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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보론.‘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외치는 이들은 결국 누구의 편인가


- 돌멩이(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1. 선한 의도, 그러나 예견된 실패


  체제를 변혁하는 투쟁을 해야한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사회가 모순이 많고 바꿔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혁명을 얘기하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이고 폭력적이다. 사회주의는 이미 망했다. 주도적인 위치에 올라 사회 전체를 점진적으로 바꾸는 게 훨씬 현실적이다.'


  여기에 깔려있는 생각은 기본적으로 사민주의와 맞닿아 있다. ‘사회적 합의’와 동의의 절차를 통해 '평화적으로' 정권을 획득해서 점진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켜 나가겠다는 프로젝트.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그러나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적 이상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선한 의도는 역사상 모두 실패로 끝났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서 외쳐지는 자유, 평등, 합의, 평화, 공생은 자본주의 사회의 추악한 실상을 가리기 위한 가면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사민주의는 그 가면을 더욱 공고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보통 이러한 견해를 개량주의 또는 수정주의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왜?


  2. 실제로 권력을 가진 자는?


  의회를 통한 사회주의의 길이 실패한 예로서 우리는 종종 1970년 칠레의 아옌데 정권을 얘기한다. 당시 사회주의자였던 아옌데는 선거에서 '민주적으로' 대통령에 당선됐고 세계의 많은 좌파들은 이것이 '사회주의로 가는 칠레식 길'이라며 흥분했다. 그러나 변화는 쉽지 않았다. 이제 자본가들이 공장 문을 닫고 파업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지원을 중단하고 부채 상환을 요구했다. 공장주의 사보타지로 생산이 중단되고 물가가 오르자 노동자들 역시 이에 맞서 결집했다. 그러나 아옌데 정부는 노동자들의 편을 들지 않고 중재자를 자처했다. 자본가에게 유리한 개각단행과 정책마련으로 지배계급(여전히!)을 달래려 했으나 이는 문제를 전혀 해결해주지 못했다. 결과는 3년 후의 군부 쿠데타였고, 아옌데를 지원하며 실질적인 조직적 힘을 비축하지 못한 좌파는 전멸하고 말았다.

  칠레뿐만이 아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자본은 엄청나게 불어났고 그러한 물적 토대를 이용, 사회주의 소련에 대당하기 위한 사민주의가 성행할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노동당, 공산당 등이 수차례 집권에 성공했으나 그들의 정책은 결코 사회주의적 이상을 구현하지 못했다. 길었던 전후 호황기가 끝나고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고부터 이러한 이상은 환상일 수밖에 없음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던져준다. 자본주의 사회의 실제적인 권력은 대통령이나 다수 의석을 확보한 정당에게 있지 않다. 당연히 '국민'에게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순진한 사민주의자들이 법 개정과 정책 마련으로 점진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을 때, 금융, 산업, 상업 자본가들은 즉각적이고도 확실한 사보타지를 통해 전 사회를 뒤흔들어 버릴 수 있다. 이들은 생산을 중단하고 자본을 해외로 빼돌릴 수 있고 다른 자본들과 연합해 경제적인 압박을 가할 수 있으며 언론을 통한 흑색 선전으로 사회주의 정권을 위기로 몰아갈 수도 있다. 자본의 지배력을 손상시키고 노동자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실질적인 정책이 상정되면 자본은 즉각 이러한 조처들로 정부를 위협하고, 결국 이러한 정책은 철회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사민주의의 역사였다.


  우리가 이러한 역사적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진정 해방되기를 원한다면, 사회의 실제적 권력을 장악해야 함이 너무도 명확해지지 않는가.


