 과반(혹은 과방)에 기반해 시작하며, 과내의 학회나 소모임이나 동아리에 가입하며 ‘재미있는’ 나날을 보낸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가 FM(개인적으로 필자는 옳지 못한 방식이라 생각하지만)이다. 대다수의 신입생은 자신이 무슨 과반이며, 앞으로 이 과반 구성원인 선배, 동기들과 잘 지내보겠다고 소리지르는 과정을 거친다. 이러한 신입생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사업들을 벌이는 과반학생회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점은 과반학생회가 공동체적 속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얼마 후면 치러질 과반별 학생회장 선거에서 대다수 선본은 ‘과반 문화의 복원’ 이나, ‘새로운 관계맺음을 위해’ 등을 모토로 내세우며 공동체로의 유대감을 견결하게 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신입생, 동기들과 함께 선본을 뛰면서, 활동가들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치에 대해 풀어나가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신뢰감을 기반으로 했을 때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이다.


 흩어지는 걸까?


  반면, 단대/총학 선거의 경우 그들에게는 뭉쳐져 있는 공동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흩어져 있는 학생 대중이 존재할 뿐이다. 총학에 비해 단대의 경우 그것이 덜 하긴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든 단위가 단대부터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은 애초에 단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선본을 꾸리며 그것을 토대로 활동을 해나간다. 이러한 활동을 벌여나가는 데 있어, 같은 공동체에 기반하고 있는 사람들로서의 인간관계를 통하거나, ‘공동체’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까라는 생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를 어떻게 대중들에게 알려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거에서 자신들의 정치를 명확히 학생들에게 알려내고, 그것에 동의하면 자신들을 뽑을 것을 설득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게 사실이다. 각 선본들은 자신의 정치를 선명하게 드러내기보다는 ‘학생들의 복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라는 내용으로 표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학생들은 당황하고, 그들이 선본을 꾸렸던 정치적 의도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비약일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오로지 수권만을 목적하는 부정직한 태도일 수 있으며, 말 그대로 학생대중을 수동화/대상화 하는 것일 수 있다.


 그래. 그래 그게 좋겠다.!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사항을 살펴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공동체적 속성이 강한 과반 학생회를 이끌어가는 데에 가담하는 학생들의 층은 다양하다. 아무런 정치적 고민도 없이 생활의 걱정도 없이 마치 고등학교 때 반장, 부반장을 하듯 조합적인 사업에만 매달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학생 사회에 투영해 상이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학생들에게 알려 나가는 노력을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조합 사업만을 위한 틀로서 학생회를 사고하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치를 학생회를 잡기 위해 숨기는 일 없이 당당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하며, 이는 어떤 학생회의 경우에라도 마찬가지이다. 덧붙이자면, 같은 공간에서 함께 숨쉬고 얘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과반 학생회의 경우와 그렇지 못한 단대/총학은 자신의 정치를 풀어내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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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어느 전직 학생회장의 회고

발제 1. 어느 전직 학생회장의 회고

발제 : (주)지구학생회컨설턴트 대표 우주


  이 글은 가상의 전직 학생회장의 회고입니다. 가상이지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이 회고록이 말하고 있는 학생회의 현실은 누구나 한번쯤 고민해본 것들이란 점입니다.


 2002년 3월. 입학.


  나도 이제 대학생. 대학에는 학생회란 것이 있다는 것을 난 익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내가 대학에 와서 정말 하고 싶었던 것, 바로 학생운동을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대충 들어서 알고 있다. 나는 반학생회가 배정되자마자 집행부 중에 하나인 사회부에 들어갔다.

  많은 집회를 다니게 되었고 선배, 동기들과의 토론이 계속되었다. 아, 새로운 세상!

  음,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나와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발전노조의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은 동기 60명 중에 사회부 3명뿐인 것만 같다. 학생운동 안하면 왕따 되던 시절은 80년대의 이야기였던 것인가!! 나는 상황파악을 잘못하고 있는 건가? 학생회는 다 투쟁하려고 만들어진 건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투쟁하는 사람들은 우리 학생회에 딱 4명이고 겨우겨우 집행부 하나 운영하고 있다. 그것도 학우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아닌 전폭적인 무관심 속에서!! 윽....!! 이제 난 고민에 빠졌다. 선배들이야 취직하기에 바쁘니까 그렇다 쳐도, 왜 동기들마저도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지 않는 걸까?    


  오늘의 결론: 더 이상 내가 꿈꿔왔던 80년대의 ‘투쟁에올인학생회’는 현실에 없다. 지금 학생회는 학생들의 분노를 모아내는 곳이 아니라, 학생들의 대학생활을 뒷받침해주는 곳으로 전락해 있다. 오히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 자본가의 앞잡이 노무현을 지지하고 있다!


 2002년 말. 그리고 2003년 말.   


  그래, 그럼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투쟁을 지지하도록 ‘대중운동’을 해보자!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총학생회 선거. 나는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학우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래서 난 나의 생각과 가장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은 사람들과 함께 선거운동을 하려고 한다.

