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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12/02
    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하이하바
  2. 2007/11/28
    2007년 대선입장
    하이하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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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04/11/18
    노동권과 여성권이 진정 결합할 수 있을 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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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민주주의와 진보를 역행하는 3자 통합 안을 거부하라

 

신자유주의를 용서하는 가!

결국 진보정당은 신자유주의와 동거하는가! 지난 11월 20일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새통합연대 3자가 통합을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지난 11월 27일 민주노동당은 당대회에서 90%에 이르는 찬성으로 통합을 확정했다. 1년 넘게 진보진영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을 위해 쌓아 올렸던 탑이 완전히 무너진 셈이다. 이들은 진보진영 대통합과 통합 진보정당 건설을 목표로 두고 2012년 총선 예비 후보 등록일인 12월 13일에 맞춰서 통합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라고 밝혔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한나라당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개혁적이고 중산층의 이해를 대변했다고 하지만 결국 철저한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집권동안 한미 FTA 협정을 체결했으며, 미국의 군사 세계화 전략을 그대로 추진하면서, 평택 대추리에 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주민을 내쫓았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또한 노무현 정부 당시 확정한 사업이었다. 복수노조 유예, 그리고 노사관계 선진화방안이라는 이름의 노동법 개악 모두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완성된 것이다. 손배 가압류의 대표적 희생자였던 배달호, 김주익 열사의 죽음은 이명박 정권에서 발생하지 않았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에서 발생했으며, 스스로 ‘노빠’라고 자랑스럽게 떠버리는 유시민이 바로 그 가운데 있었다.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하는 민주노동당이 과연 앞으로도 힘없는 노동자 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지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동당은 민주당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세력과의 연합을 반복해왔다. 문제는 그동안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해온 민주노총 등 노동자 민중의 이해관계가 국민참여당과 같은 중도 보수의 이해관계와 맞지 않는 점이다.

국민참여당은 노무현의 신자유주의를 철저히 계승한다는 점에서나, 국민 참여당 내부에 ‘혁신과 통합’이나 민주당과 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 지 분명하다. 노동자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민주노동당과 중도 보수를 지향하는 범 민주당 세력간의 “계급연합”인 셈이다. 두 계급 간에는 화해할 수 없고 합쳐질 수 없는 강이 있다. 이 두 흐름을 진보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인위적으로, 강제적으로 합치려는 것은 ‘정치공학적 대운하’라고 비유할 만하다. 인위적인 대운하가 생태계에 미치는 파장만큼 이질적인 집단의 정치적 타협이 몰고 올 파장과 폐해가 걱정되는 이유다.

 

국민참여당의 전과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미래에 노동자 민중이 없는 것이 문제다

 

민주노동당은 유시민과 국민참여당에서 김대중 노무현 정권 시절 몇몇 정책에 대해서 유감을 표시 한 것으로 그들이 반성했다고 말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또한 진보진영이 통합해야 정권교체가 가능하기에, 통합진보정이 절실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용서한다고 해도 미래가 쉽게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과거 행적이 중요한 게 아니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주지 못한다는 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시민과 국민참여당 또 더 나아가 민주당이 담고 있는 진보는 무엇인가? 백번 양보해서 민주노동당이 담고 있는 진보의 미래는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미래가 함께 동거할 신자유주의 세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도달 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아니 도달한 만 못하다.

 

통합을 앞두고 있는 3자가 공유하는 지점은 오로지 반MB전선과 정권교체다.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가난한 99%를 상대로 이익을 추구하며 무한 질주하는 신자유주의는 결코 "당"을 가려가면서 수렴되지 않는다. 지배 권력과의 결합을 통해서 다양한 형태로 변하는 것이다.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 그리고 이명박 정권 사이에 차이는 크지 않다. 노동정책의 차이, 복지 수준의 차이, 대북 정책의 강약 차이가 날 뿐이다. 시장 규제를 상대적으로 약하게 하느냐 강하게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노무현을 계승하는 국민참여당의 노동정책이 노무현 정부 정책과 차이 날 리 만무하다. 모두 알고 있듯 노사관계 로드맵은 노무현 정부 시절 작성되어 계속 이어져가고 있다.

 

아니면 최소한 가진 자들의 법인세율을 획기적으로 올리겠다는 계획이 있는가? 부유세나 토빈세를 도입할 의지가 있는가! 노무현의 반 노동자적 정책을 비판할 수 있는가! 지난 정부에서 새만금 사업을 두고 ‘이미 시작된 사업이기 때문에 중단할 수 없다’던 노무현주의자들이, 수 조원에서 수 십 조가 들어가는 4대강 사업을 과연 중단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든 빨아들여 가진 자들, 1%의 이익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신자유주의다. 신자유주의와 결별하지 않는 한 99%의 미래를 얘기하는 진보정당은 어불성설이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민주노조 운동에서 ‘배타적 지지’라는 악법을 통해서라도 민주노동당을 지지해왔던 이유는 노동자 민중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이 사명을 다할 수 없다면, 노동자․민중․서민의 정당자격을 잃는 셈이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새삼 민주노총의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애초 배타적 지지 방침은 뜨거운 감자였다. 그만큼 새로 출발하는 “당”에 배타적 지지라는 특권을 계승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노동자․민중 노동조합의 이해를 대변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당에게 배타적 지지라는 독점적 지위를 계승해 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의 세력과 함께 하는 정당을 배타적 지지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을 넘어서, 자기파멸에 가깝다.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란 노동조합원을 당원으로 가지고 있다고 해서 주어지는 자격이 아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동조합이 지지하는 정당이기 때문에 진보정당이라는 논리 또한 설득력이 없다. 신자유주의와는 다른 구체적인 방향과 정책을 제시할 때 노동자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이라 할 수 있을 게다.

 

3자 통합은 충격적인 현실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 삼아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에도 대 수술을 가할 필요가 있다. 이제 정치의 주도권을 “당”이 아닌 현장으로 가져와야 한다. 노동조합이 의회에서 표를 찍을 수는 없지만, 어떤 의원, 어떤 정당에게 투표할 지 선택할 수 있는 권력은 있다.

 

어제의 친구가 신자유주의와 한 배에 오른 지금, 민주노조운동 진영이 왕성한 정치활동으로 반 신자유주의를 분명히 한다면 그 배는 심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으로 나눠져 있던 시기에 노동조합에서는 “둘 다 비슷해서 현장에 어느 당을 지지해야하는지 알려주는 것이 힘드니 통합하라”고 하소연 했다. 이 말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색깔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지만, 바꿔 말하면 노동조합 스스로 정치적 지향이 불분명하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노동조합이 분명하게 갈 길을 간다면, 노동자 민중에게 표를 얻고자 하는 정당 스스로 더 나은 정책, 더 계급적인 입장을 밝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 민주노총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주노조 운동이 신자유주의와 동거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그 출발은 어렵지 않다. 애초 원칙도 없었던 정치방침이자, 이미 효력을 상실한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는 것에서 출발하면 된다.

