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자] 사랑이란 무엇인가?

2011/06/16 16:44

사랑이란 무엇인가? 

 

[출처 : 박노자의 만감: 일기장 2011/06/14 20:44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35697

 
저는 지금 이례적으로 노동시간임에도 집에 앉아 있으면서 저희 동네 치과에서의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돌연히 치통의 기습 (?)을 받아, 거의 책읽기가 불편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아플 때에 저로서 최고의 진통제는 글쓰기입니다. 오랫동안 생각해온 것을 글로 정리해놓으면 왠지 아픔이 조금 물러갑니다. "작문요법"이라고나 할까요? 오늘의 주제는, 제가 사춘기 때부터 고심해온 주제인지라, 아무래도 거의 20여년 간의 고민을 정리해놓으면 이 무서운 치통이 조금 덜어질 것 같아, 이렇게 글을 올리고 치과에 가려 합니다.
 
저는 지금도 1991년 여름에 열차를 타고 흑해안 휴양지에서 레닌그라드로 돌아가는 3일을 아주 생생히 기억합니다. 이게 쏘련의 마지막 여름이었다는 사실, 이 후로는 저희와 같은 일선 지식일꾼들이 흑해안 휴양지에 대한 꿈을 완전히 버려야 할 것이라는 사실, 그리고 불과 1년 후에 가스총을 휴대하지 않고 집을 떠나기가 무서운 준(準)내전적 상황들이 도래할 사실 - 이 모든 사실들을 저는 그 때에 알 리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열차여행을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가스총 없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는 마지막 쏘련식 여행이라서는 아닙니다. 흑해북안을 떠났을 때에 어떤 이름모를 우크라이나의 철도역에서 우연히 신문가판대에서 에릭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운좋게 사서, 레닌그라드 도착까지 그 책을 열독해 거의 외울 정도가 되어서, 지금도 그 여행을 "프롬과의 만남'으로 기억합니다. 신문가판대에는 황색신문과 에로잡지 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오늘날 러시아를 염두에 둔다면 20여년 전의 쏘련에서 신문가판대에서 사르트르나 일본 단가집, 도덕경의 러역, 아니면 프롬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은 거의 믿어지지 않는데, 엄연히 사실이었습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절인지라, 냉전기간에 외국사상에 접근 제한 당해왔던 인민들은, 그 때에 "외국 진보 사상"이나 "외국 고전"에 대한 매우 뜨거운 열기를 보였습니다. 참, 프롬의 이 책은 기쁘게도 번안 식의 국역본도 있는데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54419623) 국내에서 얼마나 읽혀지는지 저로서는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좌우간, 그 때에 불편한 열차 침대에서 그 책을 읽고 얻은 깨달음을, 그 후로 20년 동안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프롬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을 "소유욕"의 정반대로 정의했습니다. "소유욕"이라는 것은 자아 본위적인, 자아 지향적인, 그리고 본질적으로 타자에 대해 배타적인 욕망입니다. 효도를 함으로써 효자/효녀 소리 듣고 싶은 욕망, 자식에의 "투자'를 함으로서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모심"을 받고 싶어하는 욕망, "나의 여자/남자"가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기를 바라는 욕망 - 이는 이 사회에서 "사랑"으로 오해 받는 각종 "소유욕"의 종류들입니다. 그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독신 (瀆神)적인 것은, 불전 (佛錢) 헌납이나 교회 출석, 수천배 (數千拜) 올리기 등등을 통해서 "나"나 ("나"의 연속으로 인식되어지는) 부모/친지를 위해 천당/서방정토에서 "한 자리"를 마련하려는 욕망입니다. 정말이지, 부처님/하나님 사랑의 이름으로 신과의 "자아 본위의" 거래를 시도하는 사람보다 차라리 살인의 악업을 지어 지옥에 갈 각오로 억압자를 상대로 수류탄을 투척하는 정의의 테러리스트가 천당/서방정토에 가는 게 더 순리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악업을 짓는다 해도, 적어도 자기자신을 위한 악업이 아니고 타자의 공통적인 업(業)을 향상시키기 위한, 자기 희생적인 악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라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타자의 입장에 서서 타자에 대한 자신의 배타적인 욕망을 버리고, 타자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타자의 욕망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혼적이 없을수록 사랑의 순도가 높아지게 돼 있습니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바로 그럴 것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나를 모시라", "나에게 예배하라"라고 욕망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가 타자와의 관게망 속에서 남의 행복을 건설해주고 그 과정에서 자신들도 행복해지기를 신은 그저 바랄 뿐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신의 사랑만큼 "무아적" (無我的)이지 못하지만, 일단 이 방향으로 계속 시도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진짜 의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제 장자 유리군(君)을, 그 녀석이 19세 (노르웨이에서의 성인 연령)가 되는 그 순간 바로 "방생" (?)하려고 합니다. 본인이 이제 클 만큼 컸으니까 알아서 살아라 하고, 그 인생에 대한 일체 간섭을 절대 안할 생각입니다. 물론 그가 제게 지원이나 상담 등을 요청하면 이를 적절한 한도 내에서 받아들일 용의는 있지만, 그와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서로 동등한 타인 사이의 관계 형태로 건설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그에 대한 소유 욕망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고, 또 그래야 그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노후에 자식으로부터 "부양"이나 "효도"를 받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남에게 글 등으로 도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남의 도움에 의존해야만 하는 상태가 되기 전에 제발 저를 황천으로 보내달라고 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위의 방법으로 자식과의 관계를 설정하자면 부자 양쪽이 내면적으로 좀 강해야 하는데, 일단 아동의 자립심을 키우는 것은 "국, 영, 수"보다 더 중요한 교육의 목적이지요.
 
