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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거리서 단일기 달고 뛰며 ‘조선학교 차별반대!’

[특집연재] 나양일 통신원의 릴레이 ‘통일염원’ 마라톤(2) 2018년 2월25일 도쿄마라톤
  • 나양일 캐나다통신원
  • 승인 2018.03.02 13:59
  • 댓글 4

2018 도쿄마라톤. 당초 엔트리 추첨에서 떨어져, 어렵사리 아일랜드 여행사를 통해 참가자격이 포함된 패키지상품을 구입해 겨우 참가할 수 있었다.(도쿄마라톤에 참가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참가 신청을 하고 당첨되길 기다리거나 여행사가 확보한 참가자격에다 호텔숙박을 묶은 여행상품을 구매하면 된다.)

게다가 첫 해외원정 마라톤. 지난해 11월 뉴욕마라톤을 포함해 현재까지 13번의 마라톤에 참여했지만 이렇게 먼 거리를 이동해본 적은 없었다. 가장 길게 이동해 본 경험은 10시간여를 운전하고 가서 달린 보스턴 마라톤이었는데, 이동시간에 따른 피로감으로 기록이 좋지 않았다. 해외원정이라는 부담보다 더 염려됐던 건, 출발 전 토론토에서 만난 일본인 지인의 충고(‘조선학교 차별반대’ 로고를 달고 뛰다 우익에게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와 그저 막연한 일본에 대한 경계심과 거리감이 도쿄로 향하는 비행 내내 마음을 어둡게 하였다.

지난 22일 저녁 무렵 숙소에 도착했다. 방에는 이미 아일랜드에서 온 폴란드 출신 매트(Mat)라는 친구가 짐을 풀고 있었다. 택시운전을 한다는 그는 이미 세계 6대 마라톤을 완주하고, 시간 날 때마다 여행 삼아 주요 메이저 대회들을 다시 뛴다는데 기록은 무려 2시간50분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짐을 정리하는 중 내가 달고 뛸 단일기와 세월호 리본, 평화나비, 조선학교 차별반대 로고 등 여러 부착물들에 대해 묻는다. 하나씩 설명해 줄 때마다 한반도평화와 통일에 공감하고 응원한다고 해줘 긴 비행에 따른 피로를 덜 수 있었다. 평양마라톤을 알려 줬더니 바로 인터넷으로 검색해보고, 꼭 가서 뛰고 싶다고 관심을 보인다. 말이 통하는 친구와 같은 방을 쓰게 돼 다행이었다.

몸은 무거운데 눈은 감기지 않는다. 누워 잠을 청하지만 한숨도 못자고 3시부터 일어나 페이스북만 들여다보았다. 옆 침대의 매트도 똑같이 잠을 못자고 페북에 얼굴을 묻고 있다. 잠을 좀 자야 할 텐데 큰일이다.

23일, 밤새 페북만 하다가 뜬눈으로 맞이한 아침, 창문을 통해 바라본 밝은 날의 일본 풍경은 생각보다 낯설지 않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나무들과 조형물, 연못들로 이루어진 호텔의 일본식 정원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느낌에 약간은 긴장이 풀렸다.

탄수화물 위주의 아침식사를 마치고 패키지 상품에 포함된 반나절 시내관광에 나섰다.

▲ 사진 : 나양일 통신원

첫 장소는 메이지신사. 일본인 가이드는 메이지신사의 역사와 신사에 들어가 인사하는 방법을 열심히 설명해 준다. 야스쿠니신사였으면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을 테지만, 몸을 피곤하게 만들어 밤에 잠을 잘 요량으로 따라 들어가 걸어 다녔다. 이어 도쿄타워와 아사쿠사 지역의 절을 둘러보았는데, 아사쿠사에 있는 절을 구경할 때 일본 전통의복인 기모노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재미있는 건 그들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란 점이었다. 기모노를 입고 한국말을 하는 모습, 관광지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는 한 방식으로 이해하면 되는 건지…. 살짝 적응이 쉽지는 않았다.오전에 시내관광을 마치고, 선수등록 및 번호표를 받으러 도쿄 빅사이트(Tokyo Big Sight)에서 열린 도쿄마라톤 엑스포로 향했다. 신원 확인 후 번호표를 받고 돌아본 엑스포는 잘 준비되고 조직돼 있었다. 자원봉사자들은 두말할 나위 없을 정도로 친절했고, 전시된 다양한 상품과 아이디어는 일본의 마케팅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룸메이트인 매트와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내일까지는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해야 해서, 고기요리들을 뒤로하고 괜찮다 싶은 초밥집엘 갔는데, 예약을 안 하면 어렵다고 한다. 하릴없이 그냥 나오려는데, 마라톤 뛰러 왔냐고 묻더니 자리를 만들어줬다. 주방이고 홀이고 일하는 분들이 모두 나이가 지긋해 보인다. 정갈한 음식이 따뜻한 정종 한잔을 유혹했지만 대회를 앞두고 그림의 떡. 둘이서 밥을 먹으면서도 오늘밤엔 ‘잠을 자야할 텐데’ 걱정만 나누었다.

