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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 약사계곡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지신 곳’을 다녀와서

 

벼랑 아래 서 보면 ‘실족사’ 얘기 못한다
 
[답사기] 포천 약사계곡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지신 곳’을 다녀와서
 
정운현 기자 | 등록:2012-10-08 09:30:43 | 최종:2012-10-08 09:38:3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보내기
 
 



 

10월 6일 토요일, 조금은 더운 듯 하면서도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은, 참 좋은 가을 날씨였다. 하늘은 높고 푸르고 청명했다. 포천 흥룡사 경내 마당에서부터 대웅전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가을 국화가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약사계곡 일대에 간간이 보이는 논엔 벼가 누렇게 익었고, 산밤은 이미 다 털렸으나 단풍은 아직은 철이 일렀다. 계곡물은 속을 훤히 드러내보였고, 가을 들꽃도 향내를 뿜었다. 마치 가을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오전에 흥룡사에서 장준하 선생 천도재에 참가한 일행은 행사를 마친 후 절에서 점심공양으로 제공한 국수를 먹었다. 그리고는 서울서 타고 온 버스 두 대에 나눠 타고서 절에서 3km정도 떨어진, 장 선생이 사고를 당한 백운산 약사봉 계곡으로 향했다. 여름철 행락시설이 즐비한 계곡을 벗하며 버스로 대략 10분 정도 걸려 문제의 약사계곡 입구 마을에 도착했다. 여느 산골마을처럼 마을 뒤로 산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군데군데 논배미가 몇 보였다.
 

6일 오전 경기도 포천 흥룡사에서 장준하 선생 천도재가 열리고 있다

천도재를 마치고 약사계곡을 찾는 길은 마치 가을소풍 같았다

 

 

약사계곡 가는 길은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더러 밧줄 신세를 져야 했다

일행은 마을 뒤로 난 논두렁길을 따라 한 줄로 길게 늘어서서 약사계곡으로 향했다. 논길이 끝나고 산길이 시작되었는데 군데군데는 두 사람이 비키기도 어려울 만큼 좁았다. 또 곳곳에 낭떠러지도 있었고, 튀어나온 바위 때문에 안전이 우려되었다. 그런 곳에는 흰색 밧줄이 쳐져 있어 그걸 잡고서 겨우 지날 수 있었는데, 혜문스님 말로는 얼마 전에 인근 파출소에서 설치한 것이라고 했다. 고상만 전 조사관은 “과거엔 이 길이 윗마을 아이들의 통학길이었다”고 전해주었다.

 

20여분을 걸어 작은 개울을 건넌 후 제법 울창한 숲이 나타났고 이윽고 장준하 선생이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된 장소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제법 큰 바위들이 모여 있었고, 오른쪽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기슭 아래 작은 언덕에 ‘장준하 선생님 원통히 숨지신 곳’이라고 쓴 흰색의 추모 말뚝이 꽂혀 있었다. 그 말뚝을 보자 비로소 장 선생이 돌아가신 장소에 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최측은 그 말뚝 앞에 조촐한 젯상을 차리고 진혼제를 시작했다.

먼저, 임수경 의원이 참가자를 대표해 막걸리 세 통을 부은 대형 사발을 선생 영전에 바치고는 절을 올렸다. 이어 혜문스님이 선생의 고혼을 달래는 불경을 낭독이 끝나자 유가족들이 잔을 올렸다. 국회 행안위 소속인 임 의원은 진혼제 인사말을 통해 “장 선생 의문사 국정조사의 현장조사를 온 심경으로 왔다”며 “남은 자들이 선생의 억울함을 밝혀내야할 책무를 지고 있는 만큼 국회에서 특별기구 설치와 특별법을 만들어 반드시 진상을 밝혀내겠다.”고 말했다.
 

37년만에 처음 열린 장 선생 진혼제에서 참가자들이 절을 올리고 있다

선생의 시신이 임시로 뉘었던 바위에서 참석자들이 진혼제를 구경하고 있다

 

 

소리꾼 임진택 씨가 '유신의 추억' 판소리를 하고 있다

진혼제 의식이 끝나자 대금 연주가의 진혼곡 연주가 계곡을 어루만졌다. 이어 소리꾼 임진택 씨가 즉석에서 영화 ‘유신의 추억’에 삽입될 판소리 ‘장준하와 박정희’한 자락을 선생의 영전에 바쳤다. 임 씨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장 선생의 삶을 대비시켜가며 박정희 시대의 긴급조치, 유신 등 인권탄압 사례 등을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냈다. 임 씨는 “옛 명창들이 깊은 산속이나 냇가에서 물소리를 벗해 소리를 했다”며 맞은편 냇물 소리를 배경삼아 목소리를 돋워 참가자들의 박수를 받았다.

