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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열전⑥] 31년 철도 노동자 김재하 “열차 운전실에서 풍경 보던 행운도 끝이네요”

현장노동자로 돌아가려고 전노협 건설 뒤 철도청 입사··· 민주노조 위해 뛴 31년

기관사 승무중인 김재하ⓒ김재하 제공

“오늘 새벽 4시 출근, 경부선 마지막 승무를 마쳤다.
기관차 운전실의 높이가 2m30cm 정도라 저 멀리까지 시야가 확 트인다.
객실에서 보는 차창 밖 풍경과는 다르다.
부산역을 발차한 열차는 경부선 물금에서 밀양까지 낙동강과 함께 간다.
저 멀리 산자락에 유달리 연두빛은 대나무 숲이며 희끗희끗한 뭉치는 밤꽃들이다.
우리 강, 우리 산. 참 좋다.
매화에서 시작하여 저 멀리 산자락 마른 가지 사이 진분홍 진달래.
산수유, 개나리, 벚꽃, 라일락, 배나무, 사과나무, 오동나무, 아카시아, 이팝나무.
오늘은 저 집 뜨락의 석류나무 담벼락 능소화가 제법이다.
봄 내내 꽃 잔치이다.
꽃잔치는 이파리가 나기 전부터 시작하여 진녹색 산과 들에서 계속된다.
희한한 게 피는 시기마다 꽃 색이 비슷비슷하게 닮아있다.
분홍, 노랑, 흰색, 보라, 여름이 다가올수록 붉은색이 많다.
눈 호강 31년이 며칠 남지 않았다.”

철도 노동자 김재하는 정년퇴직을 코 앞에 둔 지난 6월 18일 경부선 마지막 승무를 마치고 SNS에 글을 올렸다. 김재하는 1990년 철도청에 입사해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 배치된 뒤 철도 노동자로 31년 동안 일했다. 기관사로 일해온 시간을 지나 정년퇴직한 철도 노동자 김재하를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교남동 한국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6월 30일 정년퇴직 후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로 활동하기 위해 곧바로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철도 노동자 생활을 마치고
삶의 변곡점에 서다

“1990년 7월에 철도청에 입사했어요. 그런데 정년퇴직 후에도 활동을 계속하니깐, 특별히 그만둔다는 느낌이 들진 않아요. 그래도 마무리할 때가 되니깐 30년 넘게 잘 살았는지, 활동을 잘했는지 조금은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60년생 79학번으로 올해 환갑이에요. 이 나이쯤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지금이 삶의 변곡점으로 느껴집니다. 삶의 절반을, 제 청춘의 대부분을 보낸 철도를 떠나는 거잖아요.”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김재하. 2021.07.03ⓒ김철수 기자

철도 노동자로, 노동운동가로 살아 왔던 시간이 일단락되고, 활동은 계속되지만 활동하는 장은 달라지는 변화를 그는 ‘삶의 변곡점’이라고 말했다. 김재하는 지난 1월 정년을 불과 6개월여 앞두고 철도 현장에 복귀했다. 철도 일선을 떠나 철도노조 부산본부장으로 2년을 일하고, 민주노총 부산본부에서 8년 동안 전임으로 일한 뒤 10년 만의 복귀였다. 지난해 민주노총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민주노총이 위기를 딛고 새로운 지도부를 선출하는 발판을 마련하고 현장으로 돌아온 그에게 6개월은 짧지만, 소중한 시간이었다. 10년 동안 바뀐 시스템을 공부하고, 견습 승무를 거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와 떨리는 마음으로 열차 운전실에 올랐다.

“마지막 운행을 나서며
이제 운전실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은 끝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실에서 보는 풍경은 너무 좋아요.
기관사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혜이고, 행운이에요.

“짧은 시간이지만,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시간이 지나면 ‘승무하고 싶어도 못하는구나’하는 생각에 너무 소중한 시간이라고 느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네요.”

