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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
ⓒ 민족문제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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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1월 5일, 24세의 젊은 시인 윤동주는 '별 헤는 밤'이란 시를 썼다. 시에서 그는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읊은 뒤 이렇게 노래했다.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짬',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는 1941년 늦가을의 밤하늘 별들을 올려다보면서 서정적인 이름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밤하늘 별들을 보면서 늦가을뿐 아니라 1년 내내 추악한 이름들을 떠올려야 할 때가 있다. 그곳에만 가면 그렇게 될 수도 있다. 국립현충원의 장군 묘역들이 바로 그곳이다.
지난 4일 군인권센터가 <친일인명사전>을 토대로 친일파 군인들의 군 경력과 현충원 안장 실태를 정리해 발표한 "국립묘지에 묻힌 '조선인 일본군'의 묘를 파묘하라"는 성명에 따르면, 국립서울현충원과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친일파 군인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해 56명이다.
그 가운데 20명은 일본제국 군인이고 36명은 만주국 군인이다. 이들은 모두 8·15 광복 뒤 대한민국 국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현충원에서 최고의 존경을 받고 있다. 56명 중 46명은 광복 뒤 장군이 돼서 별을 달았다. 일본제국과 만주국의 군인이 국군 장군으로 승진한 뒤 대한민국 현충원 장군묘역을 점거하고 있다.
깨우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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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창룡 특무대장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고 있다. |
ⓒ 전쟁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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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군인 56명 중에는 박정희 못지않게, 어쩌면 훨씬 더 극적으로 국군에 안착한 이들도 있다. 일본 관동군 헌병 이등병으로 출발해 항일세력에 대한 첩보 활동으로 성가를 날리고 헌병 오장(하사)까지 올라간 김창룡(1916~1956)도 그중 하나다. 해방 뒤 그는 사관학교 생도를 거쳐 초대 특무부대장(군사안보지원사령관)에 올랐다. 최종 계급은 중장이다.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김창룡은 해방 뒤에 국군이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남한 땅에 들어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해방 직후 고향 함경남도로 귀환했다가 소련군에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창룡은 탈옥에 성공했다. 그 뒤 38선을 넘어 국방경비대 제5연대 사병으로 입대했다. 만주군 출신인 박기병 소위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는 국군에 들어온 뒤에도 또 한 번 '도망'을 감행했다. 이번에는 탈옥이 아니라 탈영이었다. 그 이유를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이렇게 설명한다.
"가혹한 훈련에다 관동군 헌병 출신이라는 이유로 연대의 경비사관학교 지원 추천을 받지 못한 불만이 겹쳐 근무지를 이탈했다."
사관학교 입학 추천을 해주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탈영했지만, 더 이상 남하할 곳은 없었다. 그냥 남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정보 전산화가 이뤄지지 않은 당시의 기술 수준이 그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다.
그는 몰래 국군에 재입대하는 데 성공했다. <친일인명사전>은 그가 "다시 박기병이 근무하던 국방경비대 제3연대의 사병으로 재입대"했다고 말한다. 그런 뒤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정보 장교로 명성을 날리며 별 셋을 달게 됐다.
김창룡을 포함한 친일파 군인 56명 대다수는 국군 장군이 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육군·공군·해병대의 지휘부까지 점거했다. 군인권센터 보도자료에 이런 대목이 있다.
"실제로 그 56명 중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자가 6명,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자가 2명, 해병대사령관을 지낸 자가 3명이고, 초대 육군참모총장(이응준), 공군참모총장(김정렬), 해병대사령관(신현준)은 모두 친일 군인이다.
심지어 육군참모총장은 생존 중인 백선엽(7·10대 총장)을 제외하고는 1대부터 9대(이응준, 채병덕 중임, 신태영, 정일권 중임, 이종찬, 이형근)까지 모두 친일파로 현충원에 묻혀 있고, 해병대 사령관은 1·2·3대(신현준·김석범·김대식)가 모두 친일파로 현충원에 묻혀 있다. 육군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초대 교장도 친일 군인이며, 56명 중에는 국방부 장관을 지낸 자 4명(신태영·이종찬·임충식·유재흥)이고, 대통령도 1명(박정희) 있다."
이렇게 일본제국과 만주국 군인들이 별을 달고 초기 국군의 수뇌부를 점거했다. 또 그들이 현충원 장군묘역까지 차지했다. 서울현충원과 대전현충원은 국립 시설이다. 국립현충원에서 일본제국과 만주국 군인들이 추앙받고 있으니, '국립'의 국(國)이 어느 나라인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만약 친일파 군인들이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고 사죄한 상태에서 국군에 들어왔다면, 그들의 과거를 굳이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 반성하고 사죄한 상태에서 대한민국을 위해 새로운 전공을 세우고 현충원에 안장됐다면,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의 현충원 파묘를 생각할 이유도 없다. 그런 절차도 없이 현충원에 누워 있으니 일어나라고 깨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근원적 부조리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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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3월 1일 대전국립묘지 장군 제1묘역 김창룡 장군 묘 앞에서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반민족행위자 및 반국가사범의 국립묘지 퇴출"을 주장하며 묘비에 끈을 묶어 쓰러트리는 파묘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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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전향 절차도 없이 국군 수뇌부를 장악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있다. 바로, 미국의 남한 정책이다. 미국은 해방 직후 전국 곳곳에서 분출된 한국인들의 자치 역량을 억압하고 남한 땅을 자국의 전략에 맞추고자 했다. 그래서 한국 내 친일 세력 및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한국인들의 원성을 샀던 친일 경찰과 기업인들이 해방 뒤에도 별 탈 없이 살 수 있었던 것은, 그들과 제휴해 한국 민중을 억압하고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던 미국의 전략적 필요성과 무관치 않다. 친일파 군인들이 전향 절차도 없이 국군으로 옮길 수 있었던 것 역시 마찬가지다.
