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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족주의로 촉발된 주도권 쟁탈전

신 민족주의로 촉발된 주도권 쟁탈전

중·일 갈등의 본질은 고삐 풀린 분노와 상처받은자존심의 충돌에 있다


Furies Unleashed

중국 최고 지도자들에게 이번 소요는 마치 되풀이되는 악몽 같았다. 4월 16일 성난 중국인 2만 명은 “일본 돼지들, 나와라!”라고 외치며 상하이(上海) 전역에서 시위를 벌였다. 현지 주재 일본 영사관엔 돌과 토마토가 날아들었고, 일본인 가게가 부서졌다. 닛산 자동차 한 대도 전복됐다. 지금까지 성난 시위 군중에게 다친 일본인은 2명이다. 규모는 작지만 항저우(杭州)와 톈진(天津)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2주 전엔 중국인 시위대 수천 명이 베이징(北京)의 일본 대사관 유리창을 깼다. 불과 몇 시간 뒤 중국의 막강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위기 관리를 위해 회의를 소집했다.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은 시위 확산을 방치하지 말도록 경고했다. “다른 문제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할 기회를 시위자들에게 주지 말라는 뜻”이라고 중국의 한 고위 소식통은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이처럼 예민한 경계 분위기는 수주간의 대규모 시위로 천안문 광장이 마비된 1989년 당시의 정치국 대책회의를 연상시킨다고 말했다. 그는 “중국 지도부는 통제력 상실을 원치 않는다”고 덧붙였다.

일부 공식적인 격려까지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이번 시위의 직접적인 원인은 일본 정부가 자신들의 2차대전 전력(前歷)을 미화한 개정판 역사 교과서를 승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글대는 중·일 분쟁의 원인은 실제론 과거의 전쟁에 관한 게 아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당시 저지른 잔학 행위에 대해 이미 사과했고, 이름만 다를 뿐 340억 달러의 ‘개발 원조’를 중국에 제공했다고 주장한다(이 같은 사실은 중국 언론에선 별로 언급되지 않는다).

사실 분쟁의 진짜 원인은 두 나라가 아시아의 경제·외교·군사적 미래에 대한 주도권 장악을 위해 갈수록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20년간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자부심과 힘을 함께 갖게 된 중국은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 갖게 된 외교적 힘을 휘두르고 있다. 반면 일본은 중국의 부상(浮上)에 불안감을 느낀 결과 2차대전 이후 줄곧 외교정책의 기조였던 평화주의를 내팽개치고 있다.
양국은 현재 새로운 에너지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특히 일본 언론이 ‘갈등의 바다’라고 표현한 동중국해에 대량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해저 천연가스가 폭풍의 눈이다. 일본 통상산업성은 지난주 그 지역의 석유와 가스에 대한 채굴권을 일본 민간 기업들에 부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미 그곳에서 석유 탐사 작업을 해오던 중국은 즉각 이를 ‘심각한 도발’로 규정했다. 양국은 쌍방 간 교역이 급증한 상황에서도 기꺼이 상대방의 전략적 야망을 꺾겠다는 태도다.

중국은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고, 일본은 중국의 미주개발은행(IDB) 가입을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다. 워싱턴 DC에 거주하는 중국학자 페이민신은 “심리적으로나 전략적으로 양국은 매우 불편한 관계에 접어들고 있다”며 “이것은 후일 중·일 관계의 일대 전환점으로 기록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마찰은 보다 큰 현상의 등장을 의미한다. 동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는 민족주의의 새로운 부상이다. 이 지역 국가들이 자국의 이익을 주장하면서도 상대국의 이익엔 도전하는 것에서 명백히 알 수 있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은 흔들리는 정치적 지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정서에 호소하고 있다.

대만에서도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대만의 정체성에 대한 보다 확고한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92년 이후 자신을 중국인이나 중국계 대만인이 아닌, 오로지 대만인으로 여기는 사람의 수는 대만 전체 인구의 18%에서 40%로 증가했다. 타이베이(臺北)에 위치한 중국학술원 사회학연구소의 창마우퀘이는 “우리의 세계관은 변했다. 이젠 중국이 아닌 대만이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말했다.

