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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을 아직 ‘혁명’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

 

6월항쟁을 아직 ‘혁명’으로 부를 수 없는 이유
 
耽讀 | 등록:2013-06-10 09:27:20 | 최종:2013-06-10 09:30:13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인쇄하기메일보내기
 
 


 

 

오늘은 6월항쟁이 일어난지 26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1987년 6월 10일 대한민국 민주헌정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항쟁입니다. 1987년 1월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간 박종철씨(서울대)가 고문으로 죽습니다. 당시 치안본부장은 박종철이 죽은 까닭을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심문을 시작, 박종철 군의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다"는 어처구니 없는 발표를 합니다. 시민들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4월 13일 독재자 전두환은 호헌조치를 내립니다.


박종철 죽인, 전두환 '호헌'주장으로 6월 항쟁 타올라

독재자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씨를 고문해 죽였다.

시민들을 불길처럼 일어났습니다. 각계와 각 지역을 대표한 2200여 명의 발기인이 참가하여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를 결성했습니다. 이들은 '박종철살인고문'을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는 국민대회를 6월 10일 대규모로 벌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날로 잡은 이유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제시한 행동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후 6시 국기 하강식을 기하여 전 국민은 있는 자리에서 애국가를 제창한다. 애국가가 끝난 후 자동차는 경적을 울린다. 전국 사찰, 성당, 교회는 타종을 한다. 국민들은 형편에 따라 만세 삼창(민주헌법 쟁취 만세, 민주주의 만세, 대한민국 만세)을 하거나 제자리에서 1분간 묵념을 하며 민주주의 쟁취의 결의를 다진다▲경찰이 폭력으로 대회 진행을 막는 경우 전국민은 비폭력으로 이에 저항한다. 연행을 거부한다. 연행되면 일체의 묵비권을 행사한다.▲전국민은 오후 9시부터 10분간 소등을 하고 KBS, MBC 뉴스 시청을 거부함으로써 국민적 합의를 깬 민정당의 6.10대통령 후보 지명대회에 항의한다.▲6.10 국민대회는 철저하게 평화적으로 참여해 주시기를 바라며 폭력을 사용하거나 기물 파손 등을 자행하는 사람은 국민대회를 오도하려는 외부세력으로 규정한다 따위였습니다.

6.10국민대회는 서울 부산 대구 공주 인천 대전 등 대도시를 비롯하여 전국 22개 지역에서 24만 여명이 참여했습니다. 경찰은 강경진압했고, 시위는 격화되었습니다. 시청 한 곳, 파출소 열 다섯 곳, 민정당 지구당사 두 곳 등이 파손되었습니다. 전국에서 3831명을 연행됐습니다. 저녁 명동성당에서는 8백여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농성 투쟁을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격려 편지가 이어졌습니다.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6월 10일 학생과 시민 800여명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습니다.

● 민주발전을 위해 써 주십시오. 고등학생이라 아무 것도 드릴게 없어요. 지갑을 털어 작은 정성을 보냅니다.
●시대의 아픔과 고뇌를 함께 하는 데서 항상 여러분에게 못 미쳤던 평범한 샐러리맨 69명과 식당 주인 아저씨로부터
●나의 형제 자매들에게. 몸은 함께 하지 못하나 마음만은 당신들과 함께 합니다. 당신과 같이 피를 흘리지 못하나 눈물만은 함께 흘립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장한 일 하십니다. 힘과 용기를 가지십시오. 시민 일동
●사랑하는 학생들에게 학생들의 애국적인 투쟁에 따른 희생을 모르는 척 하고 눈을 돌리고 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럽고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은 괴로움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어느 모퉁이에서 간절히 동참하고 있는 마음 약한 40대 중반의 못난 선배를 용서하십시오. 그러나 부탁이 있소. 폭력은 금물이오. 국민들이 원하지 않기 때문이오. 또 법의 가면을 쓴 폭력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오. 정부당국의 발표를 보면 80년 5.17때의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하오. 이번만은 절대로 그러한 우를 범해서 반역자들에게 빌미를 주지 맙시다. 말없이 지켜보는 많은 국민은 애국적인 학생들을 지지하고 있음을 확신합니다. 부디 건강을 비오.

6월 항쟁에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이한열 열사 죽음입니다. 이한열 열사는 9일 다음날 열릴 예정인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를 앞두고 연세대에서 열린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후의 시위 도중 전투경찰이 쏜 최루탄에 뒷머리를 맞아 한 달 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7월 5일 숨졌습니다. 22살때입니다. 전경이 시위진압 도중 시위대를 겨냥해서 최루탄 SY44를 총처럼 수평으로 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머리에 맞은 사건입니다.

이한열 열사가 87년 6월 시위도중 최루탄을 맞아 쓰러지던 모습

그리고 또 다른 사진 한 장입니다.

부산 87.6.26평화대행진에 참가하기 위해 부산 문현로타리에 집결한 시민, 학생들로 이루어진 시위대에게 경찰이 다탄두 최루탄을 발사하며 대회 참가를 저지하자 한 시민이 웃통을 벗어 젖힌채 “최루탄을 쏘지마라”며 경찰쪽으로 달려가고 있다. 1987.6.26

이들 때문 오늘 우리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6·10 민주항쟁을 '혁명'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구세력이 5.18민중항쟁을 '폭동', '북한군개입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한열 열사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6·10 항쟁 26주년을 맞아 7일 평화방송 라디오 < 열린세상 오늘 서종빈입니다 > 에 출연해 5·18 왜곡 문제에 대해 "저는 그 문제를 보면서 이것은 인간들이 하는 짓이 아니고, 매국적인 행동이 아닌가 이런 걸 느꼈다"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노했습니다. 그는 또 6·10 항쟁의 의의 뿐 아니라 기억조차 희미해져가는 데 대해 "아쉽기도 하고, 26년쯤 되니까 옛날로 돌아간 것 같다"며 "살다보면 남의 일 다 잊어버린다고 하는데 그렇게 보면 참 옛날인 것 같지만 전 엊그제 같다"며 6월항쟁이 잊혀져 가는 것을 아쉬워했습니다.


노무현 "수구세력, 개혁 끊임없이 반대"…민주시민 6월항쟁 되새겨야

갑자기 노무현 대통령이 6월항쟁 기념식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6월 10일 '6·10 민주항쟁' 20주년 기념사에서 "지난날의 기득권 세력들은 수구언론과 결탁하여 끊임없이 개혁을 반대하고,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면서 "심지어는 국민으로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은 민주정부를 친북 좌파정권으로 매도하고, 무능보다는 부패가 낫다는 망언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난날의 안보독재와 부패세력의 본색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며 수구세력을 비판했습니다. 6년전 그 예언이 정확했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습니다.

2007년 6월항쟁 20주년 기념사하는 노무현 대통령

87년의 패배, 90년 3당 합당은 우리 민주세력에게 참으로 뼈아픈 상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역주의와 기회주의 때문에 우리는 정권교체의 기회를 놓쳐버렸고, 수구세력이 다시 일어날 기회를 준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뼈아픈 상실은 군사독재와 결탁했던 수구언론이 오늘 그들 세력을 대변하는 막강한 권력으로 다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한 것입니다. 분열과 기회주의가 6월항쟁의 승리를 절반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민주시민들은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더 멈출 없습니다. 저항해야 합니다. 6월항쟁을 기억하고, 되살려내야 합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다시 싸워야 합니다. 6월항쟁이 아직 '혁명'이 아닌 이유는 민주주의가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종결이 없습니다. 우리가 끝없이 싸우고 투쟁해야 할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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