 

뒤이어 고상만 전 조사관이 천도재에 이어 다시 마이크를 들고 현장소개를 했다. 고 전 조사관은 의문사 진상규명위와 과거사위원회에서 장준하 선생 의문사 사건을 맡아 조사하면서 이곳을 수 십 차례 현장조사 한 바 있다. 그는 “추모 말뚝이 서 있는 이곳은 장 선생이 돌아가신 곳이 아니라 선생의 시신을 발견한 후 이곳으로 옮겨와 수습을 한 곳”이라고 소개하고는 사고 당시 선생의 시신을 뉘였던 냇가 쪽에 있는 너른 바위를 하나 가리켰다.

진혼제가 끝날 무렵 일행 중 몇 사람은 고 전 조사관의 안내로 장 선생의 시신이 처음 발견된 ‘벼랑’으로 향했다. 진혼제를 지낸 장소에서 서쪽으로 길도 없는 가파른 산을 100미터 가량 오르자 밑에서는 숲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암벽으로 된 벼랑이 하나 나타났다. (암벽 길이는 14미터 정도라고 했다.) 암벽이 끝나는 지점에는 쬐끄만 구덩이가 하나 있었고, 주변에는 돌부리들이 흩어져 있었다. 고 전 조사관은 “지난번 조사 때 들렀을 때만 해도 이곳엔 모래가 쌓여 있었다.”며 돌부리들은 암벽 위에서 굴러내려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장 선생이 실족한 곳으로 알려진 벼랑은 경사 70도의 깎아지른 절벽이었다.

고상만 전 조사관이 절벽 아래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벼랑 아래에 후배들이 세운 추모 표지판

일행들은 장 선생이 백운산 정상에서 이 암벽으로 타고 내려오다 실족사를 당했다는 ‘목격자’ 김용환 씨의 증언을 전해 듣고서 다를 혀를 내둘렀다. 무엇보다도 암벽의 경사가 70도 정도로 가파른 곳이어서 전문 산악인도 등산장비 없이는 내려오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이건 현장에 서 본 사람이면 누구나 직감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런 곳을 장 선생이 굳이 맨몸으로 내려오려 했다는 건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날 보니 암벽으로 물이 흘러 내렸고, 일부 이끼도 끼어 있었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이리로 내려오는 것은 더욱더 불가능해 보였다.

 

고 전 조사관의 거침없는 말은 이곳에서도 이어졌다. 고 전 조사관은 “장 선생이 일행들과 헤어진 시간이 낮 12시였고, 벼랑 아래서 시신으로 발견된 시간이 오후 1시였다”며 “당시 몸이 좋지 않았던 장 선생이 1시간 만에 백운산 정상에 도착했다가 등산로도 아닌 벼랑으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고는 사견을 전제로 “장 선생의 시신을 최초로 목격했다는 김용환 씨의 주장과는 달리 저는 장 선생이 산행 자체를 하지 않았다고 본다”며 ‘목격자’ 김 씨의 증언에 강한 의문을 제기했다.

고 조사관에 따르면, 목격자 김 씨는 그간 수차례 조사에서 자신의 발언을 번복했으며, 사건 후 행적도 의심스러운 대목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대표적으로 장 선생이 잡고 내려오다 미끄러졌다는 ‘소나무’ 얘기가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김 씨는 늘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다고 했다. 고 전 조사관은 “장 선생 의문사 건은 돌아가신 분이나 유가족들을 위해서도 죽음의 비밀을 밝혀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은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김 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가 차원에서 재조사를 실시해야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귀로에 오른 일행들이 무거운 발걸음으로 냇가를 건너고 있다

 

 

아직 단풍은 이른 약사계곡에 맑은 물이 흘러 내리고 있다.

의문사위원회와 과거사위원회에서 장 선생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이라고 결정한 것에 대해 고 전 조사관은 “차후 조사를 위해 불가피하게 그런 결정을 내렸다”며 아쉬워했다. 말끝에 그는 최근에 자신이 겪은 ‘어이없는 사건’ 하나를 소개했다. 그는 장 선생 사건 조사를 마치고 관련서류 일체를 국가기록원으로 전부 이관했는데, 최근 국가기록원 쪽에 알아보니 이 자료들이 70년간 ‘해제금지’로 묶여 있더라는 것. 이를 두고 그는 “국가가 장 선생 의문사 규명을 가로막고 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오후 5시경, 일행은 답답함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벼랑에서 내려와 귀로에 올랐다. 혜문스님 말에 따르면, 백운산 정상에 오르는 ‘뒷길’이 있다는 데 그곳까진 가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쉬웠다. 삼삼오오로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오는 내내 약사계곡 냇물은 우리 일행을 졸졸 따라다녔다. 올라갈 땐 미처 보지 못했는데 오다 보니 산밤은 이미 타 털렸고, 밤나무 아래엔 침이 삐쭉삐쭉한 쭉정이만 뒹굴고 있었다. 왠지 이 계곡엘 한 두 차례는 더 찾아와야 될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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