소중했던 6개월은 쏜살같이 지나갔다. 지나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은 그에게 남았던 가장 큰 아쉬움은 철도 기관사만이 느낄 수 있는 행운을 이젠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행운은 그가 “눈 호강 31년”이라고 표현했던 벌판을 앞서 달리며 그 누구보다 계절을 먼저 만나는, 기관사들에게 하늘이 준 선물이었다.

기차 자료사진ⓒ양지웅 기자

“마지막 운행을 나서며 이제 운전실에서 이런 멋진 풍경을 보는 것은 끝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운전실에서 보는 풍경은 너무 좋아요. 기관사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혜이고, 행운이에요. 운전실이 꽤 높아서 쫙 뻗어 있는 선로가 멀리까지 보여요, 700미터마다 신호기가 있어 그걸 살피며 운행을 하는데 그렇게 달리다 보면 누구보다도 빠르게 계절을 느끼고, 만나요. 겨울이 오는 것도, 꽃피는 봄이 오는 것도 가장 먼저 느끼거든요. 그리고, 일반인들이 보기 힘든 절경도 많이 봤어요. 예를 들면 해 뜨는 풍경이 대표적이에요. 부산 해운대에서 송정 사이에 있는 동해남부선 구간에 웨딩 촬영도 많이 하는 명소가 있어요. 경주에서 출발해 동해로 가는 새벽 열차가 해 뜰 때쯤 그 구간을 통과하는데 말 그대로 절경이에요. 일부러 보고 싶어도 못 보는 풍경이에요. 기관사를 그만둔다니 ‘이제 그런 풍경을 볼 수 없겠구나, 계절을 먼저 만나는 행운도 이제 끝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노협이 만들어지자마자
그해 몇 개월 시험을 준비해서
철도청에 들어갔어요.
현장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거든요.”

남들보다 먼저 계절을 만나는 행운의 직업인 기관사로 그가 일하게 된 건 노동 현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부산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김재하는 그의 선배들과 동기들이 그러했듯 공장 노동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1986년 부산 사상공단에 있던 알루미늄 주물 공장인 남일금속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공장을 떠나 부양노련(부산양산지역노동조합총연합) 교육선전 국장을 맡아 1990년 1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이 만들어질 때까지 활동했다. 하지만, 노동단체 간부 생활이 길어지면서 현장노동자로 일하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전노협이 만들어지자마자 그해 몇 개월 시험을 준비해서 철도청에 들어갔어요. 간부 생활을 오래 하니깐 시간이 지나면서 현장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커졌어요. 현장노동자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굴뚝 같았거든요.”

지난 3일 서울 서대문구 진보연대 사무실에서 민중의소리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철도노동자 김재하. 2021.07.03ⓒ김철수 기자

1990년 7월 철도청에 입사한 그는 4주 동안 교육을 받은 뒤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 배치돼 기관조사(부기관사)로 일을 시작했다. 철도에 대해 아직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현장에서 부딪치며 기관사 업무를 하나둘 몸으로 익혔다.

“기관조사는 기관사를 보좌하면서 기관사 업무를 익혀요. 기관사들은 선로를 외워야 하거든요. 객실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선로는 곡선도 많고, 오르막 내리막도 있어요. 곡선 코스마다 제한속도가 있고, 노선을 운행하려면 선로 상황을 눈감고도 그릴 수 있어야 해요. 거기에 기관차가 화물열차일 때와 여객열차일 때 운전법도 서로 달라요. 그런 과정을 기관조사를 하며 배우는 거예요. 또한, 안전 때문에 꼭 2명이 타야 합니다.”

햇병아리 기관조사 시절
열차 탈선으로 울산 태화강 추락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에요”

1991년 8월 입사 1년이 갓 넘은 아직은 햇병아리였던 김재하에게 아찔했던 순간이 있었다. 열차운행 중에 큰 사고가 난 것이다. 기관조사로 일하던 당시 동해남부선 열차운행을 하다가 울산 명촌철교에서 탈선해 태화강에 떨어진 것이다. 당시 사고는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사고였다.

