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주장은 "이숭녕(1958). 세종의 언어정책에 관한 연구-특히 운수편찬과 훈민정음 제정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여(≪아세아연구≫ 1․2.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29~84쪽)"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인에게는 난해한 이 논문이 1976년 당시 인기를 끌었던 문고판 형식의 대중 학술서 <혁신국어학사>(이숭녕. 1976. 박영사)로 발간되면서 대중한테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 내용이 확대 재생산된 것은 <한글의 발명>(정광. 2015)이 유명 출판사인 김영사에서 나오면서였고, 뉴라이트의 대표 학자인 이영훈의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2018. 백년동안)로 이어졌다.
이숭녕(1958) 이후에도 "진영환(1966). 어제 훈민정음 서문의 새로운 해석-국자 창제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위하여-. ≪논문집≫ 21권 2호. 대전공업전문학교. 13~25쪽.", "강길운(1972). 훈민정음 창제의 당초 목적에 대하여. ≪국어국문학≫ 55․56․57 합본호. 국어국문학회. 1-21쪽."은 선행 연구 인용 없이 같은 주장이 되풀이되었다. "고종석(1999). ≪국어의 풍경≫. 문학과지성사.", "정다함(2009).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동아시아 질서와 조선에서의 한어(漢語)ㆍ한이문(漢吏文)ㆍ훈민정음. ≪한국사학보≫ 36. 고려사학회. 269~305쪽."에서도 한자음 발음기호설과 같은 주장이 공표되었다.
이숭녕 주장의 핵심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일차적으로 한자음 발음기호로 만들었고, 그것이 우리말 전체 표기 기호로 확장되었다는 것이다. 훈민정음 창제 사실을 최초로 알린 1443년 12월 30일 자 세종실록에는 한자어이든 순우리말이든 능히 쓸 수 있는 글자라고 언급돼 있지만, 이런 사실은 무시되었다.
이런 잘못된 주장이 나온 이유는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해설서인 <훈민정음> 해례본(1446)을 제대로 보지 않고 한자음 관련 기록만을 편향적으로 주목해 침소봉대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창제 목적과 실제 쓰임새를 마구 뒤섞어 창제의 진정성을 흐리고 있다. 이를 테면 통학용으로 산 자전거를 시장에 장 보러 가는 데 사용했다고 장보기용으로 산 것이라고 우기는 식이다.
한자음 발음 기호론자들은 세종이 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대략 두 달 뒤인 1444년 2월 16일 중국의 한자 발음책인 운서의 한자 발음을 훈민정음으로 적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과, 1446년 반포 후인 1448년에 <동국정>이라는 우리나라의 표준한자음 사전을 펴낸 일을 핵심 근거로 든다.
그들이 눈 감은 것
그런데 이들이 못 본 것이 있다. 이 두 사건보다 먼저 일어난 사건으로, 1444년 2월 운서 번역 지시 이전에 하급 관리인 서리들한테 훈민정음을 먼저 가르친 일이다. 이는 관리에게 훈민정음을 먼저 가르쳐 대민 업무에 주로 쓰던 이두를 대체하고 백성한테 빨리 보급하려는 의도로 그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반포 후에는 <동국정운>보다 먼저 <용비어천가>와 한글 불경 책인 <석보상절>을 펴냈다. <용비어천가>는 서사시 125수를 담았는데 그중 한자어는 한자음 표기 없이 한자로만, 순우리말은 한글로 적었다. 그런데 125수 가운데 무려 네 수는 아예 순우리말로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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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비어천가 중에서 순 우리말로 쓰여진 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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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문헌인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 서문'에 따르면 한자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고, 궁극적으로 온 백성이 편안한 문자 생활을 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더욱이 해례본에서는 한글 표기 낱말을 124개나 들고 있는데 모두 한자어가 아닌 토박이말이다. 만일 한자음 발음기호가 목적이었다면, 토박이말이 아닌 15세기 양반이 쓰던 한자 말을 예로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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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 표기 어휘 분야별 분류 *( ) 현대 대응어, [ ] 풀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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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훈민정음 왜 만들었나 : 해례본과 세종실록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왜 만들었는지는 세종실록과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이 정확히 일치한다. 이런 기록 가운데 이숭녕 등 훈민정음 한자음 발음기호설 주창자들이 보지 못한 것이 있다. 세종은 무려 훈민정음 창제 17년 전부터 한문의 어려움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자음 발음기호가 1차 목적이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자료다. 왜냐하면, 법률문을 백성들한테 알리는 문제는 한자음 표기 문제가 아니라 지식 정보를 어떻게 하면 쉽게 표현하느냐의 총체적인 표현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래는 1426년 세종실록의 기록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의 법은 함께 써야 하는데, 지금은 옛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 가까운 법률문을 준용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법률문이란 것이 한문과 이두로 복잡하게 쓰여 있어서 비록 문신이라 하더라도 모두 알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법률을 배우는 생도이겠는가. 이제부터는 문신 중에 정통한 자를 가려서 따로 훈도관을 두어 ≪당률소의(唐律疏義)≫․≪지정조격(至正條格)≫․≪대명률(大明律)≫ 등의 글을 강습시키는 것이 옳을 것이니, 이조로 하여금 정부에 의논하도록 하라." 하였다.<br />- 세종실록 1426.10.27.
