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오키나와 코자에서 일어난 폭동
이 기사는 한일연대기구 저명활동가가 추천한 기사이다.
번역 : 한희수(코리아국제평화포럼KIPF 국제팀)
1970년 12월 20일의 코자 반미 폭동으로부터 벌써 50년이 지났다. 오키나와시 전후(戦後)문화 자료전시관 <히스토리트 ヒストリート>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기획전 <‘코자 폭동’을 생각하다-그로부터 50년->을 개최하고 있다(1월 30일까지). 또 12월 20일을 목표로 ‘오키나와 아시아 국제 평화예술제 실행위원회’등이 주최해 류큐신보사와 오키나와시의 <뮤직타운 소리 시장>에서 사진전을 개최했다. 신보 1층 광장에서는 12월 12일, MP1)를 본뜬 폐차를 젊은이들이 뒤집는 퍼포먼스도 벌어졌다. 신보와 타임스의 현지 신문 2지는 연일 지면에 그 내용을 다루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게재하고 폭동인지 소동인지, 왜 일어났는지,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는지 등을 물었다. 50년이라는 세월, 반세기가 흘러도 바래지 않고 당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12월 20일의 사건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어떤 배경에서 일어나고 어떤 결과를 초래해 현재에 이르고 있는 걸까.
주1) Military Police의 약칭. 미군기지 내에서의 미군・군속 등의 사건, 사고의 조사, 풍기 위반을 단속하는 것이 임무다.
오키나와 타임즈 <분출한 마그마 - ‘코자소동’ 50년>(中)
콘 이쿠요시(今郁義)씨의 보고에서
현지신문에 게재된 여러가지 논평 중에서 오키나와 타임스 <분출한 마그마 – ‘코자 소동’ 50년>(中)(20.12.17)의 콘 이쿠요시씨 글이, 12월 16일 이토만(糸満)2)의 긴조 토요(金城 トヨ)씨의 교통사고로 인한 죽음을 규탄하는 현민대회, 19일 미사토의 독가스 철거 현민대회, 그리고 그날 밤의 스티커 부착과 당시 경과를 더듬어 20일 새벽부터 동이 틀 때에 이르는 코자 대폭동의 단초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좀 길지만 그 글을 인용하자.
주2) 오키나와 섬 최남단에 위치한 시.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과 일본군의 격전지로 알려진 이토만시에는 평화 기념공원이 자리하기도 한다.
근 한 시간이 지나 마을의 코자 우체국 근처에 이르렀을 때, 군도3)(軍道)를 사이에 두고 반대편 팔레스 호텔 근처 길거리에 2,30명의 인파가 있었다. ‘겟 어웨이, 겟 어웨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고 있는 무리였다. 뭐지 싶었지만 우리도 머지않아 그 사람들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노란 번호판 차를 지키듯 MP가 몰려드는 사람들을 쫓으려고 위압적으로 외쳐댔다. 그러자 사람들 속에서 한 남성이 “차로 사람을 치어 놓고는 뭔가!”라며 달려들었다. 나는 그 때 노란 번호판 차가 사람을 친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남성이 또 “이토만을 아느냐”며 MP에게 덤벼들었다. 엉터리 영어로 MP에게 마구 소리치는 청년도 있었다. MP가 이 사람들의 말을 다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군중의 표정으로 보아 미군이 일으킨 교통사고가 사람들을 화나게 했다는 것만은 짐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주3) 일본 복귀 전의 오키나와에 미정부가 설치하고 유지・관리했던 도로로 군용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등 군사적 관점에서 전 노선이 포장되어 있었다. 일부는 미군기의 비상 활주로 역할도 했으며 복귀와 동시에 국도, 현도로 이전되었다.
차 안의 미국인 남성 세 명과 두 명의 우치난추(‘오키나와 사람’이라는 오키나와말) 같은 여성의 표정은 굳어 있다. 차를 둘러싼 사람들은 늘어나고 보닛 쪽에 있는 몇 사람은 차를 위아래로 흔든다. 커다란 외제차는 이상하게 흔들리고 있다. 현장에 출동한 코자서의 경찰관이 “경찰이 처리할테니 즉시 해산해달라”고 경고했지만 “당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냐”는 군중의 한 마디에 씁쓸한 웃음만 지을 뿐이다.