1991년 8월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당시 사고 기사. 기사 본문엔 김재화라고 이름이 틀리게 나와 있다. 당시 사고로 김재하는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왼쪽은 당시 신문기사. 오른쪽은 울산시 블로그에 있는 명촌철교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울산시청 블로그

“기관조사로 일할 때예요. 과적 트레일러가 지나가면서 철교 아랫부분에 충돌했어요. 당시는 휴대전화도 없고, 신호시스템도 전자연동도 아니어서 기관사는 사고가 난 줄 알 수 없었어요. 트레일러 기사는 연락하려고 자리를 떴고, 우리는 반대 방향에서 운행하고 있었는데 선로가 휜 걸 보고 뒤늦게 제동을 했지만, 강물에 떨어졌어요. 그나마 화물열차여서 승객이 다치진 않았고, 속도도 줄어들었고, 열차가 연결된 상태에서 기관실이 있던 부분만 반쯤 물에 빠져 피해가 적었어요. 그러나 기관사와 제가 태화강에 떨어져서 크게 다치는 바람에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했다 복귀했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에요.”

김재하가 철도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철도 노동자들은 철도청 소속의 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직종은 아니었다. 당시 공무원은 박봉에 시달렸기 때문에 인기가 없었다. 월급은 적었고, 노동조건도 열악했기 때문에 대졸자들은 지원을 꺼렸다. 그가 입사할 당시 부산기관차승무사업소에서 일하던 700여 명 가운데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을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열차운행 시간에 따라 근무가 이뤄지는 교번근무여서 출퇴근 시간이 불규칙했어요. 거기에 노동시간도 월 240시간으로 길었어요. 요즘은 월 165시간이거든요. 지금보다 한 달에 75시간이나 더 일했어요. 더구나 당시 기관차는 열기와 냉기가 그대로 전달되는 구조였고, 냉난방도 안 됐어요. 엄청난 소음이 나는데 방음이 안 됐어요. 그래서 소음성 난청에 시달리는 기관사들이 많아요. 지금 그렇게 일하라고 하면 아마도 폭동이 일어날 거에요.”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근로조건에 시달렸지만, 철도 노동자들의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무기인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의 편에 서지 않았다. 당시 철도청은 공무원 조직이었지만 노동조합이 존재했다. 공무원 조직 가운데선 철도청과 우편을 담당하는 체신부만 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 철도노조는 사용자인 철도청의 입장만 대변하는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끊임없이 받았다.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했던
어용 철도노조의 굴욕적인 역사

철도노조가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다. 철도노조는 해방 후 우리나라 노동운동을 태동시킨 조직이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이 조직한 총파업을 주도했던 주력부대였다. 이에 미군정과 우익 청년단은 전평을 공격했고, 철도노조도 당시 서북청년단 등 우익 출신 간부들에 의해 장악당했다. 철도노조는 1947년 우익 청년단들이 주도해 만든 대한독립촉성노동총동맹(약칭 대한노총) 산하 조직으로 바뀌었고, 철도노조 강령엔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한다는 구절이 담기게 됐다. 이후 이 구절은 57년이 지난 2004년에서야 개정을 통해 철도노조 강령에서 빠졌다.

1945년 11월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창립대회 장면. 단상에 미국, 영국, 소련 등의 국기와 함께 태극기가 걸려 있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라는 구호도 보인다. 철도노조는 당시 전평의 주축 세력 가운데 한 곳이었다.ⓒ기타

철도노조가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하며 ‘어용노조’를 50년 넘게 이어갈 수 있었던 건 ‘3중 간선제’ 때문이었다. ‘3중 간선제’는 세 번 간접선거를 거쳐서 철도노조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다. 각 지역 지부 조합원들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이 각 지역본부 대의원을 뽑고, 그 대의원들이 다시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을 뽑아서, 그 대의원들이 위원장을 선출하는 제도다. 당시 조합원은 3만 명이 넘었지만, 노동조합 위원장을 선출할 대의원은 93명에 불과했다.

