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 쓰기

01년 9월

 

이청준의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읽고

 

60년대 후반의 한국사회에서 '희망'을 얘기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성싶다. 문단에 든 지 얼마 안된 20대 후반의 작가 이청준에게 그 시대의 절망과 희망을 그려내는 일이 어떤 무게로 다가왔을 지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이 간다. 나는 이 단편소설이 60년대 한국사회의 절망과 희망에 대한 하나의 소묘라고 읽었다. 자칫 이 단편을 읽어나가는 것이 무슨 수수께끼 풀기처럼 될 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문학 표현을 규정했을 정치·사회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그런 '독해'가 어쩔 수 없는 일일 듯도 싶다.

 

이 소설에 나오는 '그'는 불행하다. 그의 대학 졸업식에는 아무도 축하해주러 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는 시골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공교롭게 친구들 누구한테서도 차비를 꿀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불운을 당연하게 여기는 친구들을 저주하면서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웬만한 능력만 있으면 한국이란 썩 살만한 땅이라고 욕설처럼 늘 지껄이던 그'는 '학문에 대한 정열'도 없이 '쫓겨가노라'는 말을 남기고 출국한다. 그는 사랑했던 민영에게도 결국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자기를 잊으라고 결별을 선언한다. 그러나 그는 유학시절 '나'에게 새삼 민영의 안부를 묻고 '영이만이 자기에게 유일하다'고 편지한다. 그리고는 3년만에 돌연 귀국해서 민영을 찾지만 민영은 이미 떠난 뒤였다. '그는 돌아와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걸핏하면 외로운데 외로운데 하는 소리를 함부로 내뱉으며, 거리를 지쳐 쏘다니'던 그에게는 도벽과 거짓말이라는 두 가지 '망칙한 습벽'이 생겼다. 그는 "배반을 당하면 나도 배반을 하고 싶어지거든. 그것 뿐이야."라고 자신의 이 습벽에 대해 '나'에게 얘기한다. 어느 날 밤 그는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별을 구경시키는 망원경을 구입했다. 그는 절대로 친구들에게 자신의 이 망원경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았다. 부득부득 망원경을 한번 들여다보자는 친구들에게 그는 "나는 지금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잖아. 제발 별만이라도… 별만이라도 그냥 내 것으로 놔둬줘…"라며 애원한다. 그러던 그가 영국으로 다시 떠난다는 거짓말을 하고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던 망원경을 한강에 버린다. 망원경을 버리기 전에 그는 '나'에게 마지막이라며 자신의 망원경으로 '미친 놈들이나 좋아하는' 별을 보여준다. 그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별'을 찾기 위해 망원경을 다른 방향으로 조작하기 시작했을 때 한 사내가 한강에 빠져 죽는 소동이 일어난다. 그와 '나'는 보트를 사서 강 한가운데로 나갔다. 그는 망원경에 붙어 있던 <별을 보여드립니다-5원>이라는 표때기를 뜯어서는 그것을 강물에 띄워버렸다. 그는 "두 번씩이나 쫓겨가기는 싫었어. 거짓말을 한 것은 내 자신의 배반을 맛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던 때문이지."라고 말한 다음 "이렇게 잔잔히 별 그림자가 무늬진 강을 덮고 잠들면 이 놈은 별의 꿈을 꾸겠지."라며 망원경을 강물 아래로 밀어 넣었다. 소설은 이 '멋있는 장례식' 장면으로 끝이 난다.

 

'보다 현명한 친구들'에게 당시의 한국은 '초행부터 아예 귀국을 단념하는' 게 나은 땅이었다. 가로등주에 빠짐없이 걸려 있는 우방국 원수와 권력자의 사진을 보고 '그'가 말한다. "저 귀한 분들은 이제 좀 내려드리지. 피곤할 텐데." '능력만 있으면 제법 살아볼만한 대한민국'에서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도벽과 거짓말은 배반당한 자의 배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그 자신의 배반이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것은 망원경으로 별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별을 볼 줄 모르는 놈'들에게는 함부로 별을 보여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사람을 사랑해본 일이 없는 녀석들'은 하늘의 별을 볼 자격이 없었다. 별은 어쩌면 '미친 놈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다. 그러던 그가 애지중지하던 망원경을 강물에 버린다. 그는 망원경을 '그 녀석들'에게 도저히 다시 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오래 가지고 있으면 어느 때고 망원경을 팔게 되고 말 것 같았기 때문에 아예 망원경을 강물에 버리자고 결심한 것이다. 망원경의 주인은 <의사 기온>이라는 카로싸의 소설에 나오는 별을 보여주는 소년보다 '터무니없이 나이를 처먹고 있'는 '순 엉터리'같은 녀석이어서는 안된다.

 

망원경은 여기서 역사의 희망일 수도 있고 '양심'일 수도 있다. '그'는 어느 때고 역사에 대한 희망과 양심을 팔게 되고 말 것 같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결코 그것을 팔 수 없었기 때문에 그 희망을 강물 깊숙이 묻어둔다. 그 강물은 거품같은 사랑으로 부유하는 진과 같은 사람들의 표류가 아니라 도도하게 역사를 흐르는 민중의 심장 같은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그'에게 관객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의 불행과 불운을 역사의 그것이라고 볼 수 있고 '나'와 친구들은 그의 불운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기합리화하는 역사의 방관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한 그(역사)는 우리를 저주하고 우리와 결별한다. 하지만 그(역사)는 다시 돌아와 우리가 가진 것을 태연하게 도둑질(쿠테타와 독재)하고 거짓말(독재권력의 연장 음모)을 일삼으며 '내부질서뿐만 아니라 외부에 대해서도 무서운 파괴력을 지니게' 된 '거인'처럼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역사)는 '거품이 개울을 흘러내리듯 아무렇게나 생활을 흘러내려갔다.'

'그'가 욕심을 내선 곤란하다며 그가 가장 사랑하는 별을 찾기 위해 망원경을 다른 방향으로 조작하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한 사내가 강물에 빠져 죽는다. 자살한 사내는 처음에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배를 뒤집자고 했다가 나중에 여자를 살려두려고 혼자 살풋 몸을 날렸다. 사내는 죽었고 여자는 살아남았다. 그 사내가 남긴 유서에 대해 '그'는 죽으려고 하는 사람의 말을 살고 싶은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고 살아 있는 사람끼리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바보같이 괜히 썼다며 안타까워 한다. 그 직후에 '그'는 배를 타고 강으로 나아가 '우리의 장례식'을 치른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가장 사랑하는 별을 찾기 위해 망원경을 다른 방향으로 조작하기 시작'한 것과 한 사내가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다른 방향으로 역사의 희망을 찾아가는 것은 결국 역사의 강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과 같다. 이 때 강은 죽음과 삶까지도 가슴에 묻고 흐르는 역사의 주체로서의 민중이다. '그'와 '나'는 이 민중의 가슴 속에 망원경(희망)을 묻는 '장례식'을 치름으로써 "이제 저어나가지."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60년대 말 그 깜깜했던 한국사회에서 '희망'은 역사의 배반(쿠테타와 독재권력의 연장 음모)을 넘어 '잔잔히 별 그림자가 무늬진 강'(민중) 깊숙이 잠들어 있던 '별의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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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14 10:49 2005/02/14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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