위아래로, 좌우로 흔들리는 노란 번호판 차에서 미국인들이 MP의 도움을 받아 밖으로 나온다. 그들에게 직접 손을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빈차가 된 노란 번호판 차는 금방이라도 뒹굴 듯이 흔들린다. ‘세-노(하나 둘)!’하는 구호와 함께 넘어간 노란 번호판의 차. 어디선가 “가솔린!”, “성냥!”이라는 소리가 나오자 곧 차의 앞쪽에서 ‘쾅’하는 소리를 내며 불길이 밤 하늘로 치솟는다. 몇 초 동안일까. 순간 정적이 흐른다. 둘러보니 군중의 수는 100명을 훌쩍 넘어 있었다. 우리가 이 상황을 맞닥뜨린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15분일까, 한 시간일까. 친구들과도 이미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천천히, 천천히 차가 다가온다. “노란 번호판이다!”라고 누군가가 외쳤다. 동시에 군중의 물결이 크게 흔들리며 이동한다. 미군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차에서 달아난다. 남자들이 그 차를 밀고 나아가 앞서 불타고 있는 차에 부딪친다. “와” 하고 함성이 터진다. 함성이 신호인 듯 사람들은 몇 무리로 갈라져 길거리에 주차중인 차량 중 노란 번호판만 골라 끌어낸다. 밀면서 달리기 시작한다. 불꽃이 인다. 엔진이 터진다. 교토 관광호텔, 펠리스 호텔에 주차되어 있는 노란 번호판 차도 군도 24호선의 중앙 부근에서 불타오른다. 기묘할 정도의 고요함과 함성이 교차하며 군중은 매우 자연스럽게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미군을 공포에 빠뜨린 노란 번호판 108대의 불길
그 후 남쪽은 미군의 라이캄・하우징 지역에 이르는 시마부쿠로 사거리 방면으로, 북쪽은 고야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여 게이트 통로에서 가데나(嘉手納) 공군기지 제 2 게이트로, 불타는 노란 번호판의 수는 점점 더 늘어갔다. 덧붙여서 복귀 후 ‘노란 번호판’은 ‘Y 번호판’으로 바뀌었지만 당시 미군 군속 관계의 번호판은 노란색으로 아래쪽엔 ‘KEYSTONE OF THE PACCIFIC(태평양의 요새)’라고 써 있었다.
당시 코자 고등학교의 체육 교사였던 아사토 츠구노리(安里嗣則)씨는 “오키나와인은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오늘이야말로 미군을 물리친다”라며 거리에서 호소하고 MP에 투석했다. 그러나 이후 미군 관계 차량을 불지르며 나아가 언덕 아래를 보니, 미군 주택지구 인근에 무장한 미군들이 총을 겨누고 있었다. 아사토씨는 “죽으면 안된다”며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을 말렸다고 한다(타임스 2020.12.21). 미군 보고서에 따르면 오전 1시 35분 ‘폭동’이 발생, 수백명의 무장 미군병을 출동시켰다고 한다)
당시를 회상하며 “전쟁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해방구 같았다”, “혁명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다. 게이트로 향한 사람들은 제2게이트를 뚫고 기지 안쪽으로 진입해 패스 발권소와 미국인 학교 등에 불을 질렀으나 경찰과 무장미군에게 진압되었다. 헬기를 저공 비행시켜 취루탄가스를 발사한 미군에 봉기한 맨손의 시민들은 콜라나 주스 병으로 만든 즉제 화염병과 투석으로 대항했다. 불에 탄 노란 번호판 차는 미국 정부의 보고서에서는 82대라고 적혀있지만 당시 현장의 2km를 3번 왕복하며 불에 탄 차를 세웠던 아라사키 게이코(新崎敬子)씨에 의하면 108대였다고 한다(류큐신보 <여성들의 코자 소동 50년>(2020.12.18)). 현재 니시하라쵸에 사는 아라사키씨는 그 날, 경찰차가 초스피드로 달려 고야 사거리 방면으로 향하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해 현장으로 갔고 현장의 분위기에 사로잡혀 끝까지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고 한다.