“간접선거로 뽑히다 보니 조합원들은 단협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노조가 어떻게 활동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이런 현실을 바꾸려고 노조에 민주적으로 활동하라고 요구하면 오히려 노조에서 해당 조합원을 징계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저항하면 아예 조합원을 제명했습니다. 저도 당시에 규율을 위반했다고 징계당한 적이 있어요. 이런 게 다 어용노조의 전형적인 수법이에요. 징계를 당하면 출마를 못 하거든요. 민주파를 거세하기 위한 용도로 징계를 활용한 거지요.”

1988년과 1994년
기관사들의 파업으로 뿌린
민주노조의 씨앗

이런 철저한 견제와 방해 속에서도 자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철도 노동자들은 꿈틀거렸다. 노조 지도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기관사들이 독자적으로 나서 파업을 조직하는 등 격렬하게 투쟁했다. 그렇게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씨앗은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제가 입사하기 전인 1988년에 기관사들이 파업에 돌입했어요. 일종의 불법 파업이었습니다. 노조에서 공식적으로 쟁의권 얻어서 한 파업이 아니었거든요. 당시 기관사들이 서울에서 부산까지 교대 없이 운전해야 할 정도로 열악했던 근무 환경을 바꾸고, 근로기준법을 준수해 초과근무수당을 제대로 지급할 것 등을 요구하며 싸웠어요. 그런데 깨졌습니다.”

당시 1988년 올림픽을 50여 일 앞두고 벌어진 파업을 전두환 정권은 강경하게 진압했다. 곧바로 전국의 농성장에 전투경찰을 투입해 1,653명이 연행됐고, 파업지도부 11명이 구속됐으며, 3명이 파면됐다. 무참하게 깨졌지만, 이때의 투쟁은 1989년 5월 훗날 민주노조의 토대가 된 전국기관차협의회(전기협) 탄생으로 이어졌다. 전기협은 1994년 서울지하철노조, 부산교통공단노조와 함께 기차, 지하철 총파업에 나섰다.

1994년 6월 24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철도 파업 기사ⓒ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94년엔 전기협이 파업에 나섰어요. 철도와 서울지하철, 부산지하철이 함께 변형근로제 철폐를 요구하며 싸웠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탄력근로제 철폐를 요구한 거예요. 서울 지하철하고, 부산지하철은 합법노조였고, 철도는 기관사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었지만, 노조 조직은 아니었어요, 이 세 주체가 모여 파업을 했습니다. 제가 있던 부산에선 부산지하철과 같이 파업했는데 저도 당시 간부로 일하고 있었어요. 당시에 저와 함께 있던 부산기관차 소속 동료들이 10명이나 파면됐어요. 아마 전국에서 가장 많이 파면 됐을 겁니다. 동료들이 잘려나가는 걸 보면서 모두들 철도노조를 민주화하지 않고는 우리들의 초보적 권리도 얻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철도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철도노민추)를 만들고, 노조 민주화에 나섰어요, 저도 그때 징계를 당했습니다. 파면 동지들은 이후 10년이 지나 복직을 했고요.”

철도노조 민주화에 나선 노동자들
어용노조를 지탱해온 토대인
‘3중간선제’를 ‘직선제’로

1995년 철도 노민추가 만들어진 뒤 철도노조 민주화 투쟁은 본격화됐다. 1996년 철도노조가 대의원대회에서 평소 1%인 조합비를 상여금 지급한 달에는 2% 징수하도록 인상한 것에 반발해 투쟁을 조직하는 등 여러 활동에 나섰다. 아울러 어용노조를 지탱해온 토대인 ‘3중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꾸는 투쟁에도 본격적으로 나섰다.

“1999년과 2000년 철도노조 직선제 쟁취를 요구하며 격렬하게 싸웠어요. ‘3중간선제’로는 민주노조가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에요. 당시 투쟁 과정에서 저도 1년 넘게 부산에서 아무 연고가 없는 동해 지역으로 일종의 유배를 당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제가 동해에 있던 2000년 1월에 기대하지 않았는데 대법원에서 ‘3중 간선제는 무효’라는 판결이 나오면서 철도노조 직선제의 길이 열리게 됐어요.”

