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01년 8월

 

이호철의 소설 세개를 읽고

 

포대령

 

포대령으로 불리는 김달봉은 장성으로 진급하지 못한 채 제대한 퇴역 장교다. 포대를 떠난 포대령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현역 시절 '포병의 상식적인 존재'였다. 6.25 전쟁 때 만삭이 된 아내가 있는 곳에 포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던 뼈아픈 기억을 지닌 포대령은 다른 무엇보다도 '포병이 먼저'였던, 대포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진급에 좌절하고 '시시한 민간'이 되어 살아가는 게 어떨 지는 쉬 상상이 간다.

포대령은 포탄이 난무하는 전선에서는 용감한 승자일 수 있었다. 그러나 진급을 둘러싼 군대 내부의 전선에서는 결국 패배했다. 더구나 민간의 저 '시시한' 전선에서 그는 초라한 낙오자였다. 포대령은 자신의 패배와 낙오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초라하고 시시한 일상을 끝장내고 싶었다. 장렬한 전사. '나'는 포대령의 이 마지막 꿈을 옆에서 '관측'하고 확인시켜줄 동반자다. 내 눈에 관측된 포대령은 있어야 할 곳에서 쫓겨나고 돌아갈 곳이 없어 결국 미쳐가는 광인이다. 분단과 전쟁으로 그는 돌아갈 고향과 가족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쳤던 군대조차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장난감 야포와 등산모에 박아놓은 함석 별 뿐이다.

그는 외친다. "현재는 모든 공간이 영내야! 모든 사람들은 모두 포병이어야 해! 모든 모순은 다 적이야! 생활하는 모든 순간은 치열한 전선이야!" 그는 결코 시시하게 죽을 수 없었다. 결국 포대령은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채석장에 몸을 던진다. 그는 마지막 순간 '나'에게서 자신의 죽음이 '전사'임을 거듭 확인하고 숨을 거둔다.

우리는 포대령에게서 전쟁과 분단이 남긴 크고 깊은 상처와 좌절을 본다. 그리고 동시에 30년 넘는 세월동안 '시시한 민간'을 압박했던 저 군사주의의 황폐한 목소리도 듣는다. 포대령이 마지막 치른 전쟁은 전쟁과 분단이 빼앗아간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기 위한, 그리고 좌절된 꿈을 되살리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그는 분명 '전사'했다.

 

 

닳아지는 살들

 

분단은 한 가족을 해체시킨다. 영희의 말처럼 모두 무언가 큰 배경을 놓치고 있고 뿔뿔이 떨어져 있어서 아득하고 답답하다. 쇠붙이 두드리는 소리는 "우리와는 다른 무엇인가 싱싱한 것이 서서히 부풀어서 우릴 잡아먹을 것 같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소리는 헤어진 혈육들의 재회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더욱더 멀어지게 하는 무엇이다. 분단이라는 민족사의 '큰 배경'은 자꾸만 잊혀지고 경제개발이라는 질주(쇠붙이 소리)는 닳아지는 살들(헤어진 혈육들)의 아픔을 자꾸 묻어버린다. 이 가족의 기다림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청대문집 개

 

팔뜨기는 졸지에 동네 유지 김억대로 변신한다. 졸부 김억대의 과거를 아는 것은 존이라는 개 뿐이다. 김억대는 사시를 감추기 위해 색안경을 끼고 과거가 들통나지 않게 동네 유지로 체면을 세우는 일에 열심이다. 그러나 존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팔뜨기 시절 존 그대로다. 채석장에서 사고가 나고 현장 조사를 나온 지서 주임의 허벅지 다리를 존이 물고 흔드는 사건이 일어난다. 김억대는 사고를 처리하는 뒤 끝에 중복날 존을 잡아 인부들에게 내놓는다.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미국의 원조에 기대어 성장했던 전후 한국 자본주의의 허약한 토대와 그 속에서 양산된 숱한 김억대들을 볼 수 있다. 자신의 과거를 증언하는 존을 잡아먹는다고 졸부들의 천민 자본주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한강 다리가 폭삭 주저앉고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결국 IMF가 들이닥쳤던 저간의 심란했던 상황들을 돌아보더라도 한국 자본주의의 천민성은 여전히 극복해야 할 현재의 과제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5/02/14 10:48 2005/02/14 10:48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plus/trackback/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