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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기원 -한국인 성격 중심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연구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채 규 철
(성균관대학교)


I. 서 론

1. 문제의 제기

한국전쟁은 전후 국제정치사의 주요 강대국들이 거의 망라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전쟁이 종결된 지 벌써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특히 이 전쟁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서는 오랫동안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라는 전혀 상반되는 학설상의 대립이 있어왔다. 이들의 대립은 주로 2가지의 쟁점을 둘러싸고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이 전쟁이 "남침에 의한 것이냐, 아니면 북침에 의한 것이냐"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누가 이 전쟁을 주도했느냐"의 문제, 즉 이 전쟁이 "당시 조성되기 시작한 미 소 냉전체제의 모순에 의한 것이냐 혹은 한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에 의해 발발한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물론 최근에 러시아와 중국정부에 의해 일부 자료가 공개됨으로써 사건의 윤곽은 상당한 정도로 밝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첫번째의 쟁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북한의 남침'으로 굳어져 있으며, 두번째의 쟁점에 대해서도 "김일성이 주도하고 스탈린의 후원에 의해 발발했다"는 방향으로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쟁의 실체가 완전히 규명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으며, 여전히 의문점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두번째의 쟁점과 관련하여, "한국전쟁은 처음부터 김일성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서 그가 스탈린에게 남침 지원을 요구했으며 스탈린이 최종적으로 승낙함으로써 발발했다"는 학설을 대전제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이 학설이 개전의 직접적인 동기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즉 김일성은 스탈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끈질기게 졸라서 남침의 허락과 지원보장의 약속을 받아내려고 했을까?
이러한 의문은 이승만에게도 적용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남한군은 38선상에서 북한군과 잦은 교전을 벌였고, 특히 주한미군이 철수를 완료할 무렵인 1949년 중반에는 북한군에 대해 대규모 선제공격을 계획하기도 했는데, 그렇다면 출범한 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독립국으로서 국내의 산적한 문제들을 방치하고 게다가 군사력도 현저히 열세였던 상황에서, 과연 이승만이 그와 같이 무모한 행동을 시도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기존의 학설이 이러한 의문을 설명하지 못하는 ― 혹은 의도적으로 중요하게 다루려고 하지 않았던 ― 이유는 당시 미 소의 세계정책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남 북한을 단지 객체적 대상으로만 고려하면서, 이승만과 김일성의 역할을 오직 강대국의 의사에 일방적으로 좌우되었던 종속변수로서만 간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상황논리로만 본다면, 당시 미국과 소련은 국내외적인 이유들로 인해 '전면전을 불사할 정도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기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대전 이후의 미국과 소련은 국내문제에 전념하기 위해서라도 국제문제에서는 현상의 급격한 변화를 원치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특히 전쟁의 피해가 극심했던 소련의 경우에 더욱 절실한 것이긴 했지만, 미국 역시 의회의 군비삭감 압력으로 해외에서 적극적인 팽창정책을 수행하기가 곤란했다. 더구나 양국은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호 공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공격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양국은 경쟁과 대립 속에서도 직접 충돌의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신중한 입장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상호 협조하여 각각 남 북한을 강력히 통제하는 '냉전체제의 관리자이자 동반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한다면, 한국전쟁 개전의 동기에 관한 문제는 아무래도 해방 이후 한반도의 특수한 상황적 요인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2. 연구의 방법과 한계

이상과 같은 관점에 따라 본 논문은 '한국전쟁의 내정적 요인설'을 받아들인다는 전제하에 주로 개전의 동기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하되, 특히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을 분석의 틀로 삼고자 한다. 그러나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의 연구에 관한 한, 확립된 연구방법론이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신뢰할 만한 선행연구도 부족한 실정이어서 현재로서는 유용한 분석의 틀을 활용하기가 어렵다. 이에 부득이 본 연구는 나름대로의 분석수단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 위해서 본 연구는 우선 한국인의 2가지 속성 ― 성격적 및 심리적인 특성 ― 에 관한 틀을 구성하였다. 그 하나는 한국인의 분파주의적 대 속성과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타협적 극단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의 의존적 성향과 불안의 심리에서 연유한 조급성이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의 틀을 가지고, 한국전쟁 직전 시기에 남 북한의 정치 사회적 및 군사적 상황들에 대한 이승만과 김일성의 인식체계, 특히 정책결정을 위한 심리구조들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이와같이 연구를 진행하는 데 있어서 본 논문이 일정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선 본 논문에서 제시될 분석의 틀이 검증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 물론 이러한 분석틀은 완전한 검증도 반증도 불가능한 것이지만 ― 연구를 수행하여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이 위험한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본 논문은 새로운 이론이나 학설을 탐구하기보다는 기존의 '내쟁적 요인설'을 뒷받침하기 위한 하나의 근거로서만 제시하되, 다만 내쟁의 원인을 새로운 시각으로 해석하고 조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오히려 본 논문의 더 큰 약점은 직접적인 증거보다는 많은 부분에서 정황증거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방법론상의 한계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측면이기는 하나, 자칫 논리의 비약이나 왜곡이라는 문제점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러한 문제를 완전무결하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가능한 한 다양한 문헌들을 활용하되 문헌을 분석하는 과정에서 자료의 해석과 적용에 신중을 기하여 문제점을 최소화한다면, 실제 문제점은 그리 심각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II. 한국인의 성격적 심리적 특성