  …

  선거운동을 마쳤다. 이번 선거에는 다양한 정치를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야한다고 하는 사람들, 사회당을 지지하자는 사람들, NGO가 대안이라고 하는 사람들, ‘비운동권’이라고 하면서 기존의 학생운동에 대한 온갖 왜곡과 반동적인 정책을 들고 나온 사람들까지. 그리고 선거를 나가지 않더라도 ‘유권자모임’, ‘여학생위원회’등에서 공약을 평가하는 등 각자의 활동을 펼쳐나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학생들이 지향하고 있는 정치가 다름을 볼 수 있고 내 생각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누구인지 가늠해볼 수 있는 때일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각 선본들은 자신들의 정치를 부각시켜 얘기하기 보다는 복지공약을 부각시켰고, 이는 유권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각 선본의 정치는 모른 채 투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총학생회장의 한총련 의장 출마 사건이다. 총학생회 선거 시기에는 한총련출신 후보라는 것을 숨겼던 것이다. 학우들은 그 선본이 한총련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이번에 당선된 선본은 ‘신자유주의분쇄’를 말하는 선본이었다. 음, 이런 선본이 당선될 정도면 고대생의 대부분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고 있다는 말인가? 아니 근데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은 오히려 이 세상을 긍정하고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조건들을 충실히 갖춰나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대선에서는 노무현 찍고. 허허 이게 무슨 모순이람. 만약에 노사모가 학내에서 단체를 만들고 열심히 활동한다면 당선되기는 수월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기에 다른 선본들이 당선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공약에 있어서도 정치활동 공약과 복지공약이 서로 모순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자본주의를 외치는 선본이 출석체크와 참살이길 할인 등의 기능을 모은 카드를 공약으로 들고 나온 것이었다. 전형적인 노동자 통제 수단과 불경기 수요확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수단의 결합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선본원 내에서도 비일비재하다. 자기 선본의 정치에 동의하고서 선거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는 선배라서 시작한 경우가 정말 많았다. 2003년 선거에서는 사실 어느 두 선본의 정책이 거의 똑같았기 때문에 문제가 더 심하게 드러났다. 양쪽의 정치의 차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경쟁적인 선거운동을 거치자 감정적으로 서로를 대하게 되었고, 이는 올해에 서로에 대해서 이유 없는 적개심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는 선거운동은 안하게 됐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선거에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열사들의 투쟁을 학내에서 알려나가기로 했다. 사실, 학생운동 하는 사람들은 열사들의 투쟁을 학교 내에서 열심히 알려나가야 하는 것 아닌가? 선거를 나갔다고 이 얘기를 못할 거 없으며, 선거를 안 나갔다고 못할 거 없다. 어떻게든 자기 현실에 맞춰서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런데 오히려 선거 시기에 이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음...무엇이 ‘대중운동’이지?


  오늘의 교훈:

1. 선거운동은 정치활동이다. 한번 경험 삼아 해볼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의생각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내가 이 시기에 무엇을 할 것인지 생각해보자!

2. 선거운동은 솔직해야 한다. 내가 한총련이면 한총련, 열린우리당이면 열린우리당, 그렇게 껄끄럽다면 단체이름을 말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정치를 솔직하게 얘기해야한다. 그리고 동의를 구해내야 한다. 복지공약으로 동의를 얻는 것이 아니라, 정치로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선거운동을 하는 목적이다.

 2003년. 드디어 학생회장.


  학생회장 임기가 시작되었다. 자, 새롭게 각오를 다지며 시작해보자!

  요즘 내가 느끼는 건 아직도 학생들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런 거다. 학생회는 학생들의 조합이잖아. 그런데 학생들의 조합에 학생들이 없다!? 적어도 총회를 하면 누구나 와야 하고, 선거를 하면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하는 것 아니가? 그런데 학생총회에 학생이 없고, 학생회선거에 학생이 없다!

  더 신기한건, 이러다가도 고연전만 되면 벌떼같이 모여든단 말이다! 심지어는 고연전 축구 전반전 끝나고 총회를 하자는 의견까지 나왔다. (기발하다.) 아아, 그런데 난 고연전에 반대하는데 학생회장이라 발 빼지도 못한다. 아..차라리 동아리에 있는 내 친구가 이런 준비도 할 필요도 없고 오히려 집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주변에 훨씬 많다. 난 왜 학생회를 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난 교육투쟁을 하면 사람들이 모두 관심을 가져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물론, 교육투쟁은 하루에도 백 명이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알려나갔으니 그나마 관심이 높았다. 하지만 ‘학생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까 관심이 더 높을 거야.’라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오히려, 자발적이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사안은 탄핵과 전쟁, 귀족노동자였다.

  하하하하. 자자! 이때다! 우리가 기다리던 절호의 췌안쓰! 이제 우리들이 탄핵은 부르주아 정치인들 간에 이루어지는 권력다툼인 것을 알려나가고, 파병하는 것은 오직 자본가의 이윤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귀족노동자는 없고 오직 귀족 자본가만 있다는 것을 알려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모두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똥물들이라는 점도 말해야 한다! 바쁘다 바뻐!

  아아. 그런데 학생회장으로서 할 수 있는 게 딱 3가지였다. 대자보 붙이기, 커뮤니티에 글올리기, 술자리에서 내 생각 말하기. 사실 학생회장 아니더라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들이었다ㅠㅠ 내가 학생회장을 왜 한거야!! 하긴 학생회장이라고 하니 좀 더 잘 들어주기는 한다.

  음, 그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으로 나의 정치를 말해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야! 그래그래 수요일마다 토론회를 열자. 지금 시작은 4명이지만 내년에 새내기도 받으면  점점 발전할거야. 그래, 이렇게 나의 생각을 알려나가자! 그렇게 발전하면 학회도 몇 개 더 생길 것이고, 그러면 앞으로 학생회장으로서의 역할은 이러한 학회들의 톱니바퀴를 맞춰주는 역할이 되겠네.


  오늘의 교훈: 학생들과 학생회가 맺고 있는 운명의 고리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다. 각자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고, 각각의 이해(利害)또한 전혀 같지 않다.

우리가 학생회 활동을 하는 것은 고연전을 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를 확산시키기 위해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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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What is to be done?

발제 3. What is to be done?

               -승리를 위한 안타 한방을 날려보자!


- 페나(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다시 살아나는 악몽

 앞선 발제에서 우리는 사회적 합의주의, 다시 말해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화와 타협’을 통해 손을 맞잡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지 또 노동자계급에게 해악이 되어왔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기만의 역사가 다시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다. 이수호위원장을 위시로 한 민주노총 관료들은 노동자대중에게 “이번엔 삼진아웃”을 장담하며, 노사정위 등판을 예고하고 있다. 그리하여 5월 31일, 청와대에서는 노사정(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과 자본가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서 사회적 대화와 합의를 약속하였다. 물론 지난 9월 31일 민주노총 2차 중앙운영위원회에서 노사정 교섭 재개 여부를 내년으로 미루어, 당장 하반기에 노사정 교섭틀이 가시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위원회에 참가했던 민주노총관료들의 발언만 참고하더라도 그들의 속내를 알 수가 있다.


