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과 관련된 레포트, 혹은 수업시간에 든 생각들... 기타 등등'에 해당되는 글 28건

  1. 서도의 관계론 - 신영복함께읽기 2005/05/06
  2. 사회학개론 중간고사 레포트 2005/04/20
 

글씨, 서도, 서예 이런 것들을 잘 모르는 제가 서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좀 쑥스럽고 민망하긴 하지마는, 꼭 전문가적 식견만이 보는 것은 아니라는 변명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

이 글 ‘서도의 관계론’을 읽고 다시 신영복 선생님의 글씨를 보았습니다. 전체를 보면 조화로워 보이지만, 한 글자 한 글자 찬찬히 보면 처음에는 서도라는 것에 문외한인 저에게는 참.. 멋대로다 그런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보통 예전에 보던 글씨라는 것은 한글 워드의 정자체처럼 또박또박 정갈하게 쓰여진 것이 잘 썼다 느껴지는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계속 한 글자 한 글자 바라보다 보면 글의 의미가 글씨에서 느껴지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떤 종류의 힘이나 호소력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하고, 획일적이 아닌 것에서 오는 따뜻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첫 획이 비뚤어졌을 때 그것을 버리고 새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획으로 채우고, 첫 자의 잘못은 그 다음자로 채우고 한 줄 다 쓴 후에 그에 걸 맞는 다음 줄을 채워나가는 것이 글자 한 자 한 자를 완성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기 때문에, 한 글자의 완성을 높이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글자가 채워주는 것을 높이 사기 때문에 이 한 폭의 글이 정겹고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글에서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말씀하시고 싶은 듯하지만, 저는 한편 서도라는 것은 사람의 삶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지우거나 덧칠하거나 혹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없는 것... 그와 함께 제 삶의 궤적을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그려 봅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하고, 4년 정도의 대학생활과 그리고 사회생활 2년, 많은 이들이 그렇듯 20대 중반의 방황이 있었고, 제 경우에는 그 6년의 시간을 지워야겠다는, 사실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6년은 없었던 것처럼, 좀 괴롭더라도 잊어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개월간의 잠수에서 빠져나와 조금씩 사람들을 다시 만나고 새로운 생활들을 시작하면서 있었던 사실을 없었던 것처럼 쓰레기통에 구겨 넣고 새 종이를 꺼내들어 새로운 글자를 쓰려는 순간에 다시 이전의 6년을, 예전에 썼던 엉터리 글자들을 다시 따뜻한 마음으로 긍정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쓰레기통에서 다시 그것을 끄집어내어 꼬깃꼬깃 접혀진 것을 펼쳐든 순간 죽었다고 느꼈던 글자들이 새록새록 살아나서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 보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종이 위가 아닌 다시 그 자리에서 다음 글자를 쓸 수 있는 용기를 내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곤 마치 삶의 중요한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만사에 긍정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민은 계속 되었습니다. 내 삶의 다음 글자를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어떻게 완성할 것인지 이러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번 이 시간 ‘한 발 걸음’을 함께 읽으면서 나 자신의 고민이 결정적 한계틀 속에 갇혀있었음을 알았습니다. 나의 고민은 나 자신의 완성이라는 것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온전한 내 경험과 지식으로 만들어지는 내 사상과 삶의 완성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부분에서 다시 ‘관계’를 생각해봅니다. 제 삶 자체가 계속 써내려가는 한 폭의 글씨이기도 하지마는 나를 형성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를 규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주변의 수많은 오뚝이들이 보입니다. 홀로서기를 외치며 혼자서 우뚝 서 있으려고 하는 오뚝이들 말입니다. 상대를, 어떤 집단을 대상화하고 그 속에서 자신마저도 대상화하고야마는, 나라는 존재외에 어떤 것도 믿지 못하고, 급기야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합리와 과학의 논리에 갖힌 사람들을 봅니다. 그것이 어떠한 인간관계의 냉혹함이라던가 하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내 사고체계, 그리고 근대사회의 철학체계가 그렇게 굳어져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ㄱ’이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처럼 나 자신, 그리고 개별인간을 넘어선 관계를 바라보는 일은 여전히 힘들기만 합니다. ‘묵을 갈 적마다 인과 인 간의 뜨거운 연계 위에 서고자 한다’는 말을 저 역시 삶에서 늘 가지고 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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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06 02:30 2005/05/06 02:30
 

[4] 자본주의적 생산방식을 본인이 경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비판하시오.