1. 분파주의적 대립과 비타협적 극단주의

분파성이란 특정한 이해관계를 동기로 하여 타집단 또는 타세력에 대하여 배타적 내지는 적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분파성은 일찍이 한국 정치문화의 주요한 특성 중의 하나로서 지적되고 있는데, 한국사회 내에 그와 같은 성향이 형성된 배경으로는 유교의 명분론을 중심으로 한 집단적 갈등, 강한 공동체 의식의 반영으로서 내집단과 외집단 구성원 간의 경쟁적 대립, 관직의 수적 제한에서 비롯되는 배타적 출세주의, 가문을 중심으로 한 혈연적 가족주의, 지연 학연 인연을 강조하는 파벌양상, 그리고 정당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각종 정파의 분열과 대립 등을 들 수 있다.
한국 사학계의 원로학자인 이기백(李基白) 교수는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관을 비판하면서도 한국 정치문화에서 차지하는 당파성과 그것의 형성과정을 잘 분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당파성은 조선사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및 사회적 조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즉 조선은 중앙집권적인 사회이기 때문에 귀족들은 모두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생애 최고의 목표로 간주했으며, 그들 간의 정치적 갈등은 곧 중앙의 정계를 무대로 한 권력대립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는 것이다. 특히 근대사회에 들어 이러한 대립은 이념이나 정강의 대립보다는 혈족관계나 사제관계로 연결되었고, 이로 인해 자손이나 제자에게 계승된 파벌 간의 대립은 결국 정의나 정책을 둘러싼 논쟁을 압살하고 말았던 것이다.
최재석(崔在錫) 교수 역시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으로서 친소구분의식을 들면서, 이렇게 친소를 구분하는 의식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파벌이나 붕당이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친소를 가리는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현상이겠지만, 유독 한국인은 가족주의로부터 파생된 특이한 친소구별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는 한국인의 친소구분 의식의 요인으로서 7가지를 들면서 그 중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 '효도'의 개념을 들고 있다. 즉 개인의 정당한 주장은 언제나 누구에 대해서도 자유로이 발표되고 용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한국사회에서는 효도의 원리로 말미암아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이익의 주장이나 대립을 합리적인 조정에 의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생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이나 타집단과 타협 또는 조정에의 길이 두절되는 것은 결국 친소에 근거하는 파벌을 조장하게 되며, 이와같이 형성되는 퍼스낼리티는 두말할 것도 없이 '배타적'이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설득이나 조정을 통해서는 반대자나 적대자와 상호 이해에 도달하기 곤란하다고 인식하며, 심지어 더 넓은 집단이나 사회의 발전과 조화에 대한 관심보다 자기의 적대자에 대한 복수와 파멸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때 효도 자체가 파벌형성의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효도라는 명목하에 길들여진 자식의 퍼스낼리티가 파벌형성에 더 큰 영향을 준다. 다시 말해서 효도는 룰에 대한 충실성보다 인간에 대해서 충성하는 퍼스낼리티를 길러내는 것이다.
한국인에게 특유한 '의리'의 관념 또한 파벌형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 거의 모든 한국인이 각기 배타적인 '왕초-똘마니' 관계를 형성하여 왕초는 자기의 똘마니에 대한 보호의무만을 갖고 있으며, 똘마니는 자신의 왕초에 대하여 충성만을 이행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이념이나 정당성 또는 다같이 동일한 인격과 자유를 가진 인간이라는 점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자기 파벌 소속의 성원이나 두목의 이해관계만이 중요시되기 때문에 자기 집단 이외의 인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배타적으로 된다. 이런 이유로 종래 한국의 정치사에는 상호 인격의 존중이나 정책경쟁에 의한 페어플레이보다는 타인과 타정파에 대한 배척과 중상모략이 다반사로 발생했던 것이다.
타인과 타정파에 대한 배타성을 더욱 강화하는 요인이 바로 공동체로부터 개인의 미독립이다. 전통적으로 한국인은 자신의 소속집단과 일체감을 갖는 생활을 가장 이상적인 생활형태로 여겨왔으며, 그 결과 이들은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나 집단의 리더가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행위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주장을 피력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교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집단주의 문화의 소산으로서, 이러한 사회에서는 집단이 정치적 권위의 기반으로서 결정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그래서 만일 한 인간이 자신의 소속집단에 반대하여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너무 강하게 주장하면, 그는 즉시 소속집단으로부터 심한 사회적 따돌림을 받고 불이익을 당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집단의 논리에 순응하여 협동의 덕목을 체득하도록 강요받으면서 생활하는 것이다.
공동체나 집단으로부터 개인의 미분화는 다른 한편으로 집단 이기주의(group egoism)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가장 배타적이며 비합리적인 집단 이기주의를 생활화하면서, 개인의 존엄과 자주성을 존중하는 생활원리인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거부반응을 보인다. 그리고 이와같이 자기 집단만을 위하는 행동은 결국 대립과 파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 대립은 있게 마련이며, 정치에 있어서 갈등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대립과 갈등의 결과로서 '사회집단의 결속이 더욱 강화 유지되느냐' 아니면 '약화 내지는 분해되고 마느냐' 하는 데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한국의 정치는 대립과 갈등이 국민들의 의사나 국가의 안전과 발전의 필요에 의해 자제되고 또 해결되기보다는 오히려 극한적인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였던 것이다. 한국인의 이러한 특성은 정치적 갈등과 대립의 상황을 '제로섬(zero-sum) 게임'으로 인식하려는 성향에서 연유하며, 그것은 곧 비타협적 극단주의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분쟁 당사자들이 서로 자신들의 입장만을 절대시하고 상대방의 입장을 무시하면서 억압하려는 데서 나온다. 이러한 태도는 '나의 주장은 무조건 옳고 상대방의 주장은 그르다'는 흑백논리의 결과인 것이다. 모든 대립적 상황을 이처럼 정의와 불의의 대결 혹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시각에서만 본다면, 여기에서 타협의 여지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비타협적 극단주의는 특히 과거의 불행했던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조선조 이래 오랜 전제왕권정치와 일제의 강압정치 같은 일방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치문화 속에서 타협에 의한 정치를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조선조의 성리학에 의해 뒷받침된 배타성이 당쟁의 과열을 부채질하였고, 이후 한말의 위정척사파와 개화파, 동학운동파 간의 강경 대립, 그리고 친일파와 친청파, 친로파 간의 극단적인 경쟁과 갈등이 정치를 황폐케 하고 국론을 분열시켜 결국 일제의 합방을 재촉한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심지어 일제 식민통치하에서조차 독립운동세력들 간에 벌어진 내분과 비협조는 국권의 자주적 회복에 지장을 주었으며, 해방을 맞은 후에도 4대 강대국들은 한국 국민들이 자주적인 독립정부를 세우고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신탁통치를 강요하려 했던 것이다.
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은 결국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고, 지난 반세기 동안 남북관계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대결로 점철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국내 정치에서도 결코 예외가 아니어서 권위주의적인 군사정부와 민주화 세력 간의 대결은 한 세대 이상이나 지속되었다. 민주화 시대에 들어서도 여야 간의 극단적인 대립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으며, 각종 선거에서 지역 간의 대립의식은 오히려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감이 있다. 민주정치를 타협에 의한 정치라고 볼 때 그동안 대립과 갈등 일변도의 정치구조도 바로 이와같이 타협에 익숙치 못한 한국인의 태생적 성격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여진다.
한국인이 타협에 서투르며 그것이 또한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한 걸림돌로 작용해 왔다는 사실은 해방 직후 남한 지역에서 3년간의 군정통치를 맡았던 미국 당국에 의해서도 인정되고 있다. 그들은 "타협적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하는 문제가 한국인들과 한국의 관리들에게는 그다지 절실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4천 년에 걸친 이 나라의 봉건적 유산이 불과 3년 동안에 일소될 수는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인들이 이와같이 타협의 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한국사회가 전통적으로 농업을 위주로 하는 유학자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의 싹을 틔고 꽂을 피웠던' 고대 아테네나 영국이 모두 상업민족이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협'이란 근본적으로 상인에게는 익숙한 일이지만, 농민이나 선비에게는 낯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천한 일이기 때문이다.

