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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70년 맺힌 한, 어찌 잠들어 계셨소

청주 |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한국전쟁 70년…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 답사기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의 일명 ‘여우골’ 현장. 주택 공사가 한창인 언덕 골짜기를 조사하던 중 1950년 7월경 우리 군경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곳은 청주·청원 국민보도연맹원과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뒤 매장된 곳이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의 일명 ‘여우골’ 현장. 주택 공사가 한창인 언덕 골짜기를 조사하던 중 1950년 7월경 우리 군경에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가 발견됐다. 이곳은 청주·청원 국민보도연맹원과 청주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으로 죽임을 당한 뒤 매장된 곳이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농가·동네 산길…널린 학살 현장
충남 아산 설화산 208구 유해 곁
안경·비녀·반지 쏟아진 학살 증거

 

진통 속 통과된 과거사법 개정안
연말 ‘진실화해위 2기’ 출범 앞둬
외면했던 묵은 숙제, 이번엔 풀까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은 수많은 전사자를 냈지만, 무고한 민간인들의 목숨도 앗아갔다. 포화를 피하지 못한 이들도 있었지만, 우리 군경의 총칼에 죽은 이들도 최소 수십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그 흔적도 희미해져 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 수습되지 못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골은 도처에 있다. 농가를 잇는 평범한 길옆에서, 주민들이 애용하는 동네 뒷산 산책로 옆에서 그들은 잠들어 있다. 2018년 2월 충남 아산의 설화산 발굴 현장. 며칠간의 작업에도 불구하고 매장지를 찾지 못해 철수하려다 마지막으로 파본 곳에서 유해가 발견됐다. 이곳에서 발굴된 208구의 유해 중 17세 이하는 58구, 18세 이상 성인의 유해 150구 중 85%는 여성으로 추정됐다.

유해 주변에서는 총탄이나 단추, 안경과 혁대, 비녀나 반지 같은 물건들이 나왔다. 유해야말로 부인할 수 없는 학살의 증거다. 지난 70년 동안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곳에선 집을 짓고 다리를 건설하고 댐을 세우다 얼마나 많은 유해가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지난 5월 진통 끝에 ‘과거사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개정안이 20대 국회를 통과했다. 관련 개정안이 나온 지 7년 만이다. 2010년 중단된 1기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는 올 연말쯤 진용을 갖추고 2기 활동에 들어간다. 진화위는 2005년 12월부터 2010년 6월까지 활동하면서 국가폭력과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일을 했다. 하지만 제한된 기간에 이뤄진 활동인 만큼 한계도 분명했다.

경향신문은 2018년 12월 세 차례에 걸쳐 한국전쟁 기간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발굴 실태를 살펴봤다. 한국전쟁 70주년을 앞둔 2020년 6월. 과거사법 개정안이 지난 5월 힘들게 통과됐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진실을 밝히고 희생자들의 상처 치유를 바라는 이들은 진화위 활동을 보충하고, 과거사 청산을 지속할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유해를 발굴하고 피해자에게 합당한 배상을 하는 일, 그리고 과거사재단을 꾸리는 일 등 법적 근거가 부족해 미뤄두었던 70년 묵은 숙제를 풀 시간이다.


 

■“30~100명 묻혀” 증언 후 10년 만에 첫 삽…택지 공사 겹쳐 발굴 ‘진땀’ 

청주 ‘여우굴’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 현장에 가다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의 일명 ‘여우골’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2008년 이곳에서 유해를 발견했지만 본격적인 발굴은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이뤄졌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민간단체인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지난 5일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의 일명 ‘여우골’에서 유해발굴을 진행하고 있다. 이미 2008년 이곳에서 유해를 발견했지만 본격적인 발굴은 10년이 훨씬 넘어서야 이뤄졌다. 청주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4~5m 깊이로 파 들어가며
조심 조심 흙을 걷어내니
앙상하게 마른 뼈들이 나와
 

충북 청주와 청원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과
청주형무소 재소자 등이
적법 절차 없이 살해돼 묻혀
 

지난 5일 오후 충북 청주시 남일면 고은리의 일명 ‘여우굴’ 일대에서는 주택 공사가 한창이었다. 오래전 이곳에 굴이 있었다고 했지만 이제는 흔적도 찾기 힘들었다. 낮은 언덕을 수놓았던 나무는 깎여나갔고, 황톳빛 흙이 작은 산처럼 쌓여있었다. 이곳의 얕은 골짜기를 따라 민간단체가 모여 결성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유해발굴 작업도 진행 중이었다.

