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 토론회 전문기자

[칼럼] 토론회가 재미없는 이유
오창엽     메일보내기
최근 각종 토론회들을 취재하고 있다. 확인해 본적은 없지만 다른 매체의 기자들에게 “국내 유일의 토론회 전문 기자입니다”라고 소개하곤 한다. 프로메테우스 기자들도 그러하지만 토론회를 좋아하는 기자는 드물다.

토론회 취재. 시간 많이 걸리고 골치 아프고 기사로 작성하기도 어렵다. 행사 개요만 소개하고 한두 명 발언을 소개하는 짧은 보도기사라면 모를까, 그 내용과 주제를 독자들에게 적절한 분량으로 그리고 쉽게 전달하려면 무척 많은 시간과 힘이 드는 작업이다. 게다가 독자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아도 마치 참석해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전달하려면 영상으로 녹화하여 보여주지 않고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토론회를 담은 몇 시간짜리 인터넷 영상을 몇 명이나 보겠는가.  

말 보다 중요한 건 뜻

나의 토론회 기사 취재 목표는 뚜렷하다. 전문가들이 진지하게 연구하여 토론회 장소에서 치열하게 토론한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고, 그 핵심 주제를 환기시키고, 각각의 주장을 정확하게 전달하되 토론자들의 ‘진단’과 ‘분석’과 ‘대안’의 공통점과 차이점까지도 드러내 주려고 한다. 토론회 현장에서는 발제문으로 대신하고 넘어가는 대목도 많다. 그럴 때는 그 자리에서 발언하지 않았어도 자료집을 참고해서 그의 말과 글을 종합한다. 말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하고자 한 취지와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한 사회학 분야의 책들과 철학 관련 책들을 비교적 덜 지루해 하며 읽는 편이고 난해한 예술영화들도 인내심을 갖고 보는 편이다. 그래서 자료집을 참고하면서 토론자들의 발제와 토론을 들으며 보내는 토론회 참관 시간이 그리 괴롭진 않다. 그런데 대부분의 토론회가 진지하긴 하지만 열에 아홉은 재미없다. 진지하면서도 재밌는 토론은 MBC백분토론 밖에 없는 듯하다.

토론이란 무엇인가?

보도자료를 보아도 그날 사회자의 소개를 보아도 분명 행사의 이름은 ‘토론’회인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행사가 너무 많다.

토론(討論, discussion / debate)이란 기본적으로 대화다. 무엇에 대해 누구와 대화(discuss)하는 것이며 무엇에 관해 (서로) 이야기하거나 의논하는 것이다. 즉 토론은 옆 사람이든 앞 사람이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각 자의 견해를 밝히는 것이다. 토론은 그 문제의 이해를 높이고 그 주제를 논의해서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일련의 의사소통 행위다. 대안을 못 찾더라도 제대로 진단이라도 하면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대화가 사라진 자리에 방백만이

그러나 최근 내가 다녀본 토론회에 ‘대화’는 없고 ‘방백’만이 존재했다. 독백은 연극에서 어떤 ‘배우가 상대역 없이 혼자 말하는 행위 또는 그런 대사’를 말하고 방백은 ‘등장인물이 말을 하지만 무대 위의 다른 인물에게는 들리지 않고 관객만 들을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되어 있는 대사’를 뜻한다. 토론회에 참석한 토론자들이 대화를 안 하고 방백을 한다는 게 믿어지는가. 실제로 참석해본 사람들은 무슨 이야긴지 이해할 것이다.

토론회에 초대되어 참여한 토론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발언에 대해 시시비비를 따지지 않고 서로 박수만 쳐 준다. 주장에 동의해서 박수를 치는 지 떠드느라 고생했다는 건지 속내는 알 수 없다. 출연자들이 다른 토론자의 주장과 내용에 무관심하다면 그것이야 말로 차례로 방백을 한 게 아닌가. 요즘 토론회 자체가 요식행사요, 학예회 발표회와 다르지 않으므로 그 전체가 일종의 ‘연극’이라는 것을 부정하긴 어렵다. 그러나 왜 맨 날 독백과 방백만 있냐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치열한 갈등과 대립이 포함된 논쟁이 있는 그런 연극도 해보라는 말이다.