2. 의존성과 조급성: 불안의 심리

인류학자 오스굿(C. Osgood)은 일찍이 한국인의 성격을 '구강적(oral-saddistic)'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러한 구강적 성격의 두드러진 특징은 '의존적'이라는 데 있으며, 이들은 성장하여 사회에 나가서도 항상 남이 도와줄 것이라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의존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이들은 자신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에게 자주 부탁을 하게 되고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남이 자신의 가까이에 있어주어야 하며 자신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한마디로 그의 인생은 자신이 돌보기에는 너무 공허해서 남에게 기대고 의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은 독립적인 사고와 행동을 하는 서양인과 달리 의존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아기는 엄마에게, 엄마는 아빠에게, 아빠는 조상에게, 상민은 양반에게, 학생은 스승에게, 사원은 사장에게 일단 의존을 한다. 한국인은 어떠한 방식으로든지 의존적 연쇄에 매어져 있으며, 그렇지 않고는 불안하기에 꾸준히 매일 의존적 쇠고리를 모색한다. 그리고 그 의존체에 자기의 개성이며 이해며 욕구며 책임이며 모든 주체를 의존하고 자신을 무화시킨다. 한국인이 자신의 소속집단과 일체감을 가지려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존적 성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은 의존적일 뿐만 아니라 '수용적 성향(receptive orientation)'을 가져 자기가 원하는 것은 외부에서 들어와야 한다고 믿으며, 따라서 외부의 권위에 의지하려 하고 지식이나 도움을 밖에서만 구하려고 한다. 그래서 한국인은 외래의 종교나 사상, 문물에 너그러워서 한국에 불교나 유교, 천주교나 기독교가 들어왔을 때마다 기성의 가치관과 별다른 저항이 없이 수용된다. 한국인들은 이질적인 사물을 꾸준히 기성의 사물에 절충하고 융합함으로써 배척하지 않고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한국인들은 국내적으로는 분파주의적이고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면서도 외래문화에 대해서는 무한정의 포용성을 갖는 문화전통을 유지해 왔다.
구강적인 성격의 또 다른 특성으로서 심리적 불안감을 들 수 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이러한 불안감은 본능적 욕구와 그러한 욕구충족을 억압하는 사회 간의 갈등상황으로부터 나오거나 혹은 의존대상으로부터 격리될 가능성에 대한 우려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을 겪으면 그는 조급해지고 긴장과 공포를 느끼게 된다고 한다. 이 점에 대해 심리학자 윤태림(尹泰林) 교수는 특히 한국의 문화를 '불안의 문화'로서 규정한다. 그는 한국인의 의존성과 조급성의 근원인 '불안'은 한국의 특유한 역사적 환경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국의 歷史는 외세의 侵入과 內亂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를 누군가는 恥辱의 역사라고 했지만, 오히려 한국의 역사는 外勢와 官員들의 횡포 속에서 이루어진 不安과 위험 속에서 살아온 역사라는 것이 마땅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나라치고 고난이 없는 역사가 없었겠는가마는 유독 한국은 地政學的인 위치에서 볼 때 北에서 오는 거센 征服의 압력과 南으로 바다를 건너 밀려오는 野望을 꺾기에도 너무나 바빴고 한 때도 안심하고 살 날이 없었다. 北에서 오는 朝貢을 바치라는 강압과 壬辰倭亂이 저지른 무서운 破損에 한국인은 침략의 그림자가 항상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을 잊을 수 없었으며, 한국의 역사는 그저 한없이 참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될 괴로움이 떠날 날이 없었다. 희망을 저버리고 不安 속에서 한 가닥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無意識 속에 움트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 외에도 유교가 가르친 전제적인 가부장제의 가족제도에서 오는 억압, 역대의 왕조들을 통해서 내려오는 경제적 수탈, 특권계급의 정치적 압박, 영토의 분할에서 오는 전쟁에 대한 암운 등이 이중삼중으로 겹쳐 있는 것이 현재의 한국인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근원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은 순환하면서 다른 불안을 자아내게 되고 대인관계뿐만 아니라 정치적, 나아가서는 국제적인 불안을 조장하는 것이다.
한편 정신분석학자인 융(C. G. Jung)은 망각된 것과 억압된 것을 무의식의 영역으로 보고 그 무의식을 개인적 무의식과 집단적 무의식으로 구분하면서 특히 의식에 떠오를 수 없는 무의식, 무의식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집단 무의식'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이러한 "집단 무의식은 유전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한국인의 불안심리는 우리 조상들의 경험이나 의식구조가 우리에게 격세유전되어 결국 우리 민족이 공통적으로 갖는 집단심리로서 정형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인들은 농경시대의 봉쇄적이고 타자 의존적이며 수동적인 사유, 외세와 내란과 전제정치가 물려준 의식구조를 아직도 일부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다사다난한 격동의 시기였던 20세기 전반기는 그렇지 않아도 구강적 성격의 한국인에게 불안심리가 더욱 강화되어 표출될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억압과 공포, 그리고 가난과 혼돈으로 암울하기만 했던 일제 강점기에 성장과정을 보내야 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낯선 타국에서 나라 잃은 식민지인으로서 온갖 차별과 모멸감을 직접 겪어야 했던 사람들 ― 예로서 이승만이나 김일성 ― 의 경우에 그들의 불안심리가 어떠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남성중심적이고 가부장적인 우리 사회에서 억압과 공격성은 이미 뿌리깊이 내재되어 있던 병리현상이었다. 이승만과 김일성이 해방 직후의 남 북한에서 정치지도자로 등장했을 때 애초부터 그것은 권력의 남용이나 폭력의 형태로 표출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들일수록 헤어날 수 없을 정도의 강박관념에 매몰되어 현실을 갈등적 시각으로서 인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해방 직후 한반도의 정국을 소련을 등에 업은 공산세력과 나머지 비공산세력 간의 대결로 보았으며 중간파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일성 역시 제국주의자들과는 근본적으로 타협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조선의 혁명은 인민해방전쟁에 의해서라도 반드시 쟁취해야 할 목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구강적 성격에 있어서 불안의 심리는 의존심리와 표리의 관계에 있다. 특히 뛰어난 현실정치감각을 가졌으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는 사람일수록 그의 권력을 강화하고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강대국에 의존하거나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점에서 이승만과 김일성은 결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타고난 권력정치가로서 권력의 장악과 체제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미국의 힘을 필요로 하면서도, 기회를 포착하여 미국의 힘을 역이용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다. 김일성 역시 항상 '강한 자의 힘을 빌려 자신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퍼스낼리티의 소유자'로서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III. 한국전쟁: 외세에 의존한 통일의 추구