 

지금 민주노총에 필요한 것은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대해서 다른 모든 것에 우선에서 배제한다는 원칙이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배타적 배제를 천명한다면 노동조합에서는 다양한 진보정치와 연대 연합하는 것은 물론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2011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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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대선입장

07년 대선, 사회변혁운동의 목표는 반신자유주의 전선 구축

[기고] 반신자유주의 투쟁 강화, 대안세계화 실현을 위해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11월28일 12시54분

2007년 정세와 대통령선거 : 반신자유주의 투쟁과 분리되는
‘정치세력화!’ ‘국가권력 장악’은 사상누각일 뿐이다.

 

2007년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은 자신을 둘러싼 참혹한 현실에 비해서는 초라할 정도다. 그동안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일상적인 투쟁뿐만 아니라 선거 시기에 더 소리 높여 외친 구호였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외쳐진 세월이 20여년 혹은 그 이상일진데, 우리는 아직도 구호를 외치는 것 이상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정치세력화를 위한 시도는 민중후보 추대와 출마를 비롯해서, 진보정당의 건설과 진보정당을 통한 선거 참여로 이어졌다. 정치세력화의 방향에서 선거 자체보다는 일상적인 투쟁이 언제나 더 높은 위치와 가치를 부여받지만 90년대 중후반부터는 사실상 ‘선거’행위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래서 선거 시기에는 더욱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선거를 둘러싼 행위와 전술 이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지 못했다.

 

정치세력화에 대한 방향 논쟁에서 ‘정치세력화를 위한(과정으로) 국가권력 장악’인가!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정치세력화!’인가의 세력관계에서 후자가 완전한 승리를 거둔 상태다. 물론 선거에 참여하고 후보 출마나 후보 전술에 관여한다고 해서 모두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고민한다고 말할 수 없다. 다른 의도와 고민, 그리고 여러 정치적 목적을 두고 직 간접적으로 선거참여 전술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상적인 현장투쟁과 같은 현실에서 정치세력화의 방향을 만들어 가기 위한 투쟁이, 정당을 통한 국가권력 장악을 고민하는 세력에 비해 수세적인 상황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 민중운동 진영의 올해 대통령 선거는 가장 기본적으로 ‘신자유주의 VS 반신자유주의 전선’ 구축을 통해서 앞으로 신자유주의와 계속되는 싸움을 만들어가는 의미가 있다. 또한 실천 과정에서 개혁적 신자유주의 세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운동 내부 세력에 대한 비판 및 논쟁이 필요하다. 이 논쟁은 당과 의회 정치 중심성 - 내용이나 형식의 방향이 당과 의회를 경유한다는 뜻 - 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기에 더 본질적으로는 선거와 국가권력 장악에 대한 입장과 전망 논쟁의 장으로서 의미가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 대선과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을 대하는 입장 :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넘어 '신자유주의 반대, 대안세계화'를 우리의 운동 목표로

 

신자유주의 시대 진정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운동의 주장.방향.전망이 투쟁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즉, 투쟁이 선차적이다. 87년 투쟁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당시 투쟁 주체들에게 더 높은 전망과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가 제시된 것이고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전술 중 하나가 선거전술이며, 후보전술이며, 국가권력 장악이다. 따라서 정치세력화라는 화두뿐만 아니라 진보정당과 의회 - 선거, 그리고 국가권력의 문제도 새로운 노동자 민중의 투쟁 속에서 그것을 해명하고 그 투쟁을 상승시킬 방향으로 재조직되거나 다른 이름으로 불려질 것이지, 고정불변의 원칙은 아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금융세계화를 통한 세계 인민에 대한 착취와 무장한 세계화를 통한 전 세계적인 살육과 공포를 발생시키는 시대다. 87년체제 전후로는 과도한 정치적 탄압, 초과착취에 대한 대응방향으로 정치권력을 향한 투쟁이 분출되는 양상을 보였다. 현재 신자유주의체제 아래서는 탈정치화 경향이 증가하고 있으며 운동기반 자체가 후퇴하고 있다. 또 국가와 자본이 결집한 총자본과 전체 민중운동이 정점에서 대립하는 방식의 투쟁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대중운동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공동의 전선을 구축하기 위한 투쟁 또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신자유주의 착취와 탄압의 또 다른 양상이기도 하다. 한편 신자유주의 본질에 대한 투쟁으로 국제주의가 강화되는가 하면 신자유주의 영향력으로 민족국가 이데올로기에 포섭되는 대중이 늘어나는 모순된 시대다.

 

반면 신자유주의시대 노동자 민중의 투쟁은 기존의 운동방식과 노선을 벗어나고자 하는 사회운동의 실천 고민 속에서 다양한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러한 투쟁은 때로는 소규모적이고 때로는 무기력하며, 비록 연속성을 갖지 못하지만 부안투쟁이나, 평택투쟁, 새만금 투쟁 등 정세를 주도하는 운동, 신자유주의 지배체제에 파괴적인 타격을 주는 운동으로 폭발했다. 옛날처럼 노동대중 일반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투쟁이 조직되지 않고 그들이 동일한 이데올로기로 무장해서 체제 전환의 욕구를 갖지 않는 상황에서 과거와 같이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획일적이고 과도한 위상의 이데올로기적 제기는 적절하지 못하다. 더더군다나 정당과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정치세력화는 구체적인 정세에 조응하기에는 민첩하지 못하고 과도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노동해방.계급해방.코뮨의 아주 낮은 수준이거나 말한 모든 것들의 장기적 이행과정, 부르주아 정치체제를 지양하는 수준으로 말하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면 여전히 상징적인 유의미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닌 우리 운동의 방향 및 현실 정치의 개입 근거와 규정을 가지는 개념과 잣대로서 제기되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는 공허한 문구일 뿐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현실 투쟁에서 끌어내야 할 사회 운동의 규정과 방향은 무엇인가? 투쟁하는 주체들이 ‘얻고 싶은 것’, ‘듣고 싶은 대답’은 ‘왜 비정규직이 존재하는가?’ ‘왜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전쟁이 멈추지 않는 가’이다. 그리고 이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넘어서야 하는가이다.

 

그 누구도 정치세력화를 통해 신자유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보지 않기 때문이며 정치세력화라는 언명 자체만으로는 신자유주의와 투쟁하는 현실을 설명하기도 부족하며 전망 제시도 불분명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현실투쟁에서 비롯되어서 필요한 설명.분석.전망.투쟁 방향이다. 그러므로 대선 투쟁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규정 속에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 투쟁, 대안세계화 투쟁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은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전 세계적인 투쟁이다. 전 세계 민중은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을 가지고 투쟁한다. 제노바에서 시애틀에서 벌어졌던 투쟁, 한미FTA 반대를 위한 투쟁은 신자유주의를 반대하고 대안세계화로 나아가기 위한 투쟁이다. 또한 미국의 아프간과 이라크 침공, 레바논 전쟁에 맞서 침략반대, 전쟁반대, 파병반대 투쟁이 전 세계적으로 펼쳐졌다. 전쟁의 당사자와 전투지역에서만 펼쳐지지 않았던 것은 이것이 전 세계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 세계 민중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전쟁의 세계화를 반대하는 행동이 바로 오늘 우리 민중들이 펼치고 있는 투쟁이다. 이는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벌이고 있는 전 세계적인 착취와 전쟁을 통한 지배에 맞서는 투쟁이다. 따라서 노동자 민중을 새로운 전망으로 무장하고 반 신자유주의 전선으로 조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과거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반대 대안세계화 투쟁이다.