아침에 눈을 뜨면 수돗물에 비누, 샴푸 등을 사용하여 세수를 하고, 새벽마다 배달되는 우유 한 컵을 마시고, 옷장에 있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을 옷을 꺼내 입고,...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 내 삶의 어느 한 순간에도 소비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야말로 현대의 인간은 도구의 동물도, 생각하는 동물도 아닌, 소비의 동물, 호모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이다.

‘정상’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하는 수순을 밟아왔다면 벌써 취직하고, 결혼까지 했을지도 모를 20대 후반에, 누가 무슨 일 하느냐고 물어보면 학생이라고 몇 가지 설명을 덧붙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현 사회에서 학생이라는 위치는 그야말로 노동으로부터의 자유와 굶어죽을 자유, 어떤 복지시스템에 혜택받지 않을 자유까지 누리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아주 운이 좋게도 한달에 30만원씩을 벌어 생활을 하는데, 돈벌이를 늘려야할 것인가, 소비를 줄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하는 일을 이분법으로 쪼개어보면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임금을 받는 노동과 받지 않는 일. 이중 임금을 받지 않는 일은 보통 가치 없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되거나 혹은 자원봉사처럼 순수하고 고귀한 행위로 추앙되기도 한다. 그것은 주로 그 일의 목적이 나와 내 가족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남을 위한 것인가에서 나뉘는 것이겠지만, 돈 받지 아니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같다. 나와 함께 사는 직장인 친구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하고, 몇 시간 후에 그 행위의 결과가 금새 마치 하지 않은 듯 되어버리는 것에 대하여 한탄하고는 한다. 하루 세끼 밥 먹기 위해서는 하루 세끼 밥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고, 매일 깨끗한 옷을 입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빨래라는 일을 반복해서 해야 하지만, 보통 가사일을 도맡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귀찮은 남의 일이 되곤 하는 것이다. 그 친구의 고민은 결국 두 가지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많은 돈을 벌어 가사노동을 대체해줄 만한 사람 혹은 기계를 들이거나 아니면 가사일을 자신의 일로 인식하거나... 내 경우는 후자를 택한 셈이다. 하루 두세 시간의 가사일이 돈을 벌어다주지 않는다는 셈을 하기 이전에 그 일이 내 삶을 영위하는데에 어떠한 가치를 가지는가를 생각하고픈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가 노숙을 하지 않는 이상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돈 벌지 않고, 자급자족하며 살겠다는 것이 몽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자명하다. 최종 생산물에 대한 소비든, 중간과정에서의 소비든, 우리는 일상의 대부분의 것을 소비하고 있고, 그에 대한 교환을 가능케 하는 화폐를 필요로 한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 곧 사회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하기에 현 사회에서 우리는 하루 8시간 이상을 노동할 것을 강요받고, 8시간을 생리현상에 쓴다고 치면, 8시간에 해야하는 여타의 일에 대해서는 자신의 휴식과 놀이를 방해하는 하기 싫은 일이 되는 불가피한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 왜 민주노총에서 가사노동할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를 정부와 기업에 하지 않는 것인가. 보다 나은 점심식사를 제공받거나 좀더 높은 식대를 제공받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아침, 점심, 저녁을 스스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해 보는 것을 어떨까.

20세기 초반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자본주의생산방식은 임노동과 자본의 대립과, 그로 인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인한 필연성의 논리로 나아가는 수순을 밟는다. 그 안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것은 현재의 생산력 그 자체를, 체제의 변혁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현재의 생산력은 지극히 자본주의적 생산력이며 그 안에서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끊임없이 욕망을 자극하며 소비를 부추기고,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욕구는 장시간노동, 평생노동으로 인간을 몰아넣는다. 실업은 비정상 상태가 되며, 실업자가 돈 벌기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위한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리하여 스스로를 위한 노동은 가치 없는 것이 되고, 하루 종일 일한 결과물을 그날 저녁 술값으로 소비하기도 하는 노동자들은 현재 수준의 소비, 혹은 더 많은 소비와 더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임금인상이라는 가능한 수준에서의 분배를 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자본주의생산방식은 적어도 내게는 참여하지 않으면 사회적 무존재이자 무가치라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어떤 것이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상품을 매개로 관계맺고 있으나 이 질문 외의 다른 관계맺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How m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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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0 00:15 2005/04/20 0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