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열 칼럼] 윤석열의 '비겁함'과 한동훈의 '승부수'가 만났을 때
박세열 기자 | 기사입력 2024.06.29. 05:06:18
박근혜 탄핵이 성공한 결정적인 이유는 '야당 단독 탄핵'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범 보수 세력이 탄핵에 동참하면서 극렬 보수, 즉 '탄핵 반대파'를 고립시키고 '여야 공동 탄핵'의 모양새를 이끌어내 명분을 갖췄기 때문에 뒤탈이나 후유증이 없었다.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사실 핵심 역할을 한 사람 중 하나는 보수 정당 소속으로 국회 측 소추 위원장을 맡아 헌법적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낸 권성동 당시 법사위원장이었다. 정파 이익을 초월한 권성동 법사위원장은 최소한 이 역할에서만큼은 제대로 역사에서 다뤄줄 필요가 있다.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이 200석을 넘기지 못한 것이 아쉽다.' 혹은, '민주당이 제대로 하지 못해서 200석을 못 넘겼다." 같은 상황에서 이 말은 국민의힘 쪽에서 '100석 이하로 떨어질 걸 108석으로 막아냈다'는 버전으로 돌아다닌다. 물론 둘 다 동의하기 어렵다.
민주당이 단독으로 200석을 넘겼다면 어땠을까. 아마 야당 강성 지지자들의 '탄핵 요구'가 분출했을 것이고, 당장 정치적 효능감을 내놓으라 추궁당했을 것이다. 탄핵 가능 의석을 확보한 200석 공룡 야당은 '단독 탄핵'의 유혹에 휩싸이며 앞으로도, 로도 갈 수 없는 상황에서 극심한 내분을 겪게 됐을지 모른다. 아이러니하지만 '200석의 저주'다. 하지만 야당 단독 탄핵은 여러모로 위험하다. 탄핵 명분을 급조했다가 실패한 사례를 우린 알고 있다. 2003년 노무현 탄핵은 비록 민주당 분열이라는 요인이 있었지만 '숫자'만 믿고 밀어붙인 사실상 '야권'의 단독 탄핵이었다. 민심에 어긋난 탄핵이란 건 이듬해 '노무현당(열린우리당)'의 국회 과반 확보로 증명됐다.
가정이지만 이번 총선에 민주당이 200석을 얻었더라도 단독 탄핵은 성공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만약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이번 총선 결과는 '200석의 저주'를 피해 간 민심의 절묘한 의석 배분으로 보는 게 맞다.
탄핵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는 것은, 지금 여당의 전당대회 분위기가 아무래도 묘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그 참모들은 지금 여당 전당대회가 얼마나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징후를 내포한 채 진행되 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대한민국 헌정사 이래로 집권당이 중간 선거에서 108석으로 쪼그라든 건 전례없는 신기록이다. 8석만 이탈해도 거부권이 무력화되고 탄핵은 물론 개헌이 가능해진 정치 지형을 겪어 본 적이 없다. 여당에서 단 한 석의 이탈 여부조차 주목받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권의 '황태자', 한때 검사 중 '조선 제일검'이라고 불렸던 한동훈이 집권 여당의 전당대회에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그러자 여당 당대표 경선이라고는 눈 뜨고도 믿을 수 없는 구도가 확립된다. 전당대회 핵심 이슈가 집권당 소속 대통령의 '범죄 혐의'를 가려내는 특검을 하느냐, 마느냐로 귀결된 것이다. 자당 대통령의 범죄 혐의를 두고 여당내 정치 노선이 분화하고 세력이 재편되고 있다. 반복하지만 이런 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본 적이 없다.
한동훈은 27일자 대구 유력지 <매일신문> 인터뷰에서 채상병 사망 사건에 대해 "공동체를 위해 복무 중 젊은 군인이 돌아가신 사건에 대해 집권여당을 대표했던 한 사람으로서 먼저 깊이 사죄를 드린다"고 했다. 대통령도 이 정도 수위의 사과를 해 본 적이 없다. 한동훈은 "특검법의 목적은 진실규명이다. 공정성이 담보되는 제3자인 대법원장이 특검을 추천하면 불필요한 시비를 없앨 수 있다"며 특검법 자체의 당위성을 선명하게 내세웠다. 단순하게 풀어보면 핵심은 '윤석열 대통령을 수사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집권 여당 전직 법무부장관 입에서 나오고 있다.
