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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남주는 왜 재벌집 담장을 넘었나

[손호철의 발자국]3. 전남 해남 : '무장강도'를 찾아서

개인적으로 국내에서 제일 좋아하는 여행코스는 강진과 해남이다. 글이 막히거나 세상 돌아가는 것이 답답하면 차를 몰고 강진으로 달려가 '뿌리의 길'을 지나 다산초당으로 올라간다. 초당을 내려와 강진시장서 귀리밥을 먹은 뒤 해남의 땅 끝으로 달려가 산꼭대기에 위태롭게 자리 잡고 있는 초미니 암자 도솔암에 올라 남해바다를 바라보면 속세의 모든 번뇌를 잊게 된다.


 

다시 서쪽으로 차를 달려 진도 앞바다에 가면 명량대첩의 울둘목이 나온다. 우수영의 진도대교 밑에서 눈을 감고 울둘목의 회오리바다가 내는, 울부짖는 것 같은 소리를 듣고 있으면 온몸으로 느껴지는 이순신의 고독과 민중들의 처절한 신음소리, 분노에 찬 함성소리가 들려온다.


 

마지막으로 찾는 곳은 '무장강도'의 생가다. 현대사 답사에 "웬 무장강도냐?"고 의아해할 것이다. 거기에는 사연이 있다. 그 무장강도의 이름은 김남주(1946~1994)다. 그렇다. 시인과 무장강도.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조합이지만, 분단체제가 최종 봉인된 1953년 후 이 땅의 시인 중, 아니 예술가중 가장 '실천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김남주는 무장강도의 전력을 가지고 있다.  


 

▲ 전남 해남에 있는 '민족시인', '혁명시인' 김남주의 생가 ⓒ손호철
▲ 김남주 생가 바로 앞의 풍경. 해남 농촌 가난한 농가에서 자란 그는 그 뿌리를 잊지 않았다. ⓒ손호철

해남읍에서 5킬로미터 떨어진 삼선면 봉학리 마을회관 앞에 위치한 김 시인의 생가에 들어서면 상징 같은 굵은 뿔테 안경을 쓴 그의 동상과 여러 시비들이 맞는다. 그 시비들 사이로 보이는 시인의 생가에는 어울리지 않는 작은 건물이 있다. 흰색으로 칠해진 이 투박한 건물에는 앞쪽으로 난 작은 창에 철막대기들이 몇 개 설치되어 있다. 김 시인이 살던 감옥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 김남주 생가에 있는 김남주 시인의 흉상 ⓒ손호철
▲ 생가 뒷편에 만들어놓은 감옥의 모형. 이 같은 감방에서 김 시인은 근 10년을 보내며 결국 병을 얻었다. ⓒ손호철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호남의 인재들이 다니던 광주일고에 들어간 그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기대를 잔뜩 받았지만, 획일적인 입시교육에 실망해 자퇴했다. 검정고시로 전남대에 들어가서도 가족들의 기대와 달리 운동권이 된 그는 유신에 저항해 지하신문을 만들어 배포하다가 감옥살이를 했다. 그리고 해남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시인이 됐다. 그는 가족, 특히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자신의 심정을 <그리고 나는>에서 다음 같이 노래했다.


 

그러나 나는 / 면서기가 되어 / 집안의 울타리가 되어 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하는 금판사가 되어 / 문중의 자랑도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한 곳 / 착취와 억압이 있는 바로 그 곳에 (이하 생략)


 

▲ 김남주 소개돌 위에 핀 붉은 코스모스 잎이 뜨겁게 살다 처연하게 진 그의 삶을 상징하는 것 같다. ⓒ손호철

유신 말기인 1978년 12월부터 강남의 부유층들의 집에 강도사건이 연이어 발생했다. 1979년 4월 27일 아침 10시, 당시 재벌 2세들의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가 된 '7공자'들의 한 명으로 알려진 최원석 동아건설 사장집에 3인조 무장장도가 침입했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재빨리 출동해 격투 끝에 주범은 잡히고 두 명은 도주했다. 도주한 두 명 중 한 명이 김남주 시인이었다.