미군의 주도로 조직되기는 했지만, 해방 직후 국군 내에는 친일파뿐 아니라 민족주의 세력도 만만치 않았다.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지지하는 세력도 국군 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을 좌파 빨갱이로 매도하고 이들의 국군 입대를 막기 위한 노력도 있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2009년에 <사림> 제33호에 실린 노영기 조선대 교수의 논문 '국방경비대·육군의 세력분포와 숙군'은 해방 직후의 국군과 관련해 "다양한 세력들이 국방경비대에 참여했다"며 "그러나 아직 어느 한 세력이 압도하지 못한 채 좌우 세력의 공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어느 한쪽도 압도하지 못하던 국군 내에서 보수세력과 친일파가 독점적 지위를 갖게 된 것은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무관치 않다. 미국의 입장이 남한 단독선거 쪽으로 굳어지는 과정에서 군부 내 역학관계가 크게 바뀌는 일이 벌어졌다.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세력을 국군 내에서 숙청할 필요성이 제기됐고, 이에 따라 단행된 숙군 작업이 국군 내 민족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보수파·친일파를 강화시켰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1947년 하반기 정세의 변화에 따라 국방경비대의 위상이 변화하자, 미 군정은 단독선거에 반대할 수 있는 좌익세력의 추방을 묵인했다. 좌익세력 추방은 정부 수립 후에도 지속됐다. 오히려 정부 수립 후 반체제 세력들의 육군 입대를 봉쇄하거나 그들을 육군에서 추방할 수 있는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육군은 인적 보충과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고, 정부 수립 후에도 지속적인 숙군을 전개했다."
친일 청산과 분단 반대를 지지하는 세력이 미국과 이승만에 의해 쫓겨남에 따라 보수파와 친일파의 국군 장악력이 현저히 높아졌고, 이런 가운데 친일파 군인들이 별을 달고 수뇌부를 구성했다. 그래서 그들의 눈부신 성공은 그들의 개인적 성공뿐 아니라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성공도 동시에 반영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그들이 현충원에 누워 있는 것은 그들 개인의 파렴치를 떠나 훨씬 더한 구조적 부조리를 반영한다.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국민의 뜻대로 흘러가지 못하도록 하는 동시에 대한민국이 미국과 친일·보수파의 뜻대로 흘러가도록 만드는 구조적 부조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법적 재평가와 현충원 파묘가 절실한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의 근원적 부조리를 제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현충원의 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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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대전현충원 상징인 현충탑을 끼고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들어가면 역삼각 형태로 배치된 장군1묘역이 나온다. 여기에 김창룡의 묘가 있다. |
ⓒ 김종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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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헤는 밤'을 쓸 당시의 윤동주는 겉보기에는 여리고 순수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야심 차고 웅대했다. 그는 무장 독립투쟁을 염두에 두고 구체적 조직 활동에 나섰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43년 7월 14일 교토에서 특고경찰(사상범 단속)에 체포된 것도 그런 활동 때문이다.
일본 내무성 경보국(警保局) 보안과가 작성한 1943년 12월호 <특고월보>에 수록된 '재(在)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 책동 개요'에 따르면, 윤동주는 군인들과 함께하는 무장투쟁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송우혜의 <윤동주 평전>에 수록된 바에 따르면, <특고월보>에는 다음과 같이 윤동주의 행동 계획을 설명하는 부분이 들어 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의 강화조약에 즈음하여 조선의 독립 문제가 반드시 조건으로 제기되어야 한다. 만일 제기되지 않더라도 일본의 국력이 약해지거나 또는 일본이 패전하는 기회를 타서 독립운동을 전개시키면 조선인은 모두 궐기할 것이다. 그때에 조선 출신 군인들도 큰 구실을 해야 할 것이며, 우리들도 목숨을 바쳐 궐기해야 한다."
윤동주는 '조선 출신 군인들'과 함께 무장 독립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 자신이 무장투쟁을 주도하는 데는 한계가 많았겠지만, 적어도 그런 운동에 참여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별 헤는 밤'을 쓸 당시의 그는 그런 의지를 품고 있는 열혈 청년이었다.
윤동주는 '조선 출신 군인들도 큰 구실을 해야 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그 시기에 친일파 군인 56명은 그럴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일본군과 그 2중대인 만주군에 소속된 그들은 오로지 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정신없이 싸울 뿐이었다.
윤동주 같은 열혈 청년들을 모셔도 시원찮을 국립현충원이 그 56명을 가장 중요한 공간에 모시고 있으니, 대한민국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나라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제국과 만주국에 충성한 사람들을 위해 국민들이 세금을 들여 현충원을 운영하고 거기에 가서 참배하고 경의를 표해야 하는 이유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윤동주는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든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오늘날 현충원의 별들을 보면 박정희·백선엽·김창룡·나응준 같은 '이국(일본국·만주국) 장군들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현충원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아무 걱정 없이 별을 헤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들의 무덤을 하루빨리 파내야만 우리도 현충원에서 윤동주처럼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읊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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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현충일, #서울현충원, #현충원 파묘, #친일파 군인, #친일청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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