이날 오전에는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는 더운 날씨에 대비해 가림막을 새로 설치했다. 지난달 26일부터 길이 40m, 폭 15m의 이곳 매장 추정지를 4~5m 깊이로 파 들어가며 발굴 작업을 했다. 이 과정에서 2~3명의 것으로 추정되는 앙상하게 마른 뼈들이 나왔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군경에 의해 숨진 민간인들의 유해는 70주년이 다 되어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발굴 현장에는 ‘아버지, 어머니 - 70년의 어둠 거두어 내고 이제 밝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이곳은 2005년 과거사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 출범한 국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진화위)에서 두 차례 발굴 조사를 벌인 ‘분터골’ 인근이다. 분터골에서 300여개체의 유해가 나왔다. 분터골과 5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여우굴은 처형을 위해 이동 중 낙오한 이들을 죽여 묻은 곳으로 추정된다. 청주 일대에는 7~8곳의 매장 추정지가 있다. 1950년 6월 말부터 7월 초까지 청주·청원 지역의 국민보도연맹원들과 청주형무소에 구금 중이던 재소자 등이 적법한 절차 없이 죽임을 당한 뒤 이곳에 묻혔다. 국민보도연맹은 좌익활동을 한 이들을 전향시키겠다며 1949년 만든 전국적인 조직이다. 해방을 전후해 좌익활동을 한 이들도 있었지만, 먹을 것을 준다는 말에 가입하거나 ‘불순분자’로 몰려 형무소에 갇힌 이들이 많았다.

여우굴은 2008년 분터골 발굴이 마무리되기 직전 ‘인근에 또 다른 매장지가 있다’는 유족들의 증언에 따라 확인 조사를 벌인 결과 머리뼈 등 유해가 발견된 곳이다. 30여명에서 100여명까지 희생자 숫자에 대한 증언은 분분했지만, 민간인에 대한 처형이 이뤄졌다는 내용은 일치했다. 유해를 발견했지만, 시간과 예산 등 현실적인 문제로 전면적인 발굴은 어려웠다. 훗날을 기약했고, 10년이 흘렀다.

지역 유족회와 지자체의 협조로 여우굴에서 유해발굴을 하기로 하고 지난 3월 중순 공동조사단이 사전 조사차 방문했을 때만 해도 매장 추정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매장 추정지 바로 옆에선 주택 단지 조성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빠른 발굴이 필요해 보였다. 코로나19 상황에서도 유해발굴 작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던 이유다.

공동조사단이 본격 발굴을 위해 여우굴을 다시 찾았을 때는 매장 추정지 한쪽에 흙을 다져 쌓아올리는 복토 공사가 한창이었다. 이 때문에 매장 추정지를 찾기 힘들어졌다. 숲이 우거졌던 매장지는 누런 흙으로 황량한 모습으로 드러난 상태였다. 민간인 학살 유해 매장 추정지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따로 없었고, 도청 관계자나 주택 공사를 하는 땅의 소유주도 이 같은 사실을 제때 파악하지 못했던 탓이다.

공동조사단은 먼저 쌓인 흙을 걷어내고 매장이 이뤄졌을 것으로 추정된 골짜기의 위치를 파악해갔다. 땅파기 작업을 하며 유해 매장 위치를 가늠해가자 다행히 학살 피해자의 유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매립토를 쌓고 걷어내는 과정에서 일부 유해가 유실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바로 옆이 주택 공사가 진행 중인 사유지였기 때문에 발굴 조사를 여유롭게 할 수 없었다. 여우굴 발굴은 지난 11일까지 단 2주 동안만 진행됐다.