"사회적 교섭은 사회적 합의주의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가속화되고 LG칼텍스, 코오롱 등 우리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에 대한 돌파구를 찾아야 하는 과제가 있다. 우리가 먼저 사회쟁점화하고 성과있는 투쟁을 만들기 위해 사회적 교섭을 활용하자는 것이다. 없는 것보다 훨씬 낫게 대응할 수 있다. 예를들어 하반기 운수산업에서도 철도관련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는 수단은 결국 책임있는 정부 당사자와의 교섭이다. 다른 대안이 없다."

 -이수호 민주노총 위원장


"1기 노사정위에서 엄청난 피해를 본 것에 대한 이견은 없다. 그러나 당시 우리에게 정치적 힘이 있었다면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거란 평가에도 이견은 없다. 4.15총선에서 우리의 정치환경은 변했고 우리는 사회적 교섭구조를 통해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전술이 많다"

-김형근 서비스연맹 위원장


   다시 싸움을

 이와 같이 민주노총 관료들은 민주노동당이라는 든든한 지지기반을 업고, 투쟁 일변도의 과거 방식에서 새 시대(?)에 걸맞는 대화와 타협이라는 ‘합의주의’를 계획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맞선 흐름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지난 8월 21일 결성된 ‘노사정담합 ․ 사회적 합의주의분쇄 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이하 전노투)’가 바로 그것이다. 전노투에는 전국의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20여개가 넘는 정치/현장 조직 그리고 언론단체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들은 정권과 자본이 계속해서 들이대고 있는 노동탄압의 칼날에 맞서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만들어 기만적인 사회적 합의를 분쇄하겠다는 기조로 전노투를 결성하였다. 전노투가 다양한 단체와 조직들이 총망라되어 있는 단체인만큼 내부적으로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한 상이한 정치적 인식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또 이들의 결성과 행동이 얼마나 실질적인 투쟁을 만들어 낼 수 확신을 할 수 없을 만큼 역량이 부족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어떠한가? 노동탄압은 거세져가는 데 반해 아래로부터의 대중적인 노동자들의 투쟁이 희미하기만 하다. 또, 자본의 분절전략에 의해 점점 더 노동자들 사이의 골이 깊어져만 가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금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과 잃어버리고 있는 민주노조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결성된 전노투는 분명 의미가 있으며, 또한 하반기 우리가 주목해야할 큰 흐름 중의 하나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정권과 민주노총 관료들이 싸바싸바 움직임을 벌이고 있는 사이에, 하반기가 되자마자 노동부에서는 비정규직 관련 입법안을 내놓았다. 그동안 자칭 ‘개혁’정부는 점점 늘어가는 비정규직에 대한 ‘보호 정책’을 내놓겠다고 떠들어왔다. 그럼 그 보호 입법이 대관절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비정규직의 확대양산이다. 비정규직 보호=비정규직 확대양산? 초등학생들도 =이 양쪽이 같을 때에만 쓰이는 부호라는 것도 다 알텐데, 책상에 앉아서 정책을 짜내는 양반들은 역시 기본도 안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정부가 내놓은 입법안에 따르면, 종래에 특정 직종에서만 제한되어 있던 파견 근로가 이제는 특정 직종을 제외하고는 확대된다. 애초에 정부가 비정규직 ‘철폐’가 아닌 ‘보호’를 하겠다는 데에는 자본의 탈을 쓴 자신의 입맛에 맞도록,이제는 합법적으로(!) 재편하겠다는 심산이 담겨져 있었다. 어차피 불법파견은 점점 늘어가니 이제는 법으로 그것을 보장해주는 대신, (노동자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비정규직을 보호해준다는 말로 그럴듯하게 포장을 한 것이다.


  파견법 개악 저지 투쟁으로!

 정부가 비정규직 보호입법을 발표한지 채 일주일이 되지 않은 지난 9월 16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열린 우리당 당사를 점거했다. 국민의 뜻을 하늘 같이 받들겠다던 열린우리당 측은 그동안 전 노동자의 7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어차피 너희는 우리 안 찍을 것’이라며 묵살해왔다. 점거 농성에서 전국비정규직노조대표자연대회의(준)(이하 비정규직연대회의)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대표들은 파견법 개악 철회와 비정규직 권리보장입법안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했다. 이와 같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도적인 투쟁을 통해 지난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는 총파업이 결의되었고, 다음 날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은 정부안에 문제가 있음을 시인하였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하다. 정부의 파견법 개악안은 더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정규직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안지 못하고 있는 정규직 노동자들의 단결된 투쟁이 있을 때에만 저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정규직 연대회의는 오늘도 전국에서 노동탄압에 신음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한 데로 모아 단결하고, 계급적인 연대의식으로 투쟁할 중요한 구심이 될 것이다.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도 암울한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2004년 하반기, 자본의 노동자에 대한 공격은 더욱 거세질 것이며 노동유연화와 비정규직확대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그 속에서도 자본과 정부는 노동자들에게 끊임없이 우리와 손을 잡지 않겠냐고 또다시 ‘화해와 타협’의 손을 내밀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당할 수 없지 않은가? 미약하나마 꿈틀대고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 흐름들을 우리는 부여잡고 나아가야만 한다. 앞서 이야기했던 전노투와 비정규직연대회의는 그 중요한 두 흐름이 될 것이며, 우리 학생들도 노동자들과 함께 파견법 개악저지와 비정규직 철폐, 사회적 합의주의 분쇄를 위해 목적의식적인 연대를 해 나가야 할 것이다. 노동자들을 갈라놓고, 이기주의라 매도하는 정부와 자본에 맞서는 길은 강고하고 단결된 투쟁 뿐이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 우리의 행동들이 당장의 승리를 보장하지 못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투쟁으로 승리를 위한 안타 한 방을 날려보자! 그 첫걸음으로 10월 10일 비정규직 노동자대회에 함께 할 것을 제안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견법 개악 저지와 노동유연화 분쇄투쟁에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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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 돌멩이(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1. 선한 의도, 그러나 예견된 실패


  체제를 변혁하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가 모순이 많고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망했다.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사회 전체를 점진적으로 바꾸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합의’와 동의의 절차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프로젝트.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한 의도는 역사상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외쳐지는 자유, 평등, 합의, 평화, 공생은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실상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사민주의는 그 가면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보통 이러한 견해를 개량주의 또는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왜?