  3. 국가와 법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통한 변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국가에 대한 관점이다. 이들은 국가를 중립적인 기구로 생각한다. 국가는 단지 틀로서 기능할 뿐이고 이 틀에 다른 내용물이 들어가면 그 기구의 성격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속편한 환상에 불과하다. 국가기구는 관료제적 위계질서로 구조화되어 있고, 검, 경찰, 군대, 사법부, 행정부 등에서 수뇌부를 차지한 이들은 국가기구 안에서 실질적인 명령권을 가지고 있다. 정권을 획득한 것이 사민주의자들이라 할지라도 국가기구의 수뇌부가 자본과 실질적인 커넥션을 유지한다면 수많은 개혁정책들은 바위를 치는 계란에 불과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기구를 실제로 작동시키는 힘은 경제력이다. 이것은 공권력이 실제로 행사되는 곳이 어디인가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공권력은 사회 안정과 질서 유지를 위해 기능한다고 한다. 그러나 공권력이 출동하는 곳은 대부분 노동자와 농민의 집회 장소이거나 노동자들의 파업이 벌어지는 공장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장하는 안정과 질서는 누구의 것인가? 계급사회에서 '전국민'의 안정과 질서란 공문구에 불과하다. 자본가들은 국민의 극소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실제적으로 이들의 이해와 요구가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대변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민주의적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법을 신봉한다. 이들은 법의 개정, 제정을 통해 자본주의로 인한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법은 자본주의 계급지배의 근본적 관계를 결코 변화시킬 수가 없다. 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뿌리에 조금도 상처를 입히지 않는 곁가지들일 뿐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것은 자본과 임금노동의 메커니즘인데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법률이 아니다. 생산수단의 결핍으로 인한 빈곤이 노동계급에게 자본주의의 속박에 복종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의 틀 안에 있는 한 세상의 그 어떠한 법률도 노동계급에게 생산수단을 제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생산자, 곧 노동계급의 소유에서 생산수단을 박탈해간 것은 경제적 발전이지 법률이 아니기 때문이다."1) 즉 자본주의 생산관계는 법률적 형식을 띠지 않기 때문에 법을 바꾼다고 이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하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조차 법의 실제적인 내용은 노동자계급의 힘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1970년 전태일 열사가 분신할 때도 근로기준법은 존재했으나 그것이 실제로 노동자의 기본권 보장을 담보하게 된 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였다. 한편 노동자 계급의 결집된 힘이 미약한 2004년 현재, 파견법 및 비정규직법 개악안이 버젓이 노동자들을 내려다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다.


  그런데도 여전히 다수 의석 확보와 정책적 대안 마련에만 온 힘을 기울이며 노동자들의 투쟁을 방관하는 민주노동당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4. 의회 민주주의 - 빛 좋은 개살구


  마지막으로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속이 없는지, 아니 누구의 실속을 채워주는지를 확인하자.


  2004년 6월, 베네수엘라에서는 '국민소환'으로 좌초위기에 처했던 우고 차베스가 국민투표로 재신임에 성공했다. 사람들은 그가 소환됐을 때, 자신이 쏜 화살이 자기에게로 되돌아온 격이라고들 했다. 국민소환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차베스 자신이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은 국내외 자본의 지원을 받아 수많은 사람들을 모았고 이 제도를 이용해 차베스를 소환했다.


  뭔가가 떠오르지 않는가. 얼마전 대통령 탄핵으로 한국사회가 떠들썩했을 때 국민소환, 국민발의를 주장했던 이들이 있었다.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차베스의 사례를 통해 너무나도 잘 알 수 있다. 자본주의 질서 하에서 힘 없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음을,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음을 이들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내용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팔고 있는 공장에서는 민주주의를 찾아볼 수 없다. 아니 자본가들의 민주주의가 있을 뿐이다. 노동자들이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파업을 하고 노동자 위원회를 만들고 생산을 통제하는 것, 사수대를 조직해 자본가와 공권력은 공장 내에 얼씬도 못하게 하는 것, 이것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이다.


  5. 나가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임금과 자본가의 이윤이 서로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계급투쟁은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에서 민주적 절차를 따지고 평화적으로 대결할 것을 외친다면 상대방은 이들을 비웃을 것이다. 사민주의 혹은 개량주의자들이,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탄압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대화 파트너가 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이용가치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열심히 싸우려는 사람들에게 ‘평화적으로! 점진적으로!’를 선동해주고, 동시에 국가의 계급적 본질을 은폐해주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그렇기에 이들은 단지 어리석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의도와는 상관없이 혁명을 방해하고 저지하는 데 복무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남는 것은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중립이란 허상에 불과하다.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강자의 편에 서는 것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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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자 룩셈부르크, 「개량이냐 혁명이냐」, 『룩셈부르크주의』,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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