24일, 이틀 연속 밤에 잠자기에 실패했다. 매트도 계속 뒤척이다가 여지없이 3시쯤 일어나서 수다와 페이스북을 들여다보며 아침을 맞았다. 아침 식사 후 컨디션 조절 겸 몸풀기로 참여한 2018 도쿄마라톤 우정달리기(Friendship Run-4km 달리기)에 참가했는데, 참가자들은 자기네 나라를 상징하는 옷차림이나 장식을 꾸미고 달린다.

도쿄 국제전시장 근처의 공원에서 4km 달리기를 마친 뒤 일본 팥죽이나 음식을 맛보게 하면서 일본 문화를 알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한국도 국제마라톤대회 사전 행사로 한국 음식과 문화를 알리는 모임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오후엔 일본의 진보단체와 재일 조선동포들이 주관하는 “3.1절 조선독립운동 99주년” 기념행사에 참가했다. 일본에 출장 온 민플러스 한충목 이사와 코리아국제평화포럼 류경완 집행위원장, 그리고 재일 조선동포들을 만나 단일기를 달고 국제마라톤에 참여하는 취지를 소개하는 기회를 가졌다.

200명이 넘게 참석한 자리에서 일본의 진보적 시민들과 재일 조선동포들은 대형 단일기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마음을 담은 응원 메시지를 남겨주었다. “작은 통일을 이루어내며 평창에서 힘차게 흔든 단일기를 올림픽이 끝났다고 역사 속에 흘려보내지 말고, 남‧북‧해외 동포들이 함께 더 힘차게 흔들면서,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해 남북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평화로운 한반도와 조국통일의 희망을 같이 꿈꿨으면 좋겠다”는 인사말에 정말 뜨겁고 열렬한 환영과 응원을 보내주셨다.(대학 졸업 이후 30년 만에 그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마이크를 잡아본 적이 없어 떨려 혼났다는….)

그나저나 오늘밤엔 제대로 자야할 텐데….

25일, 2018년 도쿄마라톤 대회 날이다.

다행히 밤에 잠을 좀 잤다. 10시쯤 자서 3시에 일어났으니 5시간 정도 잔듯한데 몸은 젖은 수건처럼 무겁다. 그래도 정신은 말똥하니 또렷하다. 일어나자마자 입고 달릴 옷가지와 준비물들을 챙겼다.

한반도 단일기, 세월호 리본,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나비, 사드반대 스티커, 그리고 조선학교 차별반대 표찰. 일본에서 달리기이기에 더욱 의미가 각별한 상징물들을 붙이며, 목에 가시처럼 걸려있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해본다. 식민지시대 이후 일본에서 민족의 자긍심과 기상을 잃지 않고 살고 계시는 재일 조선동포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도쿄거리를 달리며 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새벽 5시15분, 아침 식사를 마치고 셔틀버스로 출발장소에 갔다. 날씨는 약간 싸늘한 느낌이었지만 달리기엔 좋은 날씨 같았다. 걱정이라면 몸이 좀 무거운건데 ‘뛰다보면 어찌되겠지’하는 생각으로 짐을 맡기고 출발지점으로 들어섰다.

출발 전에 화장실을 다녀오려고 줄을 섰는데, 화장실이 부족해선지 엄청 긴 시간을 기다렸는데, 출발시간에 늦을까봐 마음을 졸였다. 출발선 근처에 화장실이 많지 않은 건 보완해야 할 점이다.

도쿄마라톤은 다양한 캐릭터 복장으로 뛰는 선수가 많은 것으로 유명하다. 각 나라를 상징하는 전통의상, 깃발, 일본 애니메이션 주인공 차림을 한 선수들,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달리기를 즐기는 모습이 다른 대회와 차이점이기도 하다.