 

구체적인 정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으로 올바른 대안을 새롭게 제시한다면, 정치세력화는 신자유주의와 군사세계화를 반대하는 구체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현실에서 정치세력화는 노동자 민중이 어떤 권력기관을 손에 넣었느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땅을 지키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평화를 지키기 위한 평택 주민들의 투쟁을 보았다. 평택 미군기지싸움은 미국의 군사세계화와 연관된 투쟁이었다. 신자유주의 군사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자기 스스로 조직하고 권리를 찾아가는 것, 자기 스스로 정치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어떤 권력기관을 장악하고 권력을 얻는 것이 정치세력화가 아니다. 우리는 이런 유사한 경우를 부안과 새만금에서도 경험했다.

 

상기해야 할 것은 이런 투쟁들이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조직된 투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 속에서 나타난 결과이며, 정치세력화의 내용도 구체적인 권력기관 장악이나 권력화가 아니라 자발적인 정치 주체로서의 재조직화이며,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의 주체로서의 세력화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후보전술과 당면 선거 투표 행위에 대한 입장 : 진보정당과 그 후보 지지 여부를 포함한 모든 선거.투표 행위가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에 어떤 의미가 있느냐를 확인하는 것이 대선에서 더 본질적인 문제다.

 

특정한 정당이나 후보를 통해서 선거에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것인가는 아주 부차적인 문제다. 반면 선거 자체가 특정한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강화시키는 기재로 작동한다면 그것은 이제 맞서 싸워야할 문제이지, 활용할 문제가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선거가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또한 진보진영에서는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이동은 현실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 투쟁의 내용을 담을 수 없다.

 

2007년 선거행위(혹은 전술)와 투표행위는 철저하게 득표 전략으로 귀결되고 있다. 현재 투쟁을 표현하는 방식을 찾을 수 없다. 현실에서 벌어지는 신자유주의 착취와 그에 대한 투쟁의 조직화와 전망의 과정으로 선거와 후보, 그리고 투표전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선거는 그것이 없다. 오히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이데올로기가 면죄부가 되어 의회주의 운동세력이 신자유주의 전선의 오른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실 신자유주의 투쟁을 근거로 진보정당이 어떤 투쟁을 할 것인지가 이야기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노동자 민중의 정치세력화를 통해서 신자유주의 지배체제를 극복해야 하는데 그 유일한 대안이 선거와 후보이자 진보정당이라는’ 논리 아닌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결국 현재 진보정당은 운동은 사회운동이 가져야할 근본적인 변혁성을 상실하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반대 전선을 국가권력 장악을 통한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라는 이름으로 훼손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2007년 대선에 참여하는 것은 의회주의에 대한 판단 여부에만 있지 않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의 전선이 더 중요하다. 진보정당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민주노동당과 한국사회당 등 대중정당들이 비정규악법에 야합한 한국노총의 표를 얻기 위해 사과를 하고, 공조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전도사들과 자리를 함께하는 모습, FTA를 조건부로 찬성하는 모습은 ‘노동자 민중의 정치적 위상이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의회주의의 당연한 종착지점이다.

 

이 때문에 특정 진보정당과 그 후보를 지지할 것이냐 말 것이냐, 진보정당에 어떻게 개입할 것이냐 그 당이 반신자유주의 전선에 옳게 서느냐를 중심에 놓고 고민하지 않는다. 이는 반대로 ‘투쟁으로 선거를 돌파해야 한다’ ‘선거 자체가 개량적’이라는 비판을 지지하는 것 또한 아니다. 반신자유주의 투쟁의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는 운동전략 속에서 펼쳐지고 있는 선거를 비판하고 그것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지배분파와의 싸움이자, 운동내부의 올바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한 이중전선이다.

 

나가며 : 사회변혁운동으로 노동자 민중의 새로운 전망을 만들어 가자!

 

그러므로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 대안세계화 투쟁이 노동자 민중운동, 사회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이어야 하며 구체적인 투쟁이 제기되어야 한다. 선거를 진행하는 우리의 계획은 선거에서 제기되는 내용, 그리고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이 그동안 펼친 정책이 신자유주의와 어떤 관계, 어떤 연속성에 있는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민중투쟁을 만드는 것이다. 비정규악법 철폐투쟁, 현실에서 펼쳐지는 비정규직들의 투쟁, 파병반대 투쟁과 반전평화 투쟁과 FTA반대 투쟁을 매개로 한 대안세계화 투쟁으로 구체화 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우리의 고민은 선거에 대해서 불참할 것을 고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전체 정치전선 안에서 보이콧 전술은 어느 정도의 규모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준의 보이콧을 조직해야 한다. 사회변혁운동에게는 아직 그 힘이 미약하다. 이제 부르주아 정치질서에 대한 투쟁의 일환으로 보이콧 전술이 아닌 진보운동 내부의 요동치는 신자유주의 전선이라는 1차적인 과제를 받아 안는 전술로의 선거 불참이 조직되어야 한다. 나아가 신자유주의 지배정권에 의한 노동자 민중 착취의 현주소를 폭로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의 내용이 제출되어야 한다.

**참세상에 기고한 글입니다. 이윤보다인간을 홈페이지(RED.jinbo.net)에서 좀 더 보충된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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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운동포럼 참가를 마치고

참세상에 기고한 글인데 옮겨 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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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관계와 소통, 아쉬운 논쟁, 열려 있는 미래

[기고] 사회운동포럼 참가를 마치고

조대환(이윤보다인간을)  / 2007년09월05일 17시27분

사회운동포럼이 뜨거웠던 여름과 함께 마감되었다. 올 봄 의욕적으로 제기된 사회운동포럼이 가을을 맞으며 마감되었으니 참 오랜 기간 달려 온 셈이다. 매년 여름이면 사회운동단체가 주체하는 행사에서 학생 주최행사뿐만 아니라 여러 포럼이나 강좌와 같은 다양한 여름 행사가 열린다. 여기에 격 주년 행사까지 겹치게 되면 7-8월 두 달이 정말 눈코 뜰 새가 없다. 행사가 많으면 주최하는 사람들로서는 행사가 흥행할 지 실패할 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게다.

 

사회운동포럼 조직위원회의 경우는 잘못했다간 운동사회에 일정만 하나 더 만들고, 돈만 쓰는 민폐를 끼치는 건 아닌 지 심사숙고해야할 처지였다. 사회운동포럼을 일선에서 준비한 사람은 아니지만 나름의 목표를 가지고 참여한 사람으로서 피해갈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운동포럼 과정이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사실 올 초 사회운동포럼이 제안되었을 때만 해도 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또 한 가지 우려는 진작부터 진행해온 한국사회포럼, 맑스코뮤날레, 맑시즘2007 같은 무수한 행사들과 사회운동포럼의 차별성은 무엇인지에 답하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 내린 결론은 포럼을 위한 포럼이 아닌 운동과 운동 간에 소통과 연대의 과정으로써 사회운동포럼이다.