  2.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이 실패한 예로서 우리는 종종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얘기한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는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세계의 많은 좌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이라며 흥분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았다. 이제 자본가들이 공장 문을 닫고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공장주의 사보타지로 생산이 중단되고 물가가 오르자 노동자들 역시 이에 맞서 결집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중재자를 자처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개각단행과 정책마련으로 지배계급(여전히!)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결과는 3년 후의 군부 쿠데타였고, 아옌데를 지원하며 실질적인 조직적 힘을 비축하지 못한 좌파는 전멸하고 말았다.

  칠레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자본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그러한 물적 토대를 이용, 사회주의 소련에 대당하기 위한 사민주의가 성행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노동당, 공산당 등이 수차례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들의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지 못했다. 길었던 전후 호황기가 끝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부터 이러한 이상은 환상일 수밖에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적인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게 있지 않다. 당연히 '국민'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진한 사민주의자들이 법 개정과 정책 마련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을 때, 금융, 산업, 상업 자본가들은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사보타지를 통해 전 사회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고 다른 자본들과 연합해 경제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언론을 통한 흑색 선전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자본의 지배력을 손상시키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실질적인 정책이 상정되면 자본은 즉각 이러한 조처들로 정부를 위협하고, 결국 이러한 정책은 철회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사민주의의 역사였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진정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의 실제적 권력을 장악해야 함이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는가.


  3. 국가와 법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국가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로 생각한다. 국가는 단지 틀로서 기능할 뿐이고 이 틀에 다른 내용물이 들어가면 그 기구의 성격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편한 환상에 불과하다. 국가기구는 관료제적 위계질서로 구조화되어 있고, 검, 경찰, 군대, 사법부, 행정부 등에서 수뇌부를 차지한 이들은 국가기구 안에서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정권을 획득한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구의 수뇌부가 자본과 실질적인 커넥션을 유지한다면 수많은 개혁정책들은 바위를 치는 계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힘은 경제력이다. 이것은 공권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공권력은 사회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권력이 출동하는 곳은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의 집회 장소이거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는 공장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장하는 안정과 질서는 누구의 것인가? 계급사회에서 '전국민'의 안정과 질서란 공문구에 불과하다. 자본가들은 국민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요구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적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을 신봉한다. 이들은 법의 개정, 제정을 통해 자본주의로 인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법은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근본적 관계를 결코 변화시킬 수가 없다. 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뿌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곁가지들일 뿐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임금노동의 메커니즘인데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법률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결핍으로 인한 빈곤이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떠한 법률도 노동계급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산자, 곧 노동계급의 소유에서 생산수단을 박탈해간 것은 경제적 발전이지 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1)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법률적 형식을 띠지 않기 때문에 법을 바꾼다고 이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조차 법의 실제적인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도 근로기준법은 존재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담보하게 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였다. 한편 노동자 계급의 결집된 힘이 미약한 2004년 현재, 파견법 및 비정규직법 개악안이 버젓이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수 의석 확보와 정책적 대안 마련에만 온 힘을 기울이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는 민주노동당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4. 의회 민주주의 - 빛 좋은 개살구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지, 아니 누구의 실속을 채워주는지를 확인하자.


  2004년 6월,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민소환'으로 좌초위기에 처했던 우고 차베스가 국민투표로 재신임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가 소환됐을 때, 자신이 쏜 화살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 격이라고들 했다. 국민소환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차베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국내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이 제도를 이용해 차베스를 소환했다.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얼마전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사회가 떠들썩했을 때 국민소환, 국민발의를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차베스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을,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고 있는 공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파업을 하고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생산을 통제하는 것, 사수대를 조직해 자본가와 공권력은 공장 내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이다.


  5. 나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민주적 절차를 따지고 평화적으로 대결할 것을 외친다면 상대방은 이들을 비웃을 것이다. 사민주의 혹은 개량주의자들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탄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이용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선동해주고, 동시에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혁명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데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립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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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자 룩셈부르크, 「개량이냐 혁명이냐」,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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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최바울(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0. 어떻게 싸워야 할까 - 강경파와 온건파?


 ① 투쟁이 계속되면 선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빨리 투쟁을 정리하고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②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돌파구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으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①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완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의 싸움에 남한의 노동자들 역시 연대해야 한다.

  ② 고용허가제가 문제가 많지만 당장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고용허가제의 안 좋은 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길이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의원들과의 정책 협의로 가능하다.


  1. ‘온건파’ ―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남한의 노동운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7-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시작된다. (이 시기 통계를 살펴보면 120만의 노동자들이 노동악법을 무시하고 3255건의 불법 파업을 벌였으며, 1400개가 넘는 신규 노조를 건설하였다.) 물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대중적인 규모로서 노동자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민주노조’로 이름 붙여진, 실제로는 회사 측과 완전히 한통속인 어용노조를 깨뜨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건설해 낸 노동조합 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왔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힘에 직면하여 운동 진영 내에서의 정치적 논쟁 역시 활발하게 벌어진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벌어졌던 열띤 논쟁은 두 가지 큰 흐름에 의해 크게 굴절된다. 하나는 91년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92-93년 경에 접어들면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안착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예전과 같은 전투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운동 주체들은 이제 이전과 같은 식의 ‘빡센 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 정당을 통해 체제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해 나가겠노라고 자신들의 전향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이 곧바로 노동조합 운동에 강하게 착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이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중소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전노협뿐만 아니라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건설된다. 그리고 바로 이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의 위원장이 오늘날 이름 높은 권영길 씨이다. 이들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사회개혁투쟁”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과 연대, 경영 참가와 정책 참가를 중요시하면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에 적극 참여하는 노선을 취했다. (바로 이러한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바로 “국민파”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전처럼 빡세게 투쟁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으니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는 상층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더 선호했던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말대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는가? 우리는 96-97의 노동법개악 투쟁의 경험과 97-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96년 말, 당시 김영삼 정권은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복수노조 금지와 제3자 개입금지를 폐지하는 대신에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도입하는 노동법 개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로 처리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제 더 이상 민주노조 운동을 군부 독재 식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정부도 인식했다는 것, 그렇다면 합법성을 인정해주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제도권 내로 포섭하면서 노동 대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해 보자는 속셈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지도부는 아래로부터의 폭발적인 대중 투쟁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파업 투쟁을 관료적으로 통제해 나가기에 급급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했을 때만이 그들이 부르짖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와의 물밑 협상에 끝까지 목을 맨 그들은 결국 파업 투쟁의 열기가 꺾일 줄 모르던 1월 26일 정부의 민주노총 합법화 약속을 대가로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해버린다. 결국 이후 여야합의로 개정된 노동법은 애초 정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노총의 국민파 지도부는 정부의 충실한 들러리로 기능했을 뿐이다.

