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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레프트 리뷰>의 자살 - 까갈리츠키

40년간, 뉴 레프트 리뷰는 전세계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하나의 상징이었다. 뉴 레프트 리뷰의 논문들은 좀 더 성공적이거나 그렇지 않기도 했고, 그 관점들의 피상적 급진주의나 무력한 중도주의로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시 영어를 읽는 모든 좌파들에게 뉴 레프트 리뷰는 당대 마르크스주의의 정보원이 되었다. 새로운 명사들이 그 페이지를 통해 등장했으며 발표되었던 입장들을 중심으로 한 근본적인 중요한 논의들이 진행되었다. 영국에서 발행되었고 대다수 저자들은 영국이나 미국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뉴 레프트 리뷰는 다른 국가의 저자들에게도 열려 있었을 뿐 아니라 그 본질과 접근법, 구조와 이데올로기는 국제적인 발행물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이 저널은 더 이상은 없다. 물론 또 다른 저널이 같은 이름으로 발간되지만 이 간행물들은 이전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180도 다른 개념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2000년 1월부터 뉴 레프트 리뷰는 편집인을 바꾸고 장정과 호수체계를 달리했다. 우리 앞엔 포스트모던한 양식의 제1호의 작은 연습책이 있다. "두번째 시리즈 (Second Series)"라는 부제는 이 시리즈가 앞으로 40년간 살아남은 다음, 세번째, 네번째의 시리즈가 또 있을 것을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개념의 변화는 의미심장한 "갱신"(Renewal)이란 제하의 페리 앤더슨(Perry Anderson)의 서문에서 선언되었다. 로빈 블랙번(Robin Blackburn)의 뒤를 이어 편집을 맡은 페리 앤더슨은 뉴 레프트 리뷰에 새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뉴 레프트 리뷰의 창간도 함께 했다. 편집진의 구성도 실질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새로운 피의 수혈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전혀 반대의 이야기이다. 우리 앞엔 그저 그들의 기획과 이데올로기를 바꾸기로 결정을 내린 똑같고 오래된 집단이 있다. 토니 블레어와 게르하르트 슈뢰더와 같은 정치가들의 상승세를 따라 이 새로움이란 말이 유행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60년대에 신좌파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구현된 "구좌파"와 구별되는 아주 뚜렷한 이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이 정치적 선명성은 신, 구 좌파의 공통점을 분명히 하는 구실을 했다.

21세기 전환점에서 상황은 바뀌었다. 새로움이란 발상은 다른 모든 생각의 대체물이, 또 어떠한 긍정적 자기동일성의 상징적 대체물이, 그리고 과거와 미래에 대한 책임감으로 (때에 따라서는 그들의 양심에 따라서도) 새로움이라는 말을 거론하는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는 주문이 된다. 새로움에 근거한다면 무엇이든 정당화되지만 새로와 진다는 것이 더 나아진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게다가 새로움이 "궁극적인 것"을 의미할 수 없다는 건 더 중요한 점이다. 새로운 것은 오래된 것이 될 것이고 그리고 완전히 잊혀졌던 어떤 것은 다시 새로운 것이 된다. "새로운" 기획이나 "새로운" 생각에 대한 언급은, 그 기획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혹은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를) 숨김없이 선언할 정치적, 지적 용기가 부족함을 보여준다. 그가 논설에서 신중하게 경고했듯이 페리 앤더슨이 토니 블레어의 지지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앤더슨의 관점에서는 블레어주의는 신자유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다. 바로 이런 이유로 블레어나 슈뢰더 그리고 유사한 "신 사민주의자"들은 전세계적인 범위의 신자유주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증명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이전에 뉴 레프트 리뷰의 초기 설립자들을 고무시켰던 세계를 변혁하는 오래된 기획은 효력을 잃었다. 세상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그것으로 신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하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근본적 변화에 대한 시도들은 실패했다. 사회는 통합의 과정을 겪고 있다. 좌파에게 남은 것은 이 과정을 지켜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따라서, 뉴 레프트 리뷰도 떠오르는 상황에 순응하여 오래된 전통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재건해야 한다. 세련된 영국 신사인 페리 앤더슨은 머드 6가의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서 좌파 기획의 붕괴에 대해 축 쳐져 논하고 있다. 그는 청년시절의 이상과 급진적인 과거를 부인하지 않을 만큼의 지적 정직성을 갖고 있지만 그것들의 붕괴에 대해 애도하지 않을 만큼 냉정하다. 그가 뉴 레프트 리뷰의 첫번째 시리즈와 함께 1960년대의 기획을 묻어 버릴 준비가 되었지만 그의 서문에는 한 절, 한 문장의 정치적인 자기 비판도 포함되지 않았다.

다 좋다. 페리가 다른 젊은 급진주의자들과 함께 영국의 사회적 사상과 정치적 생활을 혁명화하려던 시도와 그리고 지금, 그가 더 이상 아무 것도 전복시키려 제안하지 않는다는 것도. 그런데 무슨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는가? 어떤 특별한 고통이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가? 서구의 지식인들이 그들의 이론 말고 실제로 뭔가 잃어버린 것이 있는가? 아무도 감옥에 갇히거나 분노한 군중 앞에 세워지진 않았다. 그들의 가정이 무너진 것도 아니고 그들의 도시도 폭파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마신 것도 아니고 수지가 안 맞아서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니며 그들이 살 형편이 안 되어서 출판사에 공짜 책을 구걸하려고 굽실거릴 필요도 없다. 그런 일은 동구나 제3세계에서는 일상적인 경험의 일부이지만 번영하는 서구에서는 아니다. 그리고 이들 중 어떤 것도 학문적 엘리트들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주진 않는다. 앤드슨에겐 사회주의의 역사는 사상의 역사, 좀 더 이야기해보자면 유행이 지난 사상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람시는 매력을 잃었고 그리고 사르트르는 잊혀졌다. 새로운 뉴 레프트 리뷰의 편집자는 회한도 없이 이것에 대해 쓰고, 마치 성공한 여성이 자신이 학생시절 찢어진 청바지를 입었던 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급진적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러워함이 없다. 시대는 변했고 패션도 그렇다. 유토피안들의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와 혁명의 희망에 대한 평형추로 페리는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uncompromising realism)"를 내어놓는다.

이 현실주의의 본질은 무엇인가? 어떤 쓰레기 같은 진실이라도 월 스트리트 저널에 나왔다면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좌파 운동의 붕괴를 승인하는 것 이외에 그 논설은 아무런 실재적인 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거긴 아무런 분석도 없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한 반성이나 세계화의 모순과 역학에 대한 이해의 노력도 없다. 이 "분석"은 월 스트리트 저널과 그 경제학자들에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그림을 비판적으로 읽으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그 주류 논설을 그대로 요약하는 데까지 갔다. 잘 봐줘도 이것은 전형적인 학교 훈련을 떠올린다. 전체를 읽은 다음 너의 말로 바꾸어 말하라. 이 경우 영감의 주요한 근원이 되는 것은 신자유주의 학교의 주석자들이고 페리는 그들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는다. 좌파는 그가 보기에 "새로운" 어떤 것도 제안할 능력이 없다. "대조적으로 이 시대에 직접적으로 정치 건설 분야를 지휘하는 우파는 세계가 어디로 가는지와 어디에 멈추어 있는지에 대한 한가지 풍부한 전망을 제시한다. 후쿠야마(Fukuyama)와 브레진스키(Brzezinski), 헌팅턴(Huntington)과 예르긴(Yergin), 루트웍(Luttwak), 프리드만(Friedman)이 계속 뒤를 이으면서. 이들은 유일하고 강력한 하나의 명제를 학문영역의 독자들이 아닌 폭 넓은 국제 공공 대중을 위한 유창하고 인기 있는 문체로 써내는 저술가들이다. 미국이 지금까지 실제적으로 독점하고 있는 이 확신에 찬 양식은 좌파에서는 어떤 대응물도 찾을 수 없다."(19쪽.)