■국가사업인 유해발굴, 10년 이상 표류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해와 유품을 찾기 위해선 땅을 파면서 나온 흙도 꼼꼼히 다시 고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청주 | 이준헌 기자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유해와 유품을 찾기 위해선 땅을 파면서 나온 흙도 꼼꼼히 다시 고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청주 | 이준헌 기자

유해가 매장된 것을 확인해도
담당 기관이 명확하지 않고
발굴을 강제하는 법도 없어
지자체나 민간단체에만 의존
 

여우굴 현장은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작업의 현실을 잘 보여준다. 유해가 매장된 것을 확인하더라도 이를 담당할 기관이 명확지 않고, 관련 규정이 없다 보니 지자체의 조례나 민간단체의 발굴 활동에만 의지해야 한다. 이미 발굴이 이뤄진 곳도 100% 완벽한 발굴을 했다고 장담할 수 없다. 한정된 시간과 예산으로 진행하는 일이다 보니 그렇다. 여전히 남아 있는 매장 추정지도 많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매장지가 더 있을 가능성도 높다.

1기 진화위가 활동하던 2005~2010년 동안 168곳의 유해 매장 추정지를 조사했고, 이 중 59곳에서 발굴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우선발굴 대상지로 39개소가 선정됐다. 1기 진화위 활동 당시부터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이 이뤄진 건 모두 22곳이다. 진화위에서 13곳, 공동조사단 등에서 9곳을 발굴했다. 2010년 진화위 활동이 중단된 이후에는 국가 차원에서 발굴이 이뤄지지 않은 것이다. 여우굴처럼 유해 일부가 발견되어 학살 매장지가 확실해도 10년이 넘도록 발굴이 이뤄지지 않고 방치된 곳이 허다했다.

70년이나 지난 민간인 학살의 유해발굴 성적표가 이토록 초라한 건 유해발굴을 강제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진화위 활동을 규정하고 있는 ‘과거사 기본법’(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에는 ‘유해’나 ‘발굴’에 대한 규정이 없다. 1기 진화위가 활동할 당시에는 유해발굴이 민간인 학살의 실체를 증명하는 사실 조사와 유가족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차원에서 진행됐다.

1기 진화위에서 우선발굴 대상지로 선정한 충북 청원군 낭성면 호정리의 ‘도장골’은 여우굴이나 분터골과 마찬가지로 청주 지역 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희생돼 매장된 곳이다. 2007년 진화위가 정리한 유해 매장 추정지 조사용역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도장골에는 70여구의 유해가 매장된 것으로 추정됐다. 조사 당시 “봉분 형태의 매장지가 발견됐고, 사건 이후 특별한 훼손 없이 보존된 상태”여서 유해가 발견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곳으로 꼽혔다. 그런데 지난해 3월부터 댐 공사를 하면서 일대가 파헤쳐졌다. ‘청주형무소 사건 민간인 집단 희생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내용 등을 적은 진화위의 철제 안내판은 뽑혀져 인근에 버려진 상태였다.

이처럼 진화위가 활동에 돌입한다 해도 제때 발굴이 이뤄지지 않으면 유해 훼손의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유해발굴 활동 관계자들은 “과거엔 일반 공사 현장에서 유해가 나오면 작업이 중단될까 몰래 내다 버리는 일도 많았다”고 말한다. 유해발굴이 필요한 지역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는 건 법적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유해 매장지를 유지·관리할 책임이 정부나 지자체 등 누구에게도 없다. 유해를 발굴하고 감식할 인력이나 예산도 없다.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유해매장지 관리는 그동안 지역의 유족회에서 시간을 내 둘러보는 정도에 그쳤다.

지난 5월 새롭게 개정·통과된 과거사 기본법에도 유해발굴에 대한 조항은 추가되지 않았다. 유해발굴에 관한 한 1기 진화위 때와 새로 출범하게 될 2기 진화위는 같은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다. 활동기간은 오히려 줄었다. 1기 진화위는 최대 6년간 활동할 수 있었지만, 2기 진화위는 최대 3년이다. 위원회 규모도 15명에서 9명으로 줄었다. 위원 수는 조사관 숫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공격적인 유해발굴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실적인 여력은 줄어들고 있다.