남녀 사랑 같으면, 독점욕이라는 독약이 제일 퍼지기 쉬운 영역입니다. 더군다나 이 미쳐버린 세상의 가장 악질적인 억압장치 중의 하나인 배타적인 일부일처제가 이와 같은 독점욕을 법제화까지 시키니 더더욱도 소유욕을 사랑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제게 (프롬의 정의에 맞는) 진정한 남녀 사랑의 모범은 로서아 혁명시인 마야코브스키와 문학연구자/혁명가 요십 브릭의 부인 릴랴 브릭 (http://en.wikipedia.org/wiki/Lily_Brik)의 사랑입니다. 1915년, 부인 릴랴가 청년 시인 마야코브스키와의 사랑에 빠졌을 때에 그 남편 요십 브릭은 그저 기뻐했을 뿐이고, 마야코브스키를 초청해 셋이서 하나의 호구를 이루어 같이 살게 됐습니다. 요십 브릭과 마야코브스키는, 질투를 느끼기는커녕 아주 절친한 친구가 된 것이죠. 1923년 이후에 마야코브스키와 릴랴가 더이상 육체적 관계를 거의 갖지 않았지만, 역시 아주 가까운 동무로 지냈으며, 거기에다가 릴랴가 마야코브스키와 새롭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또 다른 여러 여성들과 가까운 친구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십 브릭과 릴랴 브릭, 그리고 마야코브스키 사이에 각종의 "시련"은 있어도, 한 가지 절대 없었던 것은 질투이었습니다. 세계에서 "소유"라는 게 없어지게끔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혁명가들이라서 그런 것인이었던가요? 꼭 혁명가만이 진정한 (비소유적인)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대체로 공산주의적 혁명과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같은 방향으로 가는 동질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공산주의란 사유와 이윤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고, 진정한 사랑은 소유욕과 독점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공산주의자만이 진짜 사랑을 할 줄 아는 게 아니지만, 공산주의자라면 적어도 자신의 소유욕에 대한 "거리 두기", 상대화, 궁극적으로 소멸 작업을 해야 할 듯합니다.
 
아아, 오랫동안 생각해온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니 치통이 조금 나아졌습니다. 좌우간, 약속시간에 맞추어서 인제 치과에 다녀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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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김 훈의 소설에 푹 빠져서 급기야는 [칼의 노래]을 베껴쓰고 있었다.

칼의 노래는 죽음의 노래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매력적이다.

그 와중에 [자전거여행]과 [내 젊은 날의 숲]을 읽었다.

자전거 여행은 차분하고 끈질긴 여행이었고,

(내 젊은 날의) 숲의 풍경은 장엄했으며, 숲처럼 우거진 (젊은 날의) 인생은 쉼없이 끈적거렸다.

 

작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을 숨도 안쉬고 읽은 적이 있다.

달이 두개 있는 세상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외수의 [장외인간]을 보면, 달이 없는 세상이 펼쳐진다.

왜 달 이야기일까?......