이로부터 6년 뒤에는 이두문으로 펴내면 어떨까 고민한 기록도 있다. 이때의 이두문은 당연히 순우리말까지 한자를 빌려서 적은 문자 체계다. 아래는 1432년 세종실록 기록이다.
비록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문에 의거하여 판단을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저지른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법률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이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br />- 세종실록 1432.11.7.
결국, 이두문도 한자이니 한문과 같이 어렵기는 매한가지이므로 훈민정음 창제 9년 전인 1434년 한문 내용을 일종의 만화로 표현한 <삼강행실>을 펴냈고, 그조차도 실패로 돌아가니 아예 새 문자를 만들게 된 것이다. 한자음 발음 기호론자들은 실록이 보여주는 이러한 역사의 진정성을 왜 의심하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의 문자 생활에 대한 고민 기록도 세 건이나 나온다.
사형 집행에 대한 법 판결문을 이두문자로 쓴다면, 글의 뜻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 한 글자의 착오로도 원통함을 당할 수도 있으나, 이제 그 말을 언문으로 직접 써서 읽어 듣게 하면, 비록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모두 다 쉽게 알아들어서 억울함을 품을 자가 없을 것이다.<br />- 최만리 외 6인 갑자 상소(1444)에서 인용한 세종 말
글자(한자/한문) 모르는 백성이 펼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끝내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br />- 훈민정음(1446) 세종 서문
한문을 배우는 이는 그 뜻을 깨닫기가 어려움을 걱정하고, 범죄 사건을 다루는 관리는 자세한 사정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을 근심했다.<br />- 훈민정음(1446) 해례본 정인지서
세종이 모든 우리말을 정확히 적기 위해 정음 문자를 만든 것이라는 해례본 설명에서도 다음과 같이 구체적인 보기와 함께 여러 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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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민정음 해례본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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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 한자음 발음기호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이러한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과 관련 세종실록 기록이 모두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대학졸업 학사 자격을 부여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독학사 교재에 왜곡된 국어지식, 특히 대한민국 문화상징 1호인 '훈민정음(한글)' 창제에 관한 기본상식을 완전히 파괴한 지식을 담고 있고, 그 교재가 25만부나 팔릴 때까지 독학학위제를 담당하는 교육부의 국가평생교육진흥원(국평원)과 관련 학회나 국어교육계는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이제 허황된 학설에 휘둘리지 않도록 훈민정음의 역사적 진실을 담은 훈민정음 해례본을 제대로 읽고 배우는 교육에 더욱 힘써 훈민정음에 담긴 가치를 제대로 나누어야 한다. 훈민정음은 우리말을 누구나 쉽게 제대로 적어 지식과 정보를 나누라는 세종의 원대한 꿈이 담겨 있는 문자다.
참조: "김슬옹(2020). 훈민정음 한자음 발음기호 창제설은 허구다. 권오향ㆍ김기섭ㆍ김슬옹ㆍ임종화(2020).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우문에 대한 현답≫. 보고사. 160-184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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