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7주기 추모식이 8일 상주 소재 고인의 묘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7주기 추모식이 8일 상주 소재 고인의 묘에서 열렸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11월 8일. 한 달여 정도 이른 참배길이라 그런지 늦가을 날씨는 아주 화창했다. 예년 같으면 기일인 12월 14일에 맞춰 찾던 묘소라 늘 추위와 경사진 눈길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이날은 눈 대신 무성히 쌓인 낙엽 때문에 전전긍긍했다.

서울에서 승합차에 오른 8명의 참배객은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듯 차창 밖을 응시하다가 때로는 잡담과 미국 대선 이야기로 꽃피우며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풍경과 대화에 몰입했다. 2시간 반쯤 걸렸을까. 어느덧 눈에 익은 저수지가 시야에 들어왔고 이어 감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상저수지다. 벌써 묘소 근처 산 입구에 당도한 것이다.

상주의 명물 감나무.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상주의 명물 감나무.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차도에서 산길로 접어드는 곳에 이미 상주에서 곶감 농사를 짓는 전성도 전 전농 사무총장과 그의 동료가 기다리고 있다가 함께 산길로 합류했다. 상주가 고향인 그는 이곳에 줄곧 살면서 서울에서 참배객이 내려오면 길안내를 할 만큼 황태성 묘지기로 자처(?)하고 있다.

눈에 익숙한 좁은 산길을 올라간 차량은 이제 더 올라갈 수 없는 데까지 올랐다가 참배객들을 내려놓는다. 주변이 온통 감나무다. 모두 10명 참배객들의 묘를 향한 행진이 시작됐다.

낫과 갈퀴를 이용해 길을 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낫과 갈퀴를 이용해 길을 내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산길을 오르는 참배객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산길을 오르는 참배객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묘소로 오르는 산길 최초 입구부터 색깔은 바랬지만 무성한 수풀더미로 찾기가 힘들었고, 또 비탈진 산길은 그야말로 추풍에 떨어진 낙엽, 낙엽더미에 속절없이 미끌거렸다. 비교적 젊은 축들은 괜찮겠지만 80대 중반을 넘은 김영옥 선생과 권상릉 선생, 그리고 다리가 편치 않은 권낙기 통일광장 대표에게는 험난했으리라.

다행히도 상주시민인 전성도 일행이 낫과 갈퀴를 가져와 한 사람은 낫으로 나뭇가지를 치고 다른 한 사람은 낙엽을 쓸어 옆으로 제치며 길을 내주었기에 그나마 여차여차 오를 수 있었다. 20여분 정도 올랐을까? 숨이 차올라 다소 헐떡거릴 때쯤 봉분이 보이기 시작한다.

화창한 햇살이 비추는 묘소와 그 주변엔 낙엽이 무성했다. 참배객들은 마치 사계청소를 하듯 참배에 거슬릴만한 낙엽을 치우기 시작했다. 이윽고 최초 대남 밀사 황태성 57주기 추모식이 이날 고인의 묘가 있는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청상리 소재 선산 중턱에서 열렸다.

김영옥 선생이 예를 갖추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김영옥 선생이 예를 갖추고 있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먼저, 고인의 조카사위인 권상릉 선생이 예를 갖추고 추도사 대신 노래로 헌사했다.

김영옥 선생은 “고인은 이 땅에 통일조국을 만들려다가 희생 당하셨다”고는 “선생의 고귀한 꿈을 후대가 현실화시키겠다”며 짧고 명확한 추도사를 했다.

권낙기 선생은 “사람이 둘이면 그림자가 두 개다. 그런데 사람이 둘인데 그림자가 하나일 수 있다”고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는 “업으면 된다. 남과 북은 지금 둘이지만 반드시 하나가 되는 그림자를 만들겠다”며 의미심장한 추모사를 했다.

계속해서 권 선생은 “방금 낙엽에 싸인 경사진 비탈길을 올라올 때 우리 두 일꾼이 낫과 갈퀴로 나뭇가지를 자르고 낙엽을 치우면서 길을 내고 올라왔다”고는 “황태성 선생이 통일의 길을 내는 바로 그 낫과 갈퀴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 우리 후대도 그 길닦음을 본받겠다”고 말했다.

추도식 후 참가자들이 햇빛을 받으며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추도식 후 참가자들이 햇빛을 받으며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이날 참배객들이 많지 않기에 모두가 술을 따르고 예를 갖췄다. 길지 않은 추도식 후 참배객들은 묘소 주변에 옹기종기 앉아 햇빛을 받으며 담소를 나누며 고인을 기렸다.

하산길에 권낙기 선생은 “오늘 참배로 올해 주요 사업을 다 끝내 마음이 편하다”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몸이 다소 불편한데도 그만큼 일을 많이 만들고 다니기에 분주한데, 그나마 이날은 한 달 이른 참배로 일 년 사업의 마무리를 하니 안도감이 놓였나 보다.

참배객들은 내년을 기약하며 점심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향했다.

“죽으러 왔소?”
[미니 인터뷰] 황태성 조카사위 권상릉 선생
황태성 묘 옆에 선 조카사위 권상릉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황태성 묘 옆에 선 조카사위 권상릉 선생. [사진-통일뉴스 이계환 기자]

□ 통일뉴스: 매년 황태성 묘를 찾는다. 올해 소감은?
■ 권상릉: 요즘 황 선생 생각이 많이 난다. 그는 최초 남북교류 밀사였다. 당시에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그걸 시초로 그 후엔 전두환 정권 때부터 남북 밀사가 오갔다. 밀사로 온 사람을 중앙정보부가 살해한 것이다. 매번 생각하지만 너무 잘못됐다.

□ 박정희 정권이 왜 그랬나?
■ 그런데 황 선생은 단심 군사재판에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밀사’라고 전혀 말하지 않았다. 전시 중에도 밀사는 왔다 갔다 하지 않는가. 그래도 처형은 안 당한다. 그런데 내가 그걸 말했다. 내가 재판정에서 황태성은 밀사라는 말을 했다가 구형이 10년이었는데 15년을 언도받았다.

□ 황태성 선생 묘 옆에 또 묘가 있다.
■ 선생의 본 부인 묘다.

□ 이름은?
■ 선산 김 씨라고만 알아 달라.

□ 황 선생과 함께 묻혔다.
■ 부인이 살아생전에 “내가 죽게 되면 남편 묘 옆에다 안장하되 장례를 거나하게 치러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장례식 때 큰 꽃상여를 만들었고, 그 꽃상여가 여기 험한 비탈길을 올라왔다.

□ 황 선생이 1946년 월북했을 때 부인이 함께 갔나?
■ 아니다. 당시 황 선생은 월북할 때 부인과 함께 가지 못하고 둘째아들과 함께 올라갔다. 밀사로 남쪽에 내려왔을 때도 부인을 못 만났다. 황 선생이 중정한테 잡혀 구속되고 나서 부인이 형무소에 면회 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17년 만에 황 선생을 만난 부인의 첫마디가 뭐였냐면 “죽으러 왔소?”였다

 

 

 
저작권자 © 통일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