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3월 1일에 세운 소녀상 할머니는 한을 풀지 못했다

[평화의 소녀상을 찾아 ⑦] 당진 평화의 소녀상

18.03.01 12:06l최종 업데이트 18.03.01 12:06l

 

수많은 이 땅의 평범한 여성들을 강제로 전쟁터에 끌고 가 위안부라는 이름 아래 성노예로 만든 일본의 인권 유린을 비판하고, 피해자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졸속으로 체결한 한일위안부 합의의 폐기를 촉구하는 의미에서 전국 각지에 세워진-지금도 세워지고 있는- 평화의 소녀상을 답사한다.  

이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조직적으로 전개된 여성 인권 유린과, 아직도 이를 공식 인정하지도, 반성하지도 않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필자만의 평화적인 방법이며, 부끄럽고 잘못된 과거를 바르게 청산하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 사회의 여러 노력에 작은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단, 그냥 찾아다니기만 해서는 의미가 적다고 보고, 가능하면 소녀상이 세워진 지역의 역사성과 소녀상 건립이 갖는 의미, 소녀상의 모습과 상징성 등을 다양하게 알아보고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단순한 평화의 소녀상 답사를 넘는 지역 답사의 의미도 갖게 됨을 의미한다) - 기자 말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당진 평화의 소녀상은 다른 일반적인 소녀상과 달리 꼿곳이 서서 하늘과 새를 바라보고 있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 물이 뒤집혀 용솟음 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 심훈, <그날이 오면> 일부 

1930년 3월 1일, 고향인 충남 당진에 터 잡았던 시인이자 소설가 심훈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했던 당시의 감격을 되살리며 독립의 염원을 담아 지금도 마음을 절절하게 뒤흔드는 이 시를 썼다. 생전에는 발표하지 못했던 이 시는 해방 이후인 1949년에야 발표된다. 

<상록수>로도 잘 알려진 심훈. 3.1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되고 퇴학당한 학생, 신문사 기자이자 영화배우에 감독이기도 했던 청년, 그리고 발표하는 작품마다 검열에 걸렸던 일제의 감시 대상, 고향 당진에서 농민문학을 개척한 계몽운동가이기도 한 그는 '그날'을 보지 못하고 35세의 짧은 인생을 불꽃처럼 살다 갔다. 

심훈이 1930년 3월 1일, 감격에 겨워 <그날이 오면>을 쓴 그날로부터 86년 뒤인 2016년 3월 1일, 그의 고향 당진시는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 당진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심훈 시 <그 날이 오면>과 소설 <상록수>로 유명한 심훈은 고향인 당진에서 필경사를 짓고 살다가 35세 젊은 나이에 요절한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심훈을 통해 알 수 있듯 당진은 저항정신이 살아 있는 고장이다. 1919년 3월 10일, 16세의 원용은 학생이 서울에서 3.1 운동을 목격하고 내려와 고향인 면천(현재 당진시 면천면)에서 비슷한 나이 또래의 학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면천의 만세운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학생 주도의 3.1 운동'이었다.  

당진은 이웃한 서산과 함께 천주교가 가장 먼저 뿌리내린 고장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이 당진 출신이고, 100년을 넘긴 천주교회가 여럿인 고장이다. '천주 앞의 평등'을 내세우는 바람에 서슬 퍼런 박해가 이어진 조선말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새롭고 진보적인 사상과 종교를 빠르게 흡수하고 부당한 권력에 대한 저항정신으로 역사에 일관된 흐름을 남긴 당진. 지금은 아산만과 바다로 이어지는 제철 산업 단지가 거대한 공단의 긴 띠를 형성하였고, 그 배후도시가 되면서 인구가 늘어나 2012년 '군'에서 '시'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른다. 

대규모 산업단지가 들어서고 시내가 크게 변모하고 있지만, 조금만 벗어난 시골에서는 기지시줄다리기 같은 민속이 여전히 살아 있는 고장. 그만큼 변화가 빨라 좀 어지럽게도 보이는 당진시내에 들어서면 변화를 반영하듯 구도심과 신도시가 뚜렷하게 구별된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뒷모습 당진 시가지가 확장되어 소녀상 앞에는 상가 빌딩들이 많이 들어서 있다. 소녀상의 새는 그 위를 날아가려 하는 것 같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그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당진종합버스터미널도 15년 된, 비교적 근래의 시설이고 주변에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들어서 있다. 