이것은 어떻게 앤더슨의 말이 러시아 공산당수 겐나디 쥬가노프(Gennady Zyuganov)의 발언을 반복(과장함 없이 말 그대로)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가 그의 인종차별적이고 민족적이고 반 마르크스주의자적인 태도에서 이런 방법으로 "근대성"을 세우려 내놓았던 발언 말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 논쟁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헌팅턴이 앤더슨보다 더 나은 문체를 가졌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솔직히 난 어떤 차이도 모르겠다. 본질은 어쨌거나 다른 데 있다. 우리는 누가 더 많이 책을 찍어내게 하는지나 누구의 문장 구조가 더 멋들어진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든 좌파는 주석자나 대중 인기 영합자로 모자란 적이 없다. 실제로 관련된 것은 어떤 지적 수준을 요구하는 이론적 토론이다. 그리고 여기선 후쿠야마와 헌팅턴은 무력하다. 20년전에 어떤 지식인도 브레진스키가 심각한 이론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이제 그는, 헌팅턴, 절반은 잊혀진 후쿠야마와 나란히, 지식인의 정신적 선도자 경지에 거의 다다랐다. 이 저자들이 누리는 성공은 그들의 사상가로써의 어떤 장점과는 무관하다. 이것이, 이 현상이 사회학적이고 문화학적인 관점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유다. 이것은 고찰되고 쓰여질 필요가 있는 주제지만 앤더슨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다. 게다가 그는 그런 어리석고 "유행에 떨어진" 토론을 그의 저널에 허락할 생각도 없다. 타협하지 않는 현실주의는 최소한의 비판적 사고조차 없는 곳에서 구성된다.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상을 설명했지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앤더슨은 세상을 설명하는 것조차 필요 없고 그저 세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것은 그의 이데올로기적 적에 대한 세련되고 신사적인 형태의 무조건적인 항복이다. 페리는 그의 칼을 부수어 버리고 승리자의 자비에 완전히 무룹꿇었지만, 진짜 신사답게 위엄과 양식을 갖추고 했다. 그는 물론 승리한 적들이 이 "의용군대"로 무엇을 할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이론가는 자발적으로 그의 "상아탑" 속에 갇혔다. 바깥에 남겨진 우리들은 그에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런 생각은 실제의 운동과 마주칠 경험이 완전히 부족한 상황에서 태어나며 그리고 동시에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데 사용된다. 좌파 운동은 위기에 있지만 바로 그 이유로 급진적인 행동과 비판적 사고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긴요하다. 필요한 건 잘 구축된 전략과 최종 분석에서의 원리를 갖춘 견해와 윤리적 기초이다. 이 대신 페리는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의 주석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논의하고 앞으로는 저자들이 좌파에 속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에게 알려준다. 남아있는 건 오직 이름을 뉴 레프트-라이트 리뷰(New Left-Right Review)로 바꾸는 일 뿐이다. 신사가 노동조직가나 거리의 투쟁가가 될 수 없다는 건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이상하긴 하지만 이것이 20년 전에는 가능했다.) 그리고 누구도 이 "좌파"의 교수들에게 거리에서 경찰관들과 한 데 어울리라는 요구를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합당한 자신들의 책무, 비판적으로 생각하기에 바쁘기만 하다면 만족할 것이다. 우파들에 대한 존경과 (그들의 견해에 근거해 판단하기 위한) 우파와의 지적 연대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신화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근본적 접근법의 완벽한 논리적 귀결이다.

페리는 1990년대 후반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의 위기(러시아의 채무불이행,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봉기, 그리고 미국에서 1999년 가을 시애틀의 거리에서 그들의 힘을 보여준 새로운 좌파 대중의 운동에도)를 간신히 무시하는 것만이 아니다. 그는 심지어 이 현상들을 고찰한 저자들에 대해 조롱을 덧칠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위기는 좌파 상당 부분의 배신이나 겁내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훨씬 첨예해질 것이다. 배신은 1914년 제2차 인터내셔널의 항복 문서에서 보듯이 역사적 뿌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사건의 윤리적 성격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예프게니 슈발츠의 일화들 중에 하나에는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사악한 학교에서 배웠다. 그러나 누가 당신들을 탁월한 학생이 되도록 강요했는가? "갱신된" 좌파들은 신자유주의의 학교에서 뛰어난 학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로 볼 때 좌파의 갱신은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인다. 잡종 블레어-슈뢰더-쥬가노프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갱신자"들과의 단호하고 타협하지 않는 결별과 문자 그대로 우리 눈앞에 군집하고 있는 대중 운동으로 돌아서는 것으로 말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항할 대체 이데올로기의 필요는 중대하다. 급진주의와 저항은 이론적 근거를 얻어야 한다. 지금은 지식인들이 영향을 발휘할 수 있는 적기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들은 영향을 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다. 페리의 논문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결론부이다.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정치적 옳바름으로 더 많은 비서구쪽의 투고를 환영한다고 선언하다. 여기서 다시 그는 자신의 관점에서 "구" 뉴 레프트 리뷰가 비영어 사용권과 비서구의 대표자들에 대해 페이지를 충분히 열어주는 데 실패했다고 헐뜯고 있다. 그러나 책꽂이의 "구" 뉴 레프트 리뷰 소장 목록에서 하나 꺼내어 보는 것으로 현실이 이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뉴 레프트 리뷰는 라틴아메리카와 동유럽, 남한, 인도와 아프리카의 저자들을 포괄했다. 그러나 반면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이 관점에서 심각한 문제가 불가피하다. 왜 비서구 사람들이 그들 존재의 필수적 문제에 관한 노골적인 무관심을 보이는 저널을 위해 글을 써야하는가? 왜 대서양권 내부 그룹의 지식층에 속하지 않는 저자들이 그들에게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저널을 위해 협력해야 하는가? 페리는 앵글로-색슨 문화의 지식인들의 지적 나르시시즘을 애도하고 있는데 그는 그것의 끝간 데를 보여준다. 진정한 신사는 물론 외국 학자들의 사상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만, 우리 외국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수사를 해야하는 역을 할당받았고, 더 나쁜 것은 이미 만들어진 문화적 문맥 속에 집어넣어져 "문명화된 토착민"의 구실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이 전혀 아무런 지적인 요점이 없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들이 전혀 서구 지식인들과 차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외국 저자들의 글을 싣는가? 소련의 옛날 농담에 이런 게 있다. 인사팀장이 이야기하길 "우리가 라비노비치에게 일자리를 주었다고 그가 더 이상 유태인이 아니길 기대하지는 마라." 똑같은 이야기다.