 

수사팀에는 김근태 전 의원을 고문한 '남영동의 저승사자' 이근안이 있었다. 그는 최 씨 일가로부터 강도들이 '혁명군자금'을 운운했다는 진술을 듣고 연이은 강도 사건이 단순한 강도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고 이를 추적해 이 사건이 비밀조직인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의 전위조직인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의 소행인 것을 밝혀내고 남민전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결국 김 시인은 남민전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5년을 선고받아 생가에 지은 작은 감방 같은 감방에서 9년 3개월을 살다가 민주화가 되면서 형집행정지로 1988년 석방됐다. 놀라운 것은 김 시인이 쓴 510편의 시 중 360편이 감옥에서 쓴 것이라는 사실이다.


 

▲ 김남주의 시 '자유', '사랑은'을 새겨놓은 시비와 대나무숲이 조화롭다. ⓒ손호철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지배하던 1930년 파시즘 시대에도 집필을 허용해 공산당 당수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옥중수고>라는 불후의 명작을 썼다.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소위 민주화가 된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초기까지도 감방에서 펜과 종이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했다. 김 시인은 우유를 싼 못을 갈아 은박지에 쓰거나 연필심을 구해 화장지에 어렵게 쓴 시를 더 어렵게 밖으로 내보냈다.


 

▲ 김남주의 시집인 <진혼가>. 그는 감옥에서 은박지에 못을 갈아 시를 써서 몰래 밖으로 내보냈다.

그는 한국시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강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의 '종과 주인'은 충격적이다.


 

낫 놓고 ㄱ자도 모른다고 

주인은 종을 깔보자 

종이 주인의 목을 베어버렸다 

바로 그 낫으로


 

김 시인은 이처럼 뜨거운 열혈투사였지만, 고문과 오랜 감옥 생활에서 얻은 병으로 49살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두어야 했다. 도대체 남민전은 무엇이고, 왜 김남주는 무장강도 행위에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 이 모두는 유신이 낳은 비극이다.


 

박정희 정권은 유신 선포 후에도 민청학련 등 학생들의 저항이 일어나자 이를 짓밟기 위해 1960년대에 무리하게 이들을 기소했다. 문제가 됐던 대구 지역 혁신 세력인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조직 재건을 위해 재건위를 만들었다고 조작해 핵심인사들에 사형선고를 내렸고 대법원 판결 직후 사형을 집행했다(이에 대해서는 '손호철의 발자국' 27회 '대구 인혁당', <한국일보> 2021년 2월 8일자 참조).


 

국제법학자협회가 '사법사상 가장 암흑의 날'이라고 평한 이 사건은 민주화 후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조작사건으로, 박 정권은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해 사형집행 후에도 가족들에게 사체를 돌려주지 않고 화장을 하는 반인륜적인 행패를 부렸다.


 

"민주화를 위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 박정희의 오른 팔인 중앙정보부장으로 박정희를 사살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이다. 박정희의 심복의 심정이 그러했으니, 민주화운동 세력, 특히 인혁당의 동지들의 심정은 오죽 했겠는가?
 

 

인혁당의 동지로 1차 사건 때 옥살이를 했으나 민청학련 때는 도주해 사형을 피한 이재문은 동지들의 사형 소식에 날로 심해지는 유신의 횡포를 목격하고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1976년 2월 또 다른 지하당이었던 통혁당 관계자 신향식, 남조선혁명전략당 김병권과 만나 유신을 끝장내고 우리 사회를 제대로 민주화하기 위해서는 남베트남해방과 베트남통일의 기초가 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과 같은 조직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남민전을 조직하기로 합의했다.


 

김남주 시인으로부터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 사건 발표 당시 한 대기업의 파리주재원으로 근무 중이어서 다행히 체포를 피하고 정치적 망명을 신청해 택시기사로 일했던 이야기를 나중에 <나는 파리의 택시운전사>라는 베스트셀러로 쓴 홍세화, 이후 보수 정치인으로 탈바꿈해 이명박의 오른팔이 된 이재오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 등이 합류했다.

 

이들은 유신 붕괴 직전 체포되어 10‧26, 5‧18 등의 격변 속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형 등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재문은 81년 옥중 병사하고 신형식은 82년 사형이 집행됐다. 이근안은 이후 잡혀온 시국사범들에게 이재문이 옥중 병사한 것은 자기의 고문 때문이라며 겁을 줬다고 한다.

