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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과연]제국주의와 교황

제목 [번역] 제국주의는 교황을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가
글쓴이 그리스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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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는 교황을 어떻게 이용하여 왔는가
―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죽어있을 때에도


다이어더 그리스울드 (Deirdre Griswold)
번역: 우일신 | 노사과연 회원 |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지배계급이 지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죽음 앞에서 하고 있는 것만큼 그렇게 무제한적이고, 존경심에 넘치고, 심지어 아낌없는 영광을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에게 바치게 된 것은―어찌되었든 간에―아주 오래되어왔다.

현대 과학의 모든 업적이 막대한 노력을 들여서 집결되었고 그것은 공중에게 이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세계에 특별한, 심지어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신시켜준다.

교회와 국가의 분리 원칙 위에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 미국이 앞장서고 있는데, 미국은 불과 24퍼센트의 국민이 스스로를 로마 카톨릭이라고 여긴다. 16세기 영국 국교회가 로마와의 관계를 끊은 영국이 그 뒤를 바짝 따른다.
모든 주요 제국주의 국가들의 미디어는 몇 주 동안 교황의 건강, 그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는 바티칸 광장의 군중들, 장례 준비, 그리고 세계 사건들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상세하게 회고하며 국제면과 국내면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석 달 전 두 번째 대지진으로 인한 인도네시아에서 수천 명의 사망 또는 점령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계속되는 격렬한 전투들 같은 다른 세계적 사건들은 교황에 바쳐진 오대양 미디어의 관심에 비하면 형식적인 지면만을 받았다.


도그마에 맡겨진 과학


현대 과학의 모든 업적―교황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의학 처치, 그의 상태를 전 세계에 알려주는 위성, 텔레비전, 라디오, 인터넷에 의한 긴급 통신, 수백 수천 명의 애도객을 로마까지 육로 항공로 그리고 해로를 통해 동시에 이동시켜주는 교통수단―이 막대한 노력을 들여 집결되어 있는데 그것은 공중에게 이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세계에게 특별한, 심지어 초자연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오늘날의 지배적 자본가 계급의 막대한 부가 현대 산업 성장에 기름을 붓는 과학과 기술에서의 혁명적 진보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이다(중세에 카톨릭과 투쟁하며 성장했던 과학이 지금 교황을 신비화하는 것에 봉사하는 것과 비교할 때 아이러니라는 뜻―역자). 그리고 중세기 동안의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카톨릭 교회의 독점을 깼던 자본가계급과 그들에 의해 수행된 이데올로기 전투가 없이는 이것들(과학과 이에 근거한 자본가계급의 부―역자) 중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았다. 자연과학을 해방시킨 것은 교회의 도그마에 대한 계몽의 승리였다. 그리고 그 승리는 다음에는 세계를 완전히 바꾼 생산수단의 거대한 발전의 시기를 가능케 했다.
매우 오랜 동안 미국의 지배 계급은 자신을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White Anglo-Saxon Protestant)――로 여겼고 대부분이 가난한 이민자로 미국에 도착한 카톨릭 교도와 유태인에 대해 생색내는, 심지어 모욕적인 태도를 취했다. 카톨릭 교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는 데는 거의 두 세기가 걸렸고 그러기 위해서 그는 특별히 부유하고 정치적으로 힘 있는 가문의 자손이어야 했다(1961년부터 63년까지 재임한 존 F. 케네디를 가리킨다-역자). 백인 지상주의자 기관들은 종종 카톨릭과 유태인을 아프리카 아메리칸과 마찬가지로 타깃으로 삼았다.

폴란드와 교황


최근에는, 그러나, 특히 요한 바오로 2세의 임기 시작 이래로 미제국주의의 전략가들은 그의 카톨릭 브랜드를 그들의 지구적 야심을 추구하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인식해왔다. 그들은 그의 평화 선언 그리고 사형에 대한 반대와 함께 할 수 있었다. 신교도이건 카톨릭이건 유태교도이건 혹은 무종교인이건 간에 제국주의자들로 하여금 그에게 애정을 갖도록 한 것은 그의 적극적인 반공주의와 “해방 신학”을 선동했던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배척이었다.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Karol Jozef Wojtyla)는 교황이 된 첫 번째 폴란드인 카톨릭 교도이다. 그는 폴란드가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서 위기로 치달았을 때 선출되었다. 나치 독일의 패망 이후 설립된 반(半)공산주의 정부 아래 수년 동안의 국가 소유 산업 발전에도 불구하고 농업은 여전히 개인소유였고 뒷걸음치고 있었다. 사실상 노동자들은 농업의 비효율성에 보조금을 주는 셈이었지만 가난한 상태에 대한 그들의 분노는 국가와 당을 향했다. 교황이 된 후 여덟 달만에 바로 보이티와는 1979년 폴란드에 돌아와 수많은 군중 앞에서 설교했는데 이것은 체제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으로 보였다. 1년 후 미국은 그의 보스턴, 뉴욕, 필라델피아, 디모인(Des Moines), 시카고, 워싱턴 방문을 반(半)공식 휴일로 만들어 줌으로서 붉은 양탄자를 깔아 그를 맞이하였다. 어느 카톨릭 대표자들도 여태껏 그렇게 존경심에 가득한 환대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폴란드에서 반혁명이 심화될수록 연대노조(자유노조 혹은 자유연대노조라고도 불리며, 그 지도자는, 잘 알려진, 바웬사이다―역자) 운동은 CIA와 긴밀히 연결된 지식인들에 의해서 노동자들에게 주입되었다. 그리고 CIA는 “자유노조의 발전을 위한 미국 협회(American Institute for Free Labor Development)”를 지부로 둔 AFL-CIO (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즉 미국 노동 총연맹 산업별 회의―역자)를 통해 공작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로널드 레이건, 󰡔월 스트리트 저널󰡕, 그리고 미국 자본 일반의 아낌없는 승인을 받은 유일한 “조합” 운동이었다. 보이티와는 이 발전 관계에서 중요한 연결고리였다.
오늘날 폴란드는 다시 한 번 세계 자본주의 시장의 부분이 되었다. 사회주의적 집산화에 저항했던 많은 폴란드의 작은 농장들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희생물로 전락하고 있다. 농민들의 저항과 도로 점거는 세계 언론의―또는 교회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한 채 넘어간다. 1999년 현재, 폴란드 인구의 4분의 1은 농업에 고용되어 있지만 국가 GDP의 6퍼센트만을 생산한다. 연대노조의 기반이던 조선소들은 문을 닫거나 서구의 주식회사에 팔려나갔다. 폴란드 이민자들―그들 중 일부는 성매매 업자에게 팔린 여성들이다―은 서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교회가 폴란드인에게 준 것은 그들의 고통을 위한 공적이고 감정적인 배출구이다. 그러나 그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는 사회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혁명이 필요하다.