 

고만고만한 단체들이 모이다보니 재정 문제도 만만치 않았다. 풀씨(조직위원) 모집도 예상했던 대로 쉽지 않았으니 뚜렷한 대책은 없었고 오로지 풀씨 모집과 현장 자료집, 기념품 강매로 난국을 돌파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포럼 기간 내내 집행위원장은 사무국장이 전대를 틀어쥐고 사무국 회식비도 지원하지 않는다고 푸념해댔지만 옆에서 보기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사회운동포럼이 끝나면 집행위원장이 경제사범이 되지 않았을까!

 

이런 웃기 어려운 재정상황에서도 특별한 후원이나 정부기관 지원금, 거대조직의 분담금 없이 대회를 치러냈다는 것은 사회운동포럼을 통해 우리가 얻은 또 다른 성과일 터다. 이런 성과만이라도 지켜져서, 더 넓게 퍼진다면 정부재정에 기대는 거대조직, 그런 거대조직에 기대서 행사 치루기에 급급한 연대운동의 기풍도 먼 미래에는 쇄신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사회운동포럼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 제안단위 중 대중적인 기반을 가지고 있는 단위는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이었다. 나머지 단위들은 의기는 충천하나 단체 활동가 중심으로 활동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포럼 본 행사의 흥행도, 포럼까지 가는 소통과 논쟁의 과정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나마도 시간이 흐르면서 이랜드-뉴코아 투쟁이 겹치면서 대중조직들의 참여율도 불투명해졌다.

 

이 속에서 사회운동포럼에서 전략과제를 공동으로 수립하고자 개최했던 원탁회의도 제대로 개최되지 못하고 이랜드 집중투쟁, 노동자대회 등이 사회운동포럼의 주요 일정과 겹치면서 일각에서는 사회운동포럼을 탄압하기 위한 자본의 음모라는 말이 돌았다. 그리고 행사가 실패해도 핑계거리가 생겼다고 내심 좋아했지만, 남북정상회담은 연기되고 이랜드의 주요 투쟁이 사회운동포럼 기간과 빗겨가면서 핑계거리가 사라진 여러 동지들의 얼굴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경향은 포럼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사회운동포럼의 가장 중요한 일정 중 하나인 사회운동 총회에서 사회운동 선언문을 채택해야 하는데 이것이 만만치 않았다. 선언문에는 향후 한국 사회운동의 전략과 과제를 담아야 하고 공동행동 과제를 합의 선언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장 컸다. 또 다른 문제는 일부가 만들고 형식적으로 통과시키는 ‘선언문’이 아니라 참가자들의 사전 논의와 의견을 취합해서 내용에 반영하는 것이었다. 원탁토론이나 공개토론회와 같은 자리도 있었지만 그래도 웬지 부족해 보이는 것이 선언문 초안을 작성한 전략과제 기획단의 일관된 의견이었다.

 

일부에서는 알리바이용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지만, 포럼 기간 내내 설문지를 돌리고 사회운동 총회 2시간 전에 1시간의 사전 토론, 의견접수를 받겠다고 광고를 했다. 그러나 사전 토론 2시간 전에 또 한 번의 사전토론을 한다는 것이 만만치 않은 일임을 알고는 정작 사전 토론이 있는 9월 2일 13시에는 내심 아무도 찾아오지 않기를 기다리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조직화의 어려운 조건에서 남은 것은 포럼을 보란 듯이 성사시키는 것인데, 천우신조인지 맑스와 알튀세르가 도왔는지 포럼은 각 웍크샵마다 적게는 30, 많게는 1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일일 평균 300~400여 명 이 포럼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성과에는 사회운동포럼을 근 반년 동안 준비한 문화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사회진보연대 여러 활동가들의 노력이 있지 않을까 한다. 거기에 박래군 집행위원장의 제안서, 호소문과 함께 행사 직전 ‘오지 않으면 후회할 것’이라는 협박까지 사회운동포럼을 나누고자 했던 우리의 마음 전달된 결과이며 그동안 사회운동 간의 소통에 많은 사람들이 목말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운동포럼에 참가하면서 느낀 점 중 하나는 사회운동 단위가 별로 많지 않다는 점이었다. NGO시민운동으로 오해되기도 하고 그 경계에 있는 운동단체도 이번 포럼에 참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단체들이 사회운동이 가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운동질서와 합의하지 못했지만 자본주의 질서가 아닌 대안사회가 어째든 필요하며 이를 위해 공동의 모색과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에 공감하는 단체들이었다. 그래서 이번 포럼이 단체 중심이었다기보다는 웍크샵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것은 좀 더 다양한 운동, 운동단체들을 찾거나 함께 하도록 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이번 포럼에 참가한 단위 중 사실 전혀 새로웠던 단위는 없었다. 그만큼 알만한 단체, 알 만한 사람이 다시 모인 것에 불과하기도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운동이 더 넓고 깊게 대중 속에서 확장되어야 하지 않을까!

 

또 한 가지 발견한 사실은 이렇게 알 만한 사람이 모여서, 서로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여전히 서로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오래된 친구들이었지만 양파껍질처럼 벗겨내면 벗겨낼수록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서로 비슷한 용어, 유사한 단어를 써왔지만 생각하는 바가 많이 달랐다는 사실을 안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느 누구에 대한 편견이 무너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 사회운동포럼을 준비하는 각 웍크샵 기획단의 사전 논의가 없었다면 이런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당일 행사에서 앵무새처럼 자기 조직의 이야기만 읊조리는 구태의연한 사태가 재연되었을 것이다. 이번 사회운동포럼이 내세웠던 기치는 소통/연대/변혁이었다. 그 중 올해는 처음이니 만치 소통에 주안점을 두자고 했다. 이런 현실로 볼 때 소통의 목표에는 어느 정도 노력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각 포럼에서 사전에 진행한 논의나 토론에서는 서로가 똑같은 단어와 개념을 어떻게 다르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났다. 본 웍크샵에서는 서로가 가진 지향의 미묘한 차이로 인해 접근 가능한 지점과 도저히 접근 불가능해 보이는 지점이 들어나기도 했다. 물론 그러면서 어떤 확실한 결론을 맺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한계는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여성운동, 페미니즘, 여성권과 노동권의 접합이라는 개념의 의미, 서로 다른 지역운동에 대한 상, 조직 내 민주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운동양식, 노동조합운동의 혁신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지금도 가랑이 찢어진다는 하소연까지 수많은 의제와 제안이 오고 갔다. 이런 수많은 논의 중 열쇠말로 이야기되었던 지역운동/사회공공성/노동운동과 사회운동/새로운 사회운동의 생활양식은 더 논의를 발전시키고 실천 속에서 연대를 이끌어내야 할 과제로 생각된다. 이는 꼭 사회운동포럼이라는 형식을 갖지 않더라도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어찌되었건 사회운동 포럼 기간 동안 어떤 경우는 진지한 토론과 일정한 방향을 합의하고 이후 전망을 모색하는 자리도 있었고, 어떤 경우는 마음열기와 게임형식을 통해서 난상토론으로 서로의 생각을 들어보는 수준인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것이 옳고 우열하다거나 이것을 성과의 판단지점으로 삼는다는 것은 사회운동포럼의 취지에 벗어나는 일이다. 좀 더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상했던 일이지만 여러 현장의 대중들이 참석이 저조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사회운동이 그 본연의 소통의 의미를 살려간다면 이번에 부족했던 부분을 해소해 갈 수 있으리라 본다.

