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위안부’와 성병관리소의 역사
그날 우리 일행이 소요산 자락의 옛 성병관리소 인근 농성장에 도착하니 “동두천 옛성병관리소 철거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활동가들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번 평화기행의 안내는 최희신 경기북부평화행동 전 사무국장이 맡아 주었다. 그는 1990년대 초반 기지촌 여성 윤금이 님 살해사건 대책위에서 활동을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경기북부지역 미군기지와 관련한 평화운동의 산증인이라 할 만한 삶을 살아온 활동가다. 천막 안에서 최희신 활동가는 미군 성매매 정책과 성병관리소의 역사를 개괄해주었다.
남한에서는 해방 후 폐창운동을 통해 1947년 ‘공창제폐지령’,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을 통해 법적으로 성매매를 금지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 성매매와 무관해 보이는 ‘전염병예방법’과 ‘식품위생법’의 하위 명령과 규칙, 지방정부의 성병관리소 조례를 통해 미군 기지촌의 성매매를 관리했다.
즉 헌법의 기본권 보장 규정과 상위 법령으로 금지하는 성매매 행위를 법령 아래의 규칙과 조례 등을 통해 허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합법적인” 미군 대상 성매매가 허용되는 “예외상태”의 공간으로서 기지촌과 성병관리소 체제를 만들어냈다.
남성 병사에게 여자친구를 사귀도록 독려하고, 동시에 여군 파병과 가족동반 파병 증대 정책을 추진하여 성매매 수요를 줄여온 유럽의 미군 기지와는 다르게, 미국 정부는 동아시아 미군기지 주변의 성병 문제를 주재국 정부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리고 한국 정부는 그 책임을 다시 성병의 전파자인 미군이 아닌 성매매 여성에게 철저히 전가시켰다. 공식적으로 성매매가 불법임에도 한국 정부는 안정적으로 외화를 확보하고 미군에게 ‘편리하고 안전한’ 쾌락을 보장하기 위해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통제가 허용되는 ‘묵인-관리 체제’를 만들었다.
1970년 당시 양주군 성병환자 수용 연인원 7800명
그 공간에서 중앙 및 지방 정부는 기지촌 성매매 여성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면서 미군에 의한 성매매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적극 협조하였다. 미군 위안부들에게 성병검진 증명서(“보건증”)를 발급하고 주 1~2회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게 하였으며 기지촌 주변에서 수시로 불심검문을 하여 증명서를 소지하고 있지 않거나 검진을 거부하는 여성, 성병 양성이 나온 여성을 강제 연행하여 성병관리소에 구금하고 신체의 자유를 원초적으로 박탈하였다. 성병관리소에서 페니실린 과다 투약으로 쇼크사하는 경우도 상당했다고 한다. 경기도가 관련 통계를 작성한 마지막 해인 1970년 당시 동두천이 소속된 양주군의 성병환자 수용 규모는 실인원 1300여명, 연인원 7800여명 정도였다. 여성 1명이 연 평균 6회 가까이 수용된 것이다.
1990년대 초반 기지촌들이 쇠락하면서 동두천을 포함한 성병관리소 운영도 공식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러나 기지촌의 규모가 줄며 수용 인원은 줄었지만 그때까지도 성병관리소의 폭력적 운영방식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소요산 발전계획으로 철거 위기 처한 성병관리소들
최희신 활동가에 따르면, 다른 지역의 성병관리소들은 1990년대 모두 폐쇄 및 철거되었는데 유독 동두천 성병관리소 건물만 철거되지 않은 이유는 동두천 시가 토지 소유권을 가지고 있지 않아 주변지역을 개발하지 못한 우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방치되어 있던 동두천 성병관리소는 현재 연임한 박형덕 시장이 2022년 취임하면서 ‘소요산 발전계획’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됐다.
동두천시는 소요산 일대를 놀이시설로 개발하고, 옛 성병관리소 부지를 주차장으로 활용하고자 2023년 2월 부지를 매입하고 꾸준히 철거 시도를 계속해 왔다. 특히 2024년 10월에는 두 차례나 대형 굴착기(포크레인)를 동원해 철거하려 했으나 활동가와 주민들이 굴착기에 올라타는 등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제각기 사정이 다르긴 했지만, 생명을 지키기 위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다를 게 없었던 밀양과 강정, 기륭전자 같은 곳들에서의 싸움의 기억들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지역의 평화 및 여성 단체들이 주축이 된 공동대책위원회는 철거에 반대하고 있다. 대안으로 이곳에서 벌어졌던 인권침해와 폭력은 국가에 의해 자행된 일이므로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여성·인권·평화 기억관”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여성인권 기억관은 아직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전국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곳이야말로 국가가 식민주의, 군사주의, 가부장제의 논리 속에서 여성의 몸에 직접 자행한 폭력을 반성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함께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기에 가장 적절한 곳이 아닐까?
군사기지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
농성장에서 설명을 들은 뒤 점심식사를 위해 대책위 활동을 지지하는 사장님이 운영하는 주변 음식점으로 갔다. 이곳의 사장님은 농성장 사람들을 지지하면서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불매정서라는 역품을 맞고 오랫동안 운영해 온 막걸리 양조장까지 폐업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변함없이 대책위의 싸움을 지지해 주었다. 그런 분들 덕에 계속 싸울 수 있었을 것이다.