  97-98년의 IMF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닥쳐오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탈출구는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대규모의 임금 삭감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민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정리해고제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법제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문에 조인한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속도로 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800만에 달하게 되었음을 떠올려보라! 이들 국민파 관료들은 자신들이 자본과의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되는 것 따위와 수많은 노동자 대중의 절박한 생존권을 맞바꿨던 것이다!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오늘 - 민노당의 의회 진출과 ‘새로운’ 노사정위


  국민파 관료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이 말하는 대화와 타협이 결코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이 없는 것임은 이들 관료들에 대항한 노동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97-98 노사정 합의 이후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장은 쇠파이프로 무장한 현장의 조합원들에게 점거당할 정도였다.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은 기립투표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에 의해 부결된다. 물론 이후 결의된 총파업이 기회주의적인 지도부에 의해 흐지부지되면서 이미 떠난 배를 뒤돌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국민파 관료들이 노골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말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국회에 노동자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96-97 총파업이 실패한 까닭도 자신들의 투쟁회피주의, 관료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우위의 사회적 세력관계를 반전”시키고 “구체적인 법개정 성과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치력과 교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런 논리 아래 이미 97년 대선 시기 “국민승리 21”이라는, 도대체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는 사상과는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는 정체불명의 운동을 펼친 바 있었다. (다 떠나서 이들의 선거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98년 노사정위 합의안 부결과 지도부 총사퇴, 총파업 철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토대로 하여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확대재편하여 노동자중심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것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이다.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화려한 등장은 노동자 계급의 비타협적 투쟁이 관료적으로 왜곡되고 통제된 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의 원대한 구상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과 더불어 현재 이수호 위원장의 집권 이후 가속화된 산업별노조 건설 흐름으로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그들에게 산별노조는 대정부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좋은 압박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들어 내는 정치투쟁은 민주노동당, 임금을 올려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경제투쟁은 몸집을 불린 산별노조’라는 양날개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재참여 하는 것뿐이다.

  눈여겨 볼 지점은,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 역시 명백하게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내실있는 준비 이후에 수행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 따르면 노사정위원회는 논의 의제를 대폭 확대하고, 노사정 협의의 틀을 산업별, 지역별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이 개편될 노사정위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토론을 넘어 중층적인 교섭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조직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참가를 향한 자신의 구상과 그것의 정치적 본질 ― 자본에게 완전히 굴종하는 것 ― 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노무현 정권이 자본을 위해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카드인 ‘노사관계로드맵’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의 외양을 쓰고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의 입장에서야 손뼉을 치면서 좋아할 일 아닌가! 마치 남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뒷돈을 써서 자리를 청탁하듯이, 민주노총의 관료 몇 명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줌으로써 자본의 몸집을 불릴 수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출범 첫 해부터 배달호 열사 투쟁, 화물연대 투쟁, 철도 투쟁들에 데어버린 노무현 정권은 어서어서 노동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길 원한다. 민주노총의 주문대로 정부는 노사정위를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총괄기구로 개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반기 들어 가속화 되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현재 민주노총의 숨고르기로 다소 연기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참가는 이미 시기 선택의 문제로밖에 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서 업종, 지역별로 얽힌 교섭 구조 속에서 노사정위 참가를 위한 주객관적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을 뿐이며, 이것이 노사정위 참가가 유보된 유일한 까닭이다.


  3. 사회적 합의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


  언뜻 보기에는 노사정위 참가를 비롯하여 정부/자본과 대화와 타협을 벌이자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교섭 없이 투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옳다. 하지만 개별 사업장에서의 교섭은 투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노사정위 참가의 문제는 국가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화시키려는 자본의 의도에 완전히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노동과 자본은 한 배를 탄 운명인 것인가? 노동자가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국가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분쟁을 중립적으로 중재해주는 공간인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장한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자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오로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된 폭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온건파’, ‘국민파’,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며, 그로써 그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본가 계급의 충실한 보조자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권과 자본의 본질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 역시 똑똑히 알고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산악같이 일떠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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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발제 3. 제도개선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태도는 무엇인가


 




  1. 민주주의투쟁에 대한 노동계급의 원칙적인 입장에 대해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국가보안법 개/폐를 둘러싼 논란이 연일 계속되는 가운데, 현재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성명서 발표, 일인시위 등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정작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사회적인 논란 속에서 노동계급이 가져야할 원칙적인 태도일 것이다.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동계급의 힘이 부르주아에게 위협이 될 정도가 되면 부르주아의 수많은 법과 제도들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음을 지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시민단체 중심의 투쟁에 대해 진정 국가보안법이 폐지되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부분까지 포함한 원칙적인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은 민주주의적 제 권리를 쟁취하고자 하는 ‘민주주의투쟁’이기에 이러한 민주주의투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가에 대해서는 역사 속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아직 봉건제적 질서가 강하게 남아있던 19세기 중반 프로이센에서는 구체제의 유산인 반동적 귀족세력이 실질적으로 군대 등 사회전반을 아우르는 지배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부르주아들에게 있어 정치적 지배권력을 쟁취하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당면과제였지만 노동계급의 그 혁명적 힘의 분출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인 자세로 머물고 있었다. 이는 프로이센의 공장제 공업의 발전이 영국이나 프랑스에 비해 덜 발전한 사회/경제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엥겔스는 무엇을 주장했을까? 엥겔스는 봉건적 질서가 남아있는 경우보다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있어 더욱더 유리한 공간이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이 요구하는 자유에 관한 다양한 법과 제도들이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1). 그렇다고 하여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문제이니 노동계급은 봉건적 질서에서 부르주아민주주의로의 변화를 지켜만 보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엥겔스는 분명히도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부르주아들이 반동적인 봉건귀족과 싸우는 과정에서 이를 끝까지 추진하겠는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부르주아들의 꽁무니를 따라갈 것이 아니라 독자적인 당파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2) 이는 1905년 러시아의 당면 혁명의 과제인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 있어 레닌의 주장과 전적으로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엥겔스와 마찬가지로 레닌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 있어 노동계급의 태도에 대해 정치적 자유를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에 나서야 함을 주장하였다.3) 그러면서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은 분명 ‘민중의 혁명’이라고 언급하며, 이 속에서도 ‘민중’ 그 자체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들’로 구분해야 하며, 계급적 독자성에 대해 단호하게 주장하기도 했다.4) 그러면서 레닌은 명확한 실천 방향은 러시아의 상황에서 ‘사회주의를 앞당기는 데 있어서 완전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적 공화제,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 이외에는 다른 길이 현재 존재하지도 않으며 존재 할 수 도 없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계급과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독재를 제시하였다.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의 과정에서 혁명의 주체는 부르주아들이니 노동계급은 이에 전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기회주의적 조류와 확실한 선을 긋는 동시에 실제 투쟁에 있어 물리력을 담보하기 위한 무장봉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했다.