 

그렇기에 포럼에 참가한 우리는 ‘오래된 친구들이 서로에 대해 다시 알아가면서 논쟁과 연대의 미래를 열었다’는 데 이번 포럼의 커다란 성과를 두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연대의 미래가 변혁의 미래로 연결되는 그날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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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은 책 중간보고

지난 연말, 올 연초 이벤트로 책 선물받기 행사를 했다. 주기가 아니고 받기.

 

많은 이들의 동정과 격려, 동참 속에 여러권의 책을 받았는데 예상했던 대로 진도가 영 안나간다. 올해 다른 책을 사서 읽기는 퍽 힘들어 보인다.

 

 

더 분발해서 앞으로도 남은 책을 더 읽어야 겠다. 아직도 몇권 더 남았다.

남은 책은 스피노자 관련책인데 이해나 할런지 모르겠당.

더 큰 문제는 스피노자 맑스주의도 모르겠는데, 이번엔 헤겔 맑스주의가 등장한단다. 이론가나 학자들을 쫓아갈 생각도 그들의 연구에 보조를 맞출 생각도 없고, 현실운동의 속도와 이론변화의 속도를 동일시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숨가쁜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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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산자와 죽은자 대빵 두꺼운 책이다. 다행이 소설이다. 프랑스판 민중-노동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90년대 초반 읽었던 노동문학을 읽는 듯한 생동감이 다가온다. 한국 소설에서는 담지 않았던 사랑의 문제도 양념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게다.

 

그래도 현재 전 지구적으로 진행되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방식,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이 어떤 것이고 어떻게 투쟁해야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현장 내에서의 타협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 등 우리의 운동 일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등장한다.

 

그러나 끝이 너무 밋밋하다 못해 아니올시다라고 밖에 답이 나오지 않는다. 결론이 문제가 아니라 끝맺는 방식이 문제인 듯 하다. 나만의 평가일 수도 있으나....

두번째 책이자 세권째 책, 거의 다 읽어가는 책이다. 오래 전부터 보려다 못본 책이기도 하다.

자본의 흐름과 노동의 대응에 따라 산업구조와 핵심 지역이 어떻게 이동하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에 따른 노동자의 연대가 어떤 식으로 작동했는지, 어떻게 자본에게 승리 혹은 패배했는 지를 역사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자본의 통치 방식에 유효한 투쟁은 무엇인지 더 사고해야한다는 고민을 안겨준다.

자본 혹은 산업이 이동하고 옮겨 가는 경로와 향후 노동 소요의 중심이 노동 투쟁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 지를 고민해야 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연구해야 한다.

 

 

자본주의 역사강의는 백승욱 교수의 강의록이다.

내용은 상당히 중요한 지점을 쉽게 잘 다루고 있다는 강점이 있다. 하지만 강의록을 책으로 엮는 고질적인 단점인 산만하고 중언부언에 핵심을 드러내지 못하는 부분이 아쉽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기도 혹은 잘못 서술한 부분도 있어보이는데 강의야 그렇다쳐도 교정과정에서 놓친 부분은 아쉽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 역사적 자본주의가 무엇을 말하는지, 역사적 자본주의 자본주의세계체제론자들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지를 쉽게 다가갈 수 있게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고민과 국가간 체계의 고민에서 일국적차원의 사회구성체논쟁의 재 해석이나 재 접근은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발전시켜야할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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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이 허광평에게]보내는 글을 읽으며

[노신이 허광평에게 ]

인생이라는 장도에는 큰 난관이 두 개있다.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가 그것이다.

갈림길에서는 묵자선생도 통곡하고 돌아갔다고 하지만, 나는 울지도 돌아가지도 않고 우선 갈림길 앞에 앉아 쉬거나 한숨자고 괜찮을 만한 길을 택해 계속 걸어갈 것이다.

가다 정직한 사람을 만나면 음식물을 달라해서 허기를 달래되, 길을 묻지는 않으련다. 내 나름의 근거를 가지고 그 길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호랑이라도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 놈이 배고픔을 참다 못해 제 갈 길을 가면 그 때 내려올 것이고, 끝내 가지 않는다면 나무 위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혁대로 몸을 꽁꽁묶어두고 시체마저도 놈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무가 없다면 놈에게 잡아먹히긴 먹히되, 놈을 한 입 물어 뜯어도 무방할 것이다.

다음으로 완적선생도 대성통곡하고 돌아갔다는 막다른 궁지에서는 다른 길에서처럼 성큼 걸어갈 것이고, 가시밭길이 가로막는다해도 여전히 걸어갈 것이다.
다만 온통 가시밭뿐이어서 결코 갈 수 없는 길은 분명 한 번도 맞닥뜨려 본 적이 없다. 그러고보면 세상에 본래 막다른 궁지란 것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가 다행히도 아직 그런 지경에 데이지 않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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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신이 제자이자 부인이었던 허광평에게 썼다는 글이다.

선택과 궁지는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닥치는 문제다.

 

더군다나 요즘처럼 개인이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진실이 혼란 스럽고 과학이 승리하지 못하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착취와 계급투쟁이라는 역사과학이 인정 받지 못하는 현실에서 노신의 글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해보면 답이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갈림길과 막다른 궁지를 "치명적 실수, 비과학적 오류"라는 문제는 제외하고 글이 전하는 감동을 느끼고자 한다면 새로운 시대를 '우리' 스스로 건설해 가는 주체의 정치, 구성의 정치를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이 중요 한 것이 아니고 그 길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길에 놓는 발걸음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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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다하지 못하는 투쟁에 대해서

붉은사랑님의 [몇가지 에피소드] 에 관련된 글.

진짜 에피소드! 집회는 왜 하는가?

 

[.....]힘 미치지 못해 쓰러지는 것을 개의치 않고 꺽이는 것을 거부한다[.....]

유명한 야스다 강당 낙서중 일부다. 원래 이 문구보다는 "연대를 구해~~~~"뭐 이런 말 전체를 쓰기는 하지만 이번엔 이 일부분이 더 현실감 있어 보인다.

 

 



5월4일 전날 대추리로 들어가지 못한 관계로 아침부터 성명서 쓰고, 다른데 필요한 원고 쓰고, 11시 국방부로 갔다. 국방부 집회를 마치고 평택으로 이동 본정리 앞에 도착하니 민주노총 방송차량을 이용한 집회가 한창이었다.