그 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은 지엽적인 논쟁들이다. 이를테면 한동훈은 "민주당의 특검법은 반대한다. 선수가 심판을 고르는 불공정한 법안이고, 특검에 무소불위의 권한을 부여하는 위험한 법안"이라고 말하지만 논리적 모순이다. 특검법엔 복수의 특검 후보를 최종적으로 대통령이 임명하게 돼 있다. 이재명의 사법리스크를 두고 법무부장관 시절 한동훈은 '대장동 특검법'에 대해 "수사받는 당사자가 쇼핑하듯 수사기관을 선택할 수 있는 나라는 적어도 민주국가 중에는 없다"고 했다. 이 말을 그대로 돌려주면 범죄 혐의자 윤 대통령은 쇼핑하듯 특검 검사를 골라선 안된다.
한동훈은 또 "민주당이 내 특검법 제안을 받지 않을 것을 천명했지만 정성호 의원 등이 이를 수용하자 하는 등 내부 분란이 생기고 있다"며 '묘수'인 것처럼 말하지만, 나이브한 생각이다. 야당은 오히려 '한동훈조 대통령을 수사하자고 한다'는 명분에 주목하고 벌써 '개혁신당 특검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본회의에서 수정안을 만들어 통과시키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이런 나이브한 정국 전망에서 한동훈 정치의 아마추어리즘은 드러나고 만다.
집권당 대표 경선 최대 이슈를 '대통령 수사'로 만든 것은 한동훈이다. 심지어 한동훈은 당원들의 지지도 받고 있다. 한국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25~27일 1002명 대상 전화면접 조사. 응답률 11.8%. 국민의힘 지지층 308명 대상으로 한 조사는 표본오차 95% 신뢰수준에 ±5.6%포인트.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 홈페이지 참조) 국민의힘 지지층에서 한동훈 선호도는 55%로 나타났다. 압도적이다. 원희룡(19%), 나경원(14%), 윤상현(3%) 다 합해도 과반엔 턱도 없이 부족하다. '대통령이 원희룡을 밀고 있다'는 게 이미 비밀이 아닌데도, 그렇다. 대통령의 힘이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한동훈의 아마추어리즘을 지적할 순 있다지만, 물론 그것을 한동훈의 패착이라고까진 볼 수 없다. 당내 역학구도를 떠나, 채상병 특검의 당위성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것 그 자체로 한동훈은 최소한 자신의 '정치적 진정성'을 대중에게 어필하려 노력하고 있는 셈이니까. 문제는 지금 임기 절반도 채우지 못한 상황 속에서 한때 쥐락펴락하던 국민의힘 내부의 미래 권력간 벌어지는 극한 투쟁을 무기력하게 바라보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이다.
곳곳에 권력 누수가 벌어지고 있다. 민주당이 다음 주에라도 채상병 특검법을 수정해 의결하면 국민의힘은 지도부 선출도 하기 전에 '거부권' 정국에 내몰린다. 이미 한동훈이 '채상병 특검의 당위성'을 여권 내 핵심 이슈로 띄워 놓은 상황에서 당장 재부의안 부결을 위해 '8명 이탈'을 방지해야 한다.
'한동훈계'가 30명이라느니, 17명이라느니 하는 마당인데, 대통령은 집권당이 '대통령 수사'에 찬성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가? 지난해 7월과 8월, 채상병 사건을 둘러싼 모든 통화 기록과 정황 증거가 대통령을 가리키고 있다. 채상병 사건으로 본인의 부하들이 국회 청문회에서 나가 줄줄이 깨지고 있는데, 사건의 진상을 밝힐 기회를 만들 수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대통령의 '비겁함'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점점 지쳐가는 중이다.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의원 연찬회에 가서 술잔을 돌리거나, "똘똘 뭉치자", "거부권을 적극 활용하라"는 식의 공허한 말들 뿐이다.
앞서 장황하게 탄핵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 이유는, 대통령의 범죄 혐의나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것만큼이나, '그 이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핵심은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 즉 '집권 진영'이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 여부다. 대통령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후배가 이제 대통령을 수사하자며 당권에 도전한 것은 보수 진영이 '윤석열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는 어떤 '징후' 같은 것이다. 한동훈의 '정치적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최소한 대통령의 '미래'는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 재보궐선거부터, 지난 4월 총선을 지나오며, 유권자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전부 걷어차 버린 후과는 생각보다 클 것이다. 야권의 결집과 여권의 분열, 격동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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