만약 주변부 저자들의 글을 싣고자 한다면 그들이 서구의 전 급진주의자들의 허약함과 허영심에 그리 감명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놀라진 마라.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잡지의 개념과 세계관이 국제주의여서 서구에서 발행된다는 것에 따른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새" 뉴 레프트 리뷰는 처음부터 그들의 완전한 지역적 발행물이라는 특성을 받아들인다. 황량한 미국의 대학에 점점이 흩어져 있는 몇백명 되는 전 급진주의자들 이외에는 아무도 이러한 저널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유럽과 미국의 급진적인 문화의 최고를 대표했기 때문에 비서구 좌파들에게도 뭔가 가르쳐줄 것이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널이 더 앵글로색슨적일 때 다른 나라의 우리들은 더 흥미를 발견했다. "갱신"된 뉴 레프트 리뷰는 페리의 서문으로 판단할 때, 이코노미스트나 월 스트리트 저널의 논설들을 "그들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제공할 듯 싶지 않다. 그러나 원본이 있는데 왜 다시 이야기해주는 것이 필요하겠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다문화 담론은 문화들 간의 대화와 공통점이 없다. 나는 현대 중국 영화에 대한 유행하는 프랑스 비평가의 태도를 찾아내기 위해 영국의 저널을 읽는 데는 흥미가 없다. 이건 영화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문화의 사회학에 흥미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점은 단순히 이런 거다. 이미 수십개의 저널이 이 분야에 대해서 더 잘 분석하고, 더 상세하고, 더 전문적으로 하고 있고, 가장 중요한 점은, 정치와 지식의 매개가 없다는 것이다. "구" 뉴 레프트 리뷰는 현대 마르크스 이론과 정치적 분석의 국제적 저널이었고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페리의 관점에서는 이 기획은 죽었다. 수백만의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 건 아니다. 수백만이 틀리고 한사람이 옳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편집자 스스로가 신나게 승리에 차서 원래의 기획을 묻어버렸는데 우리가 왜 뉴 레프트 리뷰를 필요로 하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페리 앤더슨이 이전의 뉴 레프트 리뷰와 다르게, 그것을 공격하고 새로운 저널을 만들 필요를 느낀다면 차라리 기존의 발행물을 폐간하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 더 정직했을 것이다. 나는 이 제목을 유지한 주요한 이유가 친숙한 상표명을 고수하려는 생각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가 한 행동으로 앤더슨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정치적 지적인 좌표를 뉴 레프트 리뷰의 영향하에 형성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인간적 모욕을 주었다. 옛 이름을 새로운 저널로 그대로 이전함으로써 페리는 우리의 공통의 과거와 공유한 역사의 일부를 훔쳤다. 이것은 더 이상 용서될 수 없다. 제호와 장정이 바뀐 것은 좋다. 이것은 그의 직업적인 정직함을 보여준다. 상당한 수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이것은 신호가 될 것이다. 친숙하고 아주 사랑 받던 저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죽었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부모가 그것을 죽였다. 새로운 저널은 월 스트리트 저널의 구독자들 중에 새로운 독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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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창립 선언문

'이론동인' 창립 선언문

이론  제1호
이론

진보진영이 위기를 맞고 있다. 세계적으로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 표상되는 지배 세력의 공세 앞에서 진보진영은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난 수년간 격변해온 국내외의 실천적, 이론적 정세 속에서 우리나라의 진보적 이론진영도 커다란 동요와 혼란을 겪고 있다. 실천진영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진보적 이론과 실천 속에서 부쩍 강화되고 있는 청산주의적 경향이 그 위기의 심도를 반영한다. 우리나라의 진보세력이 맞고 있는 위기가 다른 곳에서와 똑같은 양상을 보이지는 않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이 위기의 보편성과 현실성을 냉정히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위기의 인정이 노동해방, 인간 해방을 위한 이론과 실천에 간직된 위대한 전통의 청산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계승의 조건이 된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 위기 속에서 해방을 향한 역사의 새로운 순환을 준비하고, 이를 위한 이론적 작업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하려고 이렇게 모였다. 최근의 이론적 정세에 대해 일단의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우리는 자신의 나태와 무능을 새삼 반성하면서도,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현재의 논쟁 지반을 변화시키고자 노력할 것이며, 이를 통해 이데올로기적 보수화 및 반동화의 거센 물결을 막아내는 일에 일조하고자 한다.
진보적 이론의 외연과 내포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며, 진보적 학문의 개별 분야를 뛰어 넘어 스스로를 '이론동인'으로 조직하든 우리는 현 상황에서 해낼 수 있는 주요한 공동 작업 형식으로서 동인지 『이론』을 창간한다. 이러한 우리의 노력이 진보적 이론 연구의 수준을 한층 더 높이고, 생산적인 토론의 장을 한층 넓히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1992년 3월 21일

강내희 강명구 김기원 김세균 김수행 김재기
서관모 손호철 윤소영 이세영 정성진 정영태
정운영 정춘수 최갑수 최종욱 허석렬 홍승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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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프 서영석 인터뷰 &quot;지방대 중심 새로운 글쓰기 주류 발굴&quot;

인터뷰/데일리서프라이즈 서영석 전문기자-“지방대 중심의 새로운 글쓰기 주류 발굴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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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작성일: 2004-09-22

“나는 보수주의자이다. 예를 들어 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처럼 분배의 시스템을 모두 바꾸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정도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개인의 능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그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해 주고 하는 내가 생각하는 정도다. 이정도면 건전한 보수주의자 입장이다. 나 같은 사람이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바뀐 것이라고 본다.”
송복남 편집장


"시대상황이 바뀌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웹진 서프라이즈의 서영석 전대표는 최근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창간과 관련해 자신의 입장변화를 이렇게 말했다. 웹진 서프라이즈와의 관계청산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02년 대선 당시“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므로써 내 역할이 끝났고 생각했는데, 의회의원들의 주체라는 문제가 남아있어 목숨이 연장된 것”뿐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따라서“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국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끝났기 때문에”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즉 웹진 서프라이즈 대표로서의 서영석이 아니라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전문기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섰다는 얘기다. 아울러 그는 웹진 서프라이즈와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역할 분담만은 분명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서 웹진서프라이즈의 필진을 데일리서프라이즈로 영입하지도 않았다. 웹진서프라이즈의 영역과 역할은 그대로 놔두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새로운 글쓰기의 논객 즉 지방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글쓰기 주류를 만들어 낸다는 계획을 실천하고 있다. 물론 서영석씨로서는 웹진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이“굉장히 좋은 분들이 많고 아깝”고 또“개인적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않”다. 그러나 데일리서프라이즈가 등장함으로써 서프라이즈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을까는 우려 때문에 역할분담만은 분명하게 지키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새롭게 모든 영역을 만들어 간다”는 원칙을 세웠다.

또 조선일보를 타겟으로 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에 대해서도 그는 단호하다. 오히려 조선일보에 대한 호의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조선일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라는 말에서도 드러나듯이“안티조선이라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이고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언론으로서의 데일리서프라이즈는“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큰 목적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조선일보) 조직을 죽여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또“그럴 이유”도“없다”. 함께 그는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오프라인으로의 확대계획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서영석씨는 자신의 이념적 포지션에 대해서도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어느정도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개인 능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그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해 주고 정도”가 그가 생각하는 사회변화의 정도다. 따라서 자신 같은 사람이“보수주의자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바뀐 것이라고”본다고 말했다. 나아가“노무현정권은 중도우파인 보수주의정권이며,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은 지난 8월9일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데일리서프라이즈, 오프라인 계획 있다


서프라이즈에서의 입장정리가 끝났는데 그간 서프라이즈의 역할에 대해 자평해 달라.

