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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6/20
    포이동 화재 이후2
    하이하바
  2. 2011/06/20
    포이동 화재 이후
    하이하바
  3. 2009/10/08
    우리가 너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하이하바
  4. 2007/08/11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최영미)(3)
    하이하바
  5. 2007/07/22
    [최영미]비극의 시작(1)
    하이하바
  6. 2007/06/27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6월에 어울리는 시
    하이하바
  7. 2007/06/23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김용택-
    하이하바
  8. 2007/01/06
    눈 내리는 즐거움(3)
    하이하바
  9. 2005/10/29
    꿈꾸는 사람(4)
    하이하바
  10. 2005/10/22
    강변역에서 -정호승-
    하이하바

포이동 화재 이후2

포이동! 화마가 쓸고간 자리에 다시 희망의 기운이 넘쳐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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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동 화재 이후

포이동 화재 이후 포이동 지지방문단이 6월 19일 방문했습니다.

참혹한 화재 현장에도 그곳에는 여전히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여기고 지켜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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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느끼는 지금 더 큰 꿈을 포기하지 않는 자.

 

그들이 민중이고 우리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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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 현장에도 여전히 망루는 건재하며, 삶의 공간이 사라졌지만 삶의 터전을 포기할 수 없는 이들이 있습니다. 강남구는 포이동 주민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이곳은 서울 강남구 포이동이며, 암울하고 참혹한 빈민의 역사입니다.

정당하고 당당한 주거군을 보자하는 포이동 주민들의 요구는 화재 전이나 후, 결코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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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불리 먹지 못하는 공산주의는 반쪽 공산주의이듯,

이웃의 눈물에 관심가질때 참다운 진보의 가치도 확산될 것입니다.

 

그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 바로 우리의 연대와 관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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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너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인권 : 제로섬 게임을 넘어서]

우리가 너희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하이하바

 

공 공재산의 손해란 무엇을 이야기할까? 공공건물의 손해일 수도 있고, 공기업이나 국가기관의 수익사업에서 손실분이 커지는 것을 말 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의 영역은 많은 사람과 접촉하기 때문에 다양한 이해관계가 발생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공권력은 언제나 사회를 유지하려는 입장으로 다양한 사회정치적 입장을 차단하고 조절한다.

당연하게 이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즉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다양한 민의를 조절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손실은 국가가 가져야할 당연한 자기비용이자, 어떤 면에서 보자면 사회적 비용이기도 하다. 어느 누구에게 책임지울 수 없는 영역이다.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정치행위가 사회로 표출되어서 하나의 공동행동을 만들어 낼 때는 그것은 사회적 공동체이며, 그에 대한 결과 또한 사회적 비용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공권력의 경우, 감정이나 손익을 실제 경험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게 지배질서를 대변해 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 런데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일까! 최근 들어 공권력이나 공공기관은 스스로를 감정의 주체, 손익의 주체로 행동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그것이 발휘되는 공간이 사회적인 의견전달과 정치적 행위 과정이라는 점에서 충격이 크다. 바로 경찰이 다양한 집회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장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 혹은 시위 주최 측에 대해서 서울광장 관리비용에 대한 청구 등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지난해 촛불 시위에 대해서도 경찰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상황에서 본격화되었다. 2008년엔 경찰이 광우병대책위에게 3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는가 하면, 2009년 6월 하이서울페시티발 행사 문제로 서울시는 9명의 시민에게 2억 3천500만원을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밖에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2007년 민주노총 집회나 이랜드 홈에버 투쟁에 대해서 경찰이 수 천 만원씩의 손해배상을 청구하기도 했다.

이 런 국가권력의 행동은 국가공권력을 사인화 시키면서 감정과 손익의 주체로 삼고자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 결국은 집회시위와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다. 사회적 소통의 과정에서는 충분히 예기치 못한 충돌과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는다거나 그것을 담당하는 주체가 공적 인격이 아닌 개인적 인격의 담지자로 기능한다면 공적 체제와 민주주의 의사전달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의 책임은 철저하게 개인이 지게 된다.

만약 그렇다면 국가기관은 스스로 가진 공적 인격을 거부하는 셈이다. 이렇게 공적 인격의 거부를 하고자 한다면 국가기관 스스로가 답해야하는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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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한겨례신문>

그 질문을 하기 위해서 여기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얼마 전 민족일보 사건에 대해서 법원이 배상판결이 나왔다. 유신정권에서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작사건과 불법살인이 최근 새로운 심판을 받고 있다. 이 과정에서 억울하게 살해당한 많은 사람들이 진실과 명예를 회복하고 있으며,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보상을 받고 있다. 민족일보 사건의 경우 아직 1심 사건이지만 99억 원이 배상 판결이 났다. 이미 얼마 전에는 인혁당 사건에서는 8명의 유가족에게 배상금 245억 원 및 이자 392억 원을 포함하여 637억 원을 지급하라고 법원이 판결이 완료되었다.