1. 남북의 분파주의적 비타협적 대립

해방 이후 3년간의 미 소 군정이 종식되었지만 통일된 한민족의 국가는 수립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1948년 8월과 9월 남 북한 각각의 지역에서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별개의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 북한 쌍방은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한반도 전역은 통일의 열기로 가득차 있었으며 분단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남 북한의 지도자들 역시 분단의 조속한 종식만이 민족의 유일한 활로라고 믿었고,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실현이라는 이상에만 집착했다.
남 북한은 서로 상대방을 전혀 인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전혀 없었다. 남한 당국은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평양정권은 괴뢰정부인 만큼 협상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으며, 특히 보수적인 반공주의자들은 좌익과의 협상이나 소련이 포함된 다변 협정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국익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보았다. 북한측 역시 남한정부를 미제국주의자들이 한민족을 분열시키고 한반도에서 신식민주의를 획책하기 위한 정책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매국노 이승만체제는 단지 허울뿐인 꼭두각시 정권으로서 미국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양측의 입장은 각각의 헌법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남한측의 헌법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자신의 영토로 규정하고 북한 지역을 반국가단체가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실지로 간주하여 이 실지의 회복을 바로 통일과 동일시했다. 북한의 당시 헌법 역시 서울을 '통일조선'의 수도로 규정하여 남조선을 해방하는 것이 곧 통일이라고 규정했다. 바꿔 말하면 남 북한은 서로 자기 쪽의 체제와 통치를 상대방에 확장한다는, 즉 상대방의 붕괴 내지는 소멸이라는 조건하에서만 통일을 이루려고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 북한 양측은 각각 배타적인 이데올로기를 통해서 서로의 방식에 의한 통일만을 고집했다. 그래서 정부수립 전까지만 해도 '남한만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구성'을 주장했던 현실주의자 이승만조차도 대통령이 된 후에는 여러 차례나 통일에 대한 열망을 강하게 표현했으며, 통일을 위해서는 무력을 행사해서라도 북한 지역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권한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일성 역시 "공화국 정부는 전체 조선인민을 정부의 주위에 튼튼히 단결시켜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동원할 것이며,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라고 결연히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목표에도 불구하고 이승만과 김일성 양자는 자신의 힘으로 그 목표를 실현시킬 수 있는 정책수단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유일한 대안은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한반도를 해방시켜 주었으며 그들 각각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었던" 미국과 소련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지만, 이 방법에도 물론 한계가 있었다. 남 북한은 독립한 후에도 여전히 미 소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통제되어 거의 예속된 상태에 있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이들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사활적인 이해관계를 구성하는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아서 이승만과 김일성이 자신들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이들 강대국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여지는 별로 없어 보였던 것이다.
미국은 1905년 이래 한반도를 일본의 세력권 내지 병합권으로 인정한 바 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그들의 대한반도 정책은 단지 대일전의 종전처리과정에서 부수적으로 제기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이 무렵 유럽에서 동서냉전이 시작되고 중국대륙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어 미국은 일본열도의 안전에 더욱 큰 중요성을 부여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한반도에 대해서는 종래의 소극적인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소련 역시 북한에 대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긴 했지만, 그들의 주요 관심은 여전히 유럽에 있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는 큰 비중을 두고 있지 않았다. 군사적으로도 소련은 아직 미국에 비해 취약했기 때문에 한반도처럼 부차적인 지역에서의 전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소련이 북한에 소비에트체제를 건설한 의도는 다만 극동지역에서 미국과 자유주의 진영의 도전을 차단할 수 있는 방파제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들 강대국들은 그동안 대전으로 인해 방치되었던 국내문제를 해결하는 데 국력을 기울여야 할 입장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전시체제를 평시체제로 전환하는 데 국력을 집중했으며, 소련 역시 전후복구와 경제력 재건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국은 상대방을 자극할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을 극도로 자제하고 있는 중이었으며, 한반도에서도 자국의 군대를 주둔시켜 남 북한의 충돌 억지력을 보유함으로써 현상을 유지한다는 점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상황은 으레 변하게 마련이었다. 1948년 후반 이래 한반도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 즉 남 북한 정부의 수립과 소련군의 철군, 그리고 뒤이은 미군의 철수는 그러한 변화의 단초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건들을 계기로 한반도의 두 지도자는 정치적 자율성을 대폭 신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특히 김일성보다는 이승만의 자율성이 훨씬 크게 신장되었는데, 그것은 미 소 양측의 철군이 북한보다는 남한에 대한 통제력을 크게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우선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의 차이와 철군 이후 통제방식의 차이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미 소 양국은 모두 한반도를 결정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인식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소련에게 있어서 한반도는 자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쨌든 자국의 안보와 직결되는 지역이었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한반도는 일본의 방위를 위한 전초선 정도로서 단지 부차적인 이해관계만을 가질 뿐이었다. 또한 철군 이후 소련이 김일성을 직접적인 방식으로 통제했던 데 반해 미국은 이승만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적 자율성이 김일성보다 더 신장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이유는 두 지도자의 개인적 인기와 국내 정치적 입지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남한의 이승만은 항일투쟁경력과 대중적 인기라는 측면에서 거의 필적할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진 신생 대한민국의 국부였다. 반면에 북한에서 김일성의 지위는 아직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상당한 투쟁경력과 함께 공산주의 이론에도 밝은 박헌영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으며, 그의 지위 또한 대중적 지지와 자신의 실력에 의해 쟁취한 것이라기보다는 소련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것이었기 때문에 그만큼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북한에서는 비록 1948년 12월까지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기는 했으나, 대소 의존도가 대단히 높았던 북한정권의 스탈린에 대한 충성심에는 전혀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당시의 여러 가지 자료들을 종합해 보더라도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방면에서 거의 완벽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지난날의 독립투사라는 이미지와 함께 능란한 대중조작 솜씨를 통하여, 그리고 남한 국민들의 통일 열망에 부응하여 국내적으로는 고도의 정치적 자율성을 누리고 있었다. 더구나 그는 미국에서의 오랜 유학생활과 독립운동경험을 통하여 뛰어난 현실정치적 감각을 체득하고 있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적극적이고도 능동적인 대미외교를 전개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남한의 미약한 국력으로 인해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정책수단에 한계를 느끼고 있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그의 정치적 목표, 즉 통일에의 의지마저 꺾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조국이 가진 국력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수록 그가 미국에 의존해야 할 필요성은 더욱 절실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2. 외세에의 의존

