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on 2005/02/09 15:21
Filed Under 내 멋대로 살기

친구가 권해 준 책... 거의 들춰보지를 못하다가 이번에 한반도를 유자로 그리며 움직이는 와중에 다 읽었다.

 

내게 도움이 될 듯하다고 권해준 친구의 사려 깊음이 충분히 느껴진 책이었다.

 

작가는 알랭 드 보통... 남녀간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이해... 라고 하기에는 좀 무겁고, 냉정하고 현실적인 바라보기... 정도로 정리하면 될 듯하다. 맑스부터 등장하는 온갖 철학적 개념들을 들이댄 사랑과 연애의 실체라고나 할까?

 

전부 동의할 수는 없고 반론을 제기하고 싶은 부분들과 충분히 공감을 간 부분들을 살짝 접어가며 책을 읽었다.



#1. 사랑에 빠지는 일이 이렇게 빨리 일어나는 것은 아마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에 선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요구가 해결책을 발명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출현은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다는 [대개는 무의식적인] 요구, 사람의 출현에 선행하는 요구의 제2단계에 불과하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의 특징을 빚어내며, 우리의 욕망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구체화 된다.

 

#2. 자신이 다른 사람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만큼 기쁘면서도 무시무시한 일은 드물다. 스스로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고 확신하지 않을 경우에는 타인의 애정을 받을 때 무슨 일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훈장을 받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3. 당신이 지금 나를 사랑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내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언제 당신이 내 전체를 보게 될까 초조해하며 당신의 사랑에 익숙해져가는 것은 바보 짓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의 생각이다.

 

#4. 알베르 카뮈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은 그 사람이 밖에서 보기에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모두" 아주 완전해 보이고, 주관적으로 자신을 보면 몹시 분산되어 있고 혼란스럽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관된 전개, 안정된 인격, 고정된 방향, 주제의 통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환각을 통해서 상대방으로부터 그런 장점들을 만들어 낸다.

 

#5. 성숙한 사랑의 이야기에서는 첫눈에 반하는 일이 없다. 자신이 뛰어드는 물이 얼마나 깊은지 알고 나서야 그 물에 빠진다.

 

#6. 사랑도 믿음인 한[그것 말고도 여러 가지이지만] 비자유주의적이다. 이제까지 자신의 좌절을 반대자와 이단자에게 퍼붓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웠던 믿음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어떤 것[조국,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해서 믿음을 가지는 한, 그 믿음의 강도가 증가함에 따라서 대안들은 자동적으로 추방당한다고 할 수 있다.

 

#7. 사랑의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철학의 역사는 현상(겉모습)과 실재 사이의 차이에 냉혹한 관심을 가져왔다. 철학자는 중얼거린다. "나는 밖에 있는 나무 한 그루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이 나의 망막 뒤에서 이루어지는 시각적 착각일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철학자는 기대감으로 마음을 졸이면서 중얼거린다. "나는 아내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시각적 착각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8. 사람이 미망[사랑, 자신이 달걀이라는 믿음]에 빠져서 살 수도 있지만, 그것을 보완해주는 것[비슷한 미망에 빠져 있는 클로이와 같은 연인, 토스트 한 조각]을 찾아내면 모든 일이 잘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서만 그것을 믿을 때, 그럯을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할 때만 해가 된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이라는 매우 아슬아슬한 비누 거품에 대한 믿음을 유지해나갈 수만 있다면, 버스가 진짜로 빨간색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9. 의미론적으로 볼 때 사랑과 관심이 거의 맞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나비를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는 "나는 나비에 관심이 많다"는 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며, 그 관심에 의해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무슨 말을 하는지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클로이는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나에 대한 그녀의 행동에는 "나"의 확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요소들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10. 우리가 우리 짝과 얼마나 행복하든, [우리가 일부다처제 사회에 살지 않는 한] 그 사랑 때문에 다른 낭만적인 관계를 시작하는 것은 방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데도 다른 관계를 시작하지 못하는 것을 압박으로 느끼게 될까? 짝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이미 기울고 있는 것이 아닌데도, 왜 그것을 아쉬워할까? 어쩌면 그 답은 사랑에 대한 요구를 해결한다고 해서 반드시 갈망에 대한 요구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편치 않은 생각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11. 사랑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계속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 답을 알 수 없을 만큼이나 무시무시한 질문이 있다.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이다.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 사랑의 종말과 삶의 종말 사이의 유일한 차이는 후자의 경우에는 적오도 죽음 뒤에는 우리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의 끝이 반드시 사랑의 끝은 아니며, 더군다나 삶의 끝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을 아는 연인에게는 그런 위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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