진화위가 과거 청산에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지만 한시적인 조직이라는 한계도 아쉬움으로 지적된다. 노용석 부경대 국제지역학부 교수는 1기 진화위의 유일한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팀 담당자였다. 행정·기획 업무는 물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을 학살하고 매장한 지역을 찾아다니는 역할을 홀로 맡았다. 1년에 8억원 정도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이는 한 해 동안 4곳 정도 지역을 발굴하거나 유해를 감식하고 발굴 보고서를 작성하는 등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포함한 금액이었다.

노 교수는 “새로 개정된 과거사법에 유해발굴에 관한 조항이 추가될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이미 유해를 발굴한 지역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곳이 많았다. 세 차례 발굴이 이뤄진 ‘경산 코발트광산’은 허술한 관리 탓에 고교생들이 들어왔다가 떨어져 크게 다치는 사고가 났다. 국가단위의 사업인데 10년 이상 표류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말했다.

■유해 특정된 민간인 희생자 없어…유해발굴 법적 근거 만들어야 

유해 나와도 신원 특정 어렵고
남들의 괜한 손가락질 걱정에
2005년 진실화해위 출범 이후
유해 수습한 유족도 전무
 

유해발굴 이후에도 과제가 남는다. 일단 신원 특정이 어렵다. 유해가 나오면 우선 인류학적 감식 작업을 한다. 나이와 성별, 키, 사망 원인 등을 조사한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는 총상의 흔적이나 총알이 함께 발견되는 일이 많다. 이런 조사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사진을 남긴 뒤 보고서 작성을 한다. 모든 작업을 마친 유해는 현재 세종시에 있는 추모의집으로 모신다. 2022년에는 대전 인근 국가단위의 위령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간혹 매장지에서 도장 등 신분을 특정할 단서가 발굴되는 경우가 있지만, 주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희생자들의 유해가 뒤엉킨 채 발견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신원이 특정된 경우, 피해자 유족을 찾아 유전자 감식을 한 뒤 발굴된 유해 전체를 대조할 수만 있다면 조상의 뼈를 한 조각이라도 찾는 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전자 감식에 필요한 비용과 시간 등의 제약으로 사실상 신원 특정이 어렵다. 2005년 진화위 출범 이후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 실체가 상당수 드러났지만 조상의 유해를 특정해서 수습한 유족은 한 명도 없다.

2016년 국회에서 열린 ‘과거청산을 위한 입법 토론회’에서 유해발굴 특별법에 대해 발제한 서중희 변호사는 “국가기관에 의해 전국적인 범위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쳐 법률적인 근거를 두고 유해발굴이 이뤄져야 한다”며 “대통령 등 정책 결정권자가 행정명령을 한다면 조금 더 빠른 작업이 가능하겠지만, 법적 근거가 빈약할 경우 정부가 바뀌면 조직이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서 변호사가 제안한 특별법에는 민간인 학살 희생자의 매장지를 보존·조사·발굴하고 유족을 확인해 추모사업을 벌이는 내용과 이런 업무를 수행할 위원회를 설치하는 내용 등이 포함돼 있다. 2008년 제정된 ‘6·25전사자 발굴법’의 골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법적 근거가 있다면 학살 피해자 유해에 대해 광범위한 감식을 벌일 수 있고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유족 특정도 가능하다.

여우굴 유해발굴 작업에 참여한 조성규씨(63)는 보도연맹원으로 희생된 작은아버지의 제사를 모시며 살아왔다. 그는 “늦게나마 발굴이 이뤄져 고맙지만, 70년이나 지나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다”며 “민간인 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대부분 연좌제 탓에 공직 생활 등 떳떳한 직장을 가지지 못하고,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대부분의 유족들이 70대 이상인데, 괜한 손가락질을 걱정하거나 진상규명 신청에 대한 홍보가 부족해 1기 진화위 때 피해 신청을 하지 않은 이들이 아직도 많다”며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조상들을 밝은 곳으로 모시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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