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력근로제 관련법 개정을 연내에 추진하겠다는 정치권의 계획이 노동계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며 뒤로 미뤄졌다. 정부가 급하게 법 개정을 추진하기보다, ‘사회적 대화’를 거쳐 해결하겠다는 입장을 표하면서다.
하지만 탄력근로 확대를 둘러싼 공방은 이제 시작이다. 지난 22일 출범한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이하, 경사노위)에서 경영계와 노동계는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를 두고 치열한 공방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탄력근로제는 일이 몰리는 성수기에 일을 좀 더 하고, 일이 적은 비수기엔 노동시간을 줄여서 업무시간을 조절하는 제도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며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확대·도입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그런데 왜 노동계는 총파업 주요 의제로 이를 꼽으며, 탄력근로제 확대 법 연내 추진을 막아섰던 것일까?
정치권의 '탄력근로제 기간 확대' 추진에 대해, 노동계가 지적한 문제들을 정리했다. 또한 향후 확대 시행된다고 했을 때, 확대 시행 이전에 반드시 보완해야 할 지점에 대해서도 정리해 봤다.
■ ‘탄력적 근로시간제’ 이해를 위해 알아야 할 근로기준법 제51조(탄력적 근로시간제)
① 사용자는 취업규칙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2주 이내의 일정한 단위기간을 평균하여 1주 간의 노동시간이 주40시간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에서 탄력근로를 시킬 수 있음. 다만, 많이 일하는 주의 노동시간은 48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② 사용자는 ‘노동자대표와의 서면합의’에 따라 3개월 이내의 탄력근로를 실시할 수 있음. 다만, 많이 일하는 주의 노동시간은 52시간을, 특정한 날의 노동시간은 12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
“노동자 건강 악화, 임금 삭감은 어쩌고?”
탄력근로제는 내용적 측면에서 사용자에겐 유리하지만, 노동자에겐 불리한 제도다.
탄력근로를 시행하게 되면, 사용자는 일의 양이 많고 적음에 따라 노동자의 업무시간을 조절하면 되므로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는 출퇴근 시간이 일정치 않게 되고, 성수기 기간에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게 된다.
경영계의 말대로 2주 또는 3개월 이내 단위로 허용하고 있던 탄력근로를, 6개월 또는 1년으로 늘렸을 경우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기간이 더욱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는 노동자의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또한 노동계는 밤늦게까지 일하고 받던 연장근로수당을 받을 수 없게 돼, 실질임금이 깎이는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민주노총은 경영계의 요구대로 탄력근로 기간이 확대되면,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최대 7%가량 깎일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경영계도 정치권도 이같은 노동자의 피해를 상쇄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아직 주52시간제조차 시작 안 했다”
탄력근로제 확대에 대한 논의는 사실, 올해 초 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이 진행되며 시작됐다.
올해 2월 개정된 근로기준법 부칙 3조에는 ‘고용노동부 장관은 2022년 12월31일까지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등 제도개선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노동시간 제약이 없던 특례 업종을 일부 축소하자는 노동계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경영계의 요구인 탄력근로제 확대를 부칙에 넣은 것이다.
부칙에 이같이 기한을 명시한 이유는, 주52시간 제도가 단계적으로 시행되는 상황을 지켜본 뒤 확대하는 것 등을 검토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올해 7월부터 정식 시행키로 했던 300인 이상 사업장에 대한 주52시간 상한제는, 계도 기간이 생기며 늦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또 300인 미만 50인 이상 사업장은 2020년 1월부터, 50인 미만 5인 이상 사업장은 2021년 7월부터 법을 적용키로 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법이 현장에서 완전히 시행되려면 수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경영계와 정치권이 애초 법 취지를 무시하고 탄력근로 기간 확대를 연내에 추진하겠다고 밀어붙인 것이다. 노동계는 반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요국가들 탄력근로 기간이 한국보다 길다고?”
한국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28개 회원국 중 2번째로 긴 장시간 노동을 하는 국가다. 그런데 이런 노동환경에 대한 고려 없이 “주요 선진국처럼 탄력근로 기간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그러나 경영계나 보수언론·경제매체들이 “한국의 탄력근로제 단위기간이 너무 짧다”며 비교하는 독일, 프랑스 등의 사례는 비교 전제조건조차 성립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탄력근로 기간을 비교하려면, 전제로 노동환경이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은 이 국가들과 비교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장시간 노동국가라는 지적이다.
이들 국가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OECD 국가 중 가장 짧은 1300~1400시간대다. 반면, 한국의 연간 평균 노동시간은 2100시간 가까이 된다. 전문가들은 연 평균 노동시간이 700시간 가까이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이들 국가들에 비해 탄력근로 기간이 너무 짧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한다.
더군다나, 주52시간 상한제가 아직 시행도 안 된 시점에서, 탄력근로제 기간확대 법 개정은 너무 이르다는 게 노동계의 주장이다.
“급하게 추진될 경우, 악용될 우려가 있다”
노동계는 ‘탄력근로제 기간확대’가 제대로 된 보완책을 마련하지 않고 급하게 추진될 경우, 기업들이 이를 악용해 노동자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행 근로기준법 상 3개월 이내 단위의 탄력근로제를 시행하더라도 한 주 노동시간은 52시간을 넘어선 안 되고, 하루 노동시간 또한 12시간을 초과해선 안 된다. 그런데 현행법은 탄력근로를 시행하며 동시에 ‘한 주 12시간 상한의 연장노동’을 더 시킬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사용자들에게 이같은 원칙을 어길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1일 단위 제한은 없다.
이 말인 즉은, 탄력근로제에 따라 특정일에 12시간 노동을 시킨 뒤, 12시간 연장노동을 또 시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최대 하루 24시간 노동도 가능하다. 게다가 아직 주52시간 상한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인 점을 고려하면, ‘1주 연장노동 12시간’에 ‘주말 16시간’까지 추가해 한 주 최대 80시간 노동까지 가능하게 된다. 이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 규정하는 뇌심혈관계질환 유발 기준치(발병 전 12주 동안 1주 평균 60시간)를 훨씬 웃도는 초장시간노동을 시켜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드라마·영화 제작 등 하루 20시간 노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흔하다. 사용자들이 탄력근로제를 핑계로 초장시간 노동을 강요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이에 노동계는 주요 국가들이 중요한 원칙으로 두고 있는 ‘1일 최소휴식시간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독일, 프랑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24시간당 최저 11시간의 계속된 휴식을 매일 부여해야 한다’는 규정을 두어, 사용자의 무분별한 사용을 규제하고 있다.
“이미 악용되는 사례도…”
현장에서는 이미 탄력근로제가 악용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 노동계의 주장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건설업계 쪽이다. 올해 근로기준법이 개정되자, 건설업계는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적극 도입·시행하기 시작했다.
현장노동자들은 ‘탄력근로제가 도입됐으면 효율적인 노동시간 조정으로 노동시간이 줄어야하는데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2주 단위 탄력근로제를 시행했으면, 첫째 주는 평소보다 더 오래 일하고 둘째 주는 그만큼 쉬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쉬어야 할 날에도 회사 눈치를 보며 출근해 일을 한다고 한다. 애초 취지와 다르게 탄력근로제가 악용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이런 이유로, 노동계는 탄력근로제 확대가 급하게 추진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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