“시대상황이 바뀌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므로써 내 역할이 끝났고 생각했는데, 의회의원들의 주체라는 문제가 남아있어 목숨이 연장된 것이다. 이제 새로운 대통령 새로운 국회가 등장함으로써 새로운 출발을 위한 인프라 구축이 끝났기 때문에 내 역할은 끝났다고 봐야 한다. 계기가 없었는데 이번 일이 계기가 되서 정리를 하게 된 것이다. 서프라이즈는 앞으로 영구불멸하지는 않겠지만 상당히 오랫동안 나아갈 것이고 그런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서프라이즈 속에서의 내 역할은 이제 이미 정리가 됐다. 나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 나아가야 한다. 과거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서프라이즈는 내가 없어도 새로운 개혁적인 담론들이 만들어지고 그런 것들이 전파될 것이고, 계속 지금도 성장하고 있잖은가.”

하지만 서전대표가 서프라이즈에 있고 없고의 차이가 있을 것도 같다.

“그게 서프라이즈 초창기 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별 상관없다고 본다.”

데일리서프라이즈에 웹진 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이 옮겨오지 않는가?

“기본적으로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웹진서프라이즈의 논객을 쓰지 않는다. 굉장히 좋은 분들이 많고 아깝다. 또 개인적으로는 쓰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은데 안 쓰는 이유는 행여 데일리서프라이즈가 등장함으로써 서프라이즈의 영향력이 쇠퇴하지 않을까는 우려가 있다. 그래서 역할분담을 시키는 것이다. 그 부분은 우리가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서프라이즈의 것이고 우리는 새롭게 모든 영역을 만들어 갈 것이다. 새로운 필자를 발굴하고 있고 이미 글쓰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는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발굴하는 것이 목적이다. 지금 서프라이즈는 자발적인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으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숨어있는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발굴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흔히 글쟁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들 말고 전혀 새로운 사람들을 발굴 등용할 것이다. 서프라이즈에서 글쓰는 사람을 데려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필진들의 이동은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 아닌가.

“인위적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인위적으로 막는다는 것이 어폐가 있지만, 어쨌든 서프라이즈의 논객들은 구조화 되어 있다. 그 자체가 움직이게 놔두는 것뿐이다. 우리는 칼럼리스트라는 현 글쟁이들이 주류를 배제하고 새로운 글쓰기를 하는 새로운 주류를 만들어낼 것이다. 제도권에서 현재 담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아닌 지방대중심으로 한 글을 쓸만한 사람을 소개도 받고 접촉을 하고 있다. 우리는 사설이 없다. 사설을 쓸만한 사람이 없어서이다. 그렇다고 우리 형편에 논설위원을 초빙해서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론과 칼럼 위주로 해나갈 것이다. 기획하고 있는 게 4가지다. 첫째는 14명을 선정해 7명씩 나눠서 매주 1편씩 쓰게 하면 매주 2편의 칼럼이 나온다. 시론은 300명 정도의 투어를 구성해 시론을 쓰게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우리가 정치전문이라고 하는 데 그건 아니고 데일리서프라이즈의 케치프라이즈가 중소기업을 살리자이다.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방안들이 많이 논의되고 있는데, 중소기업 CEO들이 직접 글을 통해 자신들의 얘기를 하게 할 것이다. 한 60명에서 120명 정도의 CEO들을 구성해 두 달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번 씩 이들의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 할 생각이다. 그들이 중소기업의 활성화에 대한 대안까지 제시할 수 있는 CEO칼럼이 될 것이다.”

데일리서프라이즈가 오프라인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고 보는데?

“오프라인 계획을 가지고 있다.”




데일리서프라이즈는 언론개혁 차원이다


웹진 서프라이즈에서 데일리서프라이즈에 필진들으로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있나?

“지금까지 그런 사람은 없고, 인터뷰전문기자 지승호씨는 같이 일할 것이다. 1주일에 한 번 정도이며 대가를 지불하게 된다.”

정치기자들이 중심으로 국회를 바탕으로 취재를 해나가겠다고 했는데.

“모든 사회문제 해결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이 이런 역할을 하고 우리는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들이 취재의 바탕이다.”

기자 출신이고 잔뼈가 언론에서 굳었다. 진정한 언론이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나는 기본적으로 언론개혁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데일서프라이즈를 준비하면서 새로운 지식층을 만드는 것도 언론개혁과 같은 맥락이다. 중소기업을 살리자는 것도 마찬가지다. 중소기업을 살릴 수 있는 여러 방안이 많이 있지만 중소기업을 실제 운영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음으로써 정책결정자들이 정책에 반영하고 실천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언론개혁을 해야한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언론개혁의 주체자들은 언론사 혹은 언론인들인데 그것이 여러 가지 제약조건 때문에 고쳐지지 않는다고 보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일을 함으로써 스스로 고쳐지는 모습을 보이고 이것이 독자들에게 와닿고 인기를 얻고 영향력을 가짐으로써 다른 언론사들을 계인하자는 솔선의 목적이 있다. 언론사의 가장 큰문제점은 언론 자체가 권력화 되어 있다는 점이다. 언론이 권력화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언론계라는 카테고리 자체가 권력이라고 본다. 왜 권력이냐 하면, 언론은 여론을 주도하고 있고 이 카테고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자격조건이 제한이 되어 있다. 언론고시라는 게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일단 들어가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지금 언론계는, 100% 그렇지는 않지만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서강대 외대 성균관대 등 5-6개 대학을 제외하면 들어가기가 힘들다. 이런 카테고리 속에서 들어가는 데 있어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고 기득권 속에 들어가기만 하면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고, 들어가고 나서는 취재도 잘 안하고 하는 많은 문제점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그런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지 않은 제 3,4의 대학출신을 많이 포용해서 훈련을 시키고 열심히 취재하는 언론 내부의 개혁을 해보자는 목적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사 간에 꺼렸던 언론사 이야기 기자들의 이야기도 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영역의 침범 즉 사생활침해로 인한 명예훼손이라든가 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겠는가?

“법률자문단을 구성할 것이다. 5-6명 정도의 언론 관련 변호사를 구성해서 자문을 받아 나갈 것이다. 특히 언론과 관련한 기사는 대상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문을 받을 것이며 그것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할 것이다. 나는 소송에 관해 전문가다. 전체 5,60 건의 소송을 당해봤는데 단 한 건도 패소하지 않았다.”

기자의 자질은 뭐라고 보나? 기자는 다른 직업과 다른데, 국민들도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다. 그래서 기자들의 글쓰기에 대한 고민이라든가, 취재의 성실성 등 기본적 기자로서의 정도가 있지 않겠나?