 

집회장인지 종합병원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머리에, 이마에 붕대를 감은 사람, 팔에 깁스를 한사람. 여기저기 피멍이 든 사람 투성이었다.

 

집회 참석 중 다른 사람들과 할 이야기가 있어 정신 없이 왔다 갔다 하다보니 군사차량이 대추리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잠시 정신이 없어서 다른 일을 하고 마침 지나가는 안면 있는 두 동지들에게 반 농담, 반 진담으로 우리는 못들어가는데 저차들은 왜 들어가야 하느냐? 왜 그냥 두느냐고 했다. 두 동지는 그걸로 이미 한판 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대추리로 다시 들어간다고 해서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그 때까지도 별 생각이 없었는데 순간 머리가 돌아버리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여기에 왜 와있는가? 집회는 왜하는가?

 

유혈군사작전, 군사기지반대 투쟁을 하고 있는데 군사작전차량이 옆을 버젓이 통행하고 있는데 집회는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알고 있던 동지들과 군용트럭을 막고 강력하게 항의하자 후미에 있던 집회 참석자들도 동의하고 나섰다.

 

역시나 기동대, 정보과 등등 **같은 인간들이 왔다. "다 이야기 된 것이니 길을 열어라. 지도부와 이야기 했다."

 

물론 우리들 입에서 돌아간 말은 있는 그대로 상상하시라. 결국 3차례 협박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 연행하겠습니다"를 던진 후 돌아가자. 기동대들이 한쪽 차선으로 전진하기 시작했고 집회대오와 충돌이 생겼다.

 

다음 그림은 당연하게 민주노총 관계자분들이 오셨다. 집회를 하기 위해서 합의했다. 총연맹하고 **당하고 **단위 대표자들이 결정했다는 것이 주요한 이야기의 요지였다. 누구를 위한 합의냐? 집회를 해서 뭐햐냐? 경찰이 밀고 들어오느것 안보이냐? 등의 질문에 그분들 말씀이 차를 막으니까 경찰이 오느것 아니냐?

그러면 집회를 못하니까? 타협한것 아니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군대 차량 스스로 후진하고 돌아가서야 사태는 진정되었다. 물론 사태가 끝난 후 경찰 지휘관이 차량저지한 사람 찾아내 체포하라는 말에 긴장되긴 했지만.....

 

피범이된 황새울 들판을 지척에 두고 군사작전 차량을 들여보내는 것이 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물론 그 차량은 어디로든 들어갈 차량이고 모든 길을 우리가 막을 수도 없다. 거기서 길을 막아봤지 경찰에 의해 연행되거나 해산당할 것도 뻔하다. 그 민주노총관계자 말처럼 집회를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을 두고 좌익모험주의는 한탕주의니, 장기적인 계획이 없느니 하는 것은 맞지 않다.

 

모든 것에 힘 다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이룰 수도 없다. 단순하게 쇠파이프를 들었냐 안들었냐, 화염병이 나왔냐? 물리력을 써서 승리했느냐가 강력한 투쟁, 원칙적인 투쟁을 판단하는 기준은 분명 아니다.

 

그 당시 원칙적인 투쟁은 내 힘다하지 못하고, 내 눈 미치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내 눈 앞에서 벌어지는 군사작전을 묵인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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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그 가능성에 대해서

지음님의 [고진주의자가 되다] 에 관련된 글.

지난해 읽고 나서 아직도 정리를 못하고 있다. 게시판에 "용감하게 책 읽기"를 만들고 첫 정리로 생각했는데 지음의 글을 보고야 한번 진짜 용감하게 고민을 정리해 본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읽기도 어렵게 읽고 시간도 3개월이상 이나 지났다.

 

아직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가라타니 고진의 "맑스주의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도 흥미 있는 책일 것이다.

트랜스 크리틱을 읽고 나서 칸트와 맑스의 연결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 했을 때 누군가 읽오보라고 권해준 책이다. 고진의 사상적 괘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고민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언제 읽을 수 있을지 참 요원하다.



일단 칸트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칸트를 객관적으로 접근하기도 어렵다. 이런 류의 지식이 더욱 부족한 것은 맑스주의 철학도 마찬가지지만 관념주의 철학이라고 치부되던 많은 철학들이 대중적인 언어로 이해되기 쉽게 나온 것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이책에서 칸트에 대한 부분이 난해함으로 다가오는 반면 맑스는 여전히 어려운 부분으로 다가온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맑스 이야기는 들어 봤다는 정도다. 그리고 결론에 대해서는 그 이행 가능성에 대한 고민이 든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이책을 부정적으로 읽지는 않았다. 굉장히 흥미진지하게 읽고 생각할 지점도 많았다. 다만 내가 정리할 능력이 안되고 책을 읽고 바로 정리하지 않아서 이미 책에 대한 내용이 다 날아가 버렸을 뿐이다.

 

오히려 이전에 해왔던 현실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하게 되었다. 90년대 중반부터 같이 운동하는 사람들과 운동의 전화와 혁신을 고민하면서 토론했던 느낌이 담겨 있기도 하다.물론 여러 수준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그 수준이라는 것은 누구(고진과 "우리")의 지적수준이 우세하느냐가 아니다. 체제변혁적인 중심인가 관계변화적인 중심인가일 뿐이다. 그리고 이 지점도 단순하게 내가 생각하는 문제일뿐 고진의 사상을 내 맘대로 "개랑"이리 이런 언어로 평가절하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럴 문제도 아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를 다시 정리해보아야 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핵심적인 문제는-이 지점은 이전부터 나왔던 이야기인데, 가라타니 고진의 발생인지 고진이 다른 곳에서 차용한 것인지 몰라도-코페리니쿠스적 "전회"라는 부분이다. 전회(회전, 자리바꿈)이라는 이 어렵게 쓴 쉬운 말은 칸트가 차용가능느냐, 맑스를 올바르게 해석했느냐 이전의 문제설정이다.

천동설과 지동설의 대립지점은 천동설 수준의 과학의 발전에서, 즉 양적전화에서 지동설이라는 질적전화로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발상자체와 과학의 입장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던 지점이라는 이야기다.

이것은 고전적으로 양질전화의 법칙을 사회와 역사의 발전경향에 대한 대입으로인류 역사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것이라는 목적론-경제결정론의 시각을 다시한번 교정시켜 준다. 이것은 결론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안에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생활하고 움직이면 공산주의는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 꿈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서는 코페리니쿠스의 전회처럼 자본주의가 아닌, 자본주의와 다른 체제로 "자리바꿈"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지금까지와 다르게 다른 시각으로 칸드를 돌아보고 새롭게 해석할 부분을 새롭게 해석해서 맑스와 연결시킨다고 볼 수 있다. 제목 trans와 <cri·tique

 n(문예·미술 작품 ) 비평, 평론>의 합성어인 것도 아마 이런 이유이지 않을까!