1) 대소 의존과 대미 의존: 성공과 실패
북한의 역사에서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시기는 '대소 추종기'로서, 이 기간 동안 북한은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부문, 즉 국가건설 자체를 소련에 맡기다시피 했다. 특히 경제부문에서 북한은 소련에 전적으로 의존하여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북한에 대한 해외의 경제원조는 오직 소련 한 나라로부터만 제공될 정도였다. 이 과정에서 소련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인 것이었으며, 북한에서 권력을 장악하려는 자는 누구도 소련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강한 자에게 의존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한국인의 의존심리는 이 무렵 북한 내부에서 벌어진 파벌 간의 경쟁관계와 그들의 대소 의존행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다. 각각 국내파 공산주의와 해외파 공산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박헌영과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박헌영은 1946년 1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지지하며, 5년 후에는 소련연방에 편입되기를 희망한다"라고까지 말했다. 심지어 김일성은 1949년 3월에 모스크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밀충성서약을 통해서 "첫째, 소련을 종주국으로 하며 지혜의 원천으로 인정한다. 둘째, 소련의 정치 경제 형태를 인간발전의 유일한 수단으로 인정한다. 셋째, 북한의 대외관계에 있어서 소련에게 독점적 지위를 인정하여 소련에 비우호적인 일체의 영향력을 배제시킨다"고 말할 정도였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후원은 군사부문에서도 괄목할 만했다. 양국간의 군사협력관계는 1946년 9월 소련 군사고문단이 북한의 군대창설을 위해 간부 훈련단을 조직하고 군사교육을 실시한 것을 시발로, 47년 1월부터는 북한군에게 소련제 장비를 지급하고 기술훈련을 지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이 무렵부터 북한군은 소련의 군사원조를 받아 신형무기로 무장하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그 결과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48년 2월에 기존의 인민집단군을 조선인민군으로 개칭하여 정규군으로 창설을 선포하였다.
또한 공군은 47년 8월 소련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신의주 항공대 출신의 민간인 약 300여 명을 중심으로 비행대를 창설한 후 정규군 창설을 계기로 항공연대로 증편함으로써 정규 공군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해군은 46년 7월 수상보안대 사령부로 출범한 것을 정권수립과 함께 해군 총사령부로 하여 정규 해군으로 발전하였다. 소련의 이와 같은 북한군 증강계획은 1948년 12월 북한 지역에서 완전 철수가 발표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철군하면서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모든 군사장비를 고스란히 북한군에 이양해 주었는데, 이것은 미군이 남한 지역을 떠날 때 장비의 60%를 가지고 떠난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었다.
한편 해방 직후 국방경비대와 해방병단으로 출범한 남한군은 그동안 육군 5만, 해군 3천 명에 105척의 함정을 보유할 정도로 성장하긴 했으나 병력에 비해 무기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폐물이나 다름이 없는 구식 무기가 태반이었다. 또 군정 3년 동안 미국 군사고문관들이 남한군에게 실시한 병기사용법, 기초 도수훈련, 폭동진압법 등의 훈련은 군인보다는 오히려 경찰에 적합한 내용이었으며 그것조차도 경비대 총사령부 산하 전체 고문관의 숫자가 고작 4-10명에 불과하여 한 사람이 2개 연대를 담당해 온 형편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부수립을 맞게 된 남한은 자체 능력으로는 국방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새 정부로서는 병력을 증강하고 장비를 확충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했으나, 그것은 오로지 미국의 대규모 원조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이 문제는 군정체제가 종식되고 미군 철수가 논의됨에 따라서 점차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이승만은 장차 미군의 철수가 불러올 수 있는 위기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미군이 한반도에 더이상 주둔할 명분이 없었다. 이미 47년 11월 14일의 UN 총회는 "남 북한 정부수립 이후 가급적 조속히, 가능하다면 90일 이내에 점령군이 한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도록" 결의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련이 계속 미 소 양군의 동시 철군을 촉구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따라서 이승만은 미군의 철수에 앞서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이승만은 정부가 수립되기도 전인 48년 7월 5일 장문의 서한을 통해서 한 미 양국간의 군사적 안전보장과 상호 책임문제에 대해 그후에도 결코 움직이지 않았던 정책을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 나는 美軍이 지금으로부터 90일 이내에 撤收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이 철수문제에 관련된 한국의 立場을 말하자면, 미국은 군대를 철수하기 이전에 한국 國軍이 組織될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保障해 주어야 합니다.…

이승만의 요구는 미국정부에도 어느 정도 받아들여져 1948년 8월 24일 양국은 '한미 군사안전 잠정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협정에 따라 동년 11월까지 미군이 남한측에 이양한 무기는 전혀 충분치 않은 것이어서 이승만의 당초 기대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소화기와 자동화기의 60-80% 정도만이 미제였을 뿐이고 나머지는 일제 당시의 구식 무기였으며, 더구나 박격포와 중기관총은 거의 양도해 주지도 않았다.
이승만은 주한미군의 철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최대한의 군사원조를 받아내려고 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소극적이었다. 이와 같은 미국의 태도는 전후에 평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국방예산을 삭감하고 해외주둔 병력을 감축하려는 국내적인 이유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당시 미 국무부가 주한 미 대사에게 "미국정부가 대한군사원조의 제공을 제한한 것은 한국을 돕기를 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세계 각처에서 필요로 하는 군사원조가 미국의 공여 능력을 훨씬 초과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분히 납득시키라"고 지시했던 점에서도 어느 정도 확인될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이 대한 군사원조의 제공에 소극적이었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미 연합 참모본부는 "장차 아시아 대륙에서의 주전장은 결코 한반도가 되지 않을 것이므로 심각한 병력부족을 감안할 때 4만 5천여 명에 이르는 주한미군을 보다 더 중요한 다른 지역으로 재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의 배후에는 다음의 4가지 고려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첫째,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를 낮게 평가했으며, 둘째는 대소 방위전략으로서 제공권의 활용을 과신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셋째로 원자탄의 독점이 장기화될 것으로 오판했으며, 마지막으로 남한의 사회불안에 대한 미국의 우려 때문이었다.
당시 미국은 남한이 정치적 사회적 혼란에 휩싸일 것으로 보고 이와 같은 사태가 벌어진다면 주한미군의 처지가 곤란해질 것이므로 미리 철수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국은 남한의 방위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군사원조만을 제공하면서 빨리 한반도에서 발을 빼고자 했으며, 결국 남한은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과 군사력 증강에 관한 아무런 명확한 약속도 받아내지 못한 채 자신의 운명을 오로지 미국의 선의에만 맡기게 되었던 것이다.

