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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직후 민간인들이 대량 불법학살된 경북 경산시의 코발트광산의 수평갱도 입구. |
ⓒ 오마이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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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8일. 날씨는 화창했다. 굴 앞에 마련된 제사상에는 갖은 음식이 놓였고, 주변에는 여러 기관에서 보낸 조화가 줄지어 있었다.
이태준 경산코발트광산민간인희생자 유족회장의 초헌과 송기인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의 추모사로 이어진 '제8회 한국전쟁전후 경산지역 민간인 피학살자 합동위령제'는 엄숙함 그 자체였다. 비좁은 굴 입구에 세워진 천막은 햇빛으로부터 참석자들의 얼굴을 겨우 가렸지만, 그들의 타오르는 가슴을 식힐 수는 없었다.
위령제는 개토제(開土祭)를 겸해서 열린 행사였기에 약식으로 끝났다. 드디어 한국전쟁 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된 이들의 유해를 국가가 57년 만에 처음으로 발굴하는 날이 온 것이다.
검은 양복을 입은 내빈들과 소복을 입은 이태준 회장이 삽을 뜨자 개토제 분위기는 더욱 달아올랐다. "지금부터 굴 안에 들어갈 것입니다, 굴 안에는 물이 흘러 발이 진흙에 빠질 수 있으니 장화로 갈아 신으세요"라는 이상길 경남대 교수의 당부에 일행들은 무릎까지 오는 노랑색 장화로 갈아 신었다. 이상길 교수는 진실화해위원회의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발굴 책임자였다.
"천장이 낮아 위험합니다. 모두 헬멧을 쓰세요"라는 이 교수의 말과 함께 일행 선두가 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두에는 이상길 교수와 송기인 위원장, 노용석 진실화해위원회 유해발굴 담당자, 최승호 경산신문사 사장이 섰고 뒤를 이어 각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따랐다. 굴 안으로 50m쯤 들어갔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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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의 학살지 무덤을 발굴했을 때 나온 유골의 모습. |
ⓒ 경남대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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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주위가 캄캄해 서로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는데, 한숨과 비통의 소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굴 양쪽 흐르는 물 위에 시커먼 물체가 빼곡하게 보였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유해였다.
살은 썩은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두 눈과 코, 치아의 위치가 선명한 두개골이었다. 마치 원혼이 '왜 이제야 찾아왔나?'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두개골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양쪽 가에는 두개골이 나뒹굴었으며 팔, 다리뼈와 가슴뼈들이 널려 있었다. 비전문가가 육안으로 보기에도 백여 구의 유해가 굴 안에 즐비하게 널려 있었다.
굴 안 양쪽 가에는 작은 도랑물이 흘렀다. 굴 깊숙이에서 흘러나오는 지하수와 실내외 기온 차이로 인해 돌에서 흐르는 석간수가 합쳐졌다.
"저 위에 보이는 곳이 수직굴 입구입니다. 수직굴 입구에서 총살해 밑으로 던져 버리면 여기 주변에 떨어집니다. 그렇게 수천 구의 시신이 떨어져 수평굴로 떠밀리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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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위에서 본 경산코발트 광산의 수직갱도 입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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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고향'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다. 아니 어떤 공포 영화나 소설에도 나오지 않았던 일이 1950년 7월 경북 경산시 평산동에 위치한 코발트광산에 펼쳐졌다. 코발트광산에서 나온 수백구 유해는 대체 누구인가? 1950년 7, 8월에 경북 경산·청도·대구·충북 영동군의 보도연맹원들과 대구형무소 재소자 일부가 이곳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됐다.
57년 동안 햇볕을 쬐지 못한 유해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말로만 전해지던 '코발트광산 민간인학살 사건'이 국가에 의해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 연속으로 이 지역에서 유해발굴을 실시, 총 363구의 유해를 수습했다.
강창덕 기자의 취재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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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창덕 옹이 쓴 경산 코발트 폐광 학살 사건 보도 기사 매일신문 기자로 근무하던 1960년 5월 22일 전국 최초로 경산 코발트 폐광 민간인 대량 학살 사건을 취재해 보도했다. |
ⓒ 정만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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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5월 21일. 아침 일찍 집을 나온 강창덕 대구매일신문 기자는 싱숭생숭했다. 그는 경북 경산시 코발트광산에서 10년 전에 수많은 민간인들이 학살되었고, 그 유해가 광산 주변에 널려 있다는 제보를 받고 취재에 나서는 길이었다.