“글쎄, 기술적인 문제의 자질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신문에 나오는 기사가 100% 사실이라고 믿는 것은 오산이다. 기사는 검증 시스템을 거치게 된다. 기자가 쓴 기사는 데스크의 손이 거쳐지기 때문에 기자가 쓴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우리 기자들 같은 경우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글쓰기에 문제는 있을 수는 있겠지만 훈련을 하고 있고 데스크진이 구성되면 별 문제는 없다고 본다. 오늘날의 기자는 생활인으로서의 위치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본다. 직업인으로 직장인으로서의 기자의 문제가 발생할 수는 있다고 보는데 다만 기자의 글이 사회적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볼 때, 우리 사회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주도하는 데 기여하자는 공동의 목적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런 공공의 목적이 있기 때문에 기사를 생산하는 것이지 특별히 누구와 무슨 원한관계에 있어 기사를 쓰는 것이다. 조선일보 같은 경우 못할 짓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응보를 받을 언론사이지만 우리가 꼭 그걸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조선일보도 언론사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다룰 뿐이다. 다만 조선일보가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사회적 해악이 크기 보다 좀더 다른 언론사 때문에 많이 다룬다는 차이점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일보를 유독 타겟으로 생각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죽이기 위해 데일리서프라이즈 있는 것 아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의 이념적 대립각은 있지 않겠는가?

“나는 조선일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다. 장점보다 단점이 많기 때문에 장점이 상대적으로 가려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객관적 입장에서 조선일보를 바라보고 있다. 안티조선이라는 것은 목적을 가지고 있는 사회운동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큰 목적은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 조직을 죽여야 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우리로서는 그럴 이유가 없다. 조선일보는 스스로 무너진다든가 시민운동으로 인해 타격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조선일보를 죽이기 위해 등장한 것은 아니다.”

아직 사이트 오픈 전이지만, 취재가 진행됐을 텐데, 특종이랄 기사는 있나?

“그건 우리 영업비밀이기 때문에 말 할 수는 없고, 뭐 너무 어렵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한 번 나온 것을 보고 기대를 하고 기대를 접고 그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우리는 유난을 떨지도 않을 것이고 처음에 굉장히 많은 기대를 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야 좋다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루 이틀에 평가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장기적으로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하루 이틀의 평가를 위해 특별한 것을 준비하고 있지는 않는다.”

기자들은 온라인 출신인가 오프라인 출신인가?

“오프라인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전문기자로서 일하고 싶다

웹진 서프라이즈하면 노빠라고 부르는데, 이런 대중적 이미지가 데일리 서프라이즈에도 그대로 인식되어지지 않을까 하는데.

“서프라이즈는 정론이다. 대중의 인식이 잘못된 것이다. 개혁을 하자 그랬는데 그 개혁의 주체가 노무현대통령이어서 그것을 지지한다고 노빠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문제다. 80%이상은 노빠와 관련이 없다. 그건 기사가 말해 줄 것이다. 내가 스스로 노빠다 아니다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우리가 하루 이틀 하고 말 것도 아니고 장기적으로 할 것인데.”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 서대표의 역할은 무엇인가? 경영자도 영입을 하고 편집국장도 영입한다고 하는데 구태여 서대표가 중책을 맡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나?

“구태여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럴 필요가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내가 스스로 결정한 것이다. 나는 책임있는 역할을 맡는 것이 싫고 지겹다. 또 한다고 생각하니까 캄캄했다. 나는 기자로서의 역할을 더 하고 싶다. 전문기자로서 더 활동을 하고 싶은 뿐이지 나는 남의 얘기를 듣는 사람이 아니다.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다. 다만 이 계획을 진행하면서 마지막으로 기자로서 일을 더 하고 싶다는 욕망이 강했다. 언론개혁이라든가, 친일문제라든가 이런 기획시리즈를 계획하고 있는데 이런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그러나 전반적인 부분은 능력있는 편집국장에게 맡기고 나는 세부적인 부분을 맡아 심도있게 일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없어도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어놓고 앞으로 평생 놀고먹을 것이다. 내 소원이 평생 놀고 먹는 것이다. 그걸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총선 이후 개혁추진을 어떻게 보는가?

“열린우리당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지금 노무현대통령이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열린우리당이 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 사회의 수십 년의 틀을 바꾸는 일이다. 어쩌면 이일은 끝까지 가야하고 다음 정권까지 가야 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게 단기간에 표가 나고 평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의 방향과 수순이 제대로 되고 있는가를 봐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는 긍정적이다. 어떤 일을 목적으로 갈 때는 여러 과정을 거치는데 돌아가기고 하고 곧바로 가기도 한다. 앞서간다고 좋아할 필요도 없고 돌아간다고 비난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곳으로 가고 있는 가이다. 어떤 한 가지 일을 놓고 판단을 하는 것은 숲은 안보고 나무만 보는 것과 같다.”


이런 질문을 하고 싶었다. 이 시대의 진보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글쎄, 진짜 어려운 질문인데.”

나도 몰라서 묻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대통령의 표현이 딱 맞다고 본다. 우리사회가 어떤 방향으로든지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데 이 틀을 바꿔서 가자는 사람과 반대로 아니다 그대로 가도 된다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둘이 싸우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꾸고 나가자는 사람이 진보이고 그냥 가자는 사람이 보수라고 본다. 그러나 이념적으로 보면 굉장히 다르다. 이념적인 측면에서 보면 바꾸고 나가자는 사람도 보수일 수 있다. 나도 보수주의자이다. 왜 보수냐. 우리 사회의 주류를 바꾸자는 데는 변함이 없지만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틀을 완전히 뜯어고치자는 입장은 아니다. 예를 들어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처럼 분배의 시스템을 모두 바꾸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정도 자유경쟁을 보장하고 개인 능력의 격차를 인정하고 그 능력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는 사회적 시스템이 보장해 주고 하는 정도가 내가 생각하는 것이다. 이정도면 건전한 보수주의자 입장이다. 좌파의 시각으로 보면 보수주의가 맞지만 보수주의자라는 이유로 나쁘다라고 할 수는 없다고 본다. 노무현정권도 보수주의 정권이다. 역시 노무현정권도 보수주의인데 보수주의이기 때문에 나쁘다고 욕을 먹을 이유는 없다고 본다. 노무현 정부는 중도우파정권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도 중도우파다. 자칭 우파 입장에서는 좌파고 자칭 좌파입장에서 보면 우파이다. 한나라당은 절대 보수가 될 수 없다. 그들은 수구이다. 나 같은 사람이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 우리 사회는 바뀐 것이라고 본다.”

역사는 진보한다고 보는가?

“명백하게 진보하고 있다. 역사가 진보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고 열린우리당이 다수당이 됐겠나. 느리지만 꾸준히 나가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수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개인적 화두는 무엇인가?

“아무 생각없이 놀면서 살자는 목적을 향해 지금까지 일하면서 살아왔다. 무위도식을 최상의 가치로 생각하고 산다. 무위도식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속에서 살아왔다.”

무슨 선문답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니다. 진짜 그렇다. 나는 책임감 같은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사람이다. 지금부터 내 생의 최대 목표는 빨리 손을 털고 약간의 돈을 가지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사는 여건을 만드는 데 노력할 것이다. 나는 남의 시선은 전혀 신경쓰는 사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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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미디어의 개념

 <온라인 미디어의 개념>

온라인 미디어란 통신망을 통해 전자적으로 서로 연결되어(networked), 데이터(data)의 흐름이 쌍방향으로 이루어지고, 내용이 수시로 업데이트(update) 될 수 있는 미디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의 수업에서 배운 바로는, 대면(face-to-face) 커뮤니케이션에서는 공기(air)를 매체로 소리를 전달하고, 신문은 종이를 매체로 사용하며, 방송은 전파를 매체로 사용한다고 배웠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온라인 미디어는 라인(line), 즉 통신망을 매체로 사용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 정의에서 보듯이 온라인 미디어의 첫번째 특징은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통신망을 통해 전자적으로 상호연결되어 있다는 점이에요. 즉, 컴퓨터 또는 이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도구에 의해 서로 전자적인 부호를 통해 electronic communication 또는 computer-mediated communication을 수행하는 미디어를 의미하지요. 이렇게 보면 케이블TV도 온라인 미디어의 일종이지요.