이 밖에도 경찰과 검찰 그리고 정치 판사들에 의해서 저질러진 살인과 감금에 대해서 국가 배상 판결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이 렇게 배상해야할 천문학적 돈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배상에서 과연 또 다른 공동의 피해자였던 국민의 책임이 있는가? 권력을 찬달하고 여론을 조작하고 인권유린을 직(간)접적으로 지시한 정치 지도자들, 불법, 위법적 행위를 막론하지 않고 범죄를 저지른 수사관들 및 검찰과 경찰 등 공안 기관들, 정치적 조작사건이며, 헌법에 위배되는 사항인걸 알면서도 국가권력의 시녀역할을 했던 법원이 실질적인 범죄자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배상의 실질적 책임은 이들에게 있다. 만일 국민들이 이들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천문학적 보상금을 국민의 세금으로 내야할 하당의 의무가 없으며 위법과 가해행위의 실 주체인 검찰, 경찰, 법원 (혹은 그 구성원)이 국가 재정과는 별도로 책임을 져야 한다. 단 경찰이나 국가권력이 지금처럼 국가권력의 공적 손해를 공적 비용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사적 개인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말이다.

경 찰의 시위과정에서 발생한 비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는 불법행위에 대한 책임소재를 묻는다는 포장으로 싸여 있다. 그러나 이 비용은 사실상 민주주의를 가로막고 민중의 정치행위를 차단해온 경찰과 국가권력의 불법행위가 원인으로 발생한 비용일 뿐이다.

민 주주의라는 진행형의 정치행위에서 다양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불법과 폭력으로 왜곡해서 차단하는 국가와 경찰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민주주의 이행의 과정, 헌법질서의 이행과정에서도 비용이 있어야 입장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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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최영미)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최영미-"돼지들에게", 실천문학사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할 시간도

미워할 시간도 주지 않았다

 

언젠가, 기쁨도 고통도 없이

굳은 빵에 버터 바르듯

너희들을 추억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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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비극의 시작

                           비극의 시작

                                                                                                            최영미-'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중

 

 

 

 

 

진짜 진주는 자신이 진주임을 모른다

 

뭇 구슬들이 시기하고

뭇 돼지들이 탐하는 보석,

진주는 자신의 빛나는 몸을 가리는 외투가 없다

 

자신을 보호할 껍데기가 없는 진주는

심심한 돼지와 한가한 여우들이 즐기는 간식.

 

돼지들의 노리개가 되지 않기 위해 산으로 들어간 진주는

하루 이틀이 지나고 일 년이 못 되어

자신의 단단한 성이 답답했다

 

깊은 산중에서 혼자 지내다 병에 걸린 진주는

도시로 나왔다. 하룻밤 잘 곳이 없어 찾아간 진주를

하나뿐인 친구는 병원 냄새가 난다며 밖으로 내쫓았다

밖은 찬바람 이는 겨울,

 

붕대를 맨 진주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그날 저녁,

진주는 여우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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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6월에 어울리는 시

-돼지의 변신-

『돼지들에게』中  -최영미 -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그는 워낙 작고 소심한 돼지였는데

어느 화창한 봄날, 감옥을 나온 뒤

사람들이 그를 높이 쳐다보면서

어떻게 그 긴 겨울을 견디었냐고 우러러보면서

하루가 다르게 키가 커졌다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미리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이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  …… 나는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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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김용택-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김용택-

 

이별은 손 끝에 있고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아침 산그늘 속에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누가 알랴 사람마다
누구도 닿지 않은 고독이 있다는 것을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마주 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아픈 데서 피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저문 산 아래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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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즐거움

아침부터 내린 눈이 하늘을 뒤덮고 있다.

항상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던 남산마저 보이지 않고

온통 하얀 눈가루만 날린다.

 

동네 강아지도 아니고

앞집 꼬마도 아닌데

눈내리는 날은 그냥 막연하게 좋다.

 

이땅의 사람들이 시간만 있다면 이런 날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사색하기 참 좋은 날이기도 하다.

 

또 그럴 수 없다는 현실을  눈 내리는 날은 알게 해준다.

눈 치울 걱정, 눈 때문에 먹고살기 힘들어질 걱정......

 

어째든 눈 내리면 문자라도 한번 더 보내고 싶고,

눈 내리는 풍경을 사진에 담고 싶기도 하고

편지나 카드를 써보고 싶기도 하다.

 

아날로그로 돌아가고픈 작고 가벼움 욕망이 꿈틀댄다.

그런 것이 좋다.

 

눈 내리는 날은 어릴적 시골에서 시원하게 내리는 비줄기를 바라보는 것 만큼 좋다.

 

항상 눈내린 다음, 비 내린 다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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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

시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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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사람 


세상이 두려워하는 사람은 
첫째로 꿈꾸는 사람입니다. 꿈꾸는 사람의 미래는 
꿈꾸지 않는 사람의 미래와 현저하게 다를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소유에 집착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소유를 초월한 사람입니다.
한 인간을 대단히 위대하고 두렵게 만드는 일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소유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집착을 넘어서 소유에 초연함이 필요합니다.


- 강준민의《꿈꾸는 자가 오는도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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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역에서 -정호승-

강변역에서

 

-정호승-

너를 기다리다가
오늘 하루도 마지막날처럼 지나갔다.
너를 기다리다가
사랑도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바람은 불고 강물은 흐르고
어느새 강변의 불빛마저 꺼져버린 뒤
너를 기다리다가
열차는 또다시 내 가슴 위로 소리없이 지나갔다.
우리가 만남이라고 불렀던
첫눈 내리는 강변역에서
내가 아직도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나의 운명보다 언제나
너의 운명을 더 슬퍼하기 때문이다.
그 언젠가 겨울산에서
저녁별들이 흘리는 눈물을 보며
우리가 사랑이라고 불렀던
바람 부는 강변역에서
나는 오늘도
우리가 물결처럼
다시 만나야 할 날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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