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이 14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1박2일 일본 방문 세부 일정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 2023.03.14. ⓒ뉴시스
오는 4월 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준비하고 있던 대통령실 외교안보 라인에서 최근 벌어진 일에 대해 누구도 납득 가능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김일범 의전비서관이 이달 12일 “개인적 사유”를 이유로 사표를 냈고, 최근에는 외교부 공무원 출신인 이문희 안보실 외교비서관이 교체됐다. 전날에는 외교안보 라인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김성한 안보실장이 돌연 옷을 벗었다.
이번 정부 동안 가장 큰 외교 일정으로 기록될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를 한 달여 남겨둔 중차대한 상황에서 안보실장과 핵심 비서관들이 옷을 벗는 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최소한의 사유 설명도 전무하다. 방미의 전초 격인 한일 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자평하고 있기에, 더욱 납득되지 않는 전개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만류하고, 방미 이후까지는 진용을 유지한 상태에서 가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김 실장이 사퇴 입장을 밝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사의를 수용하면서, 곧바로 후임자까지 임명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윤 대통령이 만류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는 했으나, 상식적이라면 만류가 관철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아니면 최소한 하루 정도는 고심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러한 흐름을 보면, 결국 윤 대통령도 김 실장의 사의를 예상하고 있었고, 김 실장이 옷을 벗게 되는 이유도 인식하고 있었다고 해도 무방해 보인다.
대통령실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데
비서관 교체->안보실장 사퇴->신임 실장 발탁 과정은 지나치게 전격적
여전히 말끔하게 해소 안 되는 의문
김 실장이 물러나는 것으로 이미 상황은 정리됐다. 그러면 모든 게 끝나는 것일까? 납득할 만한 이유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상식선에서는 잘 이해되지 않는 각종 설들만 난무하고 있다.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는 취지다. 대통령실 핵심 관계자는 30일 오후 용산 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김성한 전 실장의 사퇴 배경’에 대한 질문에 “한미 동맹 강화와 한일 협력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조금 더 외교적 디테일을 가미하는 데에는 학자 출신보다는 현장에서 외교했던 경험이 있는 조태용 실장이 적합할 수 있다”며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 흐름 속에서 안보실장 자리에 변화가 왔다고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고 답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왜 하필 방미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이냐는 의구심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다. 심지어 소규모 민간 기업에서조차 중요한 프로젝트를 앞두고 핵심 책임자가 사표를 쓰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번 방미는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대결, IRA와 반도체지원법,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한반도 문제 등 우리 국익과 직결되는 중대사가 어느 때보다 많고 무겁다. 신임 조태용 실장이 이 같은 현안들과 관련해 갑자기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 리도 만무하다.
김 전 실장의 후임으로 바로 전날까지 현직 주미 대사 신분이었던 조태용 실장을 발탁하면서 이번 정부 최대 외교 일정인 윤 대통령의 국빈 방미는 주미 대사가 공석인 상태에서 이뤄지는 비정상적인 상황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한 달 안에 후임 주미 대사에 대한 미국 측의 아그레망(타국의 외교사절을 승인하는 일)이 이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김 실장 사퇴를 전후해 여권 및 대통령실발 보도에서 가장 많이 나오고 대통령실도 부인하지 않은 이야기는 ‘지난 2월부터 미국 측에서 윤 대통령 방미 기간에 진행될 국빈 만찬장에서의 문화 행사를 제안했는데, 국가안보실 쪽에서 대응을 제대로 하지 않았고, 윤 대통령이 다른 경로로 이 같은 내용을 뒤늦게 인지해 화가 났다’는 것이다. 그 여파로 두 비서관들이 교체되고, 김 실장까지 옷을 벗게 됐다는 것이다. 그 문화 행사는 미국 가수인 레이디 가가와 인기 케이팝 그룹 블랙핑크의 합동 공연이다.
질 바이든 여사가 해당 행사 아이디어를 낸 것으로 알려졌다는 보도가 있는데, 바이든 여사가 ‘문화 행사’만 언급한 것인지,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 합동공연’까지 언급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만약 미국 측에서 문화 행사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제안한 것이라면 비서관급에서 이와 관련한 대응을 누락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국립외교원장을 지냈던 김준형 사단법인 외교광장 이사장은 전날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뉴스공장’ 유튜브 방송에서 “너무 이상하다. 거기서 아이돌 공연을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만약 미국 측이 블랙핑크 공연을 제안했다면) 의전비서관 입장에서는 자신의 업적을 알릴 수 있는 대박이다. 그것을 잊어버리겠나”고 의아해했다.
각종 보도를 통해 나온 파편적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미국 측이 국빈 만찬장 문화 행사를 제안했는데, 우리 측에서 블랙핑크와 레이디 가가 합동 공연 아이디어가 나왔고, 대통령실 외교안보라인 내에서 이 아이디어를 놓고 이견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미국 국빈 만찬 행사 성격상 해당 공연이 부적절하다는 정통 외교관 출신들의 입장과 합동 공연 아이디어를 관철하려는 입장이 충돌했을 가능성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30일 같은 방송에서 “해외 행사를 놓고 대통령 측근 어공들과 외교부 늘공들 사이에 밀고 당기는 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며 “대통령 주변 어공들이 외교부 늘공들이 법대로 하자고 하는 것을 찍어누르려고 하다 보니, 외교부 늘공들이 반발하면서 ‘그러면 난 그만 두겠다’ ‘외교부로 돌아가겠다’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그리고 그 사이에 김성한 실장이 끼었다가 튕겨져 나간 것 같다”며 “대통령 주변 실세 어공들과 프로토콜을 따져가며 일을 하는 늘공들 사이에서 김 실장이 좀 우유부단하게 왔다 갔다 하다가 결국 튕겨져 나간 것 같다”고 했다.
방미 관련 문화 행사를 두고 발생한 내부 문제가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점은 대통령실도 일부 인정하는 모양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이번 인사와 관련해 디테일하게 어떤 사건이라든지, 그런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고 언급했다. 물론 이 말 뒤에는 “조금 더 큰 흐름에서 볼 필요도 있을 것 같다”고 사족을 붙였다.
용산의 외교안보 라인 안에서 벌어진 어떤 사건이 ‘트리거’(방아쇠)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자연스런 흐름이라고 보기엔 이번 상황은 지나치게 전격적이다.
일각에선 대일 외교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도 나왔다. 여론이 부정적인 상황에서 지난 21일 윤 대통령의 국무회의 모두발언을 생중계하는 등 윤 대통령이 국민들을 상대로 설득 아닌 설득에 직접 나서는 상황에 대해 참모들을 질타했고, 이에 대해 김 실장이 부담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일 외교에 뒤따르는 문책이라거나, 부정적인 여론에 대한 관리 책임이라고 하기엔 설득력이 많이 떨어진다. 대일 외교와 관련해 대통령실은 ‘굴종 외교’, ‘항복 외교’ 등과 같은 여론의 평가와 달리 성공적이라고 자평하고 있으며, 심지어 여론 관리는 안보실 본연의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가 맞다고 한다면, 영국 여왕 조문 실패, ‘바이든 날리면’ 사태, 뉴욕에서의 한일 정상회담 졸속 진행 논란, 그리고 일일이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했던 각종 의전 실패 사례들이 누적된 상황에서 이미 오래전에 외교안보 라인이 교체됐어야 하는 게 상식적이다.
결국 기존 외교안보 라인 중 살아남은 고위급 인사는 윤 대통령의 최측근이자 아크로비스타 이웃이기도 했던 김태효 안보실 1차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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