 

요즘 다시 무라카미 하루키 책들을 본다.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정치의 계절은 지나가버린 뒤였다. 한때는 시대를 뒤흔든 거대한 태동으로 보였던 몇몇 물결들도 마치 바람을 잃어버린 깃발처럼 기운을 잃고 색깔을 잃어버린 숙명적인 일상 속에 삼켜져 갔다. (79쪽)

 

나는 몹시 지쳐 있었다. 촉촉히 내리는 비가 묘비墓碑처럼 세워진 빌딩 숲을 소리없이 적시고 있었다. (128쪽)

 

그건 오열도 아니었다. 마치 그녀의 기관지에 구멍이 뚫려 숨을 쉴 때마다 거기에서 공기가 새고 있는 듯한 소리였다. (186쪽)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늘 어떻게든 다른 인간이 되려고 했던 것 같아. 나는 늘 어딘가 새로운 장소에 가서, 새로운 생활을 하곤 했어. 거기에서 새로운 인격을 갖추려 했다고 생각해. 나는 이제까지 몇 번이나 그러기를 되풀이해왔지. 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성장이었고, 어떤 의미로는 인격의 가면을 교환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지. 하지만 어쨌든 나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으로서 이제까지 내가 안고 있던 무엇인가로부터 해방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거야. 나는 정말로 진지하게 그러길 원했고, 노력만 한다면 언젠가는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어. 하지만 결국 나는 어디에도 다다를 수 없었던 거 같아.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일 수밖에 없었어. 내가 안고 있던 뭔가 빠지고 모자란 결핍은 어디까지나 변합없이 똑같은 결핍일 뿐이었지. 아무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풍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내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의 톤이 바뀌어도 나는 한 사람의 불완전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 내 속에는 늘 똑같은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고, 그 결핍은 내게 격렬한 굶주림과 갈증을 가져다주었어. 나는 줄곧 그 굶주림과 갈증 때문에 괴로워했고, 아마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괴로워할 거야. 어떤 의미로는 그 결핍 그 자체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지. 난 그걸 알 수 있어. ......(생략). (325-326쪽)

 

방의 공기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처럼 내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줄어 들어가는걸요. 그럴 때는 죽는 것 따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죠. (327쪽)

 

나는 그 어둠 속에서, 바다에 내리는 비를 생각했다. 광활한 바다에,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내리는 비를 생각했다. 비는 소리도 없이 해수면을 두드리고, 물고기들조차 그 비를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334쪽)

 

*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옮김, 2007,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문학사상사, ( )는 쪽수.

 

 

- 덧붙임 :  달은 사랑과 죽음을 말하고 있다.

 

1.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에 등장하는 하지메와 시마모토

 

나는 손을 뻗어 시마모토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나는 그녀의 귀를 만지고 그녀의 이마에 손을 가져갔다. 시마모토의 몸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마치 생명 그 자체를 흡입하려는 듯이 내 페니스를 쉴 새 없이 빨고 있었다. 그녀의 손은 마치 뭔가를 그곳에 전하려는 듯이 스커트 아래에 있는 자신의 성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그녀의 입 속에서 사정했고, 그녀는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내 정액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 마셨다.

......(중략)......

나는 그녀의 원피스를 벗기고 속옷을 벗겼다. 그리고 그녀를 바닥에 눕히고 온몸에 키스했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바라보며, 그 몸을 손으로 만지고 입맞춤했다. 나는 그 몸을 확인하고 기억했다.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그렇게 했다. 오랜 세월이 걸려 가까스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았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천천히 그녀의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잠든 건 동이 트기 전이었다. 우리는 바닥 위에서 몇 번인가 몸을 섞었다. 우리는 부드럽게 몸을 섞기도 하고, 그리고 격렬하게 섞기도 했다. 도중에 한 번 내가 그녀 속에 들어가 있을 때 그녀는 감정의 끈이 끊어진 것처럼 격렬하게 울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내 등과 어깨를 세차게 쳤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몸을 꼭 껴안고 있었다. 내가 껴안고 있지 않으면 시마모토는 그대로 흩어져버릴 듯이 보였다. 나는 달래듯이 그녀의 등을 계속 쓰다듬었다. 나는 그녀의 목덜미에 입 맞추고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렸다. 그녀는 이미 냉정하고 자기 자제력이 강한 시마모토가 아니었다. 오랜 세월 그녀 마음의 저 밑바닥에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었던 것이 조금씩 녹아내려 표면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듯했다. 나는 그 숨소리와 먼 태동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녀를 꼭 껴안고 그 떨림을 내 몸 안에 받아들였다.

