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수사관이 검찰에 가기 전에 안기부에서 말한 대로 하라고 했는데, 구치소로 가기 전에 검찰에 들러 검사 조사 받는데 안기부의 수사관들과 함께 있어서 겁을 먹어 안기부에서 시키는 대로 허위 진술한 진술서였지만 어쩔 수 없이 지장을 찍었다. 구치소 있는 동안에도 안기부 수사관들이 찾아와 검찰에서 사실을 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내 사건을 담당한 신아무개 검사에게 안기부에서의 고문 사실에 대해 말하자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며 묵살 당했고, 검찰 주사보도 '빨갱이 좌경분자는 더 맞아야 해'라며 거들었다.<br /><br />또한 구치소에 있는 동안 안기부로 끌려가 반나절 정도 조사를 받았는데 다시 구치소로 돌아가지 못할까 겁을 먹었고, 수사관들의 협박으로 시키는 대로, 알려주는 대로 진술서를 작성했다.<br /><br />재판 직전 간수가 여기서 나가고 싶으면 법정에서 무조건 다 인정하라고 했다. 그렇지 않고 사실을 밝히려고 하거나 말 한 번 잘못 하면 감옥에서 영영 썩게 된다고 해서 겁을 먹었는데 법정에 안기부 수사관이 와 있는 것을 보고 공포심에 안기부에서 진술한 대로 해야 되는구나 싶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다리가 부어서 평소의 두 배가 될 정도"
안기부에 끌려가서 정형근 등에게 야만적인 고문을 받은 것은 심진구만이 아니었다. 그의 대학생 친구들도 역시 불법으로 안기부에 끌려가 가혹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심진구의 친구 서울대생 김아무개는 1987년 5월 29일 열린 서울지법 5차 공판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안기부에서 주로 당한 고문은 각목으로 때리는 것이었다. 물고문은 나중에 당했다. 거의 매일 각목으로 얻어맞았다. 단단하고 가벼운 각목으로 다리를 집중적으로 구타해서 다리가 부어서 평소의 두 배가 될 정도였다. 다리를 때릴 수 없는 정도가 되자 왼팔, 오른팔, 어깨, 발바닥 등을 번갈아 가면서 때렸고, 입고 있던 군복에 피가 배어 오를 정도로 심하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X자로 끼어놓고 구둣발로 짓밟고, 벽에 십자로 2시간 정도 탈진할 때까지 세워놓고 책상 밑에 처박고 구둣발로 무차별 구타하고, 구두를 벗어 그것으로 뺨을 심하게 구타하는 등 심한 기합을 받았다.<br /><br />마지막으로 물고문을 받았는데, 고개를 쳐들게 하고 뒤에서 머리칼을 움켜잡고 코와 입에 수건을 덮어씌우고 주전자로 물을 퍼붓고, 물을 담아 놓은 그릇에 실신할 정도가 될 때까지 얼굴을 거꾸로 처박았다. 조서 작성할 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안 하면 많은 기합을 받았다. 고문 수사로 자유 의사는 완전히 박탈당했고 그래서 자술서도 수사관이 쓰라는 대로 작성했다.<br /><br />검찰 조사 때는 심한 위축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안기부에 있을 때 '검찰청 15층도 여기와 같은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시설이 있다. 너 같은 중요 공안사범의 진술태도가 좋지 않으면 거기에 데려간다. 공범도 있고 진술태도가 안 좋으면 여기 남아 있는 심진구, 하아무개가 고생한다'며 협박을 해 검사 조사 시 심리적 위축상태였다. 특히 상당히 안면이 있는 안기부 직원이 검찰에서 조사를 받을 때 들락날락했다.
당시 심진구의 또 다른 친구 서울법대생 김아무개는 지난 2010년 진실위에서 이때의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부산에서 안기부 수사관에게 붙잡혀 서울 남산분실로 와서는 바로 군복으로 갈아입히더니 심리적 굴욕감을 주려고 벽타기 등을 하게 했다. 구학련 배후와 북한과의 연계가 있는지 물어봐서 그런 것이 없다고 하니 고문이 시작되었다. 한 달간 고문을 심하게 당했는데 야전침대봉으로 맞고, 물고문도 당했다. 정형근도 종종 조사실로 내려와 같은 서울대 법대 동문이라며 배후를 이야기하라고 해서 어이가 없었다. 검찰로 송치될 때 안기부 수사관이 동행, 배석해 검사에게 인정신문을 받았다.
심진구의 친구 하아무개도 진실위에서 1986년 안기부에서 고문조사 받던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안기부에서 신고식이라면서 매질을 당했고 욕조 물에 머리를 박게 하고 다리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수사관이 밟았다. 야전침대봉이 3개 부러질 정도로 계속 매질을 당하다가 가슴 명치를 맞아 숨을 쉴 수가 없어 쓰러졌다. 수사관들이 야전침대에 눕혀놓았는데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세 네 번 왔다. 수사관들이 필동 병원까지 데려가서 의사진찰을 받게 했으나 의사는 엑스레이 찍고 허벅지가 매질로 까매진 것을 보고 붕대만 감아주었다.<br /><br />안기부로 돌아와 그 날 밤은 그냥 잤으나 이후에 조사 받을 때 조사 내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 좋은 게 있네' 하면서 허벅지에 감긴 붕대를 풀어 손목을 의자에 묶고서 구타를 했다. 수사관이 후배랑 만나기로 한 쪽지를 발견했는데 시간을 틀리게 적어 놓은 것을 모르고 몇 번 허탕을 치고 와서는 '이제 조사할 필요 없다. 다른 팀 교대시간까지 13시간 남았는데 그때까지 때리기만 하겠다'며 실제로 13시간 동안 계속 매질과 기합을 가했다.<br /><br />검찰 조사를 받을 때에도 안기부에서 최, 서 수사관과 함께 검찰에 가서 잠깐 조사를 받았는데 수사관이 있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강압상태에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허벅지를 밟았다"
심진구의 친구 박아무개도 진실위에서 1986년 안기부에서 받은 고문을 이렇게 진술했다.
