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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20주년 특별기획] 기존 질서 붕괴와 세계 대변혁 ‘포스트 코로나’

릴레이 기고 ‘코로나 너머’ ㉓

정운현 언론인·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발행 2020-06-07 17:18:29
수정 2020-06-07 18:3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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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2000년 5월 15일 첫걸음을 뗀 민중의소리가 창간 20주년을 맞았습니다. 독자와 후원인들의 성원과 격려로 민중의소리는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민주주의를 확장하며 자주평화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한 진보언론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창간 20주년 특별기획으로 각계 원로, 전문가, 신진인사들이 코로나19 이후의 세계와 한국사회를 조망하는 릴레이 기고를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도둑맞은 봄과 짓밟힌 일상

 올해로 직장생활 3년 차인 K 씨. 그는 시중은행의 창구 직원이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할 때까지 그는 입출금을 위해 방문하는 고객을 상대한다. 어제 하던 일이나 오늘 하는 일이 크게 다르지 않다. 내일 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반복되는 일상에 그는 짜증이 늘어갔다. 그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다리라도 뚝 부러져 며칠 푹 쉬었으면’.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출근길에 무릎 통증을 느꼈다. 통증이 며칠 간 이어지자 그는 사무실 인근 정형외과를 찾았다. 몇 가지 검사를 마친 후 의사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무릎 관절에 악성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당장 수술을 해야 된다고 했다. 결국 그는 며칠 뒤에 수술을 받고 한달 간 병가를 냈다. 그제야 그는 지루했던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

올해 우리는 봄을 도둑맞았다. 봄의 문턱에서 만난 불청객 코로나19가 봄을 강탈해갔다. 구례 화엄사의 흑매(黑梅)가 언제 만개했는지, 온 산천을 뒤덮던 진달래가 언제 피었다 졌는지도 모른 채 봄을 보냈다. 처음 겪은 황당한 일이었다. 불청객은 놀랍게도 전 세계를 휩쓸었다.

비단 이 뿐만이 아니다. 평범하지만, 그러나 소중한 우리의 일상이 송두리째 짓밟혔다. 3월이면 개학하던 학교는 등교를 보류하였고, 크고 작은 모임도 한동안 금지되었다. 또 환자가 아닌데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이 마스크를 끼고 다니고 있으며, 중소상공인 등은 영업 부진으로 극도의 고통을 겪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망자는 이미 10만 명을 훌쩍 넘겼다. 세계적 대재앙이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2020.05.20
코로나19로 등교 개학이 미뤄진 지 80일만에 등교를 시작한 20일 오전, 서울 종로구 경복고등학교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등교하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발열 체크를 하고 있다. 2020.05.20ⓒ김철수 기자

2. 코로나19가 가져온 한국 사회의 명암

코로나 사태의 파장은 예상외로 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역설적인 교훈’이었다. 대표적으로 기존선진국들에 대한 인식 파괴가 그것이다. 성채처럼 견고했던 선진국들의 실체가 이번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간 의료 선진국을 자임하던 그들의 대응은 예상외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마스크 등 방역물품 품귀현상이 빚어지자, 민주시민의 보편적 자세인 질서가 하루아침에 붕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은 분명히 달랐다. 생필품 사재기나 싹쓸이 같은 행태는 단 한 건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스크 구입을 위한 줄서기 역시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였다. 확진자를 조치하는 당국의 업무 태도나 시민들의 대응 자세 역시 의연했다. 세계 주요 언론은 한국을 주목하였고, 세계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탄복해 마지않았다. 한국인의 높은 시민의식과 준비된 한국 정부의 진가가 이번에 세계인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초기 우리 정부의 방역 대책은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특히 신천지 사태 등이 터지면서 정부는 물론 국민들도 크게 우려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차분한 대응과 국민들의 협조로 사태는 조기에 수습되었고, 이를 계기로 코로나19 대응 자세는 한 단계 성숙되었다.

급기야 세계 120여 개 국가에서 우리가 만든 코로나19 진단 키트를 요청하고 있다. 이는 세계적 기업으로 평가 받는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의 명성을 단번에 뛰어넘는 성과인 셈이다. 또 방탄소년단(BTS)의 세계적 열풍과 흥행,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의 오스카상 석권을 능가하는 호평이기도 하다. 특히 해외 입양 한국인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에게 마스크를 선물하면서 한국은 또 한 번 ‘아름다운 나라’로 각인되었다.

그럼에도 한국 역시 코로나 사태의 후유증을 피해갈 수는 없다. 경기침체로 인한 경제 부진과 점증하는 실업, 시민 생활의 위축과 소비 감퇴, 마스크 쓰기 등 변화된 생활 양태로 인한 번거로움도 적잖이 늘었다. 이는 한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따라서 사회 전반에 걸쳐 ‘포스트(post) 코로나’에 대한 분석과 대응이 절실한 상황이다.

지난 4월 15일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단키트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화물을 적재하고 있다.
지난 4월 15일 인천공항 화물터미널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진단키트를 미국에 수출하기 위해 관계자들이 화물을 적재하고 있다.ⓒ외교부

3. ‘포스트 코로나’, 준비하는 이에겐 기회된다

최근 들어 세계적으로 ‘포스트 코로나’에 대한 논의가 줄을 잇고 있다. 권위 있는 석학들은 기존 질서의 붕괴와 함께 세계 대변혁을 예고한다.