2001년 열린 철도노조 첫 직선 선거에서 민주후보인 김재길 위원장이 당선되자 환호하는 철도 노동자들. 사진은 철도노조 창립 기념영상에서 캡쳐한 장면이다.ⓒ유튜브 캡쳐

2000년 1월 14일 나온 대법원의 ‘3중 간선제 무효’ 판결은 1996년 철도 노민추가 조합비 부당 인상에 맞서 싸웠던 투쟁과 연관이 있다. 당시 조합비 인상 반대 투쟁 과정에서 철도 노민추 소속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 1996년 5월 전국철도노조가 ‘96년도 전국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보선하고, 조합비 납입방법 등을 개정한 것이 무효라고 주장했다. 간선제에 의한 전국대의원 선출 방식 등이 ‘대의원을 조합원의 직접·비밀·무기명투표에 의해 선출’하도록 규정한 노동조합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위법한 방식으로 선출된 대의원 조직의 결의는 무효라며 ‘대의원회결의부존재확인 청구소송’을 낸 것이다. 1심과 2심에선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대법원은 “대의원을 간접 선출토록 한 규약이나 선거관리규정 등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7조 제2항(대의원은 조합원의 직접·비밀·무기명 투표로 선출되어야 한다)에 위배된다”며 ‘무효’라고 판결했다.

직선제 쟁취로
드디어 올린 민주노조의 깃발

“대법원 판결 이후 ‘전면적 직선제 쟁취를 위한 공동투쟁본부’를 만들고 본격적인 직선제 투쟁에 나섰어요.”

공투본은 규약개정 없이 대의원선거를 강행하려는 당시 지도부에 맞서 용산역에 있는 철도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66일 동안 농성을 벌였다. 공투본 지도부를 제명하는 등 직선제를 막으려했지만, 결국 2001년 직선제가 도입됐다. 2001년 2월 열린 첫 직선제 선거를 앞두고 철도노조 민주파에선 ‘생존권 사수와 민주노조 건설을 위한 철도노동자 투쟁본부’를 만들었고, 투쟁본부 김재길 위원장이 출마해 당선되면서 철도노조는 54년 만에 민주노조 건설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썼다. 민주노조가 생긴 뒤 김재하는 2002년 노조 정책기획실장을 했고, 2003년엔 철도, 발전, 가스가 공동으로 민영화 저지 파업을 할 때, 공동투쟁본부 상황실장을 하는 등 열심히 투쟁에 나섰다. 그는 함께했던 민주노조 지도부들의 고생이 컸다며 당시를 돌아봤다.

해방시기 전평 이후
처음으로 나섰던 2003년 전면파업…
“힘든 투쟁이었지만,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어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철도 관련 산업재해로 많은 노동자가 죽었어요. 노동강도는 높았고, 복지나 처우는 좋지 못했어요. 이런 현실을 바꿔야 하는데 직선으로 민주파가 지도부를 차지했지만, 아직 기층은 역량이 부족했어요. 당시 노조 숙소에서 생활했는데, 일 년 동안 숙소에 간 날이 며칠 안 됐어요. 기초부터 다져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각종 현안이 쌓인 상황이었는데 신자유주의 물결이 몰아치면서 국토교통부가 ‘철도 민영화’를 밀어붙였기 때문에 1기 지도부로 함께 일한 동지들이 거의 집에도 못 가고 싸웠어요. 그러다 민영화 저지를 두고 발전, 가스와 함께 2003년 공동파업에 나섰어요. 철도 노동자들로 보면 해방 직후 전평 시절 파업을 한 뒤 노조 차원의 전면파업은 처음이었어요. 힘든 투쟁이었지만, 정말 감격스러운 순간이기도 했어요.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당시 철도, 발전, 가스가 같이 했는데 철도와 가스는 당시 한국노총 소속이었고, 발전은 민주노총 소속이었어요. 그런데도 의기투합하고, 동지적 의리를 잘 지키며 함께 싸웠어요. 당시 김대중 정권 시절인데 민영화 반대 투쟁에 국민적 지지도 나름 있었어요.”

“철도공사 등에선
조합원을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서로를 믿으며 집단성과 투쟁성으로
맞설 수 있었어요.”