치열한 토론은 섭외부터 다르다

앞서 백분토론이 재밌다고 했다. 백분토론은 방송국의 토론전문 프로그램이므로 다른 토론회들과 비교하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차이가 있다. 백분토론에는 입장의 차이를 가진 이들이 한 토론회에 등장한다.

정치인이든 학자든 반대 되는 입장을 가진 대표자들을 모아 놓고 싸움을 붙인다. 그러다보니 상대의 발언을 자르거나 무시하거나 못 들은 척도 하지만 결국 대화를 기본으로 한다. 토론 내내 긴장감이 넘친다. 사회자도 그런 차이를 봉합하려 하지 않는다.

문제는 토론의 기획자가 진정 치열한 토론을 기획한 것인가 아니면 그냥 사업 가운데 하나이니 관성적으로 그런 행사를 억지로 수행한 것인가에 차이가 있다. 기획자가 토론자들을 섭외하고 적절히 선정할 때부터 토론회의 분위기는 거의 정해진다.

훌륭한 사회자가 제대로 된 토론을 이끈다

그 다음 사회자의 몫이며 스타일이다. 성품 좋은 어른이 후배들 모아 놓고 순서대로 말하라고 해서 토론이 될 리가 없다. 대부분의 사회자들은 시간 배정과 약속도 지키지 못해 나중의 발제자들과 토론자들의 발언 시간을 줄인다. 그들 역시 발언 시간이 줄면 불편해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핑계 삼아 ‘요점만 간략히’ 발표한다. 말 적게 하고 같은 돈 받으니 뒤에 배치되면 운이 좋은 것인가? 장소를 예약한 시간을 넘기기 일쑤여서 청중 질문과 토론을 반기지 않는다.

90년대 운동진영의 토론회에서는 논쟁하는 장면을 종종 보았다. 그 후로도 총선이나 대선 등 선거와 관련해서는 각 정당과 정치세력을 대변하는 토론자들이 다른 세력을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평소에 그런 논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선거 즉 표와 직결되지 않으면 입 아프게 논쟁하지 않는 것이다. 토론회에서 상대를 압도한다고 해서 대중의 지지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서로를 비판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들

정치적 입장과 평소 사회를 보는 세계관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다. 평소에도 친하여 같이 술 먹고 밥 먹는 사람들이 모인다. 표정만 봐도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들 사이에 무슨 허심탄회한 토론이 필요하겠는가. 늘 비슷한 주제의 토론에 초대받는 사람들끼리 무슨 날선 비판이 되겠는가. ‘빨리 끝내고 어디 가서 술이나 한잔 하지’라는 말을 안 할 뿐 이심전심이다.

토론회에서 망신당하여 학계를 떠났다거나 운동을 접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비판을 받지 않기에 인식이 바뀌거나 그 조직의 노선이 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잡지의 지상논쟁이라도 활발한가.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이론가들 정책담당자들 학자들이 존재하는데 왜 잘못된 사회를 바꾸는 일은 그리 안 되는 것일까.

노동조합이나 무슨 연맹에서 하는 토론회는 조합비 걷어서 토론회 열고 자료집 찍고 발제자와 토론자들에게 수고비를 주지 않는가. 정당은 당비로 단체는 회비로 그런 행사를 치르지 않는가. 치열하게 진행할 토론회가 아니라면 차라리 그 돈으로 투쟁하는 조합원들 지원하거나 노조도 없는 곳들 지원하거나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게 낫지 않을까.

한국의 토론문화가 수준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그럴수록 그러므로 이른바 ‘진보’를 공유하고 있고 ‘운동’과 관련된 단체와 학자들은 치열하게 토론에 임해야 한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만 할 게 아니라 자신들의 태도부터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그 동안 직접 취재하고 지켜보고 기사화 했던 각 토론회들을 되돌아보고 그 내용과 형식을 비교 평가해 보겠다.
2005/05/14 [19:37] ⓒprometheus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