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원세훈 3차 공판에서 드러난 국정원의 시대착오적 인식

국정원 댓글 활동 피해, "전시 민간인 사살" 비유 논란

[국정원 개혁] 원세훈 3차 공판에서 드러난 국정원의 시대착오적 인식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3-09-09 오후 5:33:22

 

 

"군으로 치면 군에서 적을 제압하라고 하면서 민간인을 사살하지 말라고 해도 군인이 현장에 가보면 적군과 민간인 구분이 곤란한 상황이 있고, 적군과 민간인을 구분하라고 한다고 하더라도 결국 민간인 피해가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 개별적 이슈에 대해서 정치적 오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부분이 넓은 의미에서 종북좌파 척결에 대한 지시에 따라 직원들이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면 된다."

이종명 전 국가정보원 3차장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이같이 진술한 것으로 9일 알려졌다. 국정원 조직을 활용해 대선 및 정치 개입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푸른 수의를 입고 피고인 석에 앉아 있었다. 별다른 말은 없었다. 합참 민군심리전부장을 역임한 군인 출신 이 전 차장은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이범균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공판에서 증인대에 섰다. 그는 검찰에 의해 기소 유예 처분을 받은 상태에서 이날 증인으로 출석했지만, 원 전 원장과 국정원의 정치 및 대선 개입 혐의를 적극적으로 부인하는 의견을 수차례 제시했다.

특히 이 전 차장이 '종북 세력'을 겨냥한 심리전 차원에서 생긴 피해자를 전시에 적과 구분 못해 사살할 수밖에 없는 민간인에 비유한 것은 충격적인 사실이다. 이는 '민간인을 적시해서 사살하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원 전 원장의 수많은 정치 및 대선 개입성 발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에 개입하라'는 말이 없었기 때문에 죄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모순투성이 논리다.
 

▲ 원세훈 전 국정원장 ⓒ프레시안(최형락)


"종북과 야당 구분하는 가이드라인 없어"…공권력을 자의적으로 행사

이날 공판은 지금 '국정원 개혁'이 얼마나 절실한지 보여주고 있다. 이 전 차장의 증언 내용을 종합해보면, 국정원은 종북 세력에 대한 규정 없이 무차별적으로 '댓글' 작업을 해왔다. 검사 측이 "북한의 입장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과 야당의 입장에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것을 구분하는 방법이 있느냐"고 질문하자 이 전 차장은 "없다"고 답했다.

"종북세력에 대응한다 해도 예민한 이슈에 접근하려면 내부적으로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고, 명확한 업무수행을 위해서라도 가이드라인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취지의 검사 측 심문이 이어졌지만 이 전 차장은 "그런 것(가이드라인)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런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저희들의 활동이 그런 것을 (정치인이나 정당 비판 등을) 특정하거나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 검사 측은 "국정원의 댓글 활동은 일종의 공권력 행사인데, 공권력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가이드라인'이 없었다는 것이냐"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같은 공방은 몇 가지 해석을 가능케 한다. 특히 국정원이 정부 정책에 비판하는 목소리에 별다른 근거 없이 '종북' 딱지를 붙여왔다는 해석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는 이 전 차장이 내놓은 '전시 민간인 사살'의 비유와도 맞아 떨어지는 논리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정부 비판 세력을 종북 세력으로 상정한 근거도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이 전 차장은 "(원세훈 전) 원장이 (북한의) 선전 선동 실체를 보고받으셨고 저 또한 그런 보고를 받다보니 일반인이 생각하는 부분과 다른, 그런 부분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그런 것으로부터 (댓글 활동의 목표 등이) 기인했다고 생각하지, 지나치게 정치권과 관련된 대응 활동을 지시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원 전 원장이 모종의 보고를 받았으니, 정부 정책 비판 세력과 종북 세력의 '교집합'을 인지했고, 이에 대해 국정원 직원들이 '심리전' 활동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모종의 보고'와 관련해 이 전 차장은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도 못했다. 그저 '나보다 원 전 원장이 보고를 더 많이 받지 않겠느냐'는 식의 추정을 내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전 차장의 비유에 따르면 '민간인 사살'의 피해는 일부 정치인들도 봤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문재인 전 대선후보를 적시해 그들의 정책을 비판하는 댓글 등을 단 국정원 직원의 행위와 관련해 이 전 차장은 "특정한 정치인을 (직원들이 댓글 활동을 통해) 거명한 것은 안타깝다"거나 "예를 드는 과정에서 한 말"이라고 일부 문제점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정치 개입'이나 '선거 개입'은 아니라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다.

검찰 측은 원 전 원장의 '정부 정책 홍보' 지시 등에 따라 국정원 직원들이 4대강 사업을 옹호하고, 4대강 사업 비판 세력을 비난하는 댓글을 달게 된 것을 언급하며 "4대강 사업은 민주당 등 야당과 환경단체 등 시민단체에서 계속 반대하고 비판적 입장을 취해왔고 특히 (국정원 직원의) 글의 게시 시기가 19대 총선 직전으로 4대강 사업이 총선 이슈로 떠오른 상황이었는데 북한 지령에 따라 종북세력이 폄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는게 아니라 4대강 사업 성과를 홍보하는 글을 게시하란 지시가 내려왔다면 결국 4대강 사업이라는 명목 하에 야당을 비판하라는 지시가 아니냐"고 거듭 심문했다.

이 전 차장은 "그런 활동의 근거가 된 것이 사회단체라든가 야당의 언행이 있어서 활동했다고 추정하긴 어렵다. 그것과 별개로 북한의 대남 선전 선동에 대응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전 차장은 "그런 것에 대해 (종북과 야당을) 식별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받아들이지만 후자(의도적으로 야당을 비판해 선거에 개입했다는 식)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이현령비현령(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는 말이 떠오르는 공판이었다. '이명박 국정원'의 핵심 요직에 있던 인사가 이같은 인식을 토대로 '심리전단'을 운영해왔다면 그 자체로 큰 문제다. 이는 국정원 국내 정치 파트 해체가 얼마나 필요한지 입증하는 사례들이다.

이 전 차장은 상당 부분에서 "정치 개입은 아니다"라고 답했고, 불리한 질문에 대해서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세열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
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