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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포지엄- 미일동맹과 북한의 핵(2)

모두발언:칼루치씨/ 합의에 의해 북한의 핵을 저지했던 것이 교훈

 

칼루치 : 의장 고맙습니다. 우선, 여기의 일원으로 초대해주셔서 매우 영광이고, 주최자 여러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93년, 94년의 위기가 이번의 위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10년간에 북한과 미국, 한국 및 일본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1단계는, 92년 무렵부터 94년(10월의 북미 테두리 안의) 합의까지입니다. 이 시기, 북한은 외교공세를 취해서, 91년 (12월)에 한국과의 남북비핵화 공동선언에 합의하고, 그리고 92년 초에는 미국과의 (북미)교섭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외교공세를 취함과 동시에, 핵개발계획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원자로 3기와 (사용이 끝난 연료봉을 재처리해서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재처리공장을 건설하는 것으로, 1년간 핵병기를 약 30개,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북한은 활발한 외교공세 뒤에서, 핵병기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선 1번째. 그러나, 핵개발계획은 국제원자력기관(IAEA)의 사찰에 의해서 중단했습니다. 핵확산금지조약(NPT) 위반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즉, 플루토늄의 분리/추출을 몰래 하고 있엇던 것입니다. IAEA로서는 허용할 수 없는 행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제사회는 92년의 시점으로, 북한의 위반, 사기행위를 간파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2번째.

 

그리고, 다음에 일어난 것은, 미국이 UN의 승인을 얻어서, 직접, 북한과 2국간 교섭을 해서, 94년 10월의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북한의 이 사기행위를 밑천으로 교섭, 거래해서, 합의에 도달한 것입니다. 북한이 추구하고 있었던 플루토늄의 추출계획을 중지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북한이 플루토늄계획을 포기하는, 즉, 엄격한 사찰에 의해서, 흑연감속원자로 기술을 단념할 의향을 나타냈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들은 타결을 지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1단계에서의 교훈으로는, 북한은 외교와 동시에 비밀리에 핵병기 개발도 한다는 것, 그리고 무엇인가 위반이 발견되더라도, 합의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2단계는 95년부터 98년까지의 시기입니다. 북한과 미국, 및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몹시 냉각되었습니다. 테두리 안의 합의에서는 (쌍방의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하기로 명문화되었습니다만,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합의를 승인하고 발족한)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에 의한 (핵동결의 대가인) 경수로 건설의 실행도 지지부진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북한측은 테두리 안의 합의에 의해서 가지게 될 것으로 생각한 외교적, 정치적 은혜/이익을 얻지 못 했던 것입니다. 미국과 북한과의 특별한 관계가 발전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1998년 8월31일, 북한은 (장거리 미사일인) 대포동(1호, 사정거리 1500킬로 이상, 일본 상공을 넘어서 태평양에 낙하)을 시험 발사했습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물론 일본도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이 핵병기 개발을 개척할 다음 루트로서, 우라늄농축분야에서의 협력을 파키스탄과 시작한 것도 아마, 이 시기였습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교훈으로서는, 1)번째는, 북한은 어떤 일이 있어도 핵병기를 가지길 원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로 나왔을 가능성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가능성으로서, (94년의) 테두리 안의 합의가 순조롭게 기능하지 않았고, 또 한, 미국이 북한의 생존을 보증하는 것과 같은 미국과 특별한 관계를 얻을 수 없다는 사태에 대비한, 북한의 보험용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3)번째 가능성으로서는, 새로이 우라늄농축을 선택한 것은, 94년에, 플루토늄 추출에 의한 핵개발계획이 미국, 일본, 한국에게 (외교의 카드로서 비싸게) 팔렸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카드로서) 팔릴 것으로 예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4)번째로는, 북한측은 농축우라늄에 의한 핵개발계획은 전혀 염두에 두지않았지만, 노동 미사일 기술을 원하던 파키스탄으로부터, 우라늄농축 기술과 물물교환하자고 제안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무엇이 정확한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제3단계는 99년부터, 클린튼정권이 끝난 2000년말까지 입니다.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페리 전 미국국방장관이 정리했던, 한미일의 협조에 의한 북한과의 대화 추진과 핵/미사일 개발의 억지를 축으로 한 대북한정책)의 시기입니다. 북미 및 남북관계가 최고조로 달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해서 (김정일 서기장과) 역사적인 (남북의 첫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같은 해 10월에는, 김정일 서기장의 특사로서, 북한지도부의 넘버 3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워싱턴을 방문하고, (그 후에는)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부장관도 평양을 방문했습니다. 북한측으로 보면, 최고의 선물은, 요구하고 있었던 (생존의) 보증을 미국으로부터 얻은 것, 즉, 이제 미국의 적은 아니게 된 것입니다. 2000년 말, 우리들은 매우 전향적인 긍정적인 궤도에 올라 있었던 것입니다.