 

 
▲ 남민전 재판 장면. 이재문이 발언을 하고 있다. ⓒ의문사위원회 자료사진
▲ 남민전의 리더였던 이재문의 묘소는 모란공원 묘지의 민주민족열사 묘역에 자리잡고 있다. ⓒ손호철

검찰은 남민전에 대해 김일성 지시를 받지 않았지만 북한의 대남간첩사건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남민전은 북괴에 지시에 의한 남한의 혁명세력이 아니라 남한 출신 인사의 자주적 혁명단체"이고 '북한과 접촉이 이루어질 경우 대등한 입장에서 접촉한다'는 것이 공식적 입장이었다. 즉 통혁당 등 과거의 지하조직들과 달리 북한과 연계되지 않는 독자적인 조직이었다. 보수언론들도 과거와 달리 '자생적 공산주의집단'인 '코레콩(코리안 베트콩)'이 등장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사실 남민전의 강령은 당시 민주화운동으로 볼 때는 다소 급진적일 수 있지만, 80년대나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차라리 '온건한' 내용이었다. 남민전의 10대 강령은 1. 국제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체제와 그 앞잡이 박정희의 유신 독재를 타도하고 민족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정권 수립, 2. 폭넓은 진보적 민주정치 실현, 3. 민족자주적인 자립경제 수립, 4. 경자유전 원칙에 의한 토지개혁 단행, 5. 남녀평등 실현, 지방색 타파, 6. 민족자주적 교육 실현과 민족문화 계승발전, 7. 국가와 인민을 보위하는 군대 건설, 8. 평화와 중립의 자주외교 실현, 9. 7‧4남북공동선언의 원칙과 토대 위에 조국의 평화적 통일 촉진, 10. 일체의 침략전쟁 반대, 세계평화 옹호이다. 

논쟁이 된다면 투쟁 방식이다. 남민전은 유신에 반대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를 만들어 여러 차례 배포했다. 그러나 '상식'을 넘어선 유신과 싸우기 위해서는 이 같은 전통적 방법 이외의 '비상한 방법'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예비군훈련장에서 소총 1정을 빼돌려 비축했고 혁명군자금 마련을 위해 무장강도와 같은 '비전통적'인 방식을 채택했다. 또 인혁당재건위 사형수 가족으로부터 8인의 속옷을 받아 그것으로 해방 직후 여운형이 만들었던 조선인민공화국(인공)의 인공기를 닮은 깃발을 만들었다.


 

하지만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과 보상심의원원회는 유신이라는 당시 상황, 즉 "암울했던 폭압적 상황"을 고려할 때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며, 이미 사망한 이재문 등 3명과 신청을 하지 않은 홍세화, 이재오 등은 제외한 김남주 등 2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정부의 판정이 인정하듯이, 남민전과 무장강도는 유신이 얼마나 양심적 지식인들을 극한으로 몰고 갔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일종의 게스트하우스로 운영하고 있는 김 시인의 집을 나서자 무장강도까지 불사했던 열혈투사 김남주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셋이라면 더욱 좋고 둘이라도 같이 가자 

앞서 가며 나중에 오란 말일랑 하지 말자 / 둘이면 둘 셋이면 셋 어깨동무하고 가자 

네가 넘어지면 내가 가서 일으켜주고 / 내가 넘어지면 네가 일으켜주고 

해방의 길 통일의 길 가시밭길 하얀 길 / 가다 못가면 쉬었다 가자 

아픈 다리 서로 기대며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


 

▲ 김남주의 '가장 따뜻한 시'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의 시비 ⓒ손호철
 
손호철

화가를 꿈꾸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로 진학했다. 독재에 맞서다 제적, 투옥, 강제 징집을 거쳐 8년 만에 졸업했다. 어렵게 기자가 됐지만, '1980년 광주 학살'에 저항하다 유학을 갔고 서강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일하며 진보적 학술 활동과 사회운동을 펼쳐왔다. <국가와 민주주의>, <한국과 한국 정치>, <촛불혁명과 2017년 체제> 등 이론서와 <마추픽추 정상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보다>, <레드 로드-대장정 13800KM 중국을 보다> 등 역사 기행서를 냈다.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111835323900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1118353239001#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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