타마키 데니(玉城デニー) 오키나와 지사의 인터뷰가 신보의 <코자 소동 50년>(2020.12.16) 기사에 실려 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지사는 비스지스센터 거리(현재의 중앙파크애비뉴)에서 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어머니와 둘이 살고 있었다. 20일 아침 7시경, 친구와 셋이서 고야 사거리 쪽으로 가니 불에 탄 자동차가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오일과 고무 타는 냄새가 주변에 가득해 전쟁이 일어난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복화술사인 잇코쿠도우(いっこく堂)씨는 당시 초등학교 1학년. 모친이 마을에서 <샌드위치 샵 타마키>라는 가게를 하고 있었고 손님의 90%가 미군이었다. 그날 아침 6시경 형과 함께 현장에 가 어른들 틈에 섞여 빈 병과 돌을 던졌다고 한다. 미군은 그 후 외출금지령을 발동. 코자 마을에서 미군들의 모습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잇코쿠도우 어머니의 가게는 빚을 지고 문을 닫았다(타임스 <코자 소동 50년>(2020.12.17)).
이날 밤의 사건은 현지 신문 2지의 1면에 전해졌다. 신보와 타임스 모두 제1보는 <코자 폭동>이었다. 당일 새벽 3시쯤 고등판무관과 함께 일등특기관 슈바르츠씨의 차를 타고 현장을 찾은 램퍼트 고등판무관은 베트남 전쟁의 광경이 겹칠 정도의 소동에 놀라 뒷골목으로 철수했다고 한다. 고등판무관은 이날 tv를 통한 성명에서 이날 밤 오키나와 사람들의 행동을 ‘폭동’, ‘완전한 파괴 행위’라며 ‘Law of the Jungle(정글의 법칙)’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현지 신문의 표현은 다음날부터 ‘코자 소동’으로 바뀌었다. 류큐 신보는 <코자 반미 소동 정치문제로 발전>(12.21), 오키나와 타임스는 <기지 마을 코자에서 심야 소동>(12.20호 외)이라고 보도했다.
전국의 신문은 12월 21일의 지면에서 <오키나와 코자시에서 ‘반미 폭동’. 기지에 난입, 방화. 쌓인 분노 폭발.>(마이니치 신문), <오키나와 코자에서 반미 소동. 미군범죄에 분노 폭발. 기지에도 난입, 방화>(요미우리 신문), <오키나와 코자시에서 반미 방화 소요. 교통사고 처리에 군중 분노. 번화가에 5천명, 부상자 다수>(아사히 신문 오사카 본사)라고 보도해 전국민의 주목을 끌었다.
‘폭동’인가, ‘소동’인가, ‘소요’인가?
‘폭동’인가, ‘소동’인가, ‘소요’인가? 아직까지 정해진 명칭은 없다. ‘소동’으로 보는 사람들의 주장은 “폭동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배자 측의 견해”이지, 미군 당국이 말하는 무질서한 폭력행사 ‘폭동’이 아니라 강압 정치에 대한 정당한 분노의 표명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란 번호판 차를 불태우는 행동은 자제되어 있었고 또 쌓일 대로 쌓인 미군을 향한 시민들의 분노 표출은 미군 개인을 향해 무질서하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가게를 약탈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행동은 ‘반미’라는 점에서 자각적이었다. 특히 흑인 병사를 저격하거나 손 대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노란 번호판 차, MP차량, 가데나 기지 게이트 내 패스 발권소와 미들 스쿨에 대해서는 사정없이 불지르고 파괴했다. 무섭고도 대단한 집단적 폭력행사 아닌가. 미군 당국이 ‘Riot(폭동)’이라고 비난한 것은 두려움의 반영이며 그날 행동이 그만큼의 충격을 상대에게 주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나는 ‘코자 반미 폭동’이라고 부르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오키나와시의 시사 편집 담당자에 따르면 시민들의 “단순한 소동으로 좋은 것인가”라는 강한 항의의 목소리와 미군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잠정적으로 괄호를 달아 ‘폭동’이라고 표현해왔다고 한다. <히스토리트>도 마찬가지다. 그 날의 행동에 ‘소동’은 확실히 너무 가볍다. 현민이 스스로 행동의 의의를 과소평가하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일일 것이다.