 

그 후는 4단계, 부시정권의 등장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워싱턴에 와서, (그가 진행하고 있는) 햇볕정책에 대해서 부시 신정권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했습니다만, 김대통령은 반대로 큰 의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부시정권에는, (94년의) 테두리 안의 합의에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들은 테두리 안의 합의의 가치에 매우 회의적입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기 치는 듯한 국가와 합의, 거래를 한 것은 윤리에 맞는 것인지, 정치적으로 현명한 것인지, 의문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북한이 테두리 안의 합의를 깨고, 비밀리에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개발계획을 진행하고 있다고 알아차리고 있었습니다. 그 후, 상황은 악화되었습니다. (동시다발테러가 일어난 2001년) 9월 11일 이후, 미국의 안전보장에 대한 견해가, 핵병기 등의 대량파괴병기를 가진 [깡패국가]와 테러리스트와의 관련에 집중되었습니다. 우리들은 그 관련(깡패국가로부터 테러리스트 손에 대량파괴병기가 전달되는 것)에 매우 중대한 불안을 가졌습니다.

 

2002년의 1월이 되면, 미국 대통령은 일반교서 연설에서, 이라크, 이란, 북한 이 3나라를 [악의 축]으로 지명해버렸습니다. 테러리스트와 손을 잡고, 대량파괴병기를 건 낼 지도 모른다고 지적했습니다. 일반교서 연설 후, 핵정책의 재검토가 행해지고, 북한은 우리들의 전략핵의 표적 리스트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9월에는, 미국의 [국가안전보장전략]이 발표되었습니다. 핵병기를 추구하는 [깡패국가]에 대처하는 수단으로서, l국이 선제공격이나 예방적 전투에 호소할 필요성을 선명하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미국의 명확한 정책의 선언이고, 공식적인 문서입니다. 그리고, 켈리 국무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 북한측에 대해서, 북한이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개발계획을 몰래 진행하고 있는 것을, 미국은 알고 있다고 통고했습니다.

 

미국은, 이라크에 대한 무력행사를 용인하도록 UN에 압력을 가했습니다만, 2002년 말에는, 북한은 가장 두려워하는 사태, 결국,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도 미국이 압도적인 군사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일본, 한국은 유럽연합(EU),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와, 북한에의 중유제공을 중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북한은 즉시 위기를 고조시키는 쪽으로 나아가고, 미국측에게 2국간의 직접협의를 하도록 요구했습니다만, 미국은 이것을 거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다국간의 문제이므로, 해결도 다국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미국의 주장입니다.

 

이상의 4개의 단계를 보면, 북한이 여러 가지 수단으로 안전보장을 확보하고 싶어 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핵병기에 의해, 핵이 불필요하면, 미국과의 합의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북한에게 있어서, 미국은 (다른 나라가) 대신할 수 없는 강대국입니다. 다른 나라가 한 묶음이 되어도 미국보다 나은 안전보장을 줄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단연코 핵병기를 가지려고 하고 있는지, 아니면 미국과의 관계를 위해서 핵계획을 단념하려고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94년의 중요한 교훈은, 합의에 의해서 북한의 핵병기개발은 저지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속였지만, 우리들은 합의를 했다. 그들은 (우라늄농축에 의한 핵계획으로), 또 우리들을 속였지만, 우리들은 합의를 한 번 더 해도 괜찮은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북한에게 파울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유연한 합의이면, 북한은 거기를 공격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북한은 반드시 속인다, 반칙을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역시, 94년에 우리들이 교섭했을 때와 같은 합의가 필요합니다. 북한이 비록, 속일지라도, 미국, 일본, 한국의 경우에는, 효과적이고 전향적인 합의입니다. 94년의 테두리 안의 합의는 그것이었습니다. 북한이 현재, 많은 핵병기를 가지고 있지 않는 것은 이 테두리 안의 합의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한 번 더, 합의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직접교섭으로 생기는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혼다 : 감사합니다. 다음은, 포네만씨. 포네만씨는 93, 94년 당시, 미국 백악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핵확산금지 담당의 상급부장이셨습니다. 그럼, 포네만씨 부탁드립니다.

 

모두발언 : 포네만씨/압력과 당근이 중요, 3개국은 즉시 행동을

 

