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메일] 당신에겐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 쾌락이란 무엇인가?
쾌락이란 뭘까? 듣기만 해도 오묘해지는 이 단어를 단숨에 정의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쾌락을 느끼다’라는 말에는 오래간 묵었던 갈증을 단번에 풀었다는 ‘쾌(快)’한 느낌이 있는가 하면 도덕적 금기를 넘어 음탕한 행위를 하였다는 ‘불쾌(不快)'의 감정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면, 쾌락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부끄러움을 대동하는 부정적인 의미인가? 아마도 그 대답은 각자만이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쾌락이 어떻게 다가오느냐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보편자가 아니라 개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수한 감정이기 때문이다.
-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다르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개념과는 조금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쾌락이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의 극단이라고 한다면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은 흥분을 가라앉혔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인간의 삶은 늘 흥분으로 점철된다.
섹시한 이성을 보면 요동치는 심장, 음식을 제때 섭취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감정, 그리고 충분한 수면을 취하지 못했을 때 드는 불안감은 늘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흥분들이다. 그러한 흥분들은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또 그때마다 해결되는데 그 흥분과 해소의 반복이 바로 프로이트가 말하는 ‘쾌락원칙’이다.
앞서 말했듯이 ‘쾌락원칙’은 늘 우리의 삶에서 끊임없이 작용한다. 그 때문에 프로이트는 쾌락을 단순히 흥분의 국소적 해소가 아닌 인간 심리 현상 전체를 지배하는 원리로 본다.
- 영화 <색, 계>에서의 쾌락원칙!
이안 감독의 영화 <색, 계>는 쾌락의 흐름경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친일파인 리(양조위)는 우리가 이미지 짓고 있는 친일파와는 달리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감성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는 체포된 테러리스트들에게 그악스러운 고문을 서슴지 않으며 나아가 살인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한다.
반대로 그는 늘 암살의 두려움을 안고 사는 사람이기도 하다. 리는 어두운 극장에는 일체 출입을 하지 않으며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항상 경호원을 대동하고 다닌다. 테러리스트들에게 있어서 친일파 ‘리’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城)과도 같다. 그는 그렇게도 신중한 사람인 것이다.
그런 그에게 있어 평범한 일상이란 가능한 것일까? 그의 삶에는 쾌락원칙이 작동하지 않는다. 흥분이 가라앉을 새도 없이 그의 기분은 언제나 상승곡선을 이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가 선택한 삶이며 살아남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쾌락에 다다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왕치아즈(탕웨이)라는 여인과의 만남과 그녀와의 섹스이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는 그녀와의 섹스를 통해 이미 최고치에 다다른 흥분을 해소할 뿐이다. 살인과 고문을 통한 흥분은 섹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흥분과는 그 차원을 달리한다. 둘 다 삶과 죽음을 담고 있지만 그 자장의 범위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고로 섹스라는 행위는 더 큰 흥분을 가라앉히는 희석제가 되어주는 것이다. 일상생활이란 어쩌면 섹스보다도 더욱 흥분되는 장(場)인지도 모른다.
- 당신에겐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쾌락 없이 우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도 말했듯이 쾌락이란 우리 삶 전체를 연동시키는 중추를 맡고 있다. 일상에서 차례로 혹은 중층적으로 고개를 드는 흥분들은 해소가 됨으로써 쾌락을 낳는다. 그 해결 과정을 들뢰즈는 리비도 집중, 수축, 종합으로 설명한다. 지금 이 순간도 나에게는 수많은 해결되지 않는 흥분들이 존재한다. 그 존재들을 하나씩 해소시켜 나갈 때마다 나는 적절한 쾌락을 면면히 이어 갈 것이다. 당신에게는 어떤 쾌락이 존재하는가?
(출처 : http://www.artnstudy.com/sub/community/mknow.asp?idx=98&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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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햐~ 방가방가~ ^^
삶이 강렬해야 이즈러짐이 아름답기도 하겠지만...
전 천상병시인이 귀천이란 시를 노래했듯이, 거짓없이 소탈하고 진솔한 삶을 살고나면 죽음또한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어요~ 굳이 강렬할 필요까진... ㅋㅋㅋ~
'강렬함'을 강도(强度, intensite, 힘의 차이)로 독해해 주시길...
완전히 퍼져버리면 아무것도 생성되나거 구성될 수 없음. 그래서 '긴장'이 있고 거기에는 속도와 밀도, 강도라는 측면을 사유 하여야 함. 변태(metamorphosis)해야 되지 않겠는가, 단절과 비약(飛躍)이 핵심이다.
앗 지금 북~경~ 얼~~~~ 좋겠수다...부럽수다...근데 춥겠수다~~~~
음~ 그렇군요~ 파워가아닌 강도...
그럼, 누렁교주님! '삶과 죽음'도 '단절과 비약'의 과정, '변태'입니까?
삶과 죽음은 병렬적인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순서라기보다는 삶의 내부에 죽음이 항상 존재하는 것임. 죽음이 단절과 비약일수도 일고 아닐수도 있음. 변태:애벌레와 나비가 같은 생명체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하는 문제이고 이것은 주체성에 관한 문제이기도 함
좀 알것같기도...
교주님! 이번에는 '강도', '삶의 강도'에 대해 이야기를 좀더 해주십시요~
생명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은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힘)이 필요함. 이 에너지(힘)이 강도(강렬도 intensite)임.
'삶의 강도'의 문제는 내재성이나 잠재성의 개념으로, 예를 들면, 알(卵)의 강도는 '완성된 신체'를 내포하고 있는 잠재적 힘이 존재함.
다른 측면으로, 삶의 강렬함이란 자신을 '완전연소'하는 문제. 항상 모든 에너지를 아낌없이 쓰는 자. 죽음이 긍정된 삶이 최고의 삶!!!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꾸벅~
[죽음은 삶의 완성] (-아트앤스터디 지식메일에서 일부 발췌)
키케로는 “철학을 한다는 것은 곧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했고, 세네카는 “잘 죽는 법을 알지 못하는 자는 잘 살지도 못한다.”고 했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우리가 시대를 앞서간 위인들의 삶 만큼이나 죽음의 과정을 궁금해 하는 것은 아마도 죽음의 순간 이야말로 그들의 삶을 농축된 밀도로 보여주는 것이라 믿기 때문일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나여, 나를 모르는 모든 나여, 부탁이 있네. 나를, 이 순간의 나를, 영원히 잊지 말아주게.”
청년 전태일은 자신이 죽음으로써 살리고자 한 모든 이를 ‘또 다른 나’라고 칭하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의 몸에 불을 당겼다.
페리안드로스는 자신이 죽을 자리를 비밀에 부치고 싶어 자기 자신에 대한 삼중 청부살인을 했고, 모딜리아니는 마약, 뒤 프레는 우울증, 니진스키는 정신분열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영양실조로 수종증이 생기자 소똥으로 치료하려 하다가 소똥 속에서 질식사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여행 도중 나뭇가지에 부딪치는 어이없는 사고로 사망하기도 했다.
영국의 탐험가 로렌스 오츠는 남극 원정 도중 동상에 걸린 자신의 발 때문에 일행의 속도가 느려져 탐험대 전체를 위험에 몰아넣을 것을 우려해 스스로 눈보라 속으로 사라졌다. 눈보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전 원정대장 스코트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잠시 밖으로 나갔다 오겠습니다.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