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박정희는 중정부장 이후락을 해임하고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을 지낸 신직수에게 부장직을 맡겼다. 언론사들은 ‘군 출신이 독점하던 부장직을 처음으로 검사 출신에게 맡긴 것은 중정 활동이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대통령의 의지에 따른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중정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중정과 검찰의 ‘유기적 관계’만 강해졌다. 1974년 상반기에만 2월의 ‘문인 간첩단 사건’, 3월의 ‘울릉도 거점 간첩단 사건’, 4월의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 5월의 ‘여간첩 채수정 사건’, 6월의 ‘재일동포 유학생 김승효 간첩 사건’ 등이 잇달아 일어났다. 이들 사건 역시 대부분 재심에서 무죄로 판정되었는데, 이들 중 ‘민청학련 및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가장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이해찬 등 학생ㆍ지식인에 ‘법적 테러’ 가한 긴급조치
1974년 1월 8일, 박정희 정권은 개학 후 대학가에 불어닥칠 유신 반대운동을 사전 차단할 목적으로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공포했다.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반대하는 행위뿐 아니라 헌법의 개폐를 주장하거나 발의, 제안, 청원하는 행위까지 금지하며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하여 징역 15년 이상에 처하도록 한 이 조치는 세계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법적 테러’였다. 이 직후, 종교인, 문인, 지식인 수십 명이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되었고, 일부는 간첩죄를 뒤집어 썼다. 3월 말, 유인태, 김병곤, 나병식, 이현배 등 대학생들은 연합시위를 벌일 계획을 세우고 「민중 민족 민주 선언」이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만들었고 4월 3일,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등 10여 개 대학생들이 시가행진을 시도했다. 당국은 이를 ‘공산폭동’으로 규정했고, 시위의 배후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 조직이 있다고 발표했다. 박정희는 이 시위를 빌미로 다시 긴급조치 제4호를 공포하여 민청학련 관련자들을 사형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하지만 시위를 주도한 대학생들이 조직을 만든 적은 없었고, ‘민청학련’이라는 이름도 중앙정보부에서 마음대로 붙인 것이었다.
‘민청학련’이라는 가상의 조직을 만들어낸 중정은 시위 관련자들을 체포, 혹독하게 고문하여 이를 실체화했다. 며칠 전 별세한 이해찬 전 총리도 이 때 잡혀가 사경(死境)에 이를 정도로 고문 당했다. 4월 25일, 1964년의 ‘제1차 인혁당 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신직수는 “이른바 ‘민청학련’의 정부전복 및 국가변란기도 사건 배후에는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계의 조종을 받은 일본 공산당원,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발표했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또는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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