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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십자가 문동환 가다

북간도의 십자가 문동환 가다

조현 2019. 03. 10
조회수 220 추천수 0
 

 

문1.jpg» 9일밤 9시께 별세한 문동환 목사

 

살아있는 근현대 박물관으로 불렸던 문동환 목사가 9일 오후 550분께 별세했다향년 98.

고인은 해사스런 귀공자형의 외모처럼 편하게 한평생을 살 수도 있었지만한맺힌 민중들을 놓을 수 없어그 자신의 표현대로 떠돌이를 자청한 삶을 살았다또한 그는 일제시대 북간도 한인사와 독립운동사교육사민중사민주화운동사기독교사를 온몸으로 겪은 인물이었다그러면서도 그는 100살이 다 되도록 과거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혁명하면서 거짓들과 싸운 종교개혁가이자 공동체적 삶을 실천하려는 공동체운동가였다.

 

고인은 1921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독립신문기자이자 목사였던 부친 문재린과 여성운동가였던 모친 김신묵의 3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고인은 그곳에서 형 문익환윤동주 시인 등과 어린시절을 보냈다명동촌은 한국적 개신교의 맹아였을 뿐 아니라 민족교육의 산실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곳이다명동촌은 문동환의 고조부인 문병규와 김약연 등 네가족 142명이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넘어 옛 고구려땅에 정착해 개간했던 한인집단공동체였다그곳에 세운 명동학교에서 문익환윤동주나운규 등이 공부했고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된 뒤 용정에 연 은진중학교에서 문동환과 안병무강원용 등이 수학했다은진중 교목이 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 설립자인 김재준이었다.

 

고인은 어린시절 나라와 민족을 위해 헌신한 김약연 같은 이가 되고싶어 목사가 될 꿈을 꿨다고 한다평생의 사표였던 김약연은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린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자 목사였고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하기 전에 명동촌 뒷산에 권총 연습을 할 은거지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인은 1938년 은진중학교를 마치고 은사인 김재준의 안내로 일본에 유학해 도쿄신학교와 일본신학교에서 공부한 뒤 고향 용정 만보산초등학교와 명신여중고에서 3년간 교사로 재직했다해방 후 1946년엔 김재준이 설립한 조선신학교를 1년간 다닌뒤 경기도 장단중학교와 서울 대광중고에서 교편을 잡았다그는 신학교를 다니면서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에 회의가 생겨 7년간 씨름했다고 한다그러다 형 문익환과 여행 중 경상도 금오산을 지나면서 너무도 함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을 보고서 고난받은 민초들의 삶의 현장으로 내려가는 게 구원이라는 확신을 얻었다고 훗날 회고한바 있다그는 그 이후 거제도 아양리라는 농촌으로 내려가 1년간 목회했다이어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1951년 미국 유학을 떠나 박사학위를 받고 1961년 모교인 한신대 교수로 초빙받아 귀국길에 올랐다유학중 만난 평생의 반려자인 미국인 부인 페이문(문혜림)과 함께였다.

 

부패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독재가 시작된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고인은 남다른 교육관으로 학교 현장과 학생들의 삶을 변화시켰다특히 번지르르한 말만을 배우지않고제대로된 가치관을 심어서 신앙인이기에 앞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이끌었다.
아무리 교실에서 그럴 듯한 소리를 하고강단에서 감명 깊은 설교를 한다 해도 그의 생이 사람답지 못하면 자신과 남을 위해서 비참한 일이다한국에 있어서 비극 중의 비극이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큰소리를 하는 사람일수록 흔히 그 생이 더 냄새가 난다는 것대중 앞에 나설 때앞에 마이크가 많은 사람일수록 뒤에서는 연막을 더 쳐야 하다는 사실이다.’

 

문2.jpg» 문동환(뒷줄 왼쪽 넷째)·문혜림(왼쪽 다섯째)씨 부부가 형수 박용길(왼쪽 여섯째)씨 등 가족들과 2002년 2월 중국 룡정시 동커우의 생가터를 둘러보고 있다.