(무라카미 하루키, 임홍빈 옮김, 2007,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문학사상사, 287-290쪽)

 

2. 김 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 등장하는 이순신과 여진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있었다. 새벽에 나는 품속의 여진에게 물었다. 밝는 날 어디로 가겠느냐...... 나의 실수였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그 여자의 목소리는 진실로 베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는 그 여자를 부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여자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새어나왔다. 담벽에 걸린 칼에 달빛이 비치었다. 칼날의 숫돌 자국 속에서 달빛이 어른거렸다. 그 여자의 머리 속에서 먼지와 햇볕의 냄새가 났다. 나는 더욱 끌어안았다. 그 여자는 몸을 작게 웅크리고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작은 손이 내 등판의 식은땀을 씻어내렸다. 그 여자의 빗장뼈 밑에서 오른쪽 젖무덤까지, 굵은 상처 자국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등에도 아문 지 오랜 상처 자국이 있었다. 나는 상처에 관하여 묻지 않았다.

달이 구름을 빠져나오면서 다시 칼날을 비추었다. 달은 칼의 숫돌 무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칼빛이 뽀앟게 살아났다. 칼은 인광처럼 차가워 보였다. 가늘고 긴 목이 내 품속에서 떨리면서, 그 여자는 다시 말했다. 나으리 밝는 날 저를 베어주시어요...... 이 세상이 아닌 곳으로 저를 보내주시어요...... 나는 다시 그 여자의 몸속을 파고들었다. 그 여자의 신음은 낮고도 애절했다. 나는 그 여자를 안듯이 그 여자를 베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칼날을 여자의 몸속으로 밀어넣고 싶었다. 어둠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이 여자를 안는 힘으로 세상의 적을 맞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몸을 떨었다. 아마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무인이 아니었다. 아침 숲에서 새떼들이 깨어나 지껄였다. 아침에 나는 그 여자의 행선지를 묻지 않았다.

(김 훈, 2009. [칼의 노래], 생각의 나무, 47-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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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호킹] 죽으면 끝

2011/05/16 15:45

1. 영화 [박쥐]의 마지막 장면, 태양이 떠오르면서 죽음 직전의 흡혈귀 한쌍의 대화.


-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 죽으면 끝, 그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2. 스티븐 호킹 박사도 '죽으면 끝'이라고 말했다.

 

I have lived with the prospect of an early death for the last 49 years.

I'm not afraid of death, but I'm in no hurry to die. I have so much I want to do first.

I regard the brain as a computer which will stop working when its components fail.

There is no heaven or afterlife for broken down computers; that is a fairy story for people afraid of the dark.

 

3. 우리들 생애 가장 위대한 가치를 찾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 So here we are. What should we do?

- We should seek the greatest value of our action.

 

*출처: http://www.guardian.co.uk/science/2011/may/15/stephen-hawking-interview-there-is-no-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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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가는 길

2011/05/07 13:24

나는 어머니의 늙음을 걱정하고,

어머니는 나의 혼자됨을 걱정한다.

 

우리들의 걱정은 너무 추상적이어서 항상 간단한 전화통화로 끝난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다른 구체적 삶의 어려움 앞에서는 침묵한다.

 

- 아무 일 없습니다. 별 일 없으시죠?

- 나야 먼 일이 있데. 자식들이 건강하면 나도 건강하다. 항상 조심해이...

- 고맙습니다.

 

[해남 가는 버스에서. 2011. 5. 7. 오후 1시 45분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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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1

2011/05/01 14:48

'김 훈 [칼의 노래]' 를 보고 쓰다가,

엊그제 비가 많이 내린 밤에, 먹다 남은 막걸리를 꺼내 마신다.

시간을 보니 컬투쇼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다.

쓰기를 멈추고 듣는다.

 

날짜를 보니 '노동자의 날'이다.

나는 서울시청 앞에서 열리는 노동자대회를, 부끄러워서 가질 못한다.

나의 부끄러움은 막걸리를 먹고 달아오른 나의 얼굴이 대신한다.

 

나의 반성과 성숙은 아직 어설프다.

진심은 나에게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내가 혼자서 끈질기게 감당해야 할 외로운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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