물론 아시아에서 국가적 자긍심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그러나 과거엔 그것이 주로 역사적 원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제국주의와 전쟁의 공포에 대한 방어적 반응으로 생겼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국립대 동아시아센터의 연구교수인 데이비드 켈리는 “역사적으로 몸에 밴 감정을 과소평가할 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새롭게 대두되고 있는 민족주의는 평화와 번영의 시대에 성장한 보다 젊은 세대의 열망에 더 많이 뿌리를 두고 있다. 도시 중산층 중 일부는 이제 자신들의 민족적 정체성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생겼다. 올림픽 개최를 부르짖는 것이 대표적 예”라고 덧붙였다.

지난 30년간 동아시아는 경제 발전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시기에 한국과 중국의 정치인들은 일본의 수정주의적 교과서, 위안부, 더 최근엔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등에 대해 자주 흥분했다. 그러나 국민 대다수는 자신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에 바빴다. 가슴을 치며 분노할 시간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도 옛날 얘기다. 젊고, 교육받고, 기술적으로 앞서가는 요즘의 젊은 아시아인에겐 경제적 안정이란 메시지가 1970년대나 80년대처럼 절실히 와닿지 않는다.

그들은 이미 돈·여가,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갖고 있다. 게다가 새로 찾은 사회적 자유와 인터넷 덕분에 자신들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표출한다. 이 같은 태도는 정부의 정책에도 갈수록 큰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중국 정부가 대만에 대해 보이고 있는 강경 입장의 배경에는 중국 젊은층의 여론이 자리 잡고 있다. 일본의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진출에 반대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 중국 네티즌이 벌이고 있는 온라인 청원에 서명한 사람은 이미 2200만 명에 이른다.

오늘날 중국 최대의 민족주의 단체 중 하나는 ‘애국자동맹망’(愛國者同盟網)이다. 웹 디자이너 루윤페이(29)를 포함한 중산층 도시 전문직이 주도해 세운 단체다. 이 단체의 웹사이트는 이미 회원 7만6000명을 거느리고 있다. 중국 정부가 새로운 철도 건설을 위한 주요 계약을 일본 회사와 체결하자 애국자동맹망은 반대 운동에 나서 8만6000명으로부터 전자서명을 받아냈다.

그 결과 계약 자체가 무산될 처지다(적어도 현재까진). 시위 참가를 부르짖는 네티즌의 요구는 지금까지 중국 내 8개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를 촉발했다.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이 미군 주도의 NATO 군에 의해 폭격당하자 시위자들이 미국 대사관을 난장판으로 만든 1999년 시위 이후 최대 규모다.

어느 정도의 민족주의 정서는 스트레스 많고 급변하는 사회에서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문제는 민족주의 간 충돌이 위험 상황으로 이어질 경우다. 그 같은 위험은 동아시아에서 잠재적 폭발성을 내포하고 있다. 국가 간 경계가 사실상 의미를 상실한 서유럽과 달리 동아시아 지역엔 유럽연합(EU)이나 NATO처럼 역내를 아우르는 국가 간 기구가 없다. 쉽게 말해 국가 간 긴장을 줄여 주거나 상호 협력을 위한 틀을 제공할 구조가 없는 것이다. 영토 분쟁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곳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 네 곳은 역사적 과오 때문에 아직도 주변국들의 의혹과 두려움을 사고 있는 일본과 관련돼 있다.

중·일 관계는 지난해 11월 동중국해에서 군사적 대치 상황이 발생한 이래 악화일로를 걸어 왔다. 당시 일본 자위대는 자국 영해를 침입한 중국의 핵추진 잠수함을 발견했다. 양국이 개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천연가스전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자위대는 그 잠수함을 이틀 동안 추격한 뒤 중국 측에 사과를 요구했다. 결국 중국은 사과했다. “주목할 만한 것은 중국 잠수함의 일본 영해 침범이 아니라 군사적 대치를 혐오하는 일본이 직접 잠수함을 추격해 쫓아냈다는 점”이라고 미 외교협회(CFR)의 중국 문제 분석가 애덤 시걸은 말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일본은 더욱 강경한 대중국 노선을 채택했다. 우선 방위백서에서 중국을 군사적 위협으로 못박았다. 1월 19일에는 일본과 미국이 전례없는 공동성명을 통해 현재와 같은 대만의 사실상 독립 상태가 ‘공동 전략 목표’라고 선언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의 내각엔 대만에 동조적인 보수·우익 인사가 더러 포진해 있다. 일본은 16년째 지속되고 있는 EU의 대중국 무기 금수조치를 해제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도 했다.