안기부에 연행되어 수사관들로부터 몽둥이로 구타를 당했고 무릎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허벅지를 밟았다. 물고문도 당했는데 책상 위에 눕혀 놓고 얼굴에 수건을 놓고 물을 부어 죽을 것 같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로 진술을 했다. 송치될 때 안기부 수사관이랑 우선 검찰에 들러 짧게 조사를 받았다.
1986년 심진구에 대한 검찰 조사에 참여한 검찰주사보 안 아무개는 진실위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당시에 안기부에서 조사받고 왔으면 고문 받고 온 것은 당연하다. 피의자한테 살아서 온 게 다행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검찰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다. 피의자가 부인하거나 증거가 없거나 조사내용이 더 필요하면 검사가 수사관에게 연락을 해 피의자를 다시 조사하기도 한다.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 수사관이 데리고 가서 고문하든지 해서 자백을 받아가지고 오는 일도 있다.
위와 같은 가혹한 고문조사를 거쳐 1987년 1월 15일 심진구는 서울지방검찰청에 송치된 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리고 1987년 4월 20일 심진구는 징역 2년, 자격정지 2년을 선고받고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되었다.
안기부의 불법 구금과 무지막지한 고문 이후 심진구 삶은 철저히 망가졌다. 박영진 열사(1986년 노동3법 보장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신흥정밀 노동자)와 함께 '구로독산지역 선진노동자회'를 이끌었던 심진구는 1987년 집행유예로 출소한 뒤엔 노동운동에 제대로 합류하지 못했다. 그가 고문에 못 이겨 안기부 수사에 협조했다는 꼬리표 때문이었다.
또한 출소 후에 심진구는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병원을 들락날락했고 심한 불면증과 불안 증세에 시달렸다. 그의 아내는 "남편이 건강 때문에 정상적인 사회생활도 쉽지 않고 본인이 뜻한 대로 살지 못하니 굉장히 괴로워했다. 불운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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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진구가 그린 안기부 고문수사관들의 몽타주 그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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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진구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석방 후 그림을 그려서 생계를 유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지난 2004년 정형근 전 국회의원(1986년 당시 안기부 대공수사단장)을 그림으로 그려 독직폭행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지만 기각됐다.
심진구의 아내는 "남편이 정형근 초상화를 그릴 때 거의 열흘 동안 방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안 먹고 그림만 그렸다. 기억을 떠올리는 게 너무 괴로워서 음식을 넘길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한편 심진구 사건을 조사한 진실위는 지난 2010년 이렇게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이 사건은 신청인 심진구가 안기부에 영장 없이 불법연행 된 후 21일 동안 불법구금 된 상태에서 고문 및 가혹행위를 받고 허위자백에 의해 일부 범죄 사실이 조작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건이다. 안기부가 신청인 등을 영장 없이 불법 연행 하고, 구속 영장이 집행될 때까지 불법구금 했으며, 조사과정에서 구타 등 가혹행위를 가한 것은 형법 제124조 불법체포감금죄, 제125조 폭행, 가혹행위죄에 해당하며 형사소송법 제420조7호, 제422조가 정한 재심사유에 해당한다. 안기부는 자백 외에 증거가 없음에도 신청인이 이적표현물을 취득했다고 일부 범죄사실을 조작했다.
위와 같은 진실위 결정을 근거로 심진구는 재심을 청구했고 지난 2012년 11월 서울중앙지법에서 26년 만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판사는 이날 판결문에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문과 증인들의 법정 진술 등에 비춰보면 지난 1986년 심씨가 불법구금을 통해 고문을 받음으로써 허위자백을 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1986년 심진구를 고문했던 전 안기부 수사관 구아무개는 2012년 재심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심진구를 고문한 적이 없다. 인간적인 훈계차원의 가벼운 꿀밤 정도만 때렸다"라고 주장했다.
그 후 고문 후유증으로 평생 시달린 심진구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지 40여 일이 지난 2014년 11월 한 많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올해 6월 24일 지난 2012년 '심진구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 "심진구를 고문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던 전 안기부 수사관 구아무개는 위증죄로 1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안기부에서 고문을 한 가해자가 구속된 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이었다. 하지만 법원이 책임을 물은 건 구아무개 수사관의 고문이 아니라 그의 위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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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생존시 심진구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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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고"
이날 재판 결과에 대해 심진구의 아내는 이렇게 감회를 밝혔다.
남편이 못 보고 떠나셨어요. 구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이 굉장히 뻔뻔하게 재판에서 진술하고. 남편이 분노하고 돌아가시기 전에 '저 사람 처벌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셨는데... 남편이 살아서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돌아가시면서도 눈을 못 감고... 감겨도 자꾸 뜨고... 잔혹한 고문을 하고도 가해자들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가면서 이 세상을 활보하고... 고문에 대한 책임을 물어서 더 중대한 벌을 받아야 하는데 위증죄로만 판결을 해서 조금 아쉽네요.
심진구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기를 고문한 안기부 요원들의 몽타주까지 그리면서 진실을 알리려 했다. 하지만 공소시효 때문에 수사와 처벌이 불가능했다.
프랑스나 독일 등에서는 반인륜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없이 가해자를 처벌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회는 왜 국가폭력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법률을 아직도 제정하지 못하는 것일까.
구아무개 전 안기부 수사관은 심진구나 그 유족에게 전혀 사과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번 판결에 불복해 "처벌이 부당하다"며 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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