미 하버드대 경제학과 로버트 배로(Robert Barro) 교수는 1918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 43개국에서 3,900만 명이 사망하고 당시 주요국의 연간 GDP가 평균 6% 감소한 사례를 들어, 이번 코로나 사태가 장기적으로 이어진다면 2~3년 동안에 10% 이상의 GDP 감소가 예상된다고 전망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다룬 책 [붕괴]의 저자이기도 한 미 컬럼비아대 애덤 투즈(Adam Tooze) 교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를 세계 제1, 2차대전에 견주며 대형 경제위기를 우려하였다.

또 덴마크 코펜하겐 비즈니스 스쿨의 루치아 라이슈(Lucia Reisch) 교수는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소상공인과 스타트업들이 특히 큰 피해를 입을 것으로 전망했으며,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탈레스 S. 테이셰이라(Thales S. Teixeira)는 고객의 양태에 따라 기업의 흥망이 극명하게 엇갈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밖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박사는 언론 기고문을 통해 “코로나 19로 세계질서가 바뀔 것”이라며 “자유 질서가 가고, 과거의 성곽시대(walled city)가 다시 도래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또 코로나 사태로 인해 여행과 이주가 줄어들고 해외로 진출했던 기업들이 자국으로 회귀하면서 글로벌 교류가 퇴보하고 이로 인한 경기침체가 우려된다고 예측했다. 그는 전방위적으로 시민을 공격하는 코로나로 인해 정부에 대한 신뢰가 약해지고 민주적 가치마저 위협받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이번 코로나 사태 와중에 이미 목격된 바 있고, 장차 충분히 예견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앙성결교회에서 교인들이 전자출입명부(QR코드) 시범운영 테스트를 하고 있다.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은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시설 출입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이날부터 서울, 인천, 대전 3개 지역의 주요 교회, 영화관, 노래방, 음식점 등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2020.06.02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중앙성결교회에서 교인들이 전자출입명부(QR코드) 시범운영 테스트를 하고 있다. 전자출입명부 시스템은 코로나19 집단감염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시설 출입자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도입된 것으로 이날부터 서울, 인천, 대전 3개 지역의 주요 교회, 영화관, 노래방, 음식점 등 시범 운영에 들어간다. 2020.06.02ⓒ민중의소리

다양한 전망과 조언 중에서도 우리가 귀담아들어야 할 이야기를 한 사람이 있다. 지한파 미래학자이자 미래학계 대부로 불리는 짐 데이토(Jim Dator) 하와이대 명예교수가 그 사람이다. 데이토 교수는 최근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코로나19로 세상이 어떻게 바뀌더라도 한국은 다음 세 가지에 과감히 도전할 것을 주문했다. 첫째, 더 이상 선진국을 따라가지 말고 스스로 선도국가가 될 것. 둘째, 지금껏 한국을 발전시켜 온 경제와 정치 논리가 미래에는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니 21세기 한국에 어울리는 새로운 것을 찾는데 앞장설 것. 셋째, 더 이상 기존의 동맹에만 의지하지 말고 외교 관계를 다극화하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정책담당자, 기업인, 연구자 등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된다.

코로나19는 아직도 전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언젠가는 종식되거나 아니면 인류가 관리 가능한 상태로 수그러질 것이 분명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까지 팔짱만 끼고 기다릴 일은 아니다. 앞서 보았듯이 세계적 전문가들은 다양한 식견을 쏟아내고 있다. 물론 우리 정부와 각계 전문가 집단 역시 나름의 대응책을 준비하고 있다. 최근 정부는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큰 역할을 해낸 질병관리본부를 ‘질병관리청’으로 격상시키기로 했다. 이는 방역 차원의 대응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킨 데 불과하다.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정운현 전 국무총리 비서실장ⓒ사진 = 정운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의식구조 등 사회 전반의 광범위한 논의와 변화, 그리고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계의 지성을 한데 모으는 작업이 절실하다. 정부가 코로나 방역을 위해 구성했던 기존의 T/F를 민-관 공동으로 국가 차원의 ‘포스트 코로나 특별위원회’로 재편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국내에도 각 분야별 전문가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이들을 한 꾸러미에 담아내는 ‘선한 손’이 필요하는 점이다. 민간의 참여를 유도하려면 정부 주도보다는 민-관 공동 형태로 꾸리고, 정부측에서 위원장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 단계 더 나가자면, 우리의 역량을 국내에만 가둬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방역 모범국가로서 한껏 높아진 위상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승화시켜야 한다. 우선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한·중·일과 동남아 국가들을 묶어 ‘동아시아 보건·의료 공동 협력체’를 수립하는 방안이다. 이는 미-중 신냉전 시대에 대한민국의 새로운 활로가 될 수도 있다. 데이토 교수는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꿈꾸고 만들어나가는 것”이라고 했다. ‘포스트 코로나’ 역시 준비하는 자에겐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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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현 언론인·전 국무총리 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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