  이렇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을 살펴보았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독자적인 당파성을 확고히 쥐고 가면서, 보다 자유로운 공간에서 계급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풍부한 토양을 만들어가는 데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상황을 그대로 남한에 적용시키기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얼마 전 탄핵사태를 경험했듯이 부르주아민주주의는 이미 안착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변혁의 과제 역시 그 당시와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엥겔스와 레닌의 주장은 상황은 다를지라도 그 주장에 담긴 보편적인 입장은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주주의투쟁에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2.구체적인 우리의 실천방안은 무엇인가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진정 고민해야 할 지점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입장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벌여낼 것인가이다. 앞서 노동계급의 역량에 따라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들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현재의 노동계급의 역량부터 살펴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요즘 신문이나 뉴스를 보면 어느 회사 노조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간다고 하는 소식을 알리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한번 파업이라도 벌어지면 국민경제를 위기에 빠뜨린다면서 노골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펴고 있다. 그래서 지하철노조에서 파업을 할 때는 사회적 명분(?)을 얻기 위해 ‘청년실업해소’라는 슬로건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그만큼 노동계급의 힘이 집약되어 조직적으로 나타는 것이 아니라 산발적으로 임금인상을 매개로 한 파업투쟁만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정치적 주체로서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국가보안법이 분명 노동계급의 투쟁에 있어 ‘친북-좌익-용공’으로 몰아붙이면서 탄압했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누구보다 먼저 국가보안법 폐지의 운동적 흐름을 만들어 가야할 노동계급은 뒷전에 있고. 시민단체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역량에 대한 현 주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과연 국가보안법을 완전히 폐지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우리는 해 봐야 한다. 부르주아 정치권에서 말하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논란은 어디까지나 ‘형법대체입법/파괴활동금지법’ 등 법률적 장치를 마련한다고 하여 사실상 제 2의 국가보안법을 준비한 상태에서 개혁성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단체에서 벌이는 투쟁은 단순히 상징적인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위한 투쟁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 그렇지는 못하다. 대부분은 시민단체에서는 ‘인권’ 운운하며, 국가보안법의 인권침해를 부각시키며 사회적 여론을 환기하는 것을 주된 활동으로 가져가고 있어서 국가보안법이 가지고 있는 그 본질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폭로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노동계급의 실천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 경험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를 개선시키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체제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급은 노동계급뿐이며, 노동계급이 투쟁에서 나서지 않는다면 부르주아의 법과 제도는 개악되면 개악되었지 ‘개선’조차 따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한 논란에 있어서도 진정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즉자적인 실천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검증된 늦지만 가장 빠른 길을 우리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계급의 현재 역량이 부족하고 국가보안법 완전철폐에 대한 입장을 가자고 투쟁을 전면적으로 벌이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냥 주저앉고 말아야 하는가? 노동계급의 역량이 더욱 강화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이는 큰 틀에서는 옳은 말이지만 우리 주변에서도 작은 실천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의 역량은 부족한 상태이지만 얼마 전 파견법 개악으로 인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신의 생존권을 쟁취하기 위해 더욱더 투쟁에 나서고 있는 상황이며, 이주노동자들은 아직도 강고하게 명동성당에서 농성단을 꾸리고 있다. 이렇게 투쟁하고자 하는 노동자들에게 대해 학생으로서 힘차게 연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투쟁을 평가하며 국가보안법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하고자 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분명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노동자들과 토론하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행동일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 학우들과 국가보안법 개/폐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진정한 해결을 위해서는 어떠한 입장이 필요한 가를 논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생각을 하고 고민을 해 보면 우리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은 참으로 많을 것이다. 그 속에서 확고히 지녀야 할 원칙적인 입장은 유지하며 다양하게 방식으로 풀어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나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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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은 그 사회적, 경제적 본질에 있어서 부르주아혁명이다. 그러나 이 올바른 맑스의 명제를 반복하여 얘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이 명제는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며 정치적 슬로건에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의 생산관계, 즉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를 기초로 한 모든 정치적 자유는 부르주아적 자유이다. 자유에 대한 요구란 주로 부르주아지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지의 대변자들은 이러한 요구를 제일 먼저 내세운다. 부르주아지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획득한 자유를 어느 곳에서나 주인처럼 행사하면서 자유를 온건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지의 것으로 변형시켜서, 평화적 시기에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단히 교묘하게 억압하고 격동의 시기에는 이들을 잔인하게 억압하는데 이 자유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이 부정되거나 또는 비난받아야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오로지 나로드니크 폭동주의자들, 무정부주의자들, 경제주의자들뿐이다. 이러한 인텔리적이며 속물적인 교의가 프롤레타리아트이 의지에 반하여 그들을 기만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잠시일 뿐이다. 정치적 자유가 부르주아지로 하여금 힘을 배가시키고 조직을 꾸리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고 할지라도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자유를 요구하며 그것도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강렬하게 요구한다는 것을 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계급투쟁을 회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범위, 계급투쟁의 의식, 조직, 결연함을 확대시키는 데 있다. 정치투쟁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의 보호자라는 지위에서 노동조합의 비서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민주주의적 부르주아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업을 경시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사회민주주의자를 민중혁명의 지도자의 지위에서 자유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전락시키는 사람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2~123)