아침에 일찍 가니 도로 건너편의 고층 빌딩들이 소녀상에 그늘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수도권의 도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가 단지들이다. 그래서 이 소녀상을 잘 보려면 그늘이 없는 한낮에 찾는 것이 좋다. 

당진종합버스터미널 광장 한쪽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1002명의 시민과 34개 시민단체의 힘을 모아 6천만 원의 성금으로 세웠다. 이 소녀상은 다른 고장의 일반적인 소녀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우선 한복을 입은 소녀상은 앉아 있지 않고 우뚝 서 있다. 13~16세 정도의 소녀 형상이라 한다. 오른팔을 하늘을 향해 높이 들었는데, 그 손 위에는 한 마리 새가 놓여 있으며, 소녀의 시선은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새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당진 평화의 소녀상'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평화의 소녀상 오른손 위에 놓여 있는 새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소녀상을 만든 배효남 작가는, 소녀가 팔을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은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고, 손 위에서 날개를 펴고 있는 새는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며 지상과 천상의 매개체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미래 세대에까지 민족의 아픔과 슬픔, 역사적 교훈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바닥을 잘 들여다보니 할머니의 그림자와 평화를 상징하는 나비 그림도 있다. 

소녀상 옆 바닥에는 평화의소녀상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새긴 글이 있다. 

"일제에 의하여 꽃다운 나이에 끌려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님들의 아픈 역사를 잊지 않고 인권과 평화가 넘치는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며 당진시민이 마음을 모아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합니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아래 발바닥에는 물방울 파장이 있고, 그 파장 위로 할머니 그림자와 나비가 그려져 있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당진은 충남 지역의 마지막 위안부 생존자 이기정 할머니의 고향이다. 1925년 당진(송산면 당산리)에서 태어난 할머니는 18세 때 위안부로 끌려가 싱가폴과 미얀마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뒤 해방 후 부산으로 귀국하였다. 하지만 위안부 후유증으로 결혼 후에도 불임으로 아이를 낳지 못했고, 중풍으로 오른손을 사용하지 못한 채 삶을 이어갔다. 2017년 11월 11일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나셨고, 당진시청에서 시민장을 치른 후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소녀상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위를 올려다보면 소녀상의 시선과 손과 새가 모두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기정 할머니가 고통과 한으로 점철된 이 세상의 육신을 떠나 넋이나마 자유롭게 유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는 듯하다. 한을 품고 가신 할머니께 소녀상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란다.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당진 평화의 소녀상 소녀상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새와 손과 소녀상의 시선이 모두 하늘을 향하고 있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새삼 이렇게 또 한 분의 할머니를 보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자괴감일지 모른다. 그분들이 생전에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나. 일본 정부에 요구하는 진정한 사과, 여성 인권과 명예 회복, 한일위안부 합의 파기, 이 말들이 아직도 허공을 떠돌고 있는 듯하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암울한 일제 강점기에 '그날이 오면' 두개골이 깨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다는 심훈의 지극한 열망. 이미 그날이 온 지 73년째가 되어가지만 '그날'의 열정과 감동은 그저 역사 속의 박제물로만 남은 건 아닌가. 

2018년 3월 1일을 앞두고 2016년 3월 1일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을 보며 묻게 된다. 

심훈이 1919년 3월 1일에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1930년 3월 1일에 노래한 그 해방, 우리는 삼각산이 일어나고 한강물이 뒤집힌 그날에 얻은 해방으로부터 몇 걸음이나 더 앞으로 나가 있는가. 

※ 답사 정보 

* 서해안고속도로 당진 IC에서 나와 32번 국도 당진, 서산 방향으로 가면 당진에 닿는다. 평화의 소녀상은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앞 광장 서쪽에 세워져 있다.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해 당진에 가면 터미널 정문으로 나오자마자 오른쪽에 위치한다. 차를 가지고 가면 당진종합버스터미널 주차장에 주차하면 된다. 주차 공간이 넓고 주차비가 저렴하다. 

* 당진은 시내와 북쪽 해안의 공단 지대를 제외하면 전통적인 시골 풍경이 남아 있는 고장이다. 시간이 되면 송악 기지기줄다리기박물관에 가보거나 심훈 생가인 필경사에 들러보면 좋다. 필경사는 심훈이 직접 설계해서 지은 집으로, 1935년 <상록수>를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천주교 신자라면 합덕의 솔뫼성지에 가보면 좋겠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기지시줄다리기박물관의 부조 농촌 공동체의 화합을 도모했던 민속놀이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 홍윤호

관련사진보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