그렇다면...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미디어의 사용은 그렇지 않은 미디어의 사용에 비교해 볼 때, 인간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약간 색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요? 흔히 통신망의 각 끝 지점, 즉 end-user에 해당하는 부분을 node라고 부릅니다. 온라인미디어는 메시지의 도착 지점과 시작 지점을 정확하게 알 수 있고, 항상 연결되어 있으므로 일종의 "준비된 커뮤니케이션 채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전달수단을 이용하는 미디어보다 정보손실 또는 연락두절(communication failure) 현상이 적다고 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e-mail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겁니다.

온라인 미디어의 두번째 특징은 정보의 전달과 반응이 쌍방향으로 이루어져서 이용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내용을 능동적, 선택적으로 커뮤니케이션한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매스미디어는 메시지 생산자(언론사, 방송사)가 수용자(독자, 시청자)를 대상으로 일방향으로 "불특정 다수에게 메시지를 뿌리는(broadcasting)" 우월적 지위를 누려왔는데, 이제 온라인 미디어가 보편화되면서 그런 우월적, 독점적 지위를 양보해야 할 시대가 왔습니다.

뉴스만 하더라도 언론사의 입사시험을 통과한 이른바 최고 엘리트라고 인정받는 "기자"라는 신분을 가진 사람만이 쓰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으나, 이제는 누구든지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생산하고 전달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또 제도권 미디어는 권력, 자본 등과 교묘한 유착 관계를 형성하면서 언론의 공정성, 객관성, 진실성이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국민을 상대로 여론조작에 동참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언론은 국민의 알 권리(right to know)를 위해 헌신하기 보다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자사의 수익증대만을 최고목표로 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러한 언론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대안미디어로서의 기능을 온라인미디어가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지고 있습니다.

온라인 미디어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인터넷에 수많은 인터넷신문, 인터넷방송과 같은 사이트들이 생기면서 누구나 메시지 생산자가 될 수 있는 환경이 되었습니다. 이와 함께 현재 국내 인터넷 이용자수가 1천6백만명이 넘으면서 자신이 만든 사이트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1천6백만명의 독자를 확보할 수도 있다는, 매체로서의 엄청난 위력을 실감할 수 있는 여건도 갖추어졌습니다. 올해 초에 처음 시작한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지금 얼마나 제도권 미디어를 긴장하게 하는지 여러분은 이미 알고 있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메시지 생산자와 수용자의 지위는 동등해지거나 오히려 수용자가 더 우월해지는 현상까지 생기게 됩니다. 요즘 주변에서 보는 사이버 여론 형성 과정을 보면 네티즌의 여론 형성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까지는 여론을 주도해 온 매스미디어가 사이버 여론에 귀 기울이고 있어야 할 형편입니다. 군필가산점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 문제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운동을 벌인 시민단체를 필두로 번져나간 지지 여론은 모두 사이버 여론 형성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확산된 것을 여러분도 알고 계시지요.

세번째로 온라인 미디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상호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어 정보의 업데이트가 수시로 이루어진다는 점이지요. 뉴스전달의 속보성을 생명으로 해 온 텔레비전이 이제 속보의 명예를 인터넷에게 넘겨줘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텔레비전 뉴스는 방송편성 시간에 맞춰 방송되고, 보통 하루를 단위로 제작되는 반면, 인터넷 뉴스는 기자가 취재한 즉시 올릴 수 있기 때문에 거의 실시간(real time)에 가깝게, 또 뉴스의 분량에 제한받지 않는 심층뉴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에서 온라인 미디어만이 가지는 연결의 경제 또는 네트워크의 외부성이 나타나게 됩니다. 보다 많은 개체들이 연결될수록 네트워크 내에 보유하고 공유하는 정보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네트워크의 유용성을 높이게 되는 겁니다.

최근 수없이 생기는 인터넷 벤처기업들의 주된 특징을 보면, 가능하면 많은 회원을 확보하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 이유는 회원 수가 그 회사의 경쟁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확보된 회원은 일종의 데이터베이스(database, 데이터의 집합)로서 마케팅 전략에 중요한 정보자원이 됩니다. 데이터베이스가 클수록 정보의 자산가치도 높아지는 거지요. 그래서 군소 기업체들은 서로 자신의 강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기업체들과 자주 합병하는데 이것을 "전략적 합병"이라고 합니다.

인터넷 사업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떤 사이트가 (1) contents, (2) connection 또는 communication, (3) community, (4) commerce 의 기능을 균형있게 갖추어야 합니다. 이 영어의 앞 자리 글자를 따서 "4C"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 포털(portal) 사이트라고도 합니다.

Contents라 함은 정보를 풍부하게 갖추고, 이를 분류, 검색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 Communication이라 함은 이용자에게 무료로 메일계정을 제공하여 회원으로서 이용자간 자유롭게 의사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주며, Community라 함은 사이트에 전자게시판을 설치하여 이용자들의 다양한 관심, 취미, 또는 활동 분야에 따라 온라인에서 자연스럽게 취향집단(taste public, 쉽게 말해 동호회 같은 것)이 형성되도록 하는 기능을 말합니다. 끝으로 Commerce라 함은 전자상거래로서, 그 사이트를 매개체로 하여 이용자가 상품을 사고 팔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contents가 풍부한 방송사가 communication, community 기반이 잘 갖추어진 인터넷 회사(Yahoo, America Online 등)와 합병하고, 또 나아가 commerce 기능이 우수한 백화점까지도 이에 연합하는 사례를 우리는 종종 뉴스로 듣고 있습니다.

정보전달 미디어를 구분하는 기준으로는 ① 일방향성인가 쌍방향성인가, 즉 수신자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용(on demand)하고 즉시적 반응을 보일 수 있는가 아니면 수동적 수용을 할 수밖에 없는가 ② 단일정보형식인가 복수정보형식(멀티미디어)을 전달할 수 있는가 라는 두 가지 기준이 널리 적용되고 있어요. 이밖에도 대인미디어(personal media)와 대중미디어(mass media)라는 구분기준도 사용되고 있는 데, 이는 위의 범주에서 쌍방향성과 일방향성의 기준과 상당 부분 중복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지요.

Package형 (Stock형)

Network형 (Update형) = Wired

일방향성 
/수동적 수용

쌍방향성 
/선택적 수용

일방향성 
/수동적 수용

쌍방향성 
/선택적 수용 
(On-line미디어)

Monomedia

(단일정보형식)

편지, 신문, 잡지, 라디오, 교통/옥외광고

음성정보서비스

전자우편, 팩스

(전화)  문자정보중심의 PC통신과 인터넷

Multimedia

(복수정보형식)

영화, VTR

Interactive CD-ROM

TV, CATV 

뉴스전광판

(대면, 회의)  멀티미디어형 PC통신과 인터넷  Interactive TV

다음으로 우리가 정보화를 미디어의 온라인화라고 단순하게 정의해 본다면, 정보화에 따른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변화가 어떨지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앞에서 설명한 내용을 바탕으로 본다면, 정보화란 정보전달 하부구조, 예를 들면 정보고속도로 같은 거 말이에요. 이것과 정보전달 맥락, 정보전달 내용, 정보전달 형태 등 포괄적인 커뮤니케이션 체계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정보전달 맥락의 변화는 교환과 거래과정의 변화, 정보획득 과정의 변화(쌍방향화, 선택적/능동적 수용), 구매형태의 변화(구매자의 직접선택으로 재고불필요)를 가져오게 되며, 또 정보전달 내용과 정보전달 형태의 변화(멀티미디어화)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보화라고 하는 말은 온라인 미디어가 커뮤니케이션의 지배적 도구로서 자리잡음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커뮤니케이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점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온라인 미디어의 보급 또는 대중화로 인해 커뮤니케이션의 주체가 사용자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정보생산자가 일방적으로 정보를 보내고 사용자가 이를 수동적으로 수신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매스 커뮤니케이션의 전형적인 모델이었지요.