2) 대미 외교: 욕구의 좌절
남한정부는 물론 미국측에 철군을 연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곧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이승만은 자신의 대통령 취임식을 즈음하여 돌연 태도를 바꾸어 철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그의 이와같이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군이 비록 남한의 안전을 위해 계속 주둔한다고 해도 남한정부에 대해 여러모로 간섭하여 자신의 행동을 구속할 것이라고 예측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의 정적인 중도파와 공산주의자들이 미군의 주둔으로 인한 독립과 주권의 침해를 문제삼아 그를 공격하게 되자, 그러한 비판의 소지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미군 철수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두번째의 더욱 중요한 이유는 만약 미군이 철수하는 대가로 적극적인 군사원조를 제공받을 수 있다면,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이 그토록 열망하는 통일을 성취할 수 있는 호기가 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당시 미국의 힘은 소련보다 우위에 있었으므로 최소한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원조만큼은 받아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은 미군 철군을 조건으로 미국정부와 무기원조를 위한 교섭을 벌이고자 했다.
1949년 4월 이승만은 조병옥을 특사로 임명하여 한국 UN 사절단을 이끌고 도미케 한 뒤 주미 한국대사 장면과 더불어 미국정부를 상대로 남한군의 군사력 증강을 위한 교섭을 시도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미국측은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이승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외교공세를 전개하기 시작했다. 1949년 5월 그는 대만의 장개석과 필리핀의 퀴리노와 함께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의 NATO와 비견될 만한 '태평양 군사동맹'을 만들고 미국을 이 기구에 끌어들이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 미 의회와 행정부 등을 상대로 적극적인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은 '태평양 군사동맹'에 가담할 경우 아시아에서 3명의 우파 독재자를 지원하여 그들을 군사적 모험으로 몰아넣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래서 그러한 군사동맹에의 참가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하기는 했지만, 이승만을 매우 위험스런 존재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무렵의 미국은 이승만이 남한 내에서 점점 구세주나 신과 같은 존재로 되고 있다고 보아 그의 정치적 야심에 대해서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은 소련과 공산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거듭되는 과대망상적인 발언이 자국의 세계정책에 재앙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미국을 끌어들여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는 독재자를 위해서 위험을 자초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자신의 노력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이 즈음 북한이 소련의 군사적 지원 아래 급속히 전력을 증강시켜 나가고 있다고 확신한 이승만은 어떻게 해서든지 미군의 주둔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철군 저지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가일층 적극화하였다. 그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를 통해서, 남한군이 자체 방어를 위해 충분한 능력을 갖출 때까지 철군을 연기해 줄 것을 호소했다. 또한 1949년 6월에는 군항인 진해를 극동지역의 미 해군기지로 사용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제의 역시 거부되자, 그는 다시 미국정부에 '상호 방위조약'의 체결을 요청하는 동시에 대규모의 군사 경제 원조를 교섭하기도 했으나 미국측의 반응은 여전히 냉담했다. 그러는 사이에 동년 6월 말경 주한미군의 철수도 거의 완료단계에 들어갔다.
이렇게 되자 이승만은 미국이 남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그것은 특히 이 무렵에 북한측에 의해 유포되어 꾸준히 나돌던 '북한군의 남침' 소문에 의해 더욱 강화되었다. 사태의 긴박성을 예감한 그는 초조한 나머지 1949년 7월 수만 명의 학생들을 동원하여 서울의 미 대사관 앞에서 "우리에게 무기를 달라"는 관제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여러 차례나 북진통일을 주장하였고, 미국이 그러한 자신의 생각에 불응할 경우에는 남한군 단독으로라도 북진을 감행하겠다는 협박 아닌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승만의 행동이 이와같이 노골화될수록 그의 야심에 대한 미국의 의구심 또한 더욱 강화되었다.
정부수립 이후 1949년 중반까지 원조교섭과 로비활동, 외교공세를 통한 설득과 회유, 그리고 공갈과 협박 등의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미국을 남한에 묶어두려는 이승만의 끈질긴 노력들은 미국으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조선 왕가의 후손으로 미국 명문대학의 박사 출신 엘리트이며 동시에 대한민국의 존경받는 국부이자 최고통치자로서, 자존심 강했던 그에게는 참기 힘든 모욕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남 유달리 강인한 의지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던 그에게는 단지 외교의 실패라는 차원 이상의 충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무렵의 이승만은 바로 자신의 유일무이한 의존대상인 어머니로부터 욕구를 충족받지 못하고 좌절한 '구강기의 갓난아이'였던 것이다.

3. 심리적 불안과 조급성

1) 전위된 공격
사회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욕구의 좌절은 흔히 분노의 감정을 유발하는 주요 원천이 된다고 한다. 이 분노의 감정은 공포감의 기능과 유사한 것으로서 그것은 특히 공격적 행위로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분노의 대상에 대해 그의 감정을 표현할 수 없을 때, 즉 그 대상이 너무 강하거나 혹은 눈앞에 없거나 혹은 보복을 하기에는 너무 불안하고 억제되어 있을 경우에는 어떤 대치된 표적에 대한 공격행위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전위된 공격'은 힘이 약하거나 없다고 인식되는 표적을 향해 표출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북한에 비해 현격한 군사적 열세와 주한미군의 철군으로 인해 심한 불안감에 휩싸인 이승만은 수차례나 거듭된 미국의 협력 거부에 의해 심지어 배신감마저 맛보아야 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와 같은 욕구의 좌절로 인해 생긴 공격감정을 미국에 대해 표출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그에게는 분노를 적절히 대치시켜 표출할 수 있는 공격대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대상은 물론 남한보다 힘이 약하거나 다루기 쉬운 상대여야 했다.
이승만은 남한 내의 남로당 게릴라와 북한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는 이들을 공격함으로써 공산세력과 고군분투하는 '반공 남한'의 위기를 미국에 인식시키고자 했으며, 그것을 통해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군사원조를 유도하자는 심산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들 공산세력들은 이승만에게는 '전위된 공격'의 제물이었으며, 동시에 미국의 원조를 낚기 위한 일종의 '미끼'였던 것이다.
<그림 1>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남한 당국의 대게릴라 공세는 주한미군의 철수가 논의되기 시작할 즈음부터 점차 강화되다가, 1949년 중반경 미군철수가 완료단계에 이를 때에 절정에 달했다. 동시에 이러한 공격은 북한에 대해서도 38선에서의 '제한적' 공격으로 나타났다. 특히 1949년 6월 15일부터 주한미군의 본대가 철수를 시작하자 극도로 조급해진 이승만은 남한군의 병력을 38선 부근으로 재배치하고 북한에 대한 대규모 기습공격계획까지 세워두었다. 이처럼 군사력이 현저히 열세였던 남한이 북한에 대해 대규모 선제공격을 감행하려고 했던 사실과 함께 그 전후에 일어났던 38선상에서의 잦은 충돌은 우발적 사건이라기보다는 미국에게 더 많은 무기의 필요성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행된, 즉 '잘 계산된' 이승만의 책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서는 우선, 당시의 북한은 주로 북한 지역에서 '혁명기지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하여 무력충돌을 비교적 잘 통제하고 있었는 데 반해, 이승만 정부의 책임자들은 38선 분쟁에 관련된 국방경비대의 지휘관들을 통제하겠다는 의사나 행동을 거의 취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당시의 국경충돌 사태들이 남한 내의 중요한 정치적 사건들과 시기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었다는 사실이다. 그 사건들은 주한미군의 철수,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의 결성, 장개석의 방문 등의 경우처럼 미묘한 시점에서 발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38선 분쟁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고의적으로 조작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1949년 중반 이후 미국의 대외정책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모색하면서 군사비 지출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
<그림 1> 남한의 게릴라 활동에 대한 Far East Command 자료(1948-1950)

출처: John Merrill, op. cit., p. 138.

가려는 중이었다. 트루먼 행정부가 이와같이 정책선회를 모색하게 된 이유는 이 무렵 중국대륙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굳어졌을 뿐만 아니라 소련이 원자폭탄실험에 성공하면서 향후 공산세력의 팽창가능성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에서도 공산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이 한층 강화됨에 따라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도 인식의 변화가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주한 미 대사 무쵸는 "남한군에게는 더 많은 군사장비가 필요하다"고 애치슨 국무장관에게 보고하면서, 만약 미국이 남한에 추가원조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남한 내의 테러와 혼란을 조성할 것이며, 그 궁극적인 목표는 한반도에서 소련의 지배권 확보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 역시 남한의 치안이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대한원조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미국은 1949년 10월에 서명된 '미 회계연도의 대외 군사원조' 총액 13억 1,401만 달러 중에서 1,020만 달러를 남한에 할당하여 주로 군대의 장비를 보충하기 위한 정비품과 부속품을 제공하는 데 쓰일 수 있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50년 1월 26일에는 남한의 군사력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미 상호 방위원조협정'을 체결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미국은 적극적인 원조를 통하여 남한의 자위능력을 발전시킴으로써 북한 공산정권과 대등한 입장에서 경쟁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 트루먼 행정부의 이러한 대한정책은 이제서야 남한을 민주주의의 보루로서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봉쇄전략'을 시험해 볼 수 있는 적절한 사례(test case)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와같이 남한의 안보환경이 극적으로 반전되자, 이승만도 이제는 더이상 38선상에서 북한군과의 충돌이나 남로당 게릴라들에 대한 공세와 같이 극단적이고 모험주의적인 행동을 벌일 필요성이 없어졌다. 따라서 <그림 1>에서 나타나듯이 1949년 10월 이래 이듬해 1월까지를 고비로 양측간의 무력충돌은 현저히 감소되었던 것이다.

