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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동지 이해찬 vs 김근태

[화제]‘대권 2룡’의 아주 특별한 만남

뉴스메이커 633호

‘친정’에서 만난 이해찬 총리·김근태 장관… 미묘한 관계 의식 않고 태연한 표정



아무도 귀빈들의 결례를 탓하지 않았다. 언론사와 정부 산하단체가 주최한 행사에 초청받아 축사를 하기로 한 국무총리와 장관이 넥타이를 매지 않은 것은 결례를 넘어 무례로까지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주최측이나 참석자나 여기에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지난 7월 5일 오후 6시 30분께 두 고위인사는 노타이 차림으로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 들어섰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경향신문사가 주최한 출판기념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다른 사람의 역작을 축하하는 것이지만 두 사람에게는 특별한 자리였다.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우리 강물이 되어’(전2권, 경향신문사)의 저자인 소설가 유시춘·김남일씨, 이우재 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 부의장, 자유기고가 유시주씨, 최민희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사무총장 등이었다. 이 책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2003년 4월부터 최근까지 경향신문에 연재한 ‘70·80년대 실록 민주화운동’을 묶은 것이다. 즉 출판기념회의 주인공은 유시춘씨 등 필자들이다. 하지만 이 총리와 김 장관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 등장하는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이날 행사에는 두 사람 외에 장하진 여성가족부 장관, 박선숙 환경부 차관, 문학진·유기홍·유시민·유승희 의원, 이길재 전 의원 등 정·관계 인사가 다수 참석했다. 주최측인 민주화기념사업회 함세웅 이사장과 문국주 상임이사 등을 비롯해 이해동 목사, 조성우 민화협 상임의장 등 옛 재야인사와 현 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또 다른 주최측인 경향신문 강신철 전무, 김지영 상무, 송영승 논설실장, 이영만 편집국장 등을 위시해 원로언론인 임재경씨, 서명숙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서영석 서프라이즈 전 대표 등 언론인도 자리를 함께 했다.

운동권 ‘짠빱’은 김 장관이 선배

꼬스트홀을 메운 약 100명의 참석자 역시 대부분 민주화운동 ‘동지’로서 책 속에 직·간접적으로 등장하는 주인공이었다. 출판기념회가 열린 명동성당 문화관은 이들에게 감회서린 곳이기도 했다. 이상문 경향신문 상무는 발간사에서 “여기가 과거 명동성당 문화관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라며 “그 현장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어 감회가 깊다”고 말했다. 유시춘씨도 답례사를 통해 “6월항쟁 때 이곳에서 5박 6일 농성을 했다”며 “그때는 내 생전에 이런 자리가 올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이 총리도 “옛날에는 여기서 모이면 반드시 중부서에 들렀다가 가야 했다”며 이곳이 민주화운동의 주요 근거지였음을 회상했다.

따라서 이 총리와 김 장관으로서는 ‘친정’이나 다름없는, 오랜만에 옛 동지들을 만나는 자리였다. 넥타이를 매는 것이 오히려 불편하고 예의에 어긋날 법도 했다.

불편한 넥타이를 벗어던지고 편안한 차림으로 참석한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하며 굳건한 ‘동지애’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한 정치적 위치는 이날 연출한 우애 넘치는 분위기와 달리 편안하게만은 볼 수 없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세간에서 지목하는 ‘대권 7룡’의 일원이다. 언젠가 서로 경쟁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두 사람은 열린우리당 내 재야, 그 중에서도 이른바 ‘비지그룹’(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를 비판적으로 지지한 친동교동계 재야세력)으로서 오랜 기간 혈맹 관계를 유지해 왔다.

어느날 갑자기 뒤바뀐 ‘서열’도 두 사람의 과거를 잘 아는 참석자들에게 묘한 느낌을 주었다. 참석자들에게는 김 장관이 이 총리보다 몇 단계 높은 대선배다. 김 장관은 서울상대 65학번이고, 이 총리는 서울문리대 72학번이다. 이 총리가 서울공대에 입학했다가 1년 후 다시 문리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6년 차이가 난다.
김 장관의 본격적인 학생운동 경력은 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사건으로 수배되면서였다. 장기 도피생활을 하던 중인 1975년 5월에는 서울대 5·22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재차 수배된다. 1970년대를 꼬박 수배생활로 보낸 김 장관이 첫 별을 단 것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폭로해 유명한 민청련 사건 때다. 이때 구속돼 1988년 6월까지 옥살이를 한다. 반면 이 총리는 학생 신분으로 두 번 투옥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때였다.

두 사람이 재야에서 한솥밥을 먹은 것은 민청련 시절이다. 이때 김 장관은 의장을, 이 총리는 상임위 부위원장을 했다. 민통련 시절에는 김 장관은 투옥중이었지만 ‘재야 40대 4인방’ 중에 한 사람으로 불렸고, 이 총리는 총무국장을 지냈다.

민청련 시절 ‘한솥밥’ 동지

표면상으로 두 사람이 정치적 노선을 달리한 것은 1987년 대선 이후이다. 이 총리는 평민련 몫으로 평민당에 입당해 13대 총선에서 당선, 17대까지 내리 5선 가도를 달리며 승승장구한다.

반면 김 장관은 재야에 남아 전민련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두 번째 옥고를 치른다. 재야세력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기성정당을 디딤돌로 정치세력화해야 한다는 데는 이 총리와 같은 처지였지만 개별 입당이 아닌 집단 입당으로 지분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 달랐다. 그 때문에 이 총리보다 7년 지각해 민주당에 입당, 15대 총선부터 지금까지 3선을 기록하고 있다.

김 장관은 정당정치에서 비록 국회 선수(選數)는 이 총리보다 아래지만 당 서열은 여전히 위였다. 민주당 시절 김 장관은 부총재, 이 총리는 당무기획실장을 지냈다. 국민회의에서도 김 장관이 부총재, 이 총리는 정책위 의장을 역임했다. 새천년민주당 시절에는 둘 다 최고위원직에 오른 바 있고, 열린우리당에서는 김 장관이 원내대표를 지냈다.

정치권력의 세계에서 나이나 선후배, 사회에서의 서열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척박한 토양에서 갖은 고초를 겪으며 함께 싸운 세계에서의 동지적 위계질서는 정서적으로 쉽게 뒤바뀌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다.

출판기념회에 동석한 두 운동권 출신의 ‘용’은 이런 미묘한 관계에도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주최측이 마련한 순서에 따라 먼저 축사를 한 이 총리는 사회자인 정재돈 전국농민연대 상임대표에게 한마디했다. 이 총리는 “민주화세력이 상당히 관료화된 것 같다”며 “내빈 소개를 하면서 총리·장관·의원 순으로 하고 민주화운동 열심히 한 분들은 나중에 하는 걸 보니 조만간 공무원이 되려는 모양이다”고 조크를 던진 것이다.

김 장관은 그동안 본격적으로 정리된 적 없는 민주화운동사 발간에 무척 고무된 표정으로 진지하게 축사에 임했다. 김 장관은 “현재와 미래의 도전에 올바르게 응전하려면 지난날 살아온 내력을 잊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이 있어야 한다”며 “이 자리가 사회 양극화 극복과 한반도 평화를 뿌리내리게 하는데 책임을 느끼는 자리가 되게 하자”고 말했다.

이 총리와 김 장관은 축사를 마친 뒤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행사가 끝날 때까지 나란히 자리를 지켰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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