4) 그렇다. 민중의 혁명이다. 사회민주주의는 ‘민중’이라는 말이 부르주아적이며 민주주의적으로 남용되는 것에 대해 싸워왔고 지금도 대단히 훌륭하게 싸우고 있다. 사회민주주의는 이 단어가 민중 내부의 계급적 적대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완전히 계급적 독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호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은 진보적 계급이 그 자체 내에 머물거나, 좁은 한계 내에 그 자신을 한정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세계의 경제적 지배자가 후퇴하지 않을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행동을 마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중간계급들의 미지근함, 동요, 주저함 등과 인연이 없는 진보적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열정적으로 전 민중의 대의를 위해서 전민중의 선두에 서서 싸우도록 하기 위해 ‘민중’을 ‘계급들’로 구분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녹진. p.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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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2. 악법 어기기. 투쟁 이기기

발제 2. 악법 어기기. 투쟁 이기기




  때는 2004년 9월. 안정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구가해 나가며, 이런저런 부르주아 지배 분파들 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는 자본주의 국가 한국. 그곳엔 56년 간 절대 공격이나 침입이 불가능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현대판 ‘소도’가 존재해 왔다. 국가보안법(이하 국보법)이 바로 그것. 이 영역을 파쇼적으로 40여년간 지켜왔던 당파와 새롭게 권력을 장악, 스스로를 ‘민주주의적 개혁파’으로 지칭하는 자유주의 당파가 국보법의 개폐를 놓고서 한판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다. 발단은 노무현 대통령이 한 tv 프로그램 대담에서 국보법의 폐지를 말한 것었다. 자유부르주아지인 열우당이 당 정책을 아예 국보법 폐지로 선회했고, 한나라당은 개정을 부르짖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부르주아 분파들 사이에 존재하는 입장 차이는 무엇으로 기인한 것인지 알아보고, 노무현 정권은 국보법 폐지로부터 무엇을 얻어내고자 했는지 알아보자.


  하나, “보이니? 파쇼와 자유주의의 차이”


  다들 알다시피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건국 직후부터 98년 전까지 집권 여당이었다. 그들은 앞 발제에서 나온 바와 같이 행복 추구권과 같은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았으며, 이를 쟁취하려는 민중의 봉기에 대해, 무자비하게 군화발과 탱크로 짓밟았다. 또한, 그들은 건국 직후 ‘빨갱이들이 설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하고, 선량한 국민들을 오염시키고, 북한 괴뢰군이 남침을 한 사실’, 기득권을 빼앗겨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웠던 위기와 공포의 순간을 뼈져리게 기억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에게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붙들어 매주는 것이며, 이를 폐지하면 국가 안보가 흔들린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자신들에게 닥쳐올 위협을 눈뜨고 지켜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탄핵 사태 이후, 급격하게 지지 기반을 상실했던, 한나라당으로선 자신들의 보수적 색채를 더 강화시켜 다시금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실제로, ‘원로’ 들과 ‘박사모’등 보수세력이 모여, 국가위기사태를 선언하고 집회를 열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빨갱이’ ‘좌익’ 세력인 노무현을 규탄하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다. 이는 정치사적으로 나름대로 깨끗한 열우당의 우위를 드러내주며, 파쇼적 분파와 자유주의 분파와의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지만, 자유주의 분파가 온건히 민중들의 사상의 자유를 보장하고, 자유로운 정치 활동을 꾀하기 위해 국보법폐지를 외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주의 분파는 왜 국보법 폐지를 말하는 것인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볼까나?


  둘, 눈 가리고 “어흥”하기.


  부르주아 인권의 잣대로 봐도 파쇼적일 수밖에 없는 국보법을 폐지함으로써, 한나라당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좀더 민주주의적이고 좀 더 국민을 생각하는 당으로서의 이미지 확보를 위한 것이다. 노무현 정권과 열우당은 故김선일씨의 죽음 이후로, 파병 반대 여론이 거세지는 가운데 국익 운운하며 추가 파병을 강행, 그들의 가면 속 진실을 엿본 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는 열우당의 지탱 세력을 흐트려 놓아, 그들이 대중을 다시 획득하기 위한 가시적인 것으로 ‘국보법폐지’만큼 좋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는 그들도 파쇼세력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계급을 착취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단순히 대중의 민주주의와 개혁에 대한 열망을 이용한 것에 불과하다.


  북한의 시장개방 흐름도 현 정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최근 중국이 단순 대북 지원 정책을 넘어서, 특권층이 많이 살고 있는 인구 220만의 평양시에 전략적 투자를 하고 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저임금 노동력, 특권층을 대상으로 한 새로운 소비시장, 동북아 경제 거점 중심지 허브를 구상하고 있는 한국 부르주아지로서는 이 뉴스는 매우 위협적이다. 따라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자본에 ‘한민족’의 소비시장을 눈뜨고 송두리째 빼앗길 수는 없는 노릇일 터, 국가보안법이라는 무지막지한 법을 폐지하는 입장으로 향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논의로, dj 정부 시절부터 가져온 평화적 민족적 통일 정책인 ‘햇볕 정책’을 계승 발전시키면서 대중들에게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자유주의 부르주아지 분파 전체가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골고루 얻을 수 있는 절묘한 찬스를 만든 것이다.