전평 이후 ‘멸공통일의 전위대임을 자임’하며 빼앗겼던 철도 노동자들의 권리를 되찾고 철도를 멈추며 감격스러운 투쟁을 벌였지만, 김재하는 이 투쟁으로 인해 구속·해직되고 말았다. 2008년 복직되기 전까지 그는 해고자 신분으로 궤도연대 집행위원장을 맡아 2004년 파업을 이끌었고, 전국철도노조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철도노조는 다른 노조와 비교해 민주노조가 늦게 만들어졌다. 다른 노조들은 1987년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민주노조가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지만, 철도노조는 2000년 들어 민주노조가 만들어졌다. 민주노조가 늦게 만들어졌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노동운동의 중요한 동력으로 자리 잡으며 여러 차례 파업 투쟁에도 나섰다. 이런 투쟁이 가능했던 건 해고를 각오하고 나섰던 철도 노동자들의 의지와 어려움을 함께 나누고자 했던 집단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민영화저지 공동파업 당시 철도노조원들을 강제로 집안하는 경찰들. 사진은 철도노조 창립 기념 영상 중에서 캡쳐한 장면ⓒ유뷰트 캡쳐

“철도는 2000년 이후 파업을 많이 했어요, 때문에 많은 해고자가 나왔어요. 임금 인상 이외에 민영화 등 정부 정책에 맞선 파업은 다 불법이기 때문이에요. 지부별로 파업하면 누가 해직될지 거의 알아요. 그런데도 각오를 하고 들어가는 겁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을 땐 조합원 절반은 필수유지 인력으로 절반은 파업에 나섰어요. 파업에 나서면서 1천만 원 정도 손해가 생겼는데, 그 손해도 전체가 균등 분배해 나눴어요. 철도공사 등에선 조합원을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서로를 믿으며 집단성과 투쟁성으로 맞설 수 있었어요.”

"제가 후배들을 만나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노동자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그래야 내 권리도, 자신도 보호받는다고 말해요.
이 시대에 철도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해야 합니다.”

아울러 민주노조 건설로 인해 더욱 커진 철도 노동자의 단결된 힘은 그들의 일터를 바꿨고, 국민을 위한 공공재인 철도가 민영화되는 것을 막아내는 가장 강력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철도노조 민주화는 직장 내에서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됐어요. 철도 조직은 그동안 매우 권위적이었거든요. 규율도 세고요. 폭언, 폭행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등 매우 전근대적인 직장문화였어요, 그런 부분들이 민주노조 건설 이후 개선됐습니다. 또 철도 사유화에 제동을 건 것도 민주노조 건설이 가져온 가장 큰 성과에요. 신자유주의 민영화, 사유화 물결을 가스 발전과의 공동파업 등으로 제동을 걸었거든요.”

민영화 물결에 제동을 걸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철도 노동자들에게 더 큰 사명감으로 요구한다. 김재하는 철도 내부 구성원들이 공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생각을 꼭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쟁을 시키겠다면서 SRT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SRT는 정식 직원이 기관사밖에 없어요. 철도 차량 정비는 물론 선로도 철도공사에서 유지보수를 합니다. 우리는 공사에서 월급을 받지만, 넓게 보면 국가 세금으로 받는 거라고 봐요. 돈벌이해서 월급 받는 게 아니거든요. 이윤을 이야기하지만, 철도는 이윤이 안 남아도 공익을 위해서 해야 하는 공적 기능이에요. 내부의 부정부패를 없애는 등 노력이 필요한 건 맞지만, 이윤과 경쟁의 논리로 운영하겠다는 건 말이 안 돼요. 다른 공기업도 마찬가지겠지만, 철도는 특히 그러합니다. 물론 내부 구성원들이 고칠 부분도 많아요, 공적 기능에 맞는 사명감도 필요하고요. 제가 후배들을 만나면 늘 이런 이야기를 해요. 노동자로서 사회적 책무를 다하자. 그럼으로써 내 권리도, 자신도 보호받는다고 말해요. 이 시대에 철도 노동자들의 사회적 책무는 무엇인가 늘 고민해야 합니다.”