고이즈미는 2001년 총리에 선출된 이후 일본의 정체된 정치 시스템 개혁을 위한 핵심 과제로 국가적 자긍심 회복을 내세웠다. 특히 일본의 젊은 세대가 그의 견해를 수용했다. 중국 전략가들은 일본 정부가 미국의 보수적인 매파 행정부 때문에 더욱 대담해졌다고 믿는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다가오는 ‘중국의 위협’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지난 3월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대만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저지하기 위해 반(反) 국가분열법을 통과시킨 것은 중국 지도부에 반드시 득이 된 것은 아니었다. 반분열법은 대만에 대한 국제 사회의 동정심을 높여준 동시에 중국을 더욱 호전적으로 보이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적 자긍심 외에 불안감도 일본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 일본 템플대의 제프리 킹스턴 교수는 “국제 서열에서 일본의 위치가 위태롭다”며 “지금은 중국이 일본을 앞지르려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90년대의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본은 아시아의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이란 지위를 포기한 듯했다. 그 여파로 일본의 젊은 세대들은 현재 깊은 불안에 빠져 있다. 심지어 일부는 포퓰리스트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 도지사나 만화가 고바야시 요시노리(전쟁에 대한 일본인들의 죄책감을 뒤집는 작품을 내놓았다) 같은 다양한 인사들이 전파하는 위대한 국가의 꿈에서 위안을 찾고 있다.

중국의 현 정권도 자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민중의 민족주의에 영합하는 편이 자신들의 정통성 결여를 불식하는 데 유리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인민들의 동기를 유발할 수 있는 이념이 아니다. 그 뒤를 이은 ‘금전 숭배’도 갈수록 커지는 빈부 격차에 대한 좌절감을 낳았다. 1930년대에 강경한 반일 노선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은 중국 공산당으로선 일본으로 화살을 돌리는 게 안전한 길이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이 긴장 완화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양국 간 교역 규모는 연간 2000억 달러를 넘어섰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일본의 최대 무역 파트너가 됐다. 일본 기업들은 중국에 막대한 금액을 투자해 현재 중국인 약 100만 명을 고용하고 있다. 다카시마 하쓰히사(高島肇久) 일본 외무성 대변인은 “양국의 상호 의존도와 보완성이 워낙 높아 서로 경원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며 “이처럼 밀접한 관계를 손상시켜선 안 된다”고 말했다. 옳은 얘기다. 그러나 2001년 이후 양국 간에는 정상회담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았다. 후진타오 주석과 고이즈미 총리는 4월 22일 자카르타의 아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이다. 그러나 둘이 만날 계획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전문가들은 중·일 간 불화가 군사적 대치로 증폭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중국이 대만을 공격하거나 봉쇄할 가능성이 우려로 남아 있다(그것은 계속 예측할 수 없는 요인이 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의 급속한 군 현대화는 이미 역내 군비경쟁에 대한 우려를 낳고 있다. 특히 중국 해군은 신형 수륙양용 공격정 23척과 공격용 잠수함 13척을 추가로 확보해 5년 전과 비교할 때 훨씬 강해졌다. 지난해 12월 중국 정부는 신형 핵추진 잠수함 1호를 진수했다. 미국 정보기관들의 예측보다 수년이 빨랐다. 중국은 또 자국산 디젤-전기 동력 잠수함도 건조 중이다.

민족주의는 한번 터져나오면 제어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주 중국 네티즌은 5월 4일(1차대전 후인 1919년 일본의 요구에 굴복한 중국 정부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벌어진 날)을 기념해 천안문 광장에서 대규모 반일 시위 개최를 요구했다. 1989년의 망령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중국 지도부는 천안문 광장에서의 민중 집회를 허용할 것 같지 않다. 그러나 반일 시위가 공안에 의해 좌절됐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 시위대는 분노의 화살을 일본에 아부하는 정부 쪽으로 돌릴 공산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중국 공산당 정치국은 위기관리 회의를 훨씬 더 자주 열어야 할지 모른다.

With JONATHAN ANSFIELD and CRAIG SIMONS in Beijing, HIDEKO TAKAYAMA and KAY ITOI in Tokyo, B. J. LEE in Seoul and JONATHAN ADAMS in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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