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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갑질에 목숨 끊은 경비원 추모 물결 “감사하고 미안합니다”

김민주 기자 kmj@vop.co.kr
발행 2020-05-11 23:37:16
수정 2020-05-12 08: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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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 씨가 한 주민의 갑질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 씨가 한 주민의 갑질에 못 이겨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 전날 새벽 한 주민의 폭언·폭행을 당한 뒤 극단적 선택을 한 경비원을 추모하기 위해 ‘추모와 반성의 촛불’ 시간을 마련했다.

11일 저녁 7시, 어스름이 깔릴 무렵 주민들이 경비실 앞으로 속속 도착했다. 퇴근하고 바로 참석한 사람들, 아기띠로 아이를 안고 온 사람들, 양초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들과 그들을 챙기는 할머니들까지. 주민 100여 명은 촛불을 들고 두 손을 모았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한 주민이 고인이 겪은 ‘갑질’ 사건을 정리해 발표했다. “얼굴을 수십 차례 때리고 머리를 수차례 폭행해 뇌진탕 증상을 얻으셨고...”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뛰어다니던 아이들도 이내 차분해졌다.

주민 황선 씨는 직접 추모시를 준비했다.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추모시 ‘선물’에 주민들은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다음은 추모시 ‘선물’ 전문.

<선물>

우리는 당신이
이상한 나라에서 왔는 줄 알았잖아요

의전이 형식이 되고
인사라는 것도 짐이 되기 쉬운 세태에
당신은 가장 멀리까지 배웅을 하고
가장 빨리 인사를 하셨습니다.

밤 새 깨어 쓰레기 분리수거를 돕던 당신,
봄처녀 꽃을 따듯 화사한 얼굴로 꽁초를 줍던 당신,
보이는 모든 아이에게서 홀로 업어 키운 딸아이를 떠올리던 당신.

이 모든
당신의 예사롭지 않은 선함이
사실은, 쓸쓸하고 아팠던 당신의 역사가 빚어낸
진주같은 거라는 것을,
입술을 깨물며 삼킨 눈물방울이 빚은 진주라는 것을,
우리는 왜 몰랐을까요.

당신이 온 풍요로운 웃음의 나라로 가고 계신가요?
이제야 당신의 인생에 눈길을 주고
이제야 당신의 사연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우리가 드릴 선물은
이것 밖에 없습니다.

기억할게요.
그리고 당신을 닮아가겠습니다.
당신을 꼭 닮은 세상을
당신의 손주들에게 선물할 수 있도록

고마웠습니다. 미안합니다.

주민들은 고인을 기리며 ‘우리의 맹세’를 발표했다. 한 주민이 대표로 마이크를 잡고 “선생님을 기억하며 이후 선생님의 억울함을 해소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우리의 사회가 이웃 사랑의 기품이 넘쳐나고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늘 주의하고 애쓰겠다”며 “그리하여 우리는 갑질 없는 세상, 착한 사람이 절망에서 쓰러지지 않는 세상을 바로 이 아파트로부터 구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
서울 강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경비원 최모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자 주민들이 경비실 앞에 추모공간을 마련했다.ⓒ민중의소리

주민들은 고인에 대한 추억을 나눴다. 한 입주민은 “엊그제까지만 하더라도 저희들 곁에서 정말 물심양면으로 우리의 손발이 돼줬던 아저씨”였다며 “너무나 비통하다”고 말했다.

추모식을 진행한 송인찬(38) 씨는 “비가 오는 날이면 ‘아침부터 출근하는 데 옷 젖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항상 차 운전석으로 저를 밀어 넣고 차를 밀어줬다”고 기억했다.

이어 “제가 흡연자인데 가끔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곤 했는데 아저씨께서 아파트 온 주변을 다 돌아다니시면서 쓰레기 줍는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반성했다”며 “그래서 꼭 통을 만들어서 버리곤 했다”고 말했다.

송씨는 추모식이 끝나고 기자와 만나 “아파트 입주민들을 위해 하시는 하나하나가 삶의 귀감이 될 정도로 항상 솔선수범하시고 친절하게 해주셨다”며 “개인적으로 요즘 같은 세상에 이런 분은 다신 못 뵐 것 같다고 생각한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제가 훨씬 나이가 어린데도 불구하고 모자를 벗고 허리를 숙여 인사해주셨다. 그렇게 해주시니까 저도 인사를 더 하게 됐다”며 “그리고 그냥 인사를 하는 게 아니라 웃으시면서 ‘오늘도 고생하셔유’ 하시고 저녁에 돌아오면 ‘오늘도 고생많았어유’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들은 ‘석별의 정’을 부르며 추모식을 마쳤다. “잘 가시오 잘 있으오/축배를 든 손에/석별의 정 잊지 못해/눈물만 흘리네”라는 가사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추모식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이들은 자리를 바로 뜨지 못하고 촛불을 든 채 경비실 앞에 서서 이웃 주민들과 고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씨가 일하던 경비초소 책상에 놓여있는 경비일지에 고인 최씨가 작성한 기록은 3일까지였다. 격일로 근무하던 고인은 지난 5일 새벽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주민들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었다.
최씨가 일하던 경비초소 책상에 놓여있는 경비일지에 고인 최씨가 작성한 기록은 3일까지였다. 격일로 근무하던 고인은 지난 5일 새벽에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다 주민들이 발견하고 병원에 입원했었다.ⓒ민중의소리

앞서 고인은 10일 새벽 생전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인은 지난달 21일부터 자신이 일하던 아파트 주민 심모 씨로부터 지속적인 폭언·폭행을 당했다. 주민들을 위해 주차 공간을 확보해 놓고자 이중 주차돼 있던 심씨의 차량을 옮기려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편, 이날 오후 서울강북경찰서는 아파트 주민들을 만나 폭행 사건과 관련한 진술을 들었다.

김민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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