‘폭동’도 ‘소동’도 아닌 평가가 있다. 소설 <타카라지마(宝島(보물섬))>의 저자 신토(真藤)씨는 신문(2020.12.20)에 실린 인터뷰에서 “모종의 시민혁명 같다”고 말한다. ‘시민 혁명’, 좋은 말이다. 전후 25년에 걸친 미군에 의한 오키나와 점령과 미군정부지배의 무법, 겹겹이 쌓인 범죄의 축적. 류큐 경찰에 따르면 1960년대 10년 간, 미군・군속에 의한 사건・사고・범죄가 매년 천 건 전후로 기록되어 있다. 베트남전의 수렁 속에서 오키나와 주둔 미군들은 거칠어졌다. 택시 요금을 내지 않고 도망치는 것은 기본. 폭행사건, 교통사고도 일상다반사. 미군정은 이들 미군・군속 가해자를 재판하는 데 있어 일관되게 공평하지 못했고 피해자를 구제하는데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현민은 하나하나의 사건・사고・범죄를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점령군과 미군정에 대한 분노가 마그마가 되어 축적되어 갔다.
코자 폭동은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는 것처럼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권력자의 불합리한 압정이 있을 때는 반드시 민중에 의한 다양한 형태의 반격이 일어난다. 오키나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그마가 폭발한 것일 뿐이다. 만약 같은 사태가 반복된다면 또 마그마는 폭발할 것이다. <히스토리트>의 전시는 끝맺음으로 ‘’코자 폭동’은 오키나와의 분노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적었다.
당시 속해 있던 단체의 전단에 코자 폭동을 ‘대미군실력투쟁’이라고 썼다는 콘 이쿠요시씨는 타임스의 인터뷰(2020.12.13)에서 “미군을 향한 하룻밤의 봉기”라고 말한다. 코자 민중의 미군에 대한 자각적 폭력에 공감하는 논자는 ‘봉기’, ‘궐기’라는 의미를 부여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도 ‘봉기’라고 하는 것은 국가권력의 탈취가 의식화된 것이므로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자연발생적인 봉기로 코자의 중심가를 지배하고 코자를 해방구로 만들어 낸 민중의 권력은 새벽과 함께 사라졌다. 코자 반미 폭동은 하룻밤만의 ‘오키나와 혁명’이었다. 아침을 맞이하자 미군기지에서는 폭동에 참가한 기지 종업원도 미군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출근해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코자 반미 폭동이 일어난 복귀 직전의 상황
당시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은 기정 사실이었다. 12월 20일의 코자 반미 폭동에 앞선 복귀 운동의 축적, 교공 2법 저지 투쟁4), 전군노(全軍労)5)의 거듭되는 파업 등 1960년대 투쟁의 고양을 배경으로, 미군정과 일본 정부에 대해 오키나와의 분단 지배를 깨부술 때까지 쌓아 온 힘의 관계는 현민 한사람 한사람의 마음에 ‘오키나와를 얕보지 말라’고 하는 강한 자각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주4) 교직원의 정치활동에 제한을 가하여 복귀 투쟁을 봉쇄하려는 권력 측의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교직원회가 100% 연가투쟁을 조직하고 입법원을 포위하여 법안을 유보시켜 실질적인 폐안을 쟁취함
주5) 전오키나와군노동조합의 약칭. 전군노 투쟁은 1971년 미군의 오키나와 노동자 대량해고에 맞선 오키나와 미군기지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수차에 걸쳐 대항.
코자 반미 폭동의 다음해인 1971년 11월 10일에는 오키나와의 첫 역사적 총파업에 10만 명이 참가했고 궐기 집회가 열린 요기 공원에는 수 만명의 인파가 결집해 짓챠쿠(勢理客)의 미군기지까지 데모 행진을 이어갔다. 당시 요기 공원은 지금처럼 울타리나 화단의 경계가 정비되어 있지 않은 그저 탁 트인 광장이었기 때문에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집회에 알맞았던 것이다.