점심 뒤 오후에는 성병관리소 지역을 벗어나 동두천 일대를 돌아다녔다. 이번 기행은 대책위 농성장 방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부터 ‘위안부’ 제도의 토대가 된 식민주의와 국가주의, 그 이전부터 공고했던 가부장제와 억압적 민족주의의 실상을 현실로 목격할 수 있는 군사기지 도시 동두천 전체를 돌아볼 수 있도록 짜인 일정이었다.
최대면적의 미군기지 캠프 케이시 주둔 보산동
먼저 방문한 곳은 한국에서 가장 큰 미군 전투부대 캠프 케이시(Camp Casey)의 주둔지인 보산동이었다. 원래 양주군에 속해 있던 동두천 시는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남진 경로였으며, 유엔군이 북진 과정에 통과한 지역이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미군은 동두천을 비롯하여 파주, 포천, 고양, 평택 등지에 주둔하였다. 그중 동두천은 지금도 국내 미군기지 중에서 면적으로는 가장 크고, 주둔 병사 규모로는 평택 다음으로 많다고 한다.
물자와 서비스를 외부에서 조달하는 미군기지의 특성상 이 지역에는 미군을 상대로 온갖 종류의 영업을 하는 기지촌이 형성됐다. 미군을 상대로 한 성매매 역시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경기도의 경우 동두천을 포함해 6개 지역의 성병관리소가 만들어졌다.
연예인 비자로 들어온 필리핀 여성들로 대체
보산동의 캠프 케이시 기지촌 일대를 걸으며 최희신 활동가는 마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설명해 줬다. 미군 위안부의 상당수는 기지촌 주변에서 미군에 의해 강간을 당한 후 ‘더러워졌다’고 비난하는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미성년인 상태로 성매매 일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이 지역에서 성매매는 주로 1996년경부터 연예인 비자를 갖고 유입된 필리핀 여성들이 하지만 상대적으로 포주의 강요나 착취 없이 일한다고 했다, 2003년 이라크전쟁 이후 보병부대인 캠프 케이시의 병사 상당수가 이라크에 파병되며 단기간에 기지촌 경제가 와해되어 동두천 세금이 급감하기도 했다. 활동을 하며 알게 된 미군 ‘위안부’ 여성들의 기구한 사연들도 여럿 들려줬다.
보산동의 길거리는 외국의 여느 관광지 상점거리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최희신 활동가가 벽에 그래피티가 가득한 한 클럽 건물을 가리키며 1층은 클럽으로, 모텔처럼 작은 창문이 일렬로 뚫려있는 2, 3층은 여성들이 생활하며 미군과 성매매를 하던 곳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생각은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가 그때 어떤 식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졌을지를 상상했고, 마음이 아파왔다. 윤금이 님이 살았던 집도 확인할 수 있었다. 1992년 당시 참혹한 살인 사건 이후 범인인 케네스 마클에 대한 처벌을 요구하며 처음으로 미군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됐고 제도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현재는 이 집을 매입하여 ‘기억과 평화의 집’으로 만들기 위한 모금이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노상으로 창과 문이 그대로 드러난 아주 작은 공간이었는데, 그의 처연한 삶이 어땠을지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캠프 호비 인근 군사기지 도시의 상흔들
이어서 간 곳은 또 다른 동두천의 주요 미군기지인 캠프 호비(Camp Hovey) 인근 쇠목마을의 ‘미군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였다. 1996년 미군은 이 지역 개인 소유 농토에 아무런 협의도 없이 전투기 사격 목표물로 사용할 고장난 장갑차를 배치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미군기지 반경 5㎞ 안은 주한미군의 군사적 필요에 따라 토지소유자의 동의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주한미군 공여지”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지역 주민이 동두천민주시민회(현 동두천시민연대)와 힘을 합쳐 3년간 천막농성을 비롯한 투쟁을 전개하고 그 결과로 동두천의 미군 공여지 600만여 평을 반환받게 된다.
특이하게 이 기념비는 원래 양주에서 발생한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고(일명 “효순·미선 사건”) 추모를 위한 기념비로 제작된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 운동사에서 촛불집회의 시초가 된 투쟁을 형상화해 기념비가 촛불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저런 연유로 기념비가 자리를 잡지 못하다가 공여지 반환운동 기념비가 되었고, 고 신효순, 심미선의 추념비는 양주시 효순·미선평화공원에 별도로 설치되었다고 한다.
기념비 주변에서 인상적인 것은 정성들여 쌓아올린 돌탑들이었다. 그중 하나는 원뿔이 아니라 전통적인 전탑과 같은 형식으로 쌓아 올린 제법 규모 있는 돌탑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이 돌탑들은 주민들이 정부나 미군이 주민들 투쟁을 분쇄하기 위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만든 것으로, 말하자면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저지선으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엄연한 사유지 소유주들에게 어떠한 통보도 하지 않고, 실탄사격으로 폭파 훈련을 했다니, 그 황당함은 미군의 폭력과 범죄에 대한 얘기를 자주 들어 온 우리 일행에게도 참으로 섬뜩한 것이었다.
쇠목마을에서 나오며 미군기지 캠프 호비 때문에 원래 있던 길이 막혀 수십년간 거의 고립된 생활을 해야 했던 걸산마을에 대한 설명을 들었으나 마을 안까지 들어갈 시간은 없었다. 지금도 새로 생긴 길이 험해 마을 어귀에서 마을까지 차로 20분가량 걸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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