그러나, 온라인화 된 커뮤니케이션 환경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 쌍방향성을 가지므로 정보수신자가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편리한 방법으로 원하는 내용을 선택하여 수신하는 on demand 환경으로 바뀌게 됩니다. 즉, 지금까지 생산자에 의해 독점되었던 정보흐름이 바뀌어 정보흐름의 주체가 수신자/정보사용자로 옮겨가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정보화된 사회가 반드시 수신자의 자유와 효용을 증대시킨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정보의 과부하로 인해 개개인에게 접근하는 정보의 신뢰성, 혹은 미디어별 일관성, 그리고 이를 지원할 수 있는 모든 다른 정보단서가 일관되게 제공되지 않는 경우에는 오히려 더 수동적인 수신자로 전락할 가능성도 지적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정보수신자가 적극적으로 정보탐색과 선택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많은 정보를 간편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정보의 체계를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며, 동시에 흥미를 부여하여 접속동기, 이용동기를 높이는 한편, 정보의 신뢰성과 일관성을 확보하고, 접속에 필요한 정보단서(주소, 안내)등을 어떻게 제공할 것인가도 고려해야 하겠지요.

변화의 두 번째 특징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시간과 공간, 내용, 용량, 비용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제공하는 정보의 양, 시간, 장소, 미디어 확보 비용, 메시지 내용변경에서의 제약이 현재보다 훨씬 적어지므로 송신자나 사용자 모두 이러한 제약을 극복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집니다.

셋째는, 커뮤니케이션이 퍼스널(personal)화 된다는 점입니다. 미디어의 다양화 추세 속에서 매스미디어의 메시지는 충분한 정보의 부족, 접점을 놓친 메시지 등으로 노이즈(noise)화되어 그 가치는 상대적으로 저하하고 있는데, 온라인 미디어는 매스미디어에서와 같이 불특정 다수가 수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별개의 수용자가 되어 개별적 필요에 의해 정보를 선택하므로 커뮤니케이션과 구매행동이 보다 세분화되고, 영어로 표현하자면 "customized" 되어 효과가 증대될 수 있습니다.

네 번째 특징은 메시지의 구조와 연결이 보다 이성적이고 논리적 형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개인이 원하는 시간과 공간에서 모든 정보를 선택적으로 얻을 수 있으므로 원하는 정보에 대한 차별적이고 심층적인 요구가 강해질 것이며, 따라서 설득형 메시지보다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소구를 하는 설명형 또는 논리형 메시지가 이에 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섯째, 미디어가 멀티미디어 특성을 가지는 경우에는 메시지의 연결, 내용, 전달형식/표현형식에 있어 멀티미디어의 이러한 장점을 살릴 수 있도록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멀티미디어의의 본질적인 특징은 멀티미디어가 인간에게 있어 무엇을 의미하는 가하는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자정보와 영상정보의 이해과정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영상정보를 접하는 경우에 보다 감정상태에 관한 언급과 평가를 포함한 사고가 보다 빈번하게 나타난다고 합니다.

즉, 멀티미디어를 통한 인간의 인지능력의 확장은 형식적인 추론이나 논리적 메커니즘에 근거하는 것에서 감정이나 평가과 같은 감성적 메커니즘에 근거하는 것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논리적 메커니즘의 작동이 저하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메커니즘을 기초로 하여 여기에 통합적으로 구성되는 감성적 메커니즘이 미디어의 확장에 의해 보다 활발해지는 것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이러한 관점에서 멀티미디어를 이해하면, 멀티미디어의 본질적인 특징은 단순히 시각정보나 청각정보가 통합된다는, 인간의 신체의 확장이 아니라 인간의 지식, 추론, 감성, 감성의 확장, 즉 인지의 확장이 가능하다는 데 그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미디어의 온라인화가 초래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변화의 핵심은 온라인 미디어가 인간이 커뮤니케이션 하고자 하는 욕망을 자극하여, 능동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대중시대에 매스커뮤니케이션의 지배로 잃어버린 대인(face-to-face) 커뮤니케이션을 회복하고 정보제공에 있어서의 힘의 전이(power shift)를 초래하여 정보의 주도권을 미디어에서 이용자로 넘어가게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로 온라인 미디어에 대한 설명을 마칠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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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상 종간.. 인터넷에 대적 안돼

인물과 사상 종간.. 인터넷에 대적안돼
조선닷컴 [2005-01-17, 조회수 31, 추천수 0] 

'인물과 사상' 종간… 강준만 "인터넷에 대적안돼"

입력 : 2005.01.17 10:51 15'

지난 97년 1월 발간된 ‘인물과 사상’(도서출판 개마고원)이 2005년 1월 33권을 끝으로 종간한다고 미디어오늘 인터넷판이 16일 보도했다. ‘인물과 사상’을 이끌어온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신속성·영향력·만족도 등 모든 면에서 책은 인터넷의 경쟁상태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도서출판 개마고원은 제33권 사고(社告)에서 “실명비판이란 원칙을 견지하며 우리 사회의 성역과 금기를 깨는데 일조하고자 노력해온 지난 8년여의 세월 동안, 독자 여러분들께서 보여주신 많은 관심과 사랑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고 밝혔다. 미디어오늘에 따르면, 강 교수는 33권 머리말 ‘인터넷시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종간과 관련, “인터넷이 활자매체의 목을 조르고 있다”며 “신문구독률의 감소보다 더 죽어나는 것은 출판계, 특히 영세한 인문사회과학 출판”이라고 말했다. 강 교수는 또 “지난 몇 년간 시사적인 이슈를 다루는 책이 대중의 호응을 얻은 건 거의 없다”면서 “특히 정치분야의 경우 인터넷이 (책의) 기능을 완전히 흡수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신속성·영향력·만족도 등 모든 면에서 책은 인터넷의 경쟁상태가 되질 않는다”고 강조했다고 미디어오늘은 전했다. 강 교수는 이어 “초기의 민중적 장점에만 주목하기엔 인터넷은 너무 비대해졌고 금력과 권력의 눈독이 집중되고 있다”며 “인터넷은 이제 더 이상 아웃사이더들만의 공간이 아니며, 신문들이 먹던 광고라고 하는 ‘밥’도 인터넷으로 몰려가고 있다”며 인터넷 커뮤니케이션 문제점에 대해 비판했다. 강 교수는 “더욱 중요한 건 인터넷이 우리 시대 오프라인 행위마저 규제하는 ‘규범 테크놀리지’로서의 위상을 갖게 되었다는 점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미디어 오늘에 따르면 강 교수는 “노무현 정권과 그 지지자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선악 이분법을 구사하는 걸 보고 경악했다”면서 “한국 사회 밑바닥에 잠재돼 있던 그 어떤 광기가 폭발한 건지, 아니면 남한 땅에 무슨 귀신이 씌웠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 모든 게 인터넷이 부린 조화인가 하고 의아해하다가 끝내 답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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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별 특성과 성향 분석

조중동에서 서프라이즈, 재미로 보는 국내언론 100자 평
온라인/오프라인 매체별 특성과 성향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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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보 : 웹진에 가까운 인터넷신문. 맹목적 반노도 맹목적 친노도 아닌 정치성향. 민주당으로 올인해버린 ㅂ뉴스와 결별을 선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불편부당한 신문으로 회귀. 서버가 다운될 정도로 방문자 수가 급격히 늘고 있는 신문. 방문자 증가 속도는 인터넷 언론 중 최고. 정치성향은 중도와 진보의 중간 정도가 될 것으로 예상. 인터넷 논객이라는 신드롬을 낳은 바로 그 대자보.
 