중앙아메리카와 ‘해방 신학’


보이티와가 교황이 되었을 때, 중미에서는 미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토지 과두 정치의 압제를 깨고 광범위한 다수―주로 인디오 농부들과 노동자―의 소망과 필요에 부응하는 인민정부를 세우려는 강력한 운동이 진행 중이었다. 인민의 고통과 혁명적 변화에 대한 갈망은 특히 가난한 자와 함께 일했던 하급 성직자들 사이에서 정치적 뿐만 아니라 종교적 표현을 찾았다. 니카라구아, 엘살바도르, 그리고 과테말라에서 “해방 신학” 주창자들은 카톨릭교회의 위계질서를 움직여 그들의 투쟁을 지원하려 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 대신에 계획적으로 바티칸에서 해방 신학자들의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는 그가 맑스주의라고 딱지 붙인 사회적 행동주의로부터 교회를 멀리하게 하는 주교들을 라틴 아메리카에 임명하였다. 행동주의자인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1989년 개봉된 영화 󰡔로메로󰡕에 의해서 국내에도 알려졌다―역자)가 보이티와가 교황이 된 2년 후인 1980년 엘살바도르에서 우익에 의해 살해당했을 때, 수녀조차도 군대에 의해 강간당하고 살해당했을 때 바티칸으로부터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또한 1963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교황 요한 23세의 주도로 발표된 것으로서 타종교와의 대화, 평신도의 역할 등 여러 진보적인 면을 담고 있다. 그 문헌은 국내에도 출판되어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2002)―역자)의 자유주의적 방침을 뒤엎고 교회를 더 권위적이고 위계적인 전통으로 되돌리기 위해 주도면밀하게 일했다. 그의 가부장제 실행은 총체적이었다. 교회는 계속해서 남성이 지배했던 것은 물론이고 언제 아이를 가질 것인지 그리고 아이를 가질지의 여부에 대한 여성의 권리―레즈비언과 게이의 동성애 권리뿐만 아니라 피임과 낙태를 포함하는―와 같은 가부장제 가족에 대한 도전은 비난받아야 했다. 1997년 이백 오십만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카톨릭 교도는 여성 성직자와 결혼한 성직자를 인정하고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적대를 버려달라고 교황에게 청원하였다. 그러나 바티칸은 움직이지 않았다.
보이티와는 성직에 들어서기 전에 배우였고 청중을 매혹시키는데 그리고 카메라를 두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아는데 그의 기술을 잘 활용하였다, 심지어 그가 심각한 병중일 때도.
이 모든 것 그리고 자본주의 미디어에 아첨하는 것은, 그러나, 수백만의 평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인기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여기서 칼 맑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부를 때 그가 진정으로 의미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는 자본주의가 백만 가지로 삶을 참을 수 없을 만치 고통스럽게 만들고 종교는 신비적 사후세계에서 일지언정 희망과 위안을 준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완전한 인용은 “종교는 억압받은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영혼 없는 상태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이다(「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맑스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p. 2, 번역은 현재 글에 인용되어있는 영어에 따랐다―역자). 이 구절을 감정 없이 읽기는 힘들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삶의 야만성은 우리 모두를 향해 있지만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고 매 하루를 헤쳐 나가려 한다. 그것이 사후의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이건, 알코올과 약물에 그의 슬픔을 빠뜨리건 또는 많은 것들이 결합되어서건 간에,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은 좌절과 무감각을 받아넘기고 다른 것에 손을 뻗친다.
비록 교회의 위계가 물질적 안락에 있어서 부족하지는 않지만,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에 반대하는 요한 바오로의 설교가 진지한 것이었다고 가정하자. 그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앞에 두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세계에서, 그것은 계급사회의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가난한 자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 그리고 대신에 정신적 구원을 위해 일하는 것.
맑스는 물론 생산수단의 소유권을 그것을 세운 노동자들에게 돌려줌으로써 사회적 관계―그리고 인간 가족의 사랑과 연대를―를 더 높고 더 평등한 단계 위에 재건축할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배고픔, 불의, 전쟁, 그리고 억압이 없을 때, 우리의 감정적이고 지적인 필요를 진정으로 충족시켜주는 것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제국주의 지배계급은 그들의 바로 그 본성에 의해 물질적 소유에 극단적인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공통의 동기를 발견했다. 냉소가들은 그(교황―역자)가 악마와 계약했다고까지 말할지도 모른다. (2005년 4월 6일, http://www.workers.org/2005/world/pope-0414/) ≪노사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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