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이해 없이 눌러 이기려고만 해…책임 있는 소통해라”
- 윤석열 정부의 언론정책, 언론관에 대해 평가해달라. 최근 정부와 언론과의 갈등이 연이어 불거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관점은 성찰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성찰을 거쳐 도출된 최선의 관점이 있다면 다른 관점과 토론·논쟁이 가능하다. 최선의 결론이 나올 수 있으리라는 믿음과 희망도 가능하다. 하지만 현재 정부가 성찰의 과정을 거쳤거나, 거치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사례를 접한 적이 없다. 기초적인 관심과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밀고 나가고 누르는 방식이다.”
- 정부가 관점을 갖추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언론정책과 언론관이 보수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히려 나을 것 같다. 진짜 문제는 언론 영역에 대한 관심·이해를 갖추지 않은 채 ‘눌러 이기려는’ 정치적 본성을 주요하게 갖고 있다는 것이다. 진위가 확인되지 않은 정보가 보도됐을 때 정부나 대통령실은 ‘가짜뉴스’라고 단언했다. 왜 그런 오해가 비롯됐고, 진짜 사실은 무엇인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따르지 않은 채 말이다. 보도를 한 미디어 조직은 공적 채널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이유에 대한 적합한 설명 없이 통보하는 방식이다.”
- ‘가짜뉴스’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위험성이 있다.
“(대통령의) 언론에 대한 기초적 이해 부족을 말하는 이유는 ‘가짜뉴스’란 용어의 부적절함 때문이다. 학술적으로 가짜 뉴스란 단어의 부적절함은 익히 밝혀졌다. 불량한 정보의 유형을 의도적인 왜곡(disinformation) 정보와 불충분한 정보(misinformation)로 구분하는 식이다. 한국에서도 ‘허위조작정보’라는 용어가 제안된 바 있다. 이를 가짜뉴스(fake news)라는 부정확한 말로 뭉뚱그리고, ‘악의적인 집단이 있다’고 비난하면 논리적인 설득력도 떨어진다.
- 정부와 언론의 갈등은 언론 수용자, 시민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이념에 따라 정부, 정당, 언론에 대한 팬덤이 양극화되는 경향이 심해졌다. 정부와 언론은 중요한 공적 제도인데, 양극화가 이뤄지면서 주요 공적 기구에 대한 신뢰가 파편화되고 있다. 사회적 합의나 정치적 경합을 위한 게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 그렇다면 정부와 대통령에게 바라는 언론정책이나 언론관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언론관처럼 거창한 대의는 아니더라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이 상식적인 양식과 교양을 갖춘 인간으로서 시민 누구나 그래야 하듯, 발음을 좀 더 정확하게 하고 본인이 의도한 뜻을 정확한 단어를 써서 말하는 습관을 갖추면 좋겠다. 이 기본적인 문제만 개선되어도 기형적인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상황이 어느 정도 개선될 것 같다. 즉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정확히 말하고 책임을 지는 커뮤니케이션 윤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또 소통이란 말을 충실하고 진지하게 사용하고 실천하면 좋겠다. ‘국민만 보고 가겠다’, ‘국민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모든 정치인이 주술처럼 애용하는 표현이다. 그런데 이들은 과연 어떤 국민을 어떤 모습으로 보며, 어느 국민의 목소리는 어떤 채널로 듣는 걸까. 현재 정치인들이 애용하는 소셜미디어 발언은 책임 있는 소통이 아니며 자기애적인 선언이 되기 쉽다. 언론과 방송 같은 공공 미디어가 정치인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해 고심하며 대답하는 ‘고전적’ 정치 커뮤니케이션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다. 문제의식과 질문부터가 시민사회에서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 비단 언론뿐 아니라 문화 분야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태도가 나타났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패러디한 고교생 풍자만화에 상을 준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을 엄중 경고했고,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선 연출자·가수 이랑의 출연을 배제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 같은 사건이 문화계에 끼치는 영향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각 사건에 대해서 이유 자체가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채, 배제와 금지가 반복되는 상황이 우려된다. 명시적인 이유와 은폐된 이유가 다른 경우도 많다.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은 민주적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이다. 논쟁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하는 정책은 한마디로 나쁘다.
선진 사회는 지배 권력 구조에 대한 비판을 얼마나 흡수할 수 있는가의 포괄성과 탄력성에 있다. 착하거나 영리하거나 이 둘의 하나만 갖추어도 문화 환경이 훨씬 나아질 텐데,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억압적이고 폐쇄적인 정책이 나온다. 정치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질이 좋거나 나쁜 문화에 대해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시민들이 어느 정도 갖췄다고 생각한다. 일반 대중이 전문가보다 훨씬 성숙한 경우도 많다. 관료들이 시민들을 지도하고 계도하며, 이들에게 위험하니 미리 방지하겠다는 과잉된 ‘친절’의식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폭력적이다.”
최근 댓글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