  두 번째, 2004년에 집권 여당에 의해 국보법 폐지가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하게 된 것인지를 살펴보자. 우리는 이를 통해서, 자유주의 분파의 계급적 본질과 그 한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남한 자본주의의 큰 성장은 지배 세력에 있어서 파쇼에서 자유주의 분파로의 이행을 가져왔다.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가 확장되는 데 있어서, 폭력적이고 위압적인 파쇼 분파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하지만, 군부정권 시절에 경제가 오히려 발전하지 않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다. 후진국 자본가들은 어느 정도 자본을 불려놓기 위해서 정권과 결탁하는데, 이를 통해 남한의 경제가 성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렇듯 어느 정도 자본이 성장하게 되면, 정경유착은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정권의 지나친 기업 규제 등이 자유로운 경쟁을 억제하기 때문이다. 또한, 파쇼적인 정책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더욱 급진화한다. 실제로, 국보법에 대한 개폐논의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87년 노동자 대투쟁같은 것을 상기해보자. 폭압적인 정책이 노동자들의 분노와 단결된 투쟁을 잘 이끌어낸다는 사실을 부르주아들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들에게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이 결국 자신들에게 이롭다는 점 역시 말이다. 이렇듯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자유민주주의는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굴러가고 있으며, 열우당이 이 점을 깊이 신뢰하기 때문에 국보법 폐지 당론을 확정한 것이다.1) 한마디로 말해, 국보법 폐지는 현 상황에 아무런 폐해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남한 자본가들은 56년간 차근차근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지배 이데올로기를 착실히 심어놓음으로써, 선심 쓰듯 국보법 폐지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궁극적으로 총자본의 이득을 위한 공문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더군다나, 이들이 실제로, 국보법 폐지 후에 바꿀 형법 개정안을 보면  제87조(내란)와 제102조(준적국)에 각각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지휘통솔 체계를 갖춘 단체’라는 표현으로 북한을 적대적 국가로 간접 지칭하는 내용 추가, 제90조(예비·음모·선동·선전)에 ‘선전·선동’과 ‘금품수수’에 대한 처벌조항을 신설했으며, 국보법 대체법안인 파괴활동 금지법안은 제2조(정의)에서 ‘적대적 국가 또는 단체’를 ‘대한민국의 존립 및 안전을 침해하는 활동을 하는 국가 또는 국가에 준하는 단체’로 표현해 마찬가지로 북한을 간접 지칭하도록 했다. 이와 함께 △국가기밀 침해죄(제4조) △민주기본질서 파괴죄(제5조) △목적수행죄(제6조) △금품수수(제7조) 등을 처벌 대상으로 삼았다. 불고지죄가 폐지되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국가보안법과 전혀 성격이 다르지 않다.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에 대한 한계는 위와 같은 것을 통해서 지적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경우를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민주주의” 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 모든 이들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게,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것에 대한  환상 말이다. 하지만 자본가 계급이 노동자 계급이 만든 잉여가치를 착취함으로써 유지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이 때의 민주주의라는 것은 계급의 착취와 피착취 관계를 은폐하고, 체제와 계급 대립의 완충 장치일 따름이다. 중립적인 의미로, 또는 민중을 위한 체제로 이해되는 민주주의는 오히려, 부르주아지를 이해를 더욱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 투쟁을 결코 방기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체제, 그것으로 유지되는 자유민주주의를 굴러가게 하는 노동자 계급에게 민주주의적 제도라는 것은 그들을 해방시킬 충실한 무기이자,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동할 수 있는 더 많은 권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민주주의를 외치는 데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입법 체제에 대한 한계는 명확하므로, 민주주의 제도를 통한 권리 획득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전초전에 불과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국가보안법이라는 악법이 폐지되더라도, 형법 조항이나, 파괴활동금지법이라는 또 다른 악법이 존재하게 될 것이므로, 다음과 같은 노래가사를 기억하자.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 불법으로 투쟁하리라.’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기만적인 유혹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답해야 한다.


  “창으로 선물을 받으리라, 창 끝에는 창 끝으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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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르주아지가 자신의 정치적 지배권을 쟁취하고 그것을 헌법과 법률에 표현한다는 것은,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도 무기를 쥐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부르주아지는, 태어날 때부터 구별되는 과거의 신분들에 대립하여 인권을, 쭌프트 제도에 대립하여 상업과 영업의 자유를, 관료적 후견에 대립하여 자유와 자치를 자신들의 깃발에 써넣어야 한다. 따라서 그 당연한 귀결로서 그들은 보통 직접 선거권,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집회의 자유, 소수 주민 계급에 대한 일체의 예외법의 폐지 등을 요구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게 요구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이기도 하다. 부르주아지에게 부르주아지이기를 중지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물론 그들에게 그들 자신의 원칙을 철저히 관철시키라고 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언론의 자유, 집회의 권리와 결사의 권리로써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 보통 직접 선거권으로써, 그리고 아울러 위에 적은 선동 수단들로써 그 밖의 모든 것을 획득한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58~59)








 

2) “부르주아지가 노동자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반동파의 앞치마 밑으로 숨어들고 노동자들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자신의 적대 분자의 힘에 호소하는 최악의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 그러한 경우가 벌어지더라도 노동자 당에 남아 있는 방도는, 부르주아적 자유, 언론의 자유, 집회 및 결사의 권리에 대한 선동과 같은 부르주아지가 저버린 선동을 부르주아의 뜻에 상관없이 추진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들이 없이는 노동자 당 자신이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다. 노동자 당이 이러한 투쟁을 벌이는 것은 자신들 본래의 생존 요소, 자신들이 숨을 쉬는 데 필요한 공기를 획득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 있어 노동자 당이 부르주아지의 단순한 꼬리로서가 아니라 그들과는 완전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당파로서 행동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노동자 당은, 노동자들의 계급 이해는 자본가들의 그것과 정면으로 대립한다는 것과 노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부르주아지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노동자 당은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에 맞서 자신의 조직을 확고히 유지하는 한편 계속 단련시킬 것이며, 하나의 권력이 다른 권력과 교섭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방식으로만 부르주아지의 당 조직과 교섭할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노동자 당은 당당한 지위를 확보하고 개별 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계급 이해에 눈뜨게 할 것이며, 혁명적 폭풍 - 그리고 이 폭풍은 상업 공황이나 춘분․추분시 폭풍우와 마찬가지로 규칙적인 회귀를 하게끔 되어 있다 - 이 불어올 때에는 행동태세를 완비해 놓은 상태에 있게 될 것이다.” (‘프로이센의 군사문제와 독일 노동자의 당’ [저작선집2] p.6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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