오전 9시10분, 출발선에 하얀 꽃가루가 벚꽃이 휘날리듯 뿌려지면서 출발신호가 울렸고, 각양각색의 복장을 한 선수들이 달려 나갔다. 출발선 이후 양쪽 도로변에 늘어선 시민들의 환호와 응원이 기대 이상이다. 달리는 내내 “간바레!” “화이또!”를 외치며 박수를 쳐주는 그들이 너무 고맙다.

특이점은 코스 전역에 거의 10m 간격으로 배치된 자원봉사자들이 쓰레기봉투를 들고 있다가 선수들의 쓰레기를 즉시 수거해 코스가 매우 깨끗하다는 거였는데, 전체적으로 도쿄에서 받은 인상은 ‘친절하고, 섬세하고 깨끗하다’였다.(그래서 드는 생각 하나. 이렇게 도시는 깔끔하고 사람들은 친절한데 왜 우익들은 과격행동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출발 초반엔 그리 나쁘지 않았다. 20km까지는 목표했던 스피드를 지킬 수 있었는데, 25km를 넘어서며 체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길가 시민들의 응원소리도, 스카이트리도 그저 밋밋한 느낌이 들 정도로 집중력도 떨어져 간다.

29km를 넘어서자 속도가 더 줄었다. 무거운 다리 근육은 뭉치기 시작하고, 쥐가 올 거 같은 신호가 계속된다. 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단일기를 달고 뛰는 내게 일본 시민들이 “꼬레아 화이또”를 외쳐준 응원이었다. 몸이 지쳐갈수록 떠오르는 생각은 “왜 단일기를 달고 일본의 수도에서 뛰는지, 엊저녁 재일 조선동포들의 단일기 마라톤에 대한 격려, 조선학교에 대한 탄압과 차별”들이었다.

35km를 넘어서니 걷는 사람이 한둘씩 보였다. 나도 걷다 뛰다를 반복하면서, 간신히 레이스를 유지하면서 응원 온 한충목 이사 일행을 찾았지만, 만날 수 없어 포기하고 막바지 골인지점으로 안간힘을 다해 뛰었다. 결승점을 약 1km쯤 앞둔 모퉁이를 돌자 단일기 현수막을 들고 선 한 이사 일행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반갑고 힘이 나던지 달려가서 얼싸안았다. 추운 날씨에 1시간30분을 기다린 분들께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어렵사리 결승선에 들어서고 나니 그저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모자를 벗고 ‘위안부’ 할머니들과 강제징용으로 고통당하신 노동자들, 그리고 일본 정부의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는 조선학교 학생들을 기억하면서 묵념을 하였다.

자원봉사자들이 완주자에게 메달과 타올을 걸어주며, 아낌없는 박수와 축하 인사를 전해주었는데,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지만 그들의 웃음과 격려로 완주의 행복감을 느꼈다.

맡겼던 옷을 찾아 입고, 응원 나온 분들을 만나 함께 사진을 찍고 있는데, 한 멋진 청년을 만났다. 내 가슴의 단일기를 보더니 성큼 다가와 “자기도 조선인”이라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너무도 감격스러워 서로 포옹을 하고 인사를 나눴는데 조선학교와 조선대학교를 졸업한 청년이었다. 도쿄마라톤에서 이 ‘우연한 작은 만남은 우리는 하나라는 큰 통일’을 느끼게 해줘 무엇보다 값진 시간으로 기억될 거 같다.

4박5일의 짧은 도쿄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한반도 분단과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와 아픔을 안겨준 일본에서 단일기를 달고 뛴 마라톤, 도쿄 구석구석을 누비며 조선학교 차별반대와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전할 수 있었다는 점은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웠지만, 아직 해결돼야 할 문제들이 많아 도쿄를 떠나는 발걸음을 무겁게 했다.

도쿄를 떠나는 날 알게 된, 지난 23일 일본 우익들의 도쿄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중앙본부 건물 총격 소식, 계속되는 일본 정부의 대북 적대정책과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정책….

우리가 일본에 살고 있는 조선동포들을 더 많이 기억하고 응원하며, 더 힘차게 일본 정부에게 전향적인 태도 변화를 촉구해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초 도쿄에서만 달고 뛰려했던 ‘조선학교 차별반대’ 표찰을 남은 모든 마라톤에서도 달고 뛰기로 하였다.

‘조선학교 차별반대!’

나양일 캐나다통신원  webmaster@minplu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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