 

그런 전회를 위해서 칸트가 기존 사상에서 뛰어 넘으려 했던 지점을 그리고 새로운 체제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도덕성을 찾아 새롭게 해석하고 맑스의 상품과 자본 잉여가치에 대한 과학과 연결시키려고 했다고 볼 수 있다. 아마 근대 최고 과학적 성과이자 혁명적 사상을 살리는 것은 그 과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학이 확장되고 돌아갈  수 있는 시스템을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 한다.

 

그 방편 즉, 고진이 칸트와 맑스의 자리바꿈을 통해서 얻은 결론,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 넘어서는 새로운 혁명적 자리 바꿈을 가져가는 운동으로 제시하는 것이 대안화폐운동과 노동(자)소비자 운동이다.

이것을 가능성이나 편견을 배제하고 본다면 새로운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내는 문제라고 본다. 자본의 축적은 시간과 공간의 흐름을 거치면서 형성이 되는데 상품이 생산되고 이윤이 축적되는 그리고 잉여가치가 착취되는 공간이 있다면 이런 것이 가능한 순환구조라는 시간 흐름이 있다.

우리 사회를 아주 단순한 사회구조라고 보았을 때 이런 흐름은 착취가 없는 공동체 경제라는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며 상품과 자본의 시간적 순환의 고리를 끊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소비자 운동, 고진이 이야기하는 노동자로서 소비자운동이 무엇인지 이전에 대중적 반감과 거부감이 심한 것은 분명하다.  또 그 가능성도 그렇게 호락호락 하지 않다고 본다. 이와 함께 생태운동이나 다른 사회운동과 결합되면서 그 가능성을 확장할 수 있다고 고진은 보는 듯 하다.

소비자라는 언급은 여러 논쟁의 여지가 있고 나 또한 문제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나중의 문제다. 나는 혁명, 혁사, 사회주의 이런 언어적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느끼는 거부감과는 좀 다른 거부감이 있다. 그것은 고진이 말하려고 했던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는 다른 체제를 바로 실천하는 것이 소비관계만의 문제로 구축이 가능한가이다.

 

또한 신자유주의 체제(축적체제)가 근본적으로 이윤율의 지속적인 하락 속에서 금융부문의 확장을 통해서 그것을 상쇄(왜곡 위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아닐까! 즉 고진의 말대로 잉여가치는 노동자가 상품을 생산하는 순간이 아니라, 노동자가 자신이 생산한 그 상품을 소비(구입)하는 순간 생긴다는 주장은 자본주의가 자신을 재생산할 이윤을 상품관계에서 끌어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 되면서 생산부문(물질적확장)을 통한 이윤추구는 사실상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을 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검소하고 청빈한 삶, 자본주의 관계 밖으로 과감하게 탈출해서 새로운 시스템으로 살고자하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 붕괴시키는 혁명적 운동을 생활 속에서 진행할 노동자가 얼마 나 존재하지에 대한 의문도 고진의 문제의식에 동의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지점 중 하나다. 그것은 노동자의 지적 수준의 문제가 아니다.

이런 운동 또한 문화적 감수성이 필요한데 노동자계급에게는 이런 문화적 감수성마저 빼앗겨서 표출하기 어려운(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점이 있다. 그래서 소수의 운동으로 제안될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노동자 민중이 펼쳐나가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중요한 문제다.

 

아무튼 공산주의가 미래의 도달할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나로서는 여러가지 경우의 수와 비판적인 지점이 있지만 고진의 주장은 새겨볼 만하다고 본다. 현실에서 공산주의 운동의 중요성을 주장한 댓가로 단계론을 폐기하고 단계로서의 피티독재를 폐기했지만 피티독재 자체를 폐기한 것으로 오해 받아온 시간이 있었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문제는 내가 인정받느냐 오해를 푸느냐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어떻게 운동하고 새로운 시스템-그것이 안되면 관계라도-을 구축하려고 하느냐이다. 그것을 위해서 고진을 받들지는 않아도, 고진의 이야기에 재미를 붙여 보는 것은 많은 활동가들에게 유의미 하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이런 문제의식을 확장하는데 역사발전 5단계론의 시각이 아닌 다른 시각의 역사해석 소위 "문명사"에 대한 고민을 해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전혀 딴 소리 같고 생소하겠지만 내 기준으로 고진의 문제의식 속에는 고진의 의도와 무관하게 맑스와 엥겔스의 5단계론을 비판하면서 공산주의운동의 현실운동, 현실 가능성에 주목이 있다.

이것은 맑스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현실에서의 운동이라고 했으면서도 5단계론을 펼친 것에 대한 고민(그 조건)에서 우리 안에 있는 서구 중심 사고를 벗어나야 하는 점이기도 하다.

 

이런 지점은 문명사와 관련한 책, "총, 균, 쇠" 가 읽을만 하다고 한다. 또 유목민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목민의 역사는 여러 해석의 차이가 있어서 조심스럽긴 하지만 새로운 문명이 기존의 문명을 대체한다는 점에서 역사발전이 단계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중앙과 변방에 동시대 적으로 존재하고 상호 경쟁, 투쟁하는 관계 속에서 어떻게 사회가 발전하는 지 역사가 흐르는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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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운동에 대하여


행복한 운동에 대하여

 

 

-이윤보다 인간을-


1.운동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목표를 갖는다. 이것은 매우 공익적인 것이다. 모든 사람이 좋은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설레고 위대한 일인가?

2.운동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운동은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인간내면을 자성하도록 한다. 우리는 운동을 통하여 인간적 성숙을 달성한다. 자신의 인격을 성숙시키고 단련시켜주는 운동은 얼마나 소중하고 고귀한 자산인가?

3.운동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운동은 운동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신뢰를 일깨우고 함께 좋은 세상을 열어나가는 사람들이 관계맺는 법을 가르쳐준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하는 역사속의 동료들을 민중이라 부르며 민중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인류가 하나되는 민주공동체의 가능성을 시시각각 확인한다.

4.운동한다는 것은 참 좋은 일이다. 운동은 운동가에게 운동을 잘하기 위해 과학적 인식과 역사적 인식을 깊이 있게 할 것을 요구하며, 냉철하게 정세를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게해주며, 우리의 실천과 심지어 버릇까지도 재조직해준다.

5.이런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은 얼나마 행복한 일인가? 운동을 직업으로 삼는 순간 우리들의 인생은 나자신만의 것도, 그렇다고 다른 이들의 것도 아닌 모두의 것으로 변한다. 충만한 따뜻함이 지배하는 운동공간이 우리들 자신이 된다. 우리는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모아 세상을 변혁할 진정한 에너지덩어리로 만들어낸다. 우리는 노동자민중이 스스로 세상을 변혁하는 역사속의 주체로 우뚝 설수 있도록 돕고 그 속에 몸을 던져 하나가 된다. 우리는 기쁨으로 몸을 던진다.

6.우리는 누구인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누구인가? 악마의 착취체제인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변혁을 꿈꾸며 우리들 자신을 민주공동체의 주체로 단련해나가고 정세적 실천을 감행하며 끝내 우리들 스스로가 역사가 될 운동가들이다.