 

그가 1972년 낸 <자아확립>이란 책의 서문에 쓴 글이다그는 토론하고 발표해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하는 새로운 수업방식을 도입했다그의 제자였던 정호진 목사는 고인의 <세계와 나>라는 수업은 일방적인 강의가 아니라 철저하게 학습자가 중심이 되는 혁명적 전환으로 스스로 세계와 역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이를 실천케 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게 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의 특별한 점은 관념에 머무르지않고 늘 실천이 뒤따랐다는 것이다그는 학생들이 삶을 배우기 원했고캠퍼스 자체가 민주적 삶의 체현장이 되도록 했다이를 위해 그가 학생과장으로 재직 때 학생교수직원교수부인들까지 동원해 만든게 캠퍼스생활위원회였다이 생활공동체를 통해 학생들과 교직원들이 평등의식과 참여의식을 배우고 실천케 한 것이다.

 

그가 주도적으로 만든게 선교신학학대학원이었다이곳에서 그는 세가지를 통해 배우도록 했다첫째 선각자의 글과 이야기를 듣고 배우고둘째 그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배우고세째 현장에서 일하면서 사회현실과 부딪친 것을 다시 대화하면서 배우라는 것이었다그가 교수로 있으면서 1972년 만든 새벽의집’ 공동체도 실천의 장이었다새벽의집에서는 6가정 50여명이 개인 집들을 처분하고 가족연합체를 만들어 살았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과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파동유신헌법 공포는 그를 더욱 세상으로 이끌어냈다삭발을 하며 투쟁을 하다 1975년 해직됐던 그는 동료 해직교수인 서남동안병무이문영 등과 갈릴리교회를 설립해 민중교회의 모태가 되게 했다. 1976년 31일엔 함석헌윤보선김대중이문영서남동문익환이우정 등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해 긴급조치 9호 위반혐의로 22개월간 옥고를 치뤘다와이에이치(YH)사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가 유신정권의 몰락 시점에 출옥해 복직했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폭압이 시작되자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그는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풀려나 미국에 온 김대중을 만나 도움을 준 인연으로, 1988년 평화민주당에 수석부총재로 참여하고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3당합당에 반대해 정계에 은퇴한 뒤 19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살다가 2013년 귀국했다.

 

그는 90대 중반까지도 집필 작업을 하면서 끊임없이 예수정신을 드러내려 애썼다그 대표적인 것이 4년전 출간한 <예수냐 바울이냐>그는 책에서 바울이 예수의 본정신을 망친 인물로 질타했다예수를 메시아로 만든 바울의 영향을 받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신학에 의해 기독교인들이 권력과 야해 식민지 쟁탈과 이방인 살육에 앞장서면서 메시아와 왕조절대권력권위주의선민의식을 거부한 예수의 정신과는 다른 종교제국주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는 진보 개신교계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그는 “80살이 지나면서 민중신학에도 회의가 생겼다면서 한 자리 차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민중을 민중이라고 말하기 어렵다고 비판하기도 했다그러면서도 그는 영화 <변호인>을 본 뒤 우리가 있는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우리 주변에서 아우성치는 사람들의 음성을 듣고 노무현이 거기에 응한 것처럼 우리도 응해야 이 험악한 세상에 변화가 올 것이라고 했다.

 

고인은 마지막까지 공동체적 삶에 대한 열정을 잊지 않았다그는 공동체를 이루려 했던 자신의 꿈을 실현해 가는 서울 수유동 밝은누리를 방문해 최철호 목사 등을 만난 자리에서 자기들끼리만 멋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깨닫고기존의 잘못된 삶을 단호히 끊은 젊은이들이 집단적 예수집단적 모세가 되어 새로운 문화권을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고 말했다.

 

그의 한신대 제자였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으로는 동병상련의 따뜻한 심성을 지닌 분이었다며 밖으로는 대형교회의 성장 축복 신앙을 맘몬 숭배로 규정하고 현대사회 악의 본질을 분명히 깨닫고 이를 끊어내기 위해 개인과 집단의 단호한 회개를 주창하며 새벽을 열었던 분이라고 추모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문혜림씨와 아들 창근·태근딸 영혜·영미(이한열기념관 학예실장)사위 정의길(<한겨레선임기자)씨 등이 있다문성근(영화배우)씨가 조카이다.

빈소는 연세대세브란스병원발인은 12일 오전 8장례예배 오전 9시 서울 수유동 한신대학원 채플실장지는 마석 모란공원이다. (02)2227-7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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