미군정 말기, 복귀 전야의 오키나와 정세는 수온(水温)에 비유한다면 들끓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배자처럼 미군의 음주 운전 교통사고 사망사건을 무죄로 만드는 미군들. 인권 유린을 거듭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미군들. 심지어 핵무기와 독가스를 현민이 모르는 사이에 대량으로 반입해 독가스 누출 사고를 내도 책임을 지지 않는 미군들. 이러한 미군에 대한 강한 분노가 정치적인 자신감으로 뒷받침되어 현민의 마음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12월 20일 코자 민중에 의한 미군에 대한 철저한 폭력 행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좌익이 군중을 선동해 일으킨 폭동’으로 파악하고 류큐 경찰은 ‘소란죄’를 적용해 주모자 색출에 혈안이 됐다. 그 결과 51명이 ‘주모죄’로 송치되어 10명이 기소됐으나 ‘소란죄’를 입증하지 못해 4명이 ‘방화’, ‘기물파손’으로 집행유예 유죄판결을 받았다(1975.6.17, 나하지법). 네 사람은 그 자리에 있던 수 천 명, 아니 오키나와 현민 100만 명의 대표이자 대신이었다. 복귀협6)은 끝까지 이 재판을 곁에서 지지했다.
주6) 오키나와 저항운동의 모체가 된 ‘오키나와 현 조국 복귀 협의회’의 약칭.
가데나 경찰서 경장 C・K씨는 ‘소요죄’ 수사를 맡게 되어 법을 공부했다. ‘수괴, ‘주모자’, ‘실행범’, ‘사람의 수’, ‘조직화’, ‘무기 종류’등 소요죄의 키워드가 ‘사람의 수’를 제외하고는 이 사건에 해당되지 않았다. 특별한 지도자가 없고 모두 맨 손으로 무기도 없어서 소요죄는 적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경장은 “진상을 규명해 마땅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 수사관의 심리”라면서, 반면에 우치난추로서 마음 속 어딘가에 ‘시타히햐(‘잘했다’는 오키나와 말)’라는 감정도 있었다고 말한다.
NHK의 ETV 특집 <오키나와가 불탄 밤 ~코자 소동 50년 후의 고백~>이 2020년 12월 19일에 방송되었다. 콘 이쿠요시씨는 이 방송에 출현해 그 날 밤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사실대로 고백하며 노란 번호판의 차를 5, 6대 불태웠다고 했다. ‘소란죄’, ‘방화’, ‘흉기준비집합죄’등으로 범죄시되는 마당에 “노란 번호판 차를 뒤집었다, 불태웠다, 투석했다”고 고백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다. 50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그 날 밤의 행동을 증언한 그는 그 이유를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 체포・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은 4명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연결된다”고 말했다.
현재에 이르는 코자 반미 폭동의 충격
코자 반미 폭동의 충격은 현 안팎의 우치난추에게도 큰 힘을 미쳤다. 당시 오사카에 있던 킨죠미노루(金城実)씨는 사건의 소식을 접하고 “시타이햐! 우치나!(‘잘했다! 오키나와!’의 오키나와말)“라고 엉겁결에 외쳤다고 한다. 킨죠씨가 영혼의 조각가가 될 결의를 굳힌 것도 이 사건 때문이었다고 하며 그는 타임스 논단에 ‘오키나와전과 미군 지배에 대한 저항의 역사. 자기결정권을 향한 선구적 역할을 짊어진 것이 코자 사건 아니었던가. 민중의 저항이야말로 비폭력 불복종의 ‘봉기’는 아닐까.(2020.12.16)’라고 적었다.
코자 반미 폭동은 일본과 미국, 양 정부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토록 큰 폭동에 미군은 무장 미군을 출동시켰으나 무력 진압은 하지 않았다. 당시 발사된 총은 실탄으로 손등을 스친 남성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군중을 해산시키려고 MP가 허공을 향해 쏜 것이었다. 만약 미군이 진압에 실탄을 사용하겠다는 선택을 했더라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참극을 낳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핵 반환, 기지 자유 사용 반환’을 은폐하는 사토 총리와 미국의 기만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미 1년 반 후에 오키나와 반환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미군도 직접 진압을 삼가하고 있던 것일 게다. 만일 이 폭동이 1950년대에 일어났다면 총검과 불도저 폭력 지배의 절정에 있던 미군은 ‘피의 탄압’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미군은 오키나와 현민의 반(反)기지 투쟁에 대한 단속을 복귀 후 일본 정부의 역할로 선택했고, 현민 또한 본토 복귀를 통해 오키나와현으로 편입하고 거기에서 기지 철거로 가는 전략을 선택했다. 그리고 현재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오키나와의 투쟁 구도는 코자 반미 폭동으로부터 이어진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202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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