2) 예방전쟁의 유혹
북한군의 전력은 1949년 여름 이후에 대대적으로 강화되었는데, 그것은 주로 2가지의 원천에 기인한 것이었다. 전력 증강의 첫째 요인은 소련의 군사적 지원이었다. 소련은 이미 북한지역에서 점령군을 철수시킨 직후부터 북한군의 현대화를 후원하였는데, 특히 1950년 봄에는 대량의 중무기를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청진으로 수송해 주었다. 그 결과 1949년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소련이 북한에 제공한 무기는 야크 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정찰기 10대, T-34형 탱크 100대, 그리고 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다른 하나의 요인은 중국으로부터 거의 5만 명에 달하는 한인 의용군이 귀환한 것이었다. 이 덕분에 북한은 1950년 6월까지 약 20만 명에 이를 정도의 병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무렵에는 남한도 미국 군사사절단의 지도하에 급속히 군사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48년 말 6만 명 정도이던 남한의 병력은 전쟁이 발발할 즈음에는 약 10만 명으로 증강될 수 있었다. 남한은 공군력을 증강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이와 관련하여 미 군사사절단은 1949년 12월 31일의 하반기 보고서를 통해서 본국 정부에 F-51 전투기 50대, T-6 연습기 10대, C-47 수송기 2대 및 지원 장비용으로 22만 5,000달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같이 급속한 추세로 증강되는 남한의 군사력은 북한의 김일성에게도 위협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북한의 군사력이 남한에 비해 여전히 우세했던 만큼 그러한 우려는 잠재적인 것이기는 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정열적인 무기구입 노력과 미국의 적극적인 원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한의 잠재적인 사회경제적 능력 ― 인구와 경제규모 등 ― 을 고려할 때 김일성으로서도 향후에 전개될 사태를 낙관만 할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미국이 이승만 정부에 대해 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남한 국민들이 이승만의 군사력 증강정책에 대해 투쟁할 것을 다음과 같이 선동했다.

남반부 인민들은 동족을 살해하는 싸움터에 청년들을 내몰기 위하여 실시하고 있는 이승만 반동 도배의 국군 강제징집을 반대하여 투쟁하며 미국과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서 살인무기를 사들이기 위하여 강제 공출과 가혹한 세납 수탈 및 군사기금 모집 등으로 인민의 고혈을 짜내고 있는 괴뢰 도당의 약탈을 반대하여 완강하게 투쟁하여야 하겠습니다.

이승만 정부에 대한 투쟁을 선동하는 김일성의 이 연설내용 이면에는 남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한 상당한 우려가 함축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우려에 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남한의 정세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판단에서도 잘 드러난다.

南韓은 5개 연대로 구성되어 있던 국방경비대를 '國軍'으로 개칭한 후에 1949년 9월까지 8개 사단으로, 그리고 50년 6월까지는 15만 兵力으로 增强했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이승만 정권은 파시스트적 테러와 야만적인 진압활동을 통해서 侵略 戰爭을 準備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1949년 7월부터 50년 1월의 7개월 동안에 10만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북한에 대한 南韓의 武裝 浸透 사건은 1949년 1월부터 9월까지만 해도 도합 432건에 달했다. 남한 지역에는 戰爭의 暗雲이 드리워졌고 '北으로의 進擊'을 울리는 나팔소리가 울려퍼지고 있다.

사실 이 무렵의 남 북한은 이미 군비경쟁상태에 돌입해 있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현재 북한의 군사적 우세는 단지 일시적인 것일 수도 있었다. 더구나 남 북한 양측은 첨예한 갈등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특히 "북으로 진격하겠다"는 이승만의 반복되는 발언 등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김일성이 무엇엔가 쫓기는 심정이었으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말의 불안감에 젖어 있었을 것임은 틀림이 없었다. 1950년에 접어들어 김일성은 한반도의 상황은 이미 급박하게 전개되고 있었고 미국과 이승만의 북침은 시간문제일 뿐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점에 대해 훗날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 미 제국주의자들과 매국노 이승만 정권은 남한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긴장을 조성했으며, 그들의 괴뢰 병력을 38선을 따라 집중적으로 배치해 놓고 '북으로 진격'해 들어올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동시에 북한 지역에 대한 그들의 무장침투는 더욱 자주 발생했는데, 특히 황해도의 벽성군 인근과 강원도의 여러 지역에서 극심했다. 우리의 조국은 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사회심리학자들은 '불안'을 예상되는 처벌에 대한 공포감으로서 정의한다. 그래서 중대한 위기상황 ― 예를 들면 매우 중요한 시험이나 수술에 직면해 있다든지 혹은 회사의 사장과 최종 담판을 앞두고 있는 ― 으로 불안에 처해 있는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 상황을 무한정 지연시키고 싶은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고통스런 상황을 한시라도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 간에 갈등을 겪게 된다. 만일 고통이 인내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면 그리고 기다림으로 인한 긴장된 불안감이 예상되는 처벌의 고통보다 더 참기 어렵다면, 그는 초조한 기다림보다는 차라리 고통의 감수를 선택하고자 할 것이다.
이것은 국가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만일 어떤 국가가 타국에 의한 위협으로 극도의 긴장과 불안 속에서 고통을 겪으면서 동시에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그 국가는 선제공격에 의해 ― 심지어 공격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일지라도 ― 기술적인 공격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은 전쟁 그 자체라기보다는 전쟁상황으로 인해 야기되는 두려움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합리적인 행위자라면 위험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선택으로서 그 위험대상을 공격하여 파괴함으로써 위험요인 자체를 제거하고자 할 것이다. 당시 남 북한의 상황은 본질적으로 이런 것이었으며, 김일성으로서는 미국의 개입이 더이상 증대되어 남한이 북침능력을 갖게 되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선제공격을 시도해야 할 이유는 충분했던 것이다.
김일성이 남침을 결심한 데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당내의 권력투쟁과 관련된 것으로서, 특히 권력서열 제2인자였던 박헌영과 남로당세력의 입지변화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무렵 북한의 내각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북로당세력이 거의 모든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고 박헌영의 남로당은 권력핵심으로부터 소외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앞의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남로당 게릴라의 전력은 남한 군경에 의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인해 거의 괴멸상태에 빠졌고, 그 결과 1949년 9월 당시만 해도 약 3,500명 정도에 달했던 게릴라 병력은 1950년 4월 무렵에는 600명 이하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남로당 게릴라의 총 지휘자로서 세력기반을 남한에 두고 있던 박헌영은 장차 북한에서 자신과 남로당의 입지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사태가 급박하다고 여긴 박헌영은 하루빨리 남한 내에 있는 자신의 세력을 구원하고 동시에 북한에서 남로당의 입지를 만회하는 방법은 남한을 공산혁명화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박헌영은 그렇게 함으로써만 북로당과 당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김일성에게 '전면 남침'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김일성으로서도 강력한 경쟁자인 박헌영의 그와 같은 요구에 직면하게 되자,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민족해방 투사'임을 입증하고 나아가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김일성이 선제 남침공격을 시도해야 할 이유는 분명해졌다. 그러나 남침의 전제조건으로서 김일성에게는 마지막 한 가지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스탈린으로부터 최종 허락을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김일성은 이미 여러 번이나 소련 대사를 통하여 스탈린에게 남침의 지원을 요청한 바 있었지만, 스탈린은 그때마다 번번이 북한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며 특히 미국이 개입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1949년 말 이래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 특히 스탈린이 우려하던 상황은 크게 변화하고 있었다. 이미 중국대륙의 내전은 공산주의자들의 완전한 승리로 종결되어 북한에 대한 중국과 소련의 양면 지원이 가능해졌다. 특히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남한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다는 선언을 함으로써 더이상 미군의 참전 가능성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졌다. 더구나 소련의 원폭실험이 성공하면서 스탈린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더욱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스탈린도 이제는 김일성의 거듭되는 요청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북한주재 소련 대사를 통해서 김일성이 그토록 고대하던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달했다.
… 본인은 김일성 동무의 불만을 이해하지만 그가 착수하려고 하는 남조선에 대한 큰 과업은 철저한 준비를 요한다고 하는 사실을 이해해야 함. … 만약 그가 본인과 이 문제에 관하여 얘기하기를 원한다면 그를 접견하여 대화를 나눌 것임. 이러한 사실을 김일성에게 말하고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본인이 그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