"대구서 경산을 지나 자인방면으로 가는 국도에서 우측으로 향하여 약 3킬로 들어가면 일제강점기에 '돈방석'이라고 알려졌던 코발트 광산 터가 있다. 이곳에는 6.25사변 당시 그해(1950년) 여름 8월경 현재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총 가진 사람들에게 총살되어, 그 시체가 광산 곳곳에 널려 있는데, 1,500구에 달하고 있어 '해골광산'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5월 22일자 기사. 원문을 필자가 현대적 표기법에 맞게 일부 고쳤음)
이날 경산 코발트광산을 찾은 강창덕 기자는 인근 주민들에게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외지인의 눈을 피하며 묵묵부답이었다. "광산을 안내해주시오"라는 요청에도 손가락으로 방향만 가르치고는 "혼자 가시오"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들에서 뛰놀던 아이들만이 뒤쫓아 왔다. 강 기자는 혼자서 굴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연찮게 마을 청년을 만났다. 그 청년은 자신이 목격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갑자기 평산 1, 2구 주민들을 몰아내고, 포장을 친 트럭이 하루 5대씩 6일에 걸쳐 왔습니다. 매일 총소리가 들렸고, 총을 쏜 군인들의 눈이 빨개, 흉측했습니다"(경산신문사, 『경산코발트광산의 진실』, 2008)
이렇게 대구매일신문에 강창덕 기자의 특종기사가 나가면서 코발트광산 주민들만 알고 있던 역사의 진실이 급속히 전파되었다. 강창덕 기자는 자신이 취재한 역사적 진실을 어떻게 규명할지를 놓고 고심했다.
그러던 끝에 그는 뜻 맡는 이들과 함께 실태조사반을 꾸렸다. 이른바 '경산군하 피학살자 실태조사회'가 그것이다. 대구매일신문에 코발트광산 기사가 보도된 지 10일 만인 1960년 6월 1일의 일이었다.
강창덕은 1읍 10면에 접수창구를 개설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1일자에 피해신고를 받는다는 광고를 대문짝만하게 내보냈고, 전단 1만장을 제작해 마을마다 배포했다. 또 지프차에 확성기를 달아 "가족 중에 6.25 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 피해자의 신청을 받습니다"라는 방송을 목이 쉬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접수된 피해자가 354명이었고, 이 신청서는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경북반에 제출되었다. 피해접수 활동의 공은 유족들에게 넘겨졌다. 강창덕은 유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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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창덕 대구매일신문 기자(94세) |
ⓒ 박만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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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960년 6월에 '경산유족회'(회장 김종석)가 결성됐고 8월 7일에는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합동위령제도 치렀다. 위령제에는 경북유족회 이원식을 포함한 임원들이 대거 참여했다. 또 8월 13일에는 코발트 현장을 찾아 유해를 수습했다(물론 2000년도 이후의 유해발굴과는 달리 이때는 현장을 확인하고 수습하는 정도였다).
유족들의 진실규명운동이 순탄하게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8월 7일 경산중앙국민학교에서 열린 위령제에는 경산경찰서 1개 소대의 경찰들이 동원되었다. 경비를 선다는 명분이었지만 주최 측 항의를 받은 경찰들은 학교 뒤편으로 물러갔다. 행사가 끝난 후에는 흥분한 남천면 유족들이 경산경찰서에서 투석전을 벌이기도 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7년 유해발굴보고서 3권 』, 2008).
또 위령제가 열리기 두 달 전인 1960년 6월 6일 저녁에는 당시 경산군 안심면 유족 30여 명이 전쟁 기간에 불법학살을 저지른 전 민보단 부단장 김만석의 집을 습격해 가재도구 20여 만환 어치를 파괴하는 일도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유족 5명이 재물손괴죄로 구속되었다. (<대구매일신문> 1960년 6월 8일자. 노용석,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사』, 2018 산지니에서 재인용)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쿵 쿵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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