7.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엄청난 운동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다. 함께 운동을 구성하고 함께 실천하고 더불어 나누는 노동자민중운동의 주체들이다. 함께 투쟁하고 일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우리들 자신을 항상 돌아보는 전진을 위하여! 행복한 혁명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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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옌데 최후의 연설

아옌데의 최후 연설


저는 목숨을 걸고 이 나라의 고귀한 원칙을 지켜내겠습니다. 약속을 저버린 채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군부의 정통성을 무너뜨린 자들에게 불명예가 쏟아질 것입니다.

민중은 방심하지 말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민중은 선동되어도 안 되며, 학살당해도 안 되지만 자신들이 이루어낸 바를 지켜내기도 해야 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품위 있고 향상된 삶을 이루기 위한 권리를 지켜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빙자하며 작금의 반란을 부추기고 있는 저들, 민중의 대변인 운운하며 혼란을 일으켜 칠레를 벼랑으로 내모는 이 길을 가도록 마구 설쳐대는 저들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민중의 가장 숭고한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조국의 이름으로 믿음을 가지라고 말하기 위해 저는 여러분들 앞에 섰습니다. 탄압으로도 범죄행위로도 역사를 멈출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극복되고야 말 한 단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금은 어렵고도 힘든 순간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우리를 짓밟을 수 있겠지만, 미래는 민중의 것, 노동자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인류는 향상된 삶을 성취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동포 여러분, 저들이 라디오를 침묵시킬 수도 있고, 제가 여러분 곁을 떠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전투기들이 지나갑니다. 저들이 우리를 벌집으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이 나라에 자신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라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가 여기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민중의 부름에 따라, 숭고한 직무를 맡은 대통령으로서의 분명한 의지에 따라 저는 그렇게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번이 여러분들 앞에 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공군은 라디오 뽀르딸레스와 라디오 꼬뽀라시온의 송신탑에 폭격을 가했습니다. 제 말은 고통스럽다는 뜻이 아니라 한심하다는 뜻입니다. 제 말은 자신들의 맹세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도덕적 응징인 것입니다.

칠레의 군인들, 참모총장들 그리고 장교들 (…) 메리노 제독 (…) 바로 어제 정부에 대한 연대와 충성을 선언했던 비열한 멘도사 장군 또한 경찰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들 앞에서 제가 노동자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것뿐입니다. 저는 사임하지 않을 것입니다. 역사적인 전환점 앞에 선 저는 목숨으로 민중의 충절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건대 수천 그리고 또 수천 칠레인의 고매한 의식에 뿌린 씨앗은 결코 완전히 헛되지는 않으리라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무력을 소유한 저들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도 있겠지만, 범죄행위로도 무력으로도 사회적 진보만은 멈출 수 없을 것입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 민중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여러분들이 보여준 한결 같은 충심, 즉 헌법과 법률의 존중이라는 정의를 향한 거대한 열망의 대리인에 불과한 한 인물에게 주신 믿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결정적인 순간, 제가 여러분을 마주 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될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의 교훈을 잘 이용하기를 바랍니다. 보수와 연대한 외국 자본, 즉 제국주의는 군부가 자신의 전통을 무너뜨리도록 분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슈나이더가 지적하고, 다름 아닌 군부의 희생자로 지금은 여러 채의 자기 집에서 자신의 이익과 특권을 계속 지킬 수 있도록 타인의 손을 빌어 권력을 굴복시키기를 바라고 있을 아얄라 사령관이 재확인한 전통 말입니다. 저는, 특히, 이 땅의 정숙한 여성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우리를 믿고 있는 시골 여성들, 더 많이 일한 노동자, 아이들에 대한 걱정거리를 인식했던 어머니를 향해 서 있습니다. 저는 조국의 직업인들, 애국적인 직업인들, 즉 며칠 전부터 여러 전문직업인 조합, 자본주의 사회의 우월성마저 같이 지켜내려는 계급 조합이 비호하는 혼란에 맞서 계속 일해오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저는 청년들, 자신들의 기쁨과 투지를 노래하며 전파시키는 그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저는 칠레인, 노동자, 농부, 지식인, 장차 수배자가 될 사람들을 향해 서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폭력적 테러리스트 사이에 파시즘이 침투해서는 의무를 다해 조용히 관리하는 사람들에 맞서 다리를 폭파하고, 철로를 끊고, 송유관과 가스관을 파괴해왔기 때문입니다. (…) 역사가 그들을 판단할 것입니다.

분명 라디오 마가야네스는 침묵할 것이고, 조용한 금속성의 제 목소리는 여러분에게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로서는 여러분들이 제 말을 계속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 곁에 있을 것이고, 적어도 저에 대한 기억은 조국에 충성했던 한 의연한 인간에 대한 기억이 될 것입니다. 민중은 보호되어야 하지 희생되어서는 안됩니다. 민중은 억압받아서도 안되고 살육되어서도 안되지만 수모를 겪을 수도 없습니다.

조국의 노동자들이여, 저는 칠레와 칠레의 미래를 믿습니다. 배반이 판을 치려는 지금의 이 암울하고 고통스런 순간을 또 다른 사람들이 극복해낼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래지 않아, 드넓은 가로수 길이 열려 자유로운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그곳을 지나다니리란 사실을 자각하고 계십시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희생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가진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적어도 저는 비열함과 비겁함 그리고 배신에 대한 심판이라는 도덕적 응징이 있을 거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1973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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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권과 여성권이 진정 결합할 수 있을 때는??

* 이 글은 뻐꾸기님의 [한 협력업체 아줌마 노동자의 두 가지 병] 에 관련된 글입니다.

사실 많은 남성들은 사회운동을 하는 활동가이건, 노동조합 간부이건 깨어 있는 지식인이건, 여성권의 문제에 대해 완벽한 이해를 얻기 힘들어 보입니다.

 

저도 남성이지만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있는 것을 현실에서 부딪힐 때 그대로 실천할 자신이 없습니다. 가사노동의 경우 그나마 노력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결국 자기가할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도와준다는 사고가 크기 때문이지요.

 

이런 구조는 아주 일반적인 가정에서는 더 심하겠지요. 그러니 여성노동자가 현장에서 노동권을 쟁취하는 것은 고사하고 가정에서 여성의 권리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는 것이 힘든 것 아닐까하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현장에서 노동자의 당연한 권리를 찾아가고자 하는 주체의 가능성이 가정에서부터 억압당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가족의 역할을 계속 강조하는 건 아닐까요?

 

이중의 역할을 지워주면서 저항할 기력마저 빼앗고 그런 이중의 역할을 근거로 여성노동을 열등하게 치부하고......

 

노동하는 인간이 편히 쉴 수 있는 세상, 좀더 정확하게 피폐해지지 않고 노동할 수 있는 세상이 언젠가는 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가져 봅니다.

 이도 아니면 여성도 노동으로 지친 육체와 정신을 (가정에서(?))편히 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이것이 처음이자 끝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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