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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발제 1. 사회적 합의주의란 무엇이며 그것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 최바울(노학연 고대모임 회원)



 0. 어떻게 싸워야 할까 - 강경파와 온건파?


 ① 투쟁이 계속되면 선거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 빨리 투쟁을 정리하고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을 당선시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② 박일수 열사의 죽음을 대공장에서 비정규직 투쟁의 돌파구로 만들어내야 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투쟁으로 열사의 뜻을 계승하자.


 ① 고용허가제는 이주 노동자들을 현대판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고용허가제를 완전 철폐해야 한다.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의 싸움에 남한의 노동자들 역시 연대해야 한다.

  ② 고용허가제가 문제가 많지만 당장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고용허가제의 안 좋은 점들을 개선해 나가는 것이 이주 노동자들을 돕는 길이다. 그것은 열린우리당의 개혁적 의원들과의 정책 협의로 가능하다.


  1. ‘온건파’ ― 사회적 합의주의의 역사


  남한의 노동운동은 87년 6월 항쟁 이후, 7-9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시작된다. (이 시기 통계를 살펴보면 120만의 노동자들이 노동악법을 무시하고 3255건의 불법 파업을 벌였으며, 1400개가 넘는 신규 노조를 건설하였다.) 물론 전태일 열사의 뜻을 이은 청계피복노조를 포함하여 여러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진정으로 대중적인 규모로서 노동자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이 때부터이다. ‘민주노조’로 이름 붙여진, 실제로는 회사 측과 완전히 한통속인 어용노조를 깨뜨리고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주적으로 건설해 낸 노동조합 운동은 남한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되어왔다.

  남한 노동자 계급의 폭발적인 힘에 직면하여 운동 진영 내에서의 정치적 논쟁 역시 활발하게 벌어진다. 궁극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한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벌어졌던 열띤 논쟁은 두 가지 큰 흐름에 의해 크게 굴절된다. 하나는 91년 소련에서 사회주의가 붕괴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92-93년 경에 접어들면서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으로 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안착으로 민주노조 운동이 예전과 같은 전투성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대부분의 운동 주체들은 이제 이전과 같은 식의 ‘빡센 투쟁’ 노선을 폐기하고 합법 정당을 통해 체제의 틀 안에서 안정적으로 활동해 나가겠노라고 자신들의 전향을 선포했다.

  이러한 정치적 경향이 곧바로 노동조합 운동에 강하게 착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95년 민주노총의 건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민주노총은 이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의 중심이었던 중소기업 노동조합 중심의 전노협뿐만 아니라 대기업 노조와 사무전문직 노조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건설된다. 그리고 바로 이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의 위원장이 오늘날 이름 높은 권영길 씨이다. 이들 지도부는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노총”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사회개혁투쟁”을 중심으로 시민단체들과 연대, 경영 참가와 정책 참가를 중요시하면서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원회 등 노사정 3자 기구에 적극 참여하는 노선을 취했다. (바로 이러한 노선을 옹호하는 세력들이 바로 “국민파”이다.) 그들에 따르면, 이전처럼 빡세게 투쟁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으니 대화와 타협을 통해서 줄 건 주고 받을 건 받으며 살자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보다는 상층에서의 대화와 타협을 더 선호했던 이들은 과연 자신들의 말대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실질적으로 증진시켰는가? 우리는 96-97의 노동법개악 투쟁의 경험과 97-98년 노사정 합의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96년 말, 당시 김영삼 정권은 노조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복수노조 금지와 제3자 개입금지를 폐지하는 대신에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등을 도입하는 노동법 개정을 여당 단독으로 날치기로 처리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이제 더 이상 민주노조 운동을 군부 독재 식으로 찍어누를 수는 없다는 것을 정부도 인식했다는 것, 그렇다면 합법성을 인정해주지만 그것을 철저하게 제도권 내로 포섭하면서 노동 대중에 대한 착취도를 강화해 보자는 속셈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선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의 파업 투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국민과 함께하는” 지도부는 아래로부터의 폭발적인 대중 투쟁을 끌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파업 투쟁을 관료적으로 통제해 나가기에 급급했다. 왜냐하면, 오직 그러했을 때만이 그들이 부르짖는 정부와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정부와의 물밑 협상에 끝까지 목을 맨 그들은 결국 파업 투쟁의 열기가 꺾일 줄 모르던 1월 26일 정부의 민주노총 합법화 약속을 대가로 총파업을 수요파업으로 전환해버린다. 결국 이후 여야합의로 개정된 노동법은 애초 정부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것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노총의 국민파 지도부는 정부의 충실한 들러리로 기능했을 뿐이다.

  97-98년의 IMF 위기 때도 마찬가지였다. 공황이 닥쳐오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 대한 강력한 공격을 개시한다. 그들의 탈출구는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와 대규모의 임금 삭감에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 역시 민주노총의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 지도부는 노사정위원회에 참가하여 정리해고제 시행과 근로자파견제 법제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노사정 합의문에 조인한다. 이때부터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속도로 산출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800만에 달하게 되었음을 떠올려보라! 이들 국민파 관료들은 자신들이 자본과의 대등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되는 것 따위와 수많은 노동자 대중의 절박한 생존권을 맞바꿨던 것이다!