이와 같은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그동안 김일성과 소련측 사이에 존재하던 '견해차이'는 완전히 해소될 수 있었다. 김일성으로서는 스탈린의 최종 허락과 지원약속을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1950년 전반기에 모스크바와 북경에서 개최된 일련의 비밀회담들은 다만 세부계획을 수립하고 최종 점검을 하기 위한 리허설인 셈이었다.


IV. 결 론

한반도는 지정학적 요충에 위치해 있어서 주변 강대국들 한반도를 둘러싸고 빈번히 각축을 벌여왔다. 그것은 물론 우리에게도 위기였으며, 그 위기 때마다 우리는 생존방법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했다. 이 경우에 우리 스스로 강대국의 힘을 극복할 수 없다면, 그러한 위기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세력균형 속의 중립노선을 취하는 방법 아니면 지배적인 강대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방법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의 역사에서는 전자보다는 주로 후자의 방법만이 선호되었던 것 같다.
물론 외세의존을 반드시 부정적인 시각에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때로는 외세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례를 약소국 신라가 외세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3국 통일의 대업을 성취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당시 신라는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3국을 통일했지만, 적극적인 민족융합정책을 통해서 혼연일체가 되어 당의 지배욕을 분쇄했던 것이다. 따라서 외세를 끌어들이는 경우에라도 그것이 자아의 무화와 단순한 사대의존이 아닌 민족적 주체성과 자주적 역량을 바탕으로 자기성찰을 통한 능동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식의 정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며, 그렇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이성적인 주체로서 외세를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용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남 북한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시의 남 북한은 민족주의적이고 정치현실적인 차원에서의 '타협전략'보다는 오로지 강대국에만 의존한 채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대립과 군사적 수단에 의한 '승부전략'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남북한은 "이데올로기의 멍에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결국 정치적 합의를 통하여 분단상황을 극복한" 오스트리아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었어야만 했다. 즉 남 북한 상호간의 타협과 미 소 양국에 대한 끈질긴 설득, 그리고 4자간의 합의를 통해 전 한반도에서 민주적 선거를 치르고 나아가 평화적 통일을 실현했어야만 했다.
만일 그것이 불가능했거나 현실적으로 곤란했다면, 차선책으로서 남 북한 간의 세력균형과 상호 불가침에 대한 합의를 통해서 적어도 현상이 더이상 악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미 소 양국에 대해 그것의 보장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선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시키고, 그 다음에 상호간의 신뢰와 이해의 바탕 위에서 통일은 점진적인 방법으로 실현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은 오랜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게 마련이지만, 그러기에는 특히 한국인의 사회적 성격은 너무나 불안하고 조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보다 신속한 ― 물론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 해결책을 선택하게 되었고, 심지어 자신들의 목표를 철저히 관철시키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강대국에 의존한 통일'을 추구했으며, 미 소의 적극적인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서로간의 반목과 질시를 고의적으로 증대시키기까지 했다. 그 결과 그들은 미 소의 증대된 원조를 이끌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동시에 그동안 누적된 상호불신과 군비경쟁의 압력을 통해서 스스로 파국을 자초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남 북한 지도자들의 정책은 수단의 합리성은 갖추었을지언정 목표의 합리성을 결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남 북한의 군사력은 대등한 속도로 증강되지 않아 일시적인 군사력의 불균형이 초래되었는데, 이때 특히 군사력이 열세에 있음을 인식한 이승만은 변덕스럽고 일관성 없는 미국 정책결정자들의 원조공약을 얻어내기 위해서 남한 내의 공산 게릴라들에 대한 소탕작전은 물론, 북한군에 대한 직접적인 공세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남 북한 상호간의 불안과 불신의 골은 점점 증폭되었고, 결국 그것은 '전면적인 충돌 외에는 해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깊은 갈등의 씨앗을 배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군비경쟁이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라도 양측이 타협의 방법으로써 ― 예를 들어 군축회담이나 불가침조약 등 ― 점진적으로 갈등의 완화를 추구할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외부적 통제장치의 역할을 통해서 ― 예로서 UN이나 중립국 감시단의 조정 완충 등 ― 상호의 대결은 효율적으로 억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들을 구사한다면 군사력의 불균형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며, 평화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반도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목표는 평화가 아니라 통일에 있었다. 근본적으로 '불안의 문화'를 이어받은 한국인들은 너무나도 조급하게 완전한 통일을 성취하고자 했으며, 그러한 열망이 곧 '통일 지상주의'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강대국에 의존'하는 방법을 선택했던 것이다.
결국 한국전쟁은 해방과 분단 이후에 형성된 남 북한의 분파주의적 갈등 대립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한 결과로서 나타난 비극이었다. 이 시기 동안 남 북한의 지도자들은 모든 정치상황을 '제로섬(zero-sum)'의 시각으로만 인식하여 비타협적인 극단주의로 일관했으며, 그것은 곧 상생의 정치가 아닌 상극의 정치로 나타나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잘못된 선택은 태고시대부터 한국인에게 '집단 무의식'의 형태로 뿌리깊이 내재되고 각인된 의존심리와 불안심리가, 냉엄한 생존경쟁의 무대에서 격세유전되어 표출된 데 기인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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