동아 : 70년대 군사독재의 광고탄압에 맞서 백지광고를 낸 바로 그 신문. 하지만 민주적 언론인 해직에 앞장섬으로써 민주적 야당지로서의 빛을 잃기 시작. 당시 해직 당한 언론인은 복직을 시도했으나 여의치 않아 결국 88년 한겨레신문 창간 멤버가 됨. IMF 경제위기 때 자사 기자를 해고하면서 기자들을 휘어잡은 이후 사주의 입김이 너무 강화되면서 맹목적 반정부 신문으로 전환. '대구, 부산에는 추석이 없다'는 기사에서 드러나듯 70년대의 선명 야당지는 수구신문 조선일보를 닮아가고 있음.
 
오마이 : 부동의 인터넷 선두 신문. 한겨레와 함께 중도성향의 신문. 민족주의 성향이 강함. 이런 성향 때문에 진보세력이 경원시하는 경향도 있음. 그래도 수구세력에 비하면 진보세력 입장에서는 우군인 신문. 이제는 세계를 향한 독립 인터넷 신문의 전도사. 댓글이 주렁주렁 달리는 인터넷 신문.
 
조선 : 한국의 대표적인 친미전쟁주의 냉전 신문. 수구신문의 대명사. 인권,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이 없어 이와 관련한 논조는 파시스트적인 수준임. 중3 수준에 맞추어 기사를 쓴다고 고백한 바 있는 신문. 칼럼과 사설, 제목 등은 이성보다 동물적 감정에 호소하는 경우가 허다함. 그 중에서도 증오에 기반한 글이 다수. 댓글에 욕이 가장 많은 신문. 친일, 기자해고, 군부독재 찬양, 족벌사주입김, 세금포탈, 불법적 경품 살포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1등 신문.
 
한겨레 : 명실상부한 민주주의의 대변지. 오마이뉴스보다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경미하게 약하고 경제와 관련해서는 진보세력에 가까운 논조가 자주 등장.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중도성향의 신문. 사설의 수준이 매우 높음. 초등학생 수준의 조선일보와는 현격한 수준의 차이를 보임. 경품 살포 등에 매우 소극적이고 법을 고지식하게 지키려 하기 때문에 조,중,동에 비해 시장 장악력이 약하고 그 결과 기자들이 박봉에 시달리는 형편임. 전체 기자들이 뽑은 가장 공정한 신문.
 
중앙 : 재벌이 소유했던 신문. 조선, 동아와 함께 불법 경품 살포의 장본인. 조선일보 지국 직원과의 다툼 끝에 살인 사건이 나기도 했던 바로 그 신문. 조선, 동아일보에 비해 남북관련 보도는 매우 전향적이었음. 사주가 스스로 친북파라고 말할 정도임. 물론 친미파라는 사실도 덧붙임. ㅈ일보보다 덜 수구적으로 보이지만 선거 때는 더 극단적이 되기도 하는 매우 경계해야 할 신문. 92년 대선 직전 IMF와의 재협상 발언을 빌미로 DJ를 역적으로 몰아간 교활한 미국발 기사를 쓴 바로 그 신문.
 
프레시안 : 한국과 연관성 있는 외신을 자주 번역해서 게으른 일부 국내 기자에게 도움을 많이 준 인터넷신문. 민주당 편애로 상당히 기울었다가 민주당이 몰락하자 제정신을 좀 차린 신문. 그 당시를 못 잊는 상당수 민주당 관계자들이 여전히 비회원 명의로 댓글을 달고 있음. 그래도 진보세력 입장에서는 (진보누리 빼고) 관련 기사를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싣는 고마운 인터넷 신문.
 
진보누리 : 좌파 성향의 인터넷 신문. 사실상 정치웹진에 더 가까움. ㅈ씨의 문제성 있는 발언으로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수구언론이 보도해줌으로써 방문자 수가 증가했음. 수구젊은이 ㅅ씨의 ㄷ신문을 비판하려던 MBC의 보도가 그 의도와 무관하게 ㄷ신문 방문자 수를 급증시킨 것과 유사한 일. 수구언론이 진보를 돕고, 중도언론이 수구를 도운 언론계의 아이러니한 일화. 민족주의 경향을 매우 싫어하는 논조가 다수. 중도세력과도 견원지간. 너무 거시적인 담론으로 정치를 바라봄.
 
서프라이즈 : 노무현 지지자들의 정치 웹진. 진보세력에 적대적이던 대표가 청탁 사건에 휘말리면서 방문자 수 격감. 진보세력과 경쟁하려 하기보다는 단세포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는 논객이 다수. 심지어 일부가 오마이, 한겨레를 수구적 시각에서 비판하는 등의 편협함 때문에 '수구세력 반대'라는 대의명분의 빛이 바래고 있음. 대표의 중도하차로 획기적 변화가 가능한지는 두고 볼 일. 너무 미시적인 시각으로 정치를 바라봄.
 
경향 : 기자들이 주식을 소유한 완전 독립신문. 한겨레에 비하면 보수적. 하지만 민주주의적 정권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한겨레처럼 강하지 않아 진보세력 관련 보도가 오히려 한겨레를 앞선 것으로 평가됨. 한마디로 상식적인 신문. 9월부터 조,중,동과 한판 벌인다고 전해지고 있음. 서울신문, 문화일보, 부산일보, 경남도민일보와 함께 최고 수준의 만평.
 
시사저널 : 애초 독립적인 주간지로 출발. 읽을거리가 많은 잡지. 기사가 색다르고 분석적임. 특히 남북, 미국 관련 기사의 예측성 있는 심층 분석은 백미. 공천 헌금을 비판한 후 DJ의 버림을 받을 위기에 처한 이해찬 당시 국회의원을 살린 바로 그 잡지. 한겨레, 오마이뉴스처럼 한국 정치, 사회 발전에 대한 책임감에 짓눌리지 않아 '홀가분하게 공정한' 잡지. 한겨레21에 비해 미시적 분석이라는 함정에 덜 빠짐. 최근 기사 유료화로 좋은 인상 많이 구김.
 
미디어몹 : 생기발랄한 딴지일보에서 갈라져 나온 인터넷 신문. 아찔할 정도로 급상승한 인터넷 신문. 헤딩라인뉴스가 일품.

* 필자의 홈피 http://www.geocities.com/turnover2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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