  2. 사회적 합의주의의 오늘 - 민노당의 의회 진출과 ‘새로운’ 노사정위


  국민파 관료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이 말하는 대화와 타협이 결코 노동자 계급의 이해와 관련이 없는 것임은 이들 관료들에 대항한 노동자 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97-98 노사정 합의 이후 열린 임시대의원대회장은 쇠파이프로 무장한 현장의 조합원들에게 점거당할 정도였다. 결국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은 기립투표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에 의해 부결된다. 물론 이후 결의된 총파업이 기회주의적인 지도부에 의해 흐지부지되면서 이미 떠난 배를 뒤돌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이러한 상황은 더 이상 국민파 관료들이 노골적으로 대화와 타협을 말하기 힘든 상황을 만들어내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끈질겼다. 그들은 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 국회에 노동자들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기 시작했다. 96-97 총파업이 실패한 까닭도 자신들의 투쟁회피주의, 관료주의 때문이 아니라 “자본 우위의 사회적 세력관계를 반전”시키고 “구체적인 법개정 성과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정치력과 교섭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런 논리 아래 이미 97년 대선 시기 “국민승리 21”이라는, 도대체가 노동자 계급의 해방이라는 사상과는 손톱만큼의 관련도 없는 정체불명의 운동을 펼친 바 있었다. (다 떠나서 이들의 선거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98년 노사정위 합의안 부결과 지도부 총사퇴, 총파업 철회가 진행되는 와중에도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토대로 하여 정치세력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한다. “민주노총은 국민승리 21을 확대재편하여 노동자중심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는 정치방침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것의 결과물이 오늘날의 민주노동당이다. 사실상 민주노동당의 화려한 등장은 노동자 계급의 비타협적 투쟁이 관료적으로 왜곡되고 통제된 이후에야 가능했던 것이다.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의 원대한 구상은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과 더불어 현재 이수호 위원장의 집권 이후 가속화된 산업별노조 건설 흐름으로 완전한 틀을 갖추게 된다. 그들에게 산별노조는 대정부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좋은 압박 수단에 불과하다. ‘노동자를 위한 법을 만들어 내는 정치투쟁은 민주노동당, 임금을 올려받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경제투쟁은 몸집을 불린 산별노조’라는 양날개 공식이 성립된 것이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노동조합 차원에서 노사정위원회에 재참여 하는 것뿐이다.

  눈여겨 볼 지점은, 노사정위원회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부정적 인식이 광범위하다는 것을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 역시 명백하게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노사정위원회 참여를 내실있는 준비 이후에 수행하려 한다는 점이다. 그들에 따르면 노사정위원회는 논의 의제를 대폭 확대하고, 노사정 협의의 틀을 산업별, 지역별로 다양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이 개편될 노사정위에 참가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토론을 넘어 중층적인 교섭구조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정책적 역량을 강화하고 조직력을 강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노사정위원회의 참가를 향한 자신의 구상과 그것의 정치적 본질 ― 자본에게 완전히 굴종하는 것 ― 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자본과 정권의 입장에서야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다. 노무현 정권이 자본을 위해 야심만만하게 준비한 카드인 ‘노사관계로드맵’이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합의’의 외양을 쓰고 관철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그들의 입장에서야 손뼉을 치면서 좋아할 일 아닌가! 마치 남는 게 더 많기 때문에 뒷돈을 써서 자리를 청탁하듯이, 민주노총의 관료 몇 명의 사회적 지위를 강화해줌으로써 자본의 몸집을 불릴 수 있다면 이것만큼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출범 첫 해부터 배달호 열사 투쟁, 화물연대 투쟁, 철도 투쟁들에 데어버린 노무현 정권은 어서어서 노동운동을 체제 내로 포섭하길 원한다. 민주노총의 주문대로 정부는 노사정위를 “명실상부한 사회적 대화의 총괄기구로 개편”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반기 들어 가속화 되던 노사정위 참가 흐름은 현재 민주노총의 숨고르기로 다소 연기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참가는 이미 시기 선택의 문제로밖에 되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부터 시작해서 업종, 지역별로 얽힌 교섭 구조 속에서 노사정위 참가를 위한 주객관적 조건은 이미 충분히 무르익고 있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노동자들의 반발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통제해 나가느냐 하는 점에 있을 뿐이며, 이것이 노사정위 참가가 유보된 유일한 까닭이다.


  3. 사회적 합의주의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하는가?


  언뜻 보기에는 노사정위 참가를 비롯하여 정부/자본과 대화와 타협을 벌이자는 것이 뭐 그리 잘못된 이야기인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교섭 없이 투쟁만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옳다. 하지만 개별 사업장에서의 교섭은 투쟁을 보조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면, 노사정위 참가의 문제는 국가의 영역에서 노동자들의 투쟁을 체제 내화시키려는 자본의 의도에 완전히 굴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다른 문제이다.

  즉 가장 중요한 것은 자본과 정권에 대해서 어떠한 태도를 취하느냐 하는 점에 있다. 과연 노동과 자본은 한 배를 탄 운명인 것인가? 노동자가 잘 되려면 기업이 잘 되어야 하는 것인가? 그리고 국가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분쟁을 중립적으로 중재해주는 공간인 것인가? 이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하는가에 따라 사회적 합의주의 흐름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정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주장한다.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라는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는 자본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과, 이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오로지 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된 폭력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온건파’, ‘국민파’, ‘사회적 합의주의론자’들은 노동자와 자본가의 공동의 이해가 존재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으며, 그로써 그들의 주관적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본가 계급의 충실한 보조자로 기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정권과 자본의 본질뿐만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의 본질 역시 똑똑히 알고 노동자 계급의 관점으로 산악같이 일떠서 투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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