포네만 : 의장 감사합니다. 훌륭한 심포지엄에 초대해주셔서, 매우 명예롭게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입니다만, 3가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93년, 94년을 교훈으로 해서, 현재의 위기에 적응할 수 없는가라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계획에 대해서, 우리들은 우선 첫째로, 명확한 목표와, 이것을 달성하기 위한 논리와 전략이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목표와 전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정력적인 외교가 필수입니다. 위기의 복잡성을 생각하면, 모든 동맹국들이 힘을 결집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우리들이 성공하려면, 가지고 있는 정책과 수단을 모두 동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씩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목표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논리입니다만, 북한정권에 대해서, 우리들이 가진 목표는 많이 있습니다. 핵위기가 가장 우리들이 의식하는 문제입니다. 이즈미선생이 말씀하신 것과 같이, 탄도미사일도 매우 위기적, 긴급한 위협입니다. 또한, 비무장지대에는, 냉전 이래로, 고도한 통상병력이 집중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한의 체제 그 자체에, 많은 문제와 불안이 있습니다. 정권의 행동, 기아에 고통 받고 있는 국민의 상황, 인권문제 등등의 것입니다. 그러나, 명확한 것은 이러한 목표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우선순위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미국은 1993년에, 명확하고 의도적인 결정으로서, 이들 목적의 전부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느 것 하나를 취하더라도, 매우 무모한, 게다가 또 한 규제가 없는 핵병기계획을 방치해 둘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목표를 이루기 위한 효과적인 논리와 전략을 실행하는 것은 말하는 것 보다는 훨씬 어려워졌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관해서 우리들은 다음 2가지를 명확하고 선명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북한은 우리들이 얼마나 그들의 핵병기개발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게다가, 북한은, 미국, 일본, 한국 및 국제사회가 이 위협에 얼마나 진지하게 대치하고 있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정책수단을 이야기할 때에 조금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핵병기계획을 이 대로 진행시켜 가면, 그들의 상황은 악화할 뿐이라는 것을 이해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또, 그들에게도 출구는 허용되어져 있다는 것도 보여 줄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들이 핵에의 야심을 포기한다면, 체제/정권의 존속은 최대한 보장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키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들이 원하는 목적을 그들이 받아들인다면, 출구는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실히 보여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음은 정력적인 외교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관점으로는, 미국, 한국, 일본의 긴밀한 협력관계를 대신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93년, 94년에 했던 우리 3개국의 노력이 성공해서, 합의에 기여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우리들 3국간의 조그마한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능숙하고, 그것을 그들은 정치적으로 이용합니다. 93년부터 94년 때, 우리들은 매년, 한국과 일본의 동료들과 협의를 했었습니다. 때로는 수시간이나 이르렀습니다. 외교문서의 교환 등과는 대조적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계속해서 의견과 지혜를 서로 내고, 마치 세미나의 브레인 스토밍 같았습니다. 우리들은 거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한 번 3개국이 어떻게 할 것인가 합의를 하면,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그 외의 국제사회의 멤버들을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UN 안보리이사회, 가능하면 상임이사국, 즉 중국, 러시아라는 북한의 인접국을 끌어 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해 나감에 있어서의 곤란함은, 북한에의 대처에 대해서, 관계국의 안전보장상의 국익이 다른 것입니다. 이즈미선생이 2003년과 93년과의 차이를 명확하게 지적해 주셨습니다. 미국의 인식은 9/11테러 이후, 변해 버렸습니다. 뉴욕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서도, 오클라호마에서도, 한반도의 38선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안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북한이 현재 가지고 있는 사용이 끝난 연료봉 8000개를 재처리시설에서 처리해서, 핵폭탄 5개, 6개분의 플루토늄을 추출해서, 그리고 매우 작은 숨기기 쉬운 것으로 하면, 9/11테러 후에 생긴 [국가안전보장전략]이 명확하게 말하고 있듯이, 이것은 칼루치대사도 지적하셨습니다만, 그것은 북한이 미국 본토의 위협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에 대해서 핵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본토에 대한 핵의 위협, 한국에의 보통병기에 의한 위협을 생각하면, 우리들은 지난 번 보다 더 긴밀한 협의/협조가 요구됩니다.

 

3번째입니다만, 완전히 내용물이 갖춰진 도구함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94년의 경험으로 얻은 명확한 교훈입니다. 94년 6월이, 당시의 위기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래서 북한은, 최종적으로는 플루토늄 생산시설을 해체하는 것이 되는 핵개발 동결을 결단했습니다. 왜인가? 북한은 자신들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이 대화를 중단하고, UN은 제재 결의를 보이고, 미국은 주한미군 증강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그 시점에서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그리고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을 생각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예상되지 않았던 카터 전대통령의 북한 방문이 실현되어 북한의 체면을 구해주고, 그 후의 테두리안의 합의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번에도 이와 같은 밸런스를 갖춘 어프로치(접근)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압력과 인센티브(당근)입니다. 이상의 역사에서 3개의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우선 첫째로 이 문제는 정말로 긴급을 요합니다. 수개월 이내에 북한은 5, 6개의 핵병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자신들이 사용할지, 혹은 우리들의 적에게 팔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문에 우리들은 즉시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둘째로, 우리들은 북한에게 명확한 선택지를 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북한에게 핵병기가 자신들의 존속을 보증하는 것으로 생각 들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핵병기의 길을 선택하면, 고립화되고, 존속이 위험하게 되고, 핵을 버리면 존속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강력하게) 밀어 붙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제를 해결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이 3개국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긴밀한 협력/협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혼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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