2015년 9월 16일 부산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부산본부 소속 조합원들이 ‘노사정 야합 주범 노동부 규탄 집회’를 열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 당시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을 맡았던 김재하는 삭발을 했다.ⓒ민중의소리 김보성기자

철도를 떠나지만, 그는 하나부터 열까지 철도에 대한 애정이 여전한 철도 노동자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믿고 함께해준 동료들에게 감사하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노조 간부 생활을 오래 했어요. 1990년에 입사해 지부 간부로 시작해 지도부로 오래 일해왔습니다. 그동안 지도부를 믿고 따라준 동료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고마움을 느껴요. 활동하다 보면 지도부는 맡은 역할에 의해 지침 내리기도 하는데, 현장의 간부나 조합원들이 안 따라주면 소용이 없어요. 자신들 입장에선 어떤 건 감내하기 힘든 투쟁이었을 것이고, 또 지도부에게 말은 안 했지만, 그릇된 판단도 있었을 거예요. 그럼에도 지도부를 믿고 단결하며 지침에 따라 투쟁해준 조합원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어요. 철도노조 간부로 일했던 게 복이에요.”

“지금 청년은 고통받는 세대예요.
사회 구조에 자유로울 수 없어요.
사회 시스템, 제도를 변화시켜야
출로가 열려요. 진보진영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사회개조에 같이 나서야 합니다”

그는 ‘베이비붐 세대’다. 이번에 많은 동료가 함께 정년퇴직했다. 철도 노동자로 첫발을 내딛던 30년 떠올려 보면 김재하는 자식 세대인 지금의 2030세대에게 무한한 애정을 느낀다. 그는 오늘의 청년들이 고통받는 세대라며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가 함께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서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7월 8일 서울 중구청이 노점상을 대상으로 행정대집행하려 하자 이를 막기위해 현장에 함께한 김재하 한국진보연대 상임대표ⓒ페이스북 캡쳐

“청년들을 두고 개인주의가 심화됐다는데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나이에 의한 차이, 시대의 흐름에 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청년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아요. 아마도 우리 아버지도 날 그렇게 봤을지 모르거든요. 지금 청년은 고통받는 세대예요. 사회 구조에 자유로울 수 없어요. 대부분 취직, 주거, 앞으로의 전망 등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다)이란 절망적인 표현까지 나올 정도예요. 모든 문제는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실업문제만해도 청년실업 해소는 노년 정년 연장과 충돌해요. 절대 개인이 풀 문제가 아니에요. 노동력의 재배치 등 모두가 연동됩니다. 사회 시스템, 제도를 변화시켜야 출로가 열려요. 진보진영도 이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가 힘을 모아 사회개조에 같이 나서야 합니다.”

“불평등을 넘자면 우선 불평등에
저항하는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

31년 철도 노동자 생활을 마감한 김재하는 이제 ‘삶의 변곡점’에 섰다. 그동안 노동운동, 진보정당 운동, 각종 사회운동의 선두에서 일해온 그에게 이후의 삶도 이전의 여정과 다르진 않을 것이다. 한국진보연대 공동 상임대표와 전국민중행동 조직강화특위장을 맡은 그는 얼마 전 ‘민플러스’에 기고한 글에서 “재벌과 수구보수세력은 말로는 불평등이 문제라고 떠들지만,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그 과실을 따 먹는 세력이다. 집권여당은 불평등을 개선할 의지도 능력도 의심스런 집단이다. 누굴 쳐다보고 어디에 기댈 것인가. 바로 노동자 민중, 우리 자신들”이라며 “불평등을 넘자면 우선 불평등에 저항하는 투쟁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대로 가면 내년 봄 대선판과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뻔히 예상된다. 권력이 어디로 가든 누가 집권한들 불평등의 사회는 그대로라는 것을 우리들은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노동자 열전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도 그가 외친 건 투쟁이었다.

“한반도의 자주와 평등 여기에 동의하는